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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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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15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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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9

DUMMY

"달에 피가 차오르는구나."




떠오르는 달이 분홍빛으로 물들 때면, 언제나 스승인 에이블은 이런 표현을 하곤 했다. 왜 많고 많은 것 중에 피일까. 그 이유를 물어보니 에이블은 인자한 웃음을 보이며 말해주었다.




"지금 떠오른 카나르(달)는 일정 주기마다 붉은 빛으로 물든단다. 그리고 그럴 때면 항상 어느 곳에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이란 피에 젖은 암투가 대부분이란다. 포스티어 제국이 통일 전쟁을 시작한 것도 카나르가 붉게 물든 날의 낮이었고, 악몽을 부른 마법사 칼티어스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도 붉은 달이 떴을 때다. 실버팽이 민가 스무 군데를 쓸어버린 '실버데드' 사건도, 돌연변이 오거가 기사 팔십을 죽인 '윌리거' 사건도, 혁명군이란 이름의 반란군들이 성 다섯 곳을 점령했을 때도…… 붉은 달이 떴었단다."




생각해보면 그런 일들이 있었단 걸 역사학을 배우면서 들은 기억이 있다. 헌데 그저 우연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일종의 '상징성'을 갖춘 계획일 수도……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 했다. 어떤 이는 그 시기에 마나가 가득 차올라 흉포해지기 때문이라 하고, 어떤 이는 붉은 빛이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마왕이란 가상의 존재가 힘을 발휘한다고도 했지만 어느 누구도 들어맞는 이론을 펼치지 못했다. 마나는 언제나 넘쳐있고, 붉은 빛을 보며 침착해지는 사람도 있으며, 마왕의 존재는 그저 허구의 인물일 뿐이었다."




헛기침 한 번.




"​이렇게 수많은 가설이 좌절되어도 수많은 학자와 마법사가 붉은 달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나서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비밀은 밝혀지지 않았지. 지금 나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




자신도 붉은 달을 연구한 마법사 중 하나임을 밝혔다.




"​그리고 가장 근접한 이론을 밝혀냈다. 그건……"


























​"델브라에 큰 사건이 벌어질 때만 나타나는 신의 경고."




헤스타는 자기 머리칼처럼 붉게 물들어가는 달을 올려다보며 웃음 섞인 숨을 내뱉었다. 에이블이 살해당했단 소식을 듣고 얼마나 울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창 틀에 팔을 걸치고, 그와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


​검을 잡으며 평정을 되찾으란 아버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마법사는 항상 냉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일한 자랑거리인 머리에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헌데 마법사로서도 갈무리 할 수 없는 이성을 겨우 검을 휘두른다고 진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코 헛소리를 할 인물이 아닌 것을 알기에 헤스타는 검을 잡았다. 그리고 미친듯이 휘둘렀다. 마치 에이블을 죽인 범인이 눈앞에 있기라도 하듯, 수십 번에 걸쳐 공기를 갈랐다. 머리칼과 옷이 땀에 젖어 피부에 들러붙었다. 호흡은 거칠어지고, 금방이라도 쓰러질듯이 휘청거렸다. 칼릭소 공작은 단 하나뿐인 피붙이에게 위로의 말은 커녕 부축해주지도 않고 돌아섰다. 헤스타는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지하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급격히 몰려오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에 그대로 연무장 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보이는 건 세로로 보이는 연무장의 배경이었고, 느껴지는 건 머리맡의 탄탄한 감촉과 몸을 덮고있는 모포의 훈훈함이었다. 고갤 들었다. 자신의 아비가 가부좌를 튼 자세로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앉아있는게 아닌가. 그것도 자기 머리를 허벅다리에 얹어두고 말이다. 헤스타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갈히 기른 회색빛 턱수염과 두 갈래로 나눠 끝을 구부린 콧수염, 얼굴 곳곳에 보이는 깊은 주름과 대비되는 강인해보이는 이목구비. 짙은 눈썹, 부리부리한 코. 전형적인 무인의 얼굴을 한 아버지를 보며 헤스타는 덮고있던 모포를 같이 두르며 그의 옆에 앉아 머릴 기대었다. 높다…… 똑같이 앉아있는데도 칼릭소 공작이 한 치 더 큰 것인지 어깨가 아니라 팔뚝에 머리가 닿았다. 단단하다. 이것이 수많은 인간을 죽이고 수많은 성을 무너뜨린 '파괴자'의 팔인가. 그 생각을 하며 다시 눈을 감았고, 얼마 뒤 아카데미로의 이전을 신청했다.




