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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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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0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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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12

DUMMY

보고싶다.


붉은 달(카나르)을 볼 때마다 그때 만났던 붉은 머리의 여인, 헤스타를 떠올린다. 하크의 젖은 눈망울에 비친 달은 헤스타의 모습으로 바뀌어 일렁였다. 그녀의 흐르는 머리칼처럼, 하크의 두 볼도 은은하게 물들어갔다. 가슴을 움켜쥐어도 심장이 진정되질 않아, 계속 밤 바람을 쐬고 있지만 오히려 이 열병은 심해지는 것 같다.


마음껏 숨을 들이쉬고 푹 내쉰다. 이제 좀 진정되는 거 같다. 눈빛을 가라앉히며 공터 한 구석에서 아카데미의 풍경을 둘러보던 하크의 눈에 뭔가가 잡혔다. 오밤 중에 움직일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잽싸게 사라지는 그림자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누구였지? 그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하크가 자신의 어깨에 얹어진 손을 돌아보았다.




[로이트.]




하크가 빠끔거리며 입 모양을 보이자, 로이트가 피곤한 웃음을 보였다.




"잠이 안 오나보네."




하크가 고갯짓을 해보이자 로이트가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새빨간 달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나도 잠이 안 오더라. 그래서 뒤척이고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밖에 나가고 싶더라고. 밖에 나가니 돌아다니고 싶고, 돌아다니니 어딘가에 있고 싶고…… 그래서 여기로 왔는데…… 너가 있네."




로이트의 장황한 말에 하크가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민망했는지 로이트가 웃으면서 고갤 틀었다.




"그냥 그렇다고. 근데 하크는 어떻게 아카데미에 오게 된 거야?"




입을 뻐끔거리던 하크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로이트가 머쓱해하며 머릴 긁었다. 말을 할 수 없는 애한테 이게 무슨…… 곁눈질로 하크를 보다 슬쩍 말문을 열었다.




"난 말이지…… 우리 아버지께서 가보라고 하셨어. 아카데미로 가 기사가 되어서, 나만의 검을 들라 하시더라. 그래서 여기에 오게 된 거야. 기사가 되면 뭘 먼저 해야할까? 우선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좀 더 강해져서 도적과 반란군을 꺾어야겠지? 돈에 현혹되어선 안 되지만, 돈을 벌게 되면 부모님께 보내드리고…… 그렇게 정식으로 귀족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을 돕고, 부모님께 많은 돈을 보내드릴 거야."




꿈 같은 말을 내뱉는 로이트의 얼굴은…… 참으로 기괴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얼마 못가 부숴져버렸어. 내가 뭘 했다고 그렇게 핍박하는걸까. 왜 나를 괴롭히는거지? 잠깐의 의심을 품은게, 정의를 꿈꾸는게 잘못 인건가? 그래도 꾹 참았어. 나를 이곳으로 보내주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로 마중해주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꿋꿋이 버텨냈어."




목소리는 떨렸지만 울음기는 없었다.




"근데…… 근데 아버지가 찾아오셨다네. 그리고…… 아버지를 내쫓았대. 교관이 말이야. 기사 중의 기사라고 불리우는 렘피룬트 교관이!!"




어두운 밤공기를 떨게 할 정도로 격앙된 목소리에 하크가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행동에도 로이트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계속, 소리높여 말하였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만나게 해주지 못했단 말은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분명 그럴거야. 왜? 내가 귀족이 아니고, 기사가 아니고, 강하지 않으니까! 우리 아버지와 난 평민이고, 아직 기사도 아니고 돈도 없고 힘도 약하니까, 다른 아이들처럼 서로 만나고 시험을 쉽게 합격시켜주고 괴롭히지도 않는 거야!! 왜! 기사라면 그래선 안되는데 대체 왜!! 왜 차별을 두는 건데!!"




누구에게 외치는 건지 모를 외침과, 대상이 뚜렷한 분노가 로이트를 휘감았다. 하크의 두 눈엔 걱정이 어렸다. 그 몇 년 동안 튼튼하게 버텨왔던 로이트가 단 몇 주일만에 망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절묘한 시기에 그의 감정을 건드릴만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말이다. 콧김을 씩씩 뿜으며 분노로 일그러진 로이트의 두 눈이 그 어느 것도 보지 않고 허공의 무언가를 응시하였다.




"들고있는 검은 긍지조차 없는 밭갈개야! 몸에 두르고 있는 갑옷은 의지가 없는 쇳덩이야! 검술은 목적과 이지를 상실한 몸부림일 뿐이고, 기사라는 위명은 본지가 뭔지 모르는 벌레의 허물에 불과해! 기사란 존재는, 렘피룬트 교관은…… 가짜…… 가짜야…… 렘피룬트 그 인간은 가짜라고!!"




광적인 로이트의 말은 마치…… 동화에서나 들을 법한 마왕을 소환하는 의식 같았다. 혼이 빠지고 두려움이 솟아오르는 분위기에 하크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자 로이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하크를 내려다보았다.




"……미안."




하크의 도리질에 로이트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눌렀다. 갑자기 솟구친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고르다, 하크에게 말하였다.




"하하, 아마 무슨 오해가 있었던 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가 그렇게 쉽게 돌아갔을리가 없지! 그거 알아? 우리 아버지께서 얌체같이 물길을 가져간 볼스 아저씨에게 한 일을? 대뜸 찾아가서 엄청 화를 내시더니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혼내시더라. 볼스 아저씨도 제법 힘있고 강했는데 우리 아버지한텐 꼼짝 못했어. 아, 그리고 우리 어머니도…… 굉장히 예쁘시다? 어떤 때는 처음 온 사람이 우리 어머니가 너무 예뻐서 고백했다가, 아버지한테 몇 대 맞고 달아났어!"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고 할 수 없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 로이트의 표정엔 아까의 광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하크는 그저 답이 없어도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로이트를 보며


옅게 웃으며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둘은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는 시간을 보냈다.




























"옆에 있던 녀석은 누구였지?"




밀레트의 무심한 물음에 라이가스가 곰곰이 생각하다 답했다.




"책을 끼고 살고, 한참 어린 모습을 보니 3조에서 만물박사라 알려진 네보일 겁니다. 어느 남작 가문의 차남인 걸로 알고있습니다만, 가문의 이름까진 모르겠군요."


"그래?"




턱을 괴며 골똘히 고민에 잠겨있는 밀레트를 보며, 라이가스가 추가적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론 워낙 책에 빠져사는 통에 가문에서도 골칫거리로 취급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차면서 보지 못하는 그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만큼 네보의 지식 능력은 끝없이 자라나고 있고, 나중에 가선 현자란 말을 들어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생각 이상으로 후한 말이었지만, 밀레트는 그것이 익숙해서 그저 툴툴거리며 답해주었다.




"하여간에…… 넌 상대를 너무 과하게 평가해. 내가 이렇게 말하면 또."




"그저 객관적으로 상대를 볼 뿐입니다."


"그저 객관적으로 상대를 볼 뿐…… 음……"




자기가 할 말을 똑같이 따라하는 밀레트를 보며, 라이가스가 민망한 지 도중에 말을 멈췄다. 밀레트는 큭큭 웃으면서 라이가스를 향해 한 가지 물었다.




"그럼 로이트는?"


"예?"


"객관적으로 봤을 때 로이트는 어떻냐구."




라이가스가 소리를 길게 뺐다. 워낙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었기에 밀레트가 재촉하지 않고 그의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나온 답은…….




"이길 순 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저도 큰 부상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애?"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체격 면에서도, 기술 면에서도 라이가스가 우위일텐데…… 왜 그가 이런 답을 내놓은 것인가. 그의 호기심을 알아챘는지 라이가스가 먼저 답해주었다.