​"……스승님"




그렇게 아카데미에 온 헤스타는 눈에 띄게 안정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검술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기까지 하니, 화살 한 방으로 새 두 마리를 잡은 격이었다. 비록 제 2의 아버지같았던 에이블 스승을 잃었지만 헤스타는 새로운 삶을 찾았다. 그렇다고 그를 잊은 건 아니었다. 만일 라르카 백작이 알카드마를 잡게 된다면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해치울 것이다.


























졸업식이란 큰 행사에 묻혔을 뿐, 이 길고 긴 준비 기간 동안 시험은 있었다. 바로 진급 시험! 시험은 크게 2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육체의 단련 상태를 보는 시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사도 정신을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계열의 시험은 4급에서 3급으로 가든, 1급 학생이든 똑같았다. 꾸준한 체력 단련과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강조한단 의미에서 그런 것이지만 지금은 거의 그 의미가 사라졌다. 이곳에 아이를 보내는 대부분이 골칫거리에게 그나마 작위를 주기 위해서였고, 기사로 만들기 위해서 약간의 투자를 서슴치 않고 벌였다. 덕분에 시험은 매우 불평등해졌고, 뒷돈을 먹고 허접해진 체력 시험을 합격한 학생들이 점점 늘어갔다. 기사도 정신을 평가하는 필기 시험에선 깃펜을 잡게 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고 들어온 이들은 한 번 진급 시험을 떨어지고 나서야 이곳의 무서움을 깨닫는다. 그들은 조급해졌다. 어쩌면 로이트처럼 4년 내내 노예 학생으로 아카데미에서 썩으며 지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방법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거나, 줄을 잘 서는 것이었고 조금씩 파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번 체력 시험의 결과에 따라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울 조와 체력 단련과 정신 교육만 반복할 세 조가 나뉘어질 것이다."




렘피룬트의 한 마디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저 진급 시험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검술을 배우느냐 못 배우느냐로 갈리게 된다니! 제트가 조장인 1조는 마치 자신들이 검술을 배우는 조가 된 것 마냥 웃으며 고갤 끄덕였고, 나다크가 조장인 3조는 그러든가 말든가란 식으로 멀뚱히 보고 있었다. 피블론이 조장인 2조는 심각한 표정을, 리든이 조장인 4조는 얼굴을 구기며 불쾌한 티를 냈다.




​"불공평하다 생각하겠지만 몇 개월 간의 훈련을 부지런히 했다면 이번 체력 시험을 치르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운 녀석은…… 고생 좀 하겠지. 시험은 오늘로부터 이주일 후다. 일주일 전에 시험 방식을 발표할 것이고 나머지 일주일 동안 컨디션을 조절하게끔 시간을 자유롭게 쓰게 해줄 것이니 무리해서 체력을 키우려 하거나 쓸 데 없는 짓을 해서 다치지 않도록."




렘피룬트의 말이 끝나고 모두가 나뉘어지며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이거 원…… 마냥 쉽게 끝날줄 알았는데……"


"하하! 아버지가 오늘 추가로 50 길드(G)를 주셨다고! 아마 어느 정도 봐주겠지."


"끗…… 나도 더 보내달라 해야겠다……"




​​이상, 귀족 혹은 그에 준하는 부를 가진 부모를 둔 아이들의 대화였다.




"젠장…… 일주일이라…… 그때 동안 몸이나 더 다져놔야겠다……"


"같이 할래? 혼자 하니까 심심해서 못 버티겠더라……"


"아드도 같이 데리고 가자. 혹시 알아, 고블린이랑 싸우게 할지?"