"우선 녀석에겐 기본적인 체력이 있습니다. 마음 먹고 근력을 발휘한다면 제가 이길 수 있지만, 장기전으로 간다면 지구력이 녀석에 비해 뒤처집니다. 제가 앞세울 수 있는 건 그가 배우지 못한 기술과 경험 뿐, 자신의 한계를 알고 힘을 배분하며 체력을 운용하는 점이나 그 끈질긴 정신력 덕분에 저와 비등하게 싸울 수 있을 겁니다. 이마저도 메워지지 않는다면……"


"진단 소리야?"




굳이 대답 하지 않았지만 라이가스의 침묵으로 이해하였다. 밀레트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고민에 빠졌다. 상인이 되려는 건 아니지만, 그 동안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었으니. 상인으로서 무조건 객관적인 판단을 해야하고, 작은 손실 때문에 큰 이득을 버리지 말란 소릴 지겹도록 들었다. 당연히 그의 생각으론 로이트는 쓰지도 않고 버리기엔 너무도 아까운 물건이었다. 이제껏 그저 만만한 놈으로 알고 있었는데…… 머릿 속에서 계산을 하며, 밀레트는 능글맞게 웃으며 라이가스의 등을 때렸다.




"황실 친위대장이 되겠다는 녀석이 벌써부터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하면 되겠어?"

"만일 제 수련만을 위해, 혹은 경험을 쌓기 위해서라면 무모함을 갖췄겠지만 친위대의 위치는 폐하를 적으로부터 막아내고, 지켜내는 '수호자'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정확히 평가하고 알맞은 판단으로 황제의 목숨을 우선시……"


"그만, 그만. 대체 너는 옛날이고 지금이고 변한 게 없어. 생각해보니 내가 여식들이랑 놀 때 가장 먼저 잔소리한게 너였지?"




손가락을 흔들면서 따지고 드는 밀레트를 향해, 라이가스가 눈을 감고 고갤 저었다.




"요즘은 훈련에 몰두하느라 못 하고 있지만 헤스타 님께서 잘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너 설마…… 레이디 페이쉬와의 데이트도……"


"예. 말했습니다."




그날 학생들은 처음으로, 방정맞게 뛰어다니는 밀레트와 라이가스의 모습을 보았다. 헤스타는 멀뚱히 그 모습을 보다 남자는 나이를 얼마나 먹든 다 똑같단 생각을 하며 돌아섰다.


























이젠 4급 학생으로서 아카데미에서 5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대부분이 체력 단련 뿐이었지만 몸이 힘든 만큼 시간도 빨리 지나갔고, 예전과 달라진 몸을 보며 서로 떠들기 바빴다. 모두가 들떠있을 때, 렘피룬트가 걸어왔다.


은은한 빛이 흐르는 갑옷은 어깨, 몸, 다리…… 어느 곳 하나 남김 없이 감싸고 있었고, 잘각거리며 풀을 으스러뜨리는 탄탄한 금속제 그리브와 부츠엔 먼지 한 톨 없었지만 세월의 흔적으로 보이는 옅은 흉터가 가득 했다. 망토는 무겁게 펄럭였으며, 짧은 회색 머리칼은 고원의 풀밭처럼 조용히 하늘거렸고, 그의 검붉은 가죽 허리띠에 매달려있는 팔뚝보다 긴 검은 고동색 가죽집에 싸여 흔들렸다.


강렬한 눈빛과 꾹 다문 입, 휘어져 있는 눈썹과 단단해보이는 광대뼈는 그를 몹시 강한 인상으로 만들어주었고, 몇 날 며칠이고 함께한 수련생들조차 다시금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간 고생 많았다."




그 한 마디를 툭, 던지곤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까지 체력을 키웠다면 이제부턴 정신을 단련할 것이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어가는 시점에서 이 두 가지를 고루 섞어가며 교육을 할 것이다. 다만, 그때부터 진짜 검술을 배우느냐 마느냐가 달라지겠지. 곧 졸업 학생을 위한 축제가 있고 모두가 참가할 수 있다지만 너무 나태해지지 말아라. 그것이 검은 든 기사의 자세고, 기사로서의 정신이다."




무거운 목소리로 진중하게 말하니 처음 철검을 잡았을 때처럼 자신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꽉 죄는 분위기 속에서 침조차 제대로 못 삼키고 있을 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제트. 그가 부스스하게 기른 검은 머리칼을 긁으며 렘피룬트를 향해 물었다.




"검술은 단 1개 조만 익힐 수 있다 하였는데, 그럼 나머지 학생들은 뭘 하는 것이죠?"




그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설마 도태시키진 않겠지? 아무리 돈을 받아먹는 아카데미라지만 똑같은 학생일진데, 버리는 일은 없을테지.




"허수아비가 되는 거지."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면전에 대고 저런 말을 할까. 허나 그들의 생각은 단순한 착각에 불과했다.




"검술이 없는 기사는 그저 허수아비, 나무토막에 불과하다. 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정신이 깃들고, 마음을 갖춘다면 그는 더 이상 나무토막이 아니다. 정신과 마음은 인간의 것이고, 그 중에서도 검을 든 기사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 묻겠다. 검술을 배우지 못 해서, 내가 너희를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 해서 기사의 직위를 포기할 것인가?"




모두가 말이 막혀서 답을 못한 것이지. 하나 같이 답은 아니다, 일 것이다. 기사의 꿈을 갖고 온 이들에게 정말 당연한 답이 나올 질문이 아닌가. 렘피룬트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을 느리게 둘러보았다. 그 무서운 눈이 모두를 쓸어보고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고 아카데미가 키워줄 거란 생각은 하지 마라. 스스로 길을 찾아라. 기사가 한 명만 있는게 아니듯, 검술도 한 가지만 있는게 아니다. 자기만의 검술을 만들어 내든, 아니면 다른 스승에게서 검술을 이어받든…… 선택을 하거라."




그렇게 말한 렘피룬트가 돌아섰고, 덧붙여서 한 마디 하였다.




"그리고 뛰어난 한 개 조만 가르친다 하였지, 나머지를 버린단 말은 하지 않았다. 언제고 내게 가르침을 원한다면 오거라. 단, 나에게서 배울 것이라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와라."




























"최고다."




릭트의 말을 선두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흥분에 차올라 떠들어댔다. 역시, 과연, 그럼 그렇지란 말들이 오고 가며 렘피룬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생겨났다.


처음 자신들에게 했던 말은 위기감을 갖게 하기 위한 독한 말이었고, 실제론 모두를 챙겨주는 기사 중의 기사다! 모두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그를 칭송하고 있을 때, 한 명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질문을 했던 제트. 그는 무심한 눈으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웃기는 소리.'




아직 정신도 제대로 박히지 않은 아이들에겐 그럴듯한 사탕발림이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제트에겐 정말 헛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검술이란게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면 모두가 목숨을 걸고 덤벼들지 않았을 것이다. 헌데 세 치 혀로 누구나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흔한 돌멩이 같은 걸로 만들어버리다니…… 심지어 이 우둔한 학생들은 그걸 믿고 있었다. 노련한 언변이지 않은가. 그 일그러진 표정은 누군가에게 드러나기도 전에, 제트도 환호하는 학생들에게 섞여들었다.




'검술에 한 평생을 바치다 바스라질 아이들…… 잡을 수 없는 꿈을 위해 달려가는 아이들아…… 너희 전부를 구해내기엔 폐하의 눈은 어둡고, 세상을 뒤집을 자들이 많다. 미안하다.'