이상, 평민이라 불리우는 이들의 대화였다. 이렇게 극명하게 나뉘어지는 말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각 조의 조장들은 서로를 보며 탐색하기 시작했다.​


제트가 느끼기엔 1조는 대부분이 이 체력 시험을 합격할 것이다. 자신이 혹독하게 대한 것도 있지만 적어도 그들에겐 '희망'이 있었으니까. 떨어져도 제트를 통해서 검술의 끝자락이라도 보게 된다는 그런 희망! 2조는 배우든 배우지 않든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체력 시험만 통과한다면 진급에 문제가 없으니 그것에 초점을 두는 것 같았다. 혹은……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를 노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피블론은 각 급수 별로 지금과 같은 도전을 시킨다고 생각했고 이 사실을 조원들에게 말했다. 확정된게 아니지만 그럴싸한 말 몇 마디로 2조는 긍정적으로 변했고, 아마 체력 시험을 보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몇 기름기가 끼어있는 1조원과는 달리 2조는 전원이 평민인지라 뒷돈을 대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정공법을 택하였고, 매일 주어지는 과제도 전부 소화하거나 아슬아슬하게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조는 포기를 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으려고 했다.


3조……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곳이다. 애당초 나다크란 녀석의 실력은 제트와 비슷했으면 했지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그게 체력적인 면이든, 지휘적인 면이든 어느 하나 밀리지 않았다. 제트로선 만일 라이벌을 만들어야한다면 나다크가 아닐가 생각되었다. 적어도 자신은 뒷배경과 힘으로 1조원들을 내리찍었지만, 나다크는 특유의 권위로 3조원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자신은 보스(BOSS)지만 놈은 리더(LEADER)다. 제트의 눈은 리든을 향했다. 찌꺼기 조라고 해도 이상할게 없는 조잡함. 그리고 그곳에서 강제로 떠밀려 조장을 하게 된 리든에겐 리더십도, 보스로서의 힘도, 모두를 ​에두르는 친화력도 없었다. 계급에 취약하고 윗배에 대한 처세만 뛰어난 녀석. 집단 행위를 함에 있어서 결코 앞으로 나서지 않는 비열한 놈.




'저 새낀 아까부터 왜 저리 눈을 부라리는거야'




리든은 제트의 관찰하는 눈빛을 보며 속으로 씹어댔다. 괜히 한 마디라도 잘못 했다간 여기서 뿐만 아니라 졸업하고나서도 그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통일 제국의 대공의 장남이란 자리가 거대했다. 리든의 상식으론 1조원의 태도는 물론 이따금 그에게 살갑게 구는 보에르란 녀석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부분이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인간을 보면 기가 죽기 마련이다.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약간의 열등감으로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헌데 그들은 점점 '적응'해갔다. 평민으로써 자기 위치를 확실히 알고있는 리든에겐 정말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로이트란 저 놈도 불쌍한 놈이다. 어쩌다가 귀족의 눈 밖에 나선…….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녀석이 피범벅이 된 옷을 입고 나다니는 걸 보니 언제나 심사가 꼬여있던 리든조차 동정심이 피어났다. 원인을 찾아보자면 계층 사회에서 노예 다음 위치이자, 억눌려 살아야하는 평민으로서 동질감을 느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를 대하는 태도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어느 집단에서나 위가 있으면 밑이 있기 마련이고, 다른 놈을 밑으로 밀어냈으면 밀어냈지 그곳에서 끄집어내줄 생각이 없었다.


펠빅은 여전히 빵빵한 뱃살을 놀리며 횡포를 부리기 바빴다. 엘더 포레스트에서 아이들을 선동한 뒤로 근신 처분을 받았을텐데도 뻔뻔하게 쏘다니고 있었다. 살이 얼굴에도 쪄서 낯짝도 두꺼워진건지…… 더럽더라도 일단은 귀족의 자제이니, 비위를 맞춰줘야했지만 언제 해도 역겨운 일이었다. 힘. 힘만 있으면. 그 생각을 하며 살아온게 얼마인가. 제트가 보기에 리든은 그저 약아빠진 초식동물이었지만 리든은 독을 품으며 기회를 노리는 맹수였다. 그리고 모두가 이런 어정쩡하게 힘자랑을 하며 강자에게만 약한 모습을 보이는 리든을 비겁하고 상종못할 불량배로 느끼고 있었다. 위장은 성공이지만 그로선 매우 불쾌했다. 이것이 살기 위한 일인데, 배부른 귀족놈의 자식들은 그런 것도 신경쓰지 않고 놀고 먹기만 해대니 모를 것이다. 아니, 자신과 같은 평민들도 잘 모를 것이다.