제트는 들리지 않을 사과를 하며 옆 학생과 어깨동무를 하였다. 그리곤 이 일을 축하하자며 과실음료를 마시자 제안했고, 1조 전원이 다시 한 번 환호성을 내질렀다.


한편,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피블론과 리든이었다. 원체 신중한 성격의 피블론과 부정적인 리든이었기에 가능한 생각들이 머릿 속을 휘저었다. 우선 피블론.




'확실히 그냥 버린다면 아깝지. 그리고 혹시나 버린다 쳐도 아카데미에서 감당할 수 없을테니까…… 노예 학생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할 일도 없어질 뿐더러, 입이 많아지는만큼 소문도 무시할 수 없어. 당연히 이런 선택을 해야겠지. 하지만 왜 지금 와서 저러는 걸까. 뭐…… 이유는 있겠지.'




그 다음은 리든.




'돈을 더 받아내려는 술수지. 약간의 희망을 줌으로써 조금이라도 그 희망에 다가가게 만들려는 속셈이 아니고 뭐겠어. 어정쩡한 꿈을 가진 놈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곤 돈을 더 갖다바치는 것 뿐이니, 그 몇 푼 좀 모아서 큰 돈으로 만드는게 훨씬 이득일테지! 쯧…… 더럽다. 더러워…… 그냥 이 돼지한테나 붙어서 편히 있다가 졸업해야지. 기사직 받고 용병 노릇 좀 하면 최소한 굶진 않겠지 뭐. 검술이 뭐 대수인가.'




여러 생각이 뒤엉키고 있는 이 군집에서, 로이트는 말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렘피룬트에게 전력으로 달려갔다.






























"잠깐만요!"




심장이 제대로 뛰지도 않았는데 숨을 헐떡인다. 육체 노동 쪽에선 굉장한 끈기를 가진 녀석이 이렇게 호흡이 불안정하단 건 정말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뛰어왔거나…… 긴장으로 전신이 굳어 평소보다 몇 배는 힘들었단 소리다.


로이트에 대한 분석을 끝낸 렘피룬트가 특유의 굳세보이는 입가의 주름을 파며 말했다.




"왜 그러지?"




1년 전에도, 2년 전에도 같은 말을 했지만 그가 이렇게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대부분이 자신의 말을 듣고 검술을 배우기 위해 즉시 달려온 적은 없었지만…….


왠지 모를 호기심이 그를 찔러댔다. 무심한 눈 너머로 숨을 고르는 로이트가 비쳤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4년하고도 몇 개월일까. 그 이전에도 비슷한 물음을 들은 것 같다.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렘피룬트가 말해보라 하자 로이트가 침을 꼴깍 삼키고 입맛을 다시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




그가 채 말하기도 전에 머릿 속을 뒤흔드는 일이 있었다. 2년 전과 불과 몇 개월 전. 그리고 둘 다 같은 사람이 주체가 되었다. 렘피룬트의 머리가 흔들렸다.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는 것 같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로이트가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꼭 2년 째 되는 날, 그가 노예 학생으로 점찍힌 날이기도 한 그 때 그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첫인상은 굉장했다. 렘피룬트의 눈은 기사의 눈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관인만큼 사람을 훑어보는 탐색기이기도 했다.


어깨. 둥그스럼하고 두껍다. 매우 무거운 걸 짊어지기 좋고, 근력이 묵직히 잠들어 있다. 팔. 어깨만큼이나 두툼하다. 여기서 큼직한 손까지 연계되어 상반신의 힘은 렘피룬트조차 이길 수가 없다. 거기에 통나무같은 허리와 튼튼해보이는 하반신만 본다면 체력 면에선 그가 우위. 힘 대결을 펼친다면 자신의 필패. 검술을 더한다면 무승부. 여기에 온갖 요소를 더한다면 이길 순 있으나 깔끔한 승리가 아니다.