그저 일찍 철이 든 것일 뿐이니까.




"​자, 그럼 모두 배나 채우러 가자고! 이 데븐 남작의 후계자 펠빅 님께서 전부 산다!!"


"와아아아!!"


"하하, 역시 펠빅은 배포가 크다니까!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 쓸 생각도 못하는데 말이야."​




그래, 그래. 너 잘났다. 할줄 아는게 돈 쓰는 것 밖에 없는 돼지새끼……




"​​리든 넌 내 호위기사니까 특별 대우를 해줘야겠지! 희귀한 과일들을 알고 있거든! 자, 어서 가자고! 시험은 합격한거나 다름없으니 검술은 우리 거다!!"




그렇게 펠빅을 비롯한 4조원 전부 아카데미 밖의 상가로 향했다. 아, 물론 로이트는 제외하고.






















​만약 숲에서의 일이 없었다면 로이트도 별 생각 없이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살아난 감정은 죽지 않고 요동쳤다. 펠빅의 저열한 자금질도, 리든의 비겁한 행태도, 아이들의 저급한 군중심리도 모든 것이 역겨웠다. 아무 생각없이 넘어갈 일을 계속해서 비난하고 헐뜯었다.


윗대가리들에게 손을 비벼대는 그 행위가 더러웠고 강한 힘 앞에서 무릎 꿇고 고갤 숙이는게 추잡했다. 해선 안되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해대는게 거북했고 그걸 묵과하는게 짜증났다. 도저히 보고 넘길 수 없는 것들이 가득했다. 노예학생, 뒷돈, 따돌림, 구타……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걸 막으려고 들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힘이 센 것도 아니었으며, 권력이 큰 것도 아니었으니까! 피해자들이 내세울 수 있는 건 억울함과 실실 웃고있는 가면뿐이었다.


바로 로이트처럼.


그들이 간 이후로 로이트는 바쁘게, 아주 바쁘게 보냈다. ​평소보다 배는 많은 짐을 옮기고, 많은 곳을 청소하고, 많은 욕을 먹었다. 헉헉거리며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마치 모든 것을 로이트에게 떠넘긴 것처럼 말이다. 얼마나 정신없이 움직였으면 벌써 머리 위에 달이 뜬 것도 몰랐을까.




"붉네……"​




​언제부턴가 달이 빨갛게 물들었었다. 그게 언제일까…… 지친 몸을 이끌고 아카데미로 돌아왔을 때부터? 아니면 엘더 포레스트를 탈출했을 때부터? 그것도 아니면…… 괜히 복잡한 생각을 하다가 고갤 힘차게 젓는다. 요즘 들어 몸이 축축 처지고 있었다. 단련을 게을리해서 그런 거라고 단정짓고 창고로 들어섰다.




녀석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자박거리는 발소리에 로이트가 들고있던 걸 내려놓고 강아지를 힘껏 안아주었다. 로이트가 돌아오고나서부터 기운을 차린건지, 녀석은 힘차게 짧은 꼬리를 흔들어댔고, 로이트는 행복한 미소를 띄우며 복실복실한 털가죽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고보니 아직 이름도 안 지어줬네."




문득 녀석의 자그마한 머리를 쓸다보니 든 생각이었다. 무슨 이름이 좋을까? 기왕이면 멋진 이름으로 지어주고 싶었지만 이곳에 와서 제대로 배운게 없다 보니 알고있는 폭도 좁았다. 기껏 해야 몬스터와 관련된 것밖에 모르니, 이렇게 귀여운 아이와는 맞지 않단 생각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그래서 뒤늦게 들어온 하크가 몹시 반가웠다. 오늘도 강아지에게 줄 고기 몇 조각을 들고왔고, 로이트가 그걸 받아 먹이면서 하크에게 작명에 대해 물었다. 하크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도 사실 아는게 별로 없었으니, 잔뜩 기대하며 묻는 그에게 부응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청소하면서 몇 번 씩 주워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소리는 알아도 글은 제대로 몰랐으니, 그걸 또 단어로 쓰는 데도 고역이다. 로이트가 하크가 손바닥에 쓴 단어를 느끼고 고갤 끄덕였다.