분석을 끝낸 렘피룬트가 거만하게 그에 대한 걸 물었고, 그는 자신을 길리번이라 소개했다. 큰 덩치에 비해 겸손하다. 하긴, 평민이 귀족을 대하는데 대들었다면 제국은 무너졌을 것이다.




"로이트의 아버지로 있습니다."




뭔가 말투에서부터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렘피룬트는 길리번만큼 연륜이 있었고, 침착하게 말했다.




"용건이 뭔가."


"이 아이의 엄마, 즉 저의 안사람이 몹시 아픕니다. 그래서 잠깐 데려가 만나게 해주려고 합니다."




그 강렬한 눈빛에 하마터면 그러라고 답할 뻔했다. 하지만 안된다. 로이트는 분란의 싹이자 가져선 안될 뜻을 심은 아이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간다면 이것이 움터서 반란군에 한 몫 하게 될 것이다. 물론 비약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이건 어디까지나 위에서 내린 결정이고, 명령이니 말이다.




"안 된다."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꽉 다문 입술로 돌아섰다. 그 순간, 렘피룬트는 후회가 됐다.


무엇 때문이지? 처음부터 이렇게 물어서 궁금증을 해결했으면 나았을까. 아니면 잠깐 아이와 만나게 해서 하소연이라도 하게 해주었으면 됐을까? 그러면 이 답답함이 조금이라도 풀릴까. 괜한 생각이 들자 렘피룬트가 눈을 꽉 감고 고갤 털었다.


잊자.


평소처럼 잊고 아카데미에 힘을 쓰자. 단 한 순간 흔들렸던 스스로를 탓하며 돌아선 그는…… 다시 한 번 길리번을 만났다. 그리고 그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단 것도 알았다. 말라버린 눈과 음푹 꺼져있는 눈두덩, 파들거리는 입술만 봐도 무슨 일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다가 도적이라도 만난 것인가? 거친 시간을 보낸 그의 모습에 렘피룬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길리번이 말했다.




"아내가 죽었소."




그 울리는 목소리가 렘피룬트의 머릴 흔들었다. 다짜고짜 하는 소리가…… 뭐?




"제가 여기에 다시 온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끝끝내 목숨을 거두고 말았소이다."




뭔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멀리 보낸 아들이 보고 싶다고, 그렇게 얘기하다가 나중에선 말도 못하고…… 죽어갔소."




잠깐…… 그만해.




"그러다 숨을 거두기 직전…… 한 마디 하더군요."




안돼.




"로이트."




렘피룬트의 이성이 흐트러졌다. 길리번의 묵직한 말이 그 단단하던 기사의 생각을 뒤흔들었다. 이제껏 외면하고 살아왔던 것이 길리번과 만나면서 한 번에 터져나왔다.


아카데미 장 멜베스크가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노예 학생이 하나둘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떠나갈 때, 뒷돈을 챙겨먹는 감독관들을 보았을 때, 학생 몇이 쓸데없는 일로 트집이 잡혀 귀족집 자제의 화풀이로 쓰여질 때, 눈 앞의 겉치레에 홀려 달려드는 아이들과 현실을 보고 꿈이 깨져나가는 졸업생을 보낼 때, 십 여 년 간 벌어졌던 모든 일이 뒤섞였다. 그 응어리 진 암덩이가 머릿 속에 꽉 끼었고, 길리번이 그 억센 힘으로 달려들 때까지 움직이지도 못하게 훼방을 놓았다.




"내 아들을 내놔라-!!"




이 사무친 울음 소리…… 몸 곳곳까지 떨리는 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자신을 쓰러뜨린 길리번의 육중함이 느껴지기도 전에 머나먼 기억이 되살아났다.