"카…… 타르……?"




하크가 고갤 저었다.




"라​파르?"


"리와라?"


​"카오드!"




온갖 단어를 말하고, 쓰고 하는 걸 반복하다가 간신히 하크가 원하는 말이 나왔다.




"카나르(달)."




​하크가 고갤 끄덕였고, 로이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기를 맛깔나게 씹고있는 강아지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카나르야."




​카나르라 불리게 된 강아지가 맑은 울음 소릴 냈다. 하크도 녀석의 머릴 쓸어주며 기분좋게 웃었다. 주머니 속의 손수건 한 장을 만지작거리면서……




























'시험은 기둥 쪼개기일게 분명해'




목검용 나무 인형을 옮기면서 로이트가 생각했다. 지금까지 여러 번 떨어진만큼 시험이 어떤 내용인지 간파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그가 계속 탈락한 것에 이유가 있단 생각만 하며 그에게서 어떤 정보도 캐묻지 않았고, 덕분에 로이트는 편히 사색에 잠길 수 있었다.




'받아먹은 돈에 따라서 검의 예리함이 달라지고 기둥의 재질이 달라진다'




로이트가 처음 본 시험에선 아주 단단한 나무 기둥에, 고기조차 못썰 정도로 뭉툭한 검으로 기둥을 쪼개는 시험을 받았다. 합격을 위해선 완전히 동강내야 했지만 약한 육체에 열악한 도구로 그런 일을 해내기란 불가능했고 당연히 떨어졌다. 두 번째 시험도, 세 번째 시험도 똑같았고, 아마 이번에 치를 시험도 똑같을 것이다. 로이트가 해야할 일은 단 하나. 그저 몸을 튼튼히 만드는게 전부였다. 지금 와서야 아무리 얼마를 주어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만족할만한 돈을 만들어낼 능력도 없었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빌려볼까'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오만함과 자만심으로 가득 찬 귀족 학생들의 기분이나 맞춰준다면 집에서 보내주는 돈의 서너 배에 해당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펠빅에게 붙어있는 리든도 이제껏 먹어보지 못한 술과 음식을 맛보거나 약간의 용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로이트가 어찌 그런 걸 할 수 있을까. 귀족 학생 중에선 물론, 아카데미 바깥에서도 최상위에 있는 밀레트에게 밉보인 그를 가까이할 아이는 없었다. 그의 눈치를 안봐도 되는 사람을 꼽자면 제트나 나다크 정도가 전부였고, 그들이 로이트와 친해질 이유는 없었다. 밀레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아'




이번엔 어떻게든 합격을 해야한다. 성장하는만큼 시험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는 건 몸이요, 요구하는 수련양은 더 많아질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아카데미에서 평생을 썩는단 소리다. 너무 과장된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밀레트의 졸업이 어떤 변수를 부를지 몰랐다. 자신에게 관심을 끄거나, 아니면 더 강하게 압박하거나 둘중 하나였다. 하지만 결코 전자가 될 거란 희망은 품지 않았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알게된 건…… 꿈같은 희망을 믿어봤자 이루어지지 않는다였다.


누군가 나에게 손을 건네주길 바랐고, 누군가 도움을 주길 원했다. 누군가 여기서 구해주길 꿈꾸고, 이 괴로움이 끝나길 빌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들이 내민 손길은 아팠고,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절벽 끝으로 몰아세우며 끝없는 고통을 주었다.


로이트는 끝없이 방법을 생각했다. 이 삶을 끝내기 위해, 절대로 노예 학생으로 남지 않겠단 각오를 하며…… 서서히 불타올랐다.


















후웅-!


목검이 공기를 깨부수는 소리가 퍼진다. 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다부진 몸의 청년은 근 1시간 째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도 안에 쇠심이 박혀있는 목검을 말이다. 같은 자세로, 같은 속도로 얼마나 휘둘렀는지 땀에 젖어있는 검은 수련복이 몸에 착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고, 그의 숨은 증기나 다를 바 없는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단단한 이마 아래로 짙은 눈썹과 단호한 눈매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가상의 적을 동강낸다. 한 호흡에 한 번씩.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검을 휘두른다. 청년, 라이가스는 펄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에게 날아오는 걸 목검을 뻗어 받아냈다. 갓 빤 듯한 푹신한 수건이 힘없이 걸린다. 라이가스는 땀을 닦아내며 저 멀리서 걸터앉아 손을 흔드는 밀레트를 바라보았다.




"쉬면서 하지? 무리하면 몸 상해."




라이가스가 그의 옆에 걸터 앉으며 한숨을 푹 내뱉었다.




"여인에게 진 몸으로 설렁설렁한다면 아버지께서 야단치실 겁니다."


"설마! 그 대단하신 칼릭소 공작님의 핏줄인데, 그 정돈 당연하다 생각하겠지."


"그런 쪽으론 융통성이 없으셔서……"




​라이가스의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패였다. 밀레트도 한껏 미소를 지어보였다.




"헤스타는 어쩌고 홀로 다니십니까."


"벌써부터 잡혀 살면 안되잖아."


"여름 파티를 들킨 뒤로 규수와 만나는 건 그만두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흠……"




밀레트가 ​콧방귀를 팩 뀌며 고갤 돌렸다.




"​하여간에 한 마디도 지질 않아."


"밀레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의 소소한 대화를 끝으로, 밀레트는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레 쉬고 있던 라이가스 역시 땀을 닦아내고 저 멀리 벽을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이제 곧 체력 시험을 치르겠군요."




라이가스의 말에 밀레트가 고갤 흔들다 답해주었다.




"그러게. 작년 4급 시험이 뭐였지?"


"기둥 격파입니다."


"흠…… 녀석에게 아주 특별한 걸 선물해줘야겠는 걸."


"어째서 그놈에게 신경을 쓰시는 겁니까?"




밀레트가 라이가스의 눈을 보았다. 웃고있는 얼굴은 변함이 없었지만 유독 그 눈동자만은 날이 서있었다.




"​해선 안될 말을 했거든."


"음……"


"아버지께 그 한 마디를 들었을 때 궁금했어. 녀석이 무슨 말을 했길래 노예 학생으로 만들었는지 말이야. 헌데 그 이유가 황당하더라고."




밀레트가 손을 내밀었다. 천장을 향한 손바닥엔 수없이 찢어지고 다져진 흔적이 남아있었다.​ 곱상한 얼굴과는 비교 되는 모습이었고, 이 점이 라이가스가 그를 신뢰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혹시 모를 싹을 제거한다."




펼쳐진 그의 손이 쥐어졌다. 그저 주먹을 쥔 것이라기엔 라이가스가 느끼기엔 조금 달랐다. 마치 손 안에서 얼마든지 꺾을 수 있는 작은 생명을 바스라뜨린듯한, 소름끼치는 동작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단 소립니까?"


"그래. 녀석이 내뱉은 한 마디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말이기도 했어. 그저 모래알같은 무게지만…… 절대 생각해서도, 입 밖으로 꺼내서도 안될 말이었지."


"선문답같군요."​


​"변하지 않아야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헤스타가 마법사에서 기사가 되고, 내가 기사에서 장사꾼이 되듯이 말이지."




쥐어진 밀레트의 주먹이 덜덜 떨렸다. 라이가스의 두 눈에는 귀족집 도련님보단 꿈을 이루지 못한 아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라이가스는 말없이 수건을 목에 두르고 일어나 검을 휘두르러 갔고, 밀레트는 그의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사라졌다.






















체력 시험 방식이 발표되었다. 진검으로 단단한 나무 기둥을 쪼개는 것. 아주 단순한 과제인 것 같았지만 추가 사항이 적혀있었다. 나무 기둥은 몹시 단단하며, 마법적 가공을 거친 것이다. 거기에 진검 역시 날이 많이 서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절대로 내리쳐선 안됐다.




"이게 무슨 소리지?"