견습 기사 시절, 털북숭이 괴물 하나와 조우한 적이 있다. 그리고 놈의 이름이 '오거'이고 아직 새끼란 걸 안 건 한참 나중이었다. 아무튼 녀석과 마주한 순간, 렘피룬트의 머리는 얼어붙었다. 괜히 무리에서 떨어져나와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검을 뽑아들고 자신과 거의 비슷한 덩치의 괴물을 겨누며 덜덜 떨었다. 호기롭게 외치며 출정한 게 엊그제이거늘, 지금 와선 그저 겁쟁이에 불과했다.




"침착하자."




자신에게 한 마디를 던져주고 뒤엉킨 생각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스승의 가르침에서부터 선배 기사의 조언, 책에서 읽었던 지식, 짧지만 남다른 경험,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염원, 망상에 가까운 구상과 약간의 바람, 온갖 것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새끼 오거의 목에 검을 꽂아넣는 굉장한 검술이 펼쳐졌다. 단 한 번에 처음 만난 몬스터란 것을 제압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몸에 피가 튀고, 살생하였다는 것조차 잊고 울부짖었다. 한 가지 더.


새끼가 돌아다닌다는 건 어미도 있을 거란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새끼보다 훨씬 날래고 강하고…… 잔혹하단 것도 몰랐다. 얼굴을 스쳐 희미하게 남아있는 흉터도 어미 오거가 남긴 것이다. 그리고 녀석은 곧장 렘피룬트를 깔아뭉개더니 그의 얼굴에 침을 튀겨가며 포효했다.


위협이 아니다. 그저 목청이 큰 것도 아니다. 녀석은…… 원망하고 있었다. 한 차례 길게 울부짖은 녀석이 주먹을 높이 들었다. 기사단 하나를 상대할 정도의 녀석이니…… 죽을 수 밖에 없나. 그 순간, 오거의 몸뚱이에 네댓 발의 화살이 꽂혔다. 곧이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기사들의 손에 오거는 무방비하게 죽어버렸다.


살았단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놈의 육중한 몸에 짓눌려 뼈가 부러져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 냄새나는 놈에게 당해서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도 아니다.


왜냐하면…… 녀석의 눈을 보았으니까.


원망, 허무, 분노,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무언가가 렘피룬트의 눈에 꽂혔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을 넘고 공간을 뚫어서 길리번의 눈에서 뿜어져나왔다. 그 눈빛을 본 순간 다시 얼어붙었다. 죄책감. 길리번이 경비병에게 붙들려 널부러지고, 두들겨 맞는 그때까지도 렘피룬트는 아무 말도 못했다. 일어나서 몸을 털고, 돌아설 뿐이었다.


그 눈을 보고 싶지 않았다. 옛날의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기분에 허우적거리긴 싫었다.


그래.


겁에 질렸다. 그래서 도망친 거다.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머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귀는 전부 들었다. 렘피룬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로이트를 내리깔아보며 말했다.




"4급 체력 시험조차 합격하지 못하는 녀석이, 괜히 부모를 만난다면 마음이 약해질 게 뻔하다. 그런 경우를 수없이 지켜보았고…… 특히 너처럼 세 번…… 아니, 이번으로 네 번이군. 이렇게 많이 시험에 떨어진 경우도 없었다."




로이트가 약간의, 정말 조금의 기대를 갖고 물었건만 돌아오는 답은 기대 이하였다. 로이트의 축 늘어진 어깨와 뒷모습을 보며, 렘피룬트도 돌아섰다. 만일 그가 여기서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조금 더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었다면, 아니면 그럴듯한 거짓을 꾸며내기라도 했다면……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아버지와 만나게 해주었더라면…… ……아니, 만일 그때…… 뒤를 돌아보았더라면.


야수보다, 잔혹한 살인마보다, 복수에 눈이 먼 기사보다 더 진한 로이트의 눈빛을 보았더라면…… 로이트가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았을까.


작가의말

신년이 밝았습니다만 제 글실력과 게으름은 여전합니다.

요 몇 달 간 훈련 및 업무, 넉넉치 못한 지갑사정으로 인하여 연재가 원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빨리 제대하던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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