한 학생이 게시판에 붙어있는 체력 시험 공고문을 보며 말하자, 다른 학생이 말을 받았다.




"체력 시험을 어떻게 치를 지 발표난 거야."


"글은 나도 읽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내리치면 안된다니, 왜 굳이 그런 항목을 넣은 거지?"


"순수하게 실력만 보겠단 뜻이겠지."




좌중을 헤치며 나타난 피블론이 특유의 눈웃음을 보이며 말하였다.




"횡베기, 혹은 올려치기로만 날이 서지 않은 검으로 단단한 기둥을 베란 것은…… 그 동안 얼마나 힘을 기르고, 검을 단련했는지 확인하는 걸 거야. 마법적 가공을 거쳤다고 하니, 아마 보통 나무보다 훨씬 단단하겠지?"


"근데 그냥 나무인데……"


"결을 베지 않으면 힘들어. 그 무거운 도끼로 있는 힘껏 내리쳐도 장작 하나를 제대로 못 쪼개는 사람이 부지기수야. ​그러니 기본적인 힘이 있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 기술이 뒷받침을 해줘야겠지."




여기서 나무꾼 출신의 ​릭트가 끼어들었다.




"헌데 날도 안 선 걸로, 검의 무게도 싣지 못한다면 그건 굉장한 불이익이야. 생나무가 얼마나 질긴지 모르지? 우리 몸뚱이만한 굵기의 나무도 한참을 두들겨도 꺾을 수가 없어. 도끼로 나무를 벤다고 하지만 사실상 '부러뜨린다'가 맞아. 꺾이면 꺾였지 결코 부러지지 않는 것들이거든."


"결론은…… 엄청 힘들거란 소리네."


"그렇지. 차라리 고블린과 싸우는 게 훨씬 나을 걸!"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자기들끼리 떠들어대는 아이들을 보던 피블론이 한 아이를 주시했다. 로이트.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이미 알고있던 걸 확인한 것처럼 금방 돌아서서 가버렸다. 피블론은 미리 그에게 물어보면 좋았을거란 생각을 하다, 라인과 보에르를 발견했다.




"시험 내용은 봤어?"


"아직. 근데 다들 표정이 애매하다? 릭트 쟤는 아드랑 왜 싸우고 있어?"


"그런게 있어. 한 번 봐봐."




둘의 반응도 비슷했다. 이게 시험인가? 하지만 릭트의 설명을 듣고나선 얼마나 어려운 시험인지 이해하였다.




"대체 기사가 얼마나 강한 거야? 어릴 때부터 이런 시험을 보고, 또 합격하는게 가능한 거야?"


"뒷돈이지."




피블론의 말에 라인이 손뼉을 쳤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지금도 아카데미에선 비리가 넘치고 있어. 다만 평민들은 모를 뿐이지. 돈을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 나무의 강도, 칼의 예리함이 달라져. 어쩌면 그저 나갔다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합격시켜줄지도 모르지."


"나빠……"


"보에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이곳은 ​​​좋은 곳이 아니야."


"……하지만"




피블론이 한껏 기가 죽은 보에르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일단 아직 시간은 좀 있으니까 그때까지 방법을 강구해보자고. 라인, 릭트랑 아드 좀 말리고 와줘. 난 보에르랑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


"어어? 어디 가게?"


"​아아, 나도 한 번…… 반칙 한 번 써볼까 하고."




히죽 웃는 피블론을 보며 라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의심스럽게 쳐다보다가 그의 말대로 티격대는 둘에게 향했다. 피블론은 라인의 뒷모습을 보다가, 어리둥절해하는 보에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가 하는 말은 몹시 허황된 것이었지만 시도할만한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보에르가 뒤를 따랐다.


피블론이 향한 곳은 로이트가 자주 들르는 창고였다.


작가의말

군부대 훈련 및 사적인 취미 활동 때문에 좀 늦어졌습니다. 음.. 어.. 작가의 말에 무슨 만날 늦어서 죄송하단 말밖에 안쓰는거 같네요. 스릉흡느드..


설정 오류가 중간에 있어서 수정합니다.  칼릭소 공작에게 부여된 ‘학살자’를 ‘파괴자’로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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