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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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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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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0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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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10

DUMMY

상인을 꿈꾸거라.


라르카 백작의 한 마디는 밀레트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기사의 꿈. 그것은 어릴 적부터 키워온 그의 자그마한 소망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졸업만 하면 가능한게 기사직이었고, 부정부패로 가득한 그곳은 부유한 라르카 백작가에겐 졸업이란 손쉬운 일이었다. 헌데 밀레트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기사가 되어 보이고 싶었다.




"아카데미로 가고 싶습니다."




밀레트는 처음 아버지께 이렇게 얘기했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라르카 백작이란 인물이 원해야만, 아니 계산에 맞아야만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단 것을…… 그런데 답은 의외였다.




"좋다."




이 한 마디가 밀레트에겐 꿈으로 가는 계단이 되었다. 밀레트는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안가 자신이 아버지의 계산 속에 있었단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이크라 후작가의 차남, 라이가스의 입학. 그리고 그에게서 들은 아카데미에 대한 아버지의 계획은 밀레트의 꿈을 산산이 부숴놓았다. 밀레트는 좌절했다. 어릴 적 두려움을 꺾게 해주었던 검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의 상술에 자신의 검이 더럽혀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4급 체력 시험 때 아무것도 보지 않고 통과시키려던 시험감독관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렇게 딴 재시험의 기회는…… 망쳤다. 당연히 밀레트도 렘피룬트에게서 단련을 거쳤다. 하지만 그들이 내준 시험의 벽은 몹시 높았다. 사실 그걸 알고있는 감독관들도 그에게 시험의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다간 그 거대한 라르카 백작에게 찍힐 수도 있었으니까!


시험은 실패했지만 그들이 먹은 돈이 있었기에 최우수 합격점에 들었다. 하지만 밀레트에겐 정말 치욕적인 일이었다. 고블린과 싸웠을 때도 이렇게까지 무력하진 않았다. 나무 하나 베지 못해서 이렇게 절망을 맛보아야하다니. 아버지와 절친한 칼릭소 공작의 검은 무쇠도 가르고 한 번에 다섯의 기사를 베었을 정도로 강하다 했는데 그와 자신의 차이가 이렇게 컸었다니! 밀레트는 그 뒤로 미친 듯이 검을 잡았다. 밤마다 홀로 고된 훈련을 하고, 정작 렘피룬트의 가르침이​ 있을 땐 가차없이 빠졌다. 그리고 옆에 여자를 끼며 방탕한 삶을 보냈다. 삐뚤어진 수련과 잘못된 행태로 서서히 추락하고 있을 때, 헤스타가 나타났다. 그녀는 단숨에 타고난 무골인 라이가스를 꺾었고, 심지어 새벽에 검을 휘두르고 있던 밀레트를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땀을 듬뿍 흘리며 생기있는 표정을 짓는 헤스타가 쓰러져있는 밀레트의 턱밑에 목검을 겨누고 말했다.




"이겼네요."




​그때부터였다. 1급 학생으로서 졸업을 준비하던 밀레트가 어릴 적의 꿈을 떠올린 것이다.


다음 날, 아카데미로 전학 온 헤스타가 현 1급 학생의 2인자인 라이가스를 꺾었단 소문이 퍼졌다. 밀레트는 이 소문의 시작을 찾아보았고, 의외로 라이가스가 스스로 시인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기야 강직한 그의 성정상 거짓을 말하진 못했을테니, 아마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을 것이다. 헌데 이상한 건…… 언제부터인지 자신이 1급 학생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거짓을 진실로 만든 것처럼…… 헤스타가 이 점에 의문을 품긴 했으나 굳이 캐내진 않았다. 밀레트도 긁어부스럼을 만들진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피블론은 히죽 웃으면서 자신을 따라오는 보에르를 향해 입술에 검지를 세워보였다. 보에르는 그걸 따라하며 끄덕였고, 곧 라호드 영감이 졸고있는 창고 앞까지 다가왔다. 여전히 고갤 꾸벅이며 조는 모습이 이젠 이 아카데미의 명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한결같았다. 가끔 교관이나 다른 관리인에게 그렇게 혼나면서도 언제나 조는 모습을 보였고, 그를 혼내는 사람들도 뭐라 하기만 하지 자르거나 하진 않았다. 그가 아니면 어느 누가 지루한 창고 관리인을 할까! 무엇보다 창고 안에서 뭘 훔치려드는 사람은 없었고, 있다 해도 금방 잡히게 되니 그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은 없었다. 그저 명분이라 보면 될 것이다.


각설하고, 피블론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보에르가 예상하는 대로 로이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왜 그를 만나야 되냔 물음에도 웃어주기만 하니, 보에르는 답답해하면서 그를 따라갔다. 그러다 살금살금, 삐걱대는 창고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서야 피블론이 답해주었다.




"로이트가 이곳에 오래 머문만큼 뭔가 아는게 있을 거야. 하다 못해 시험을 어떻게 치르는지, 어디서 검을 가져오는지 따위의 자잘한 정보를 알 확률이 높아. 설사 모른다 해도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는 만큼 무심코 시험에 연관했을 가능성이 있어. 그래서 밑져봐야 본전이야. 사실 여기서 무슨 수련을 더 하든 그때의 상황이 우리에게 쉽지만은 않을 거 아냐? 그러면 우리는 우리대로 대비를 해야하지 않겠어? 그래서 선택한게 바로"


"우왁!?"




피블론의 말을 듣던 보에르가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자, 그도 덩달아 놀아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꽉 막힌 입으로 뭔가를 말하려는 듯 갑갑한 소리를 내던 보에르는 부릅 뜬 눈으로 창고 저 너머를 보았다. 그곳에선 일렁이는 그림자와 함께 무언가가 서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보에르의 모습에, 피블론도 시선을 돌렸다가 그 역시 심장이 멎는줄 알았다. 아무도 없어야할 창고에 선객이 있다는 건 상대가 로이트이거나 창고 관계자란 소리였다.​ 혹여 귀신이라는 말도 안되는 경우도 있지만, 뭐가 됐든 그들에게 달가운 경우는 아니었다.


​사악-


뭔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트가 맞는 건가? 피블론은 침을 꿀꺽 삼켰다가 뒷걸음질을 하며 창고 문을 조금 열어젖히고, 그 틈으로 냅다 달렸다. 보에르 역시 그의 손에 이끌려 딸려가다가, 창고 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줄기가 미지의 존재를 비추는 걸 보았다. 새까만 머리에 음침한 표정, 꽉 다문 입. 언뜻 보니 자기 또래의 아이였다. 보에르는 그걸 얘기하려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로이트를 보고 피블론의 어깰 두드렸다.
























​하크는 갑자기 달려나가는 두 아이를 보다, 카나르라 이름 지어진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로이트가 엘더 포레스트로 간 뒤, 늦은 밤 벌어진 그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때 분명 녀석에게 송곳니가 있었고, 발톱도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녀석은 물어죽일 기세로 자신에게 다가왔었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야수에게서나 나올 법한 울음 소리와 야성의 눈빛이 녀석에게서 나타났단게 낯설었다. 헌데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듯, 자신에게 날아들어 품에 안겼다. 그러더니 몸 곳곳에 난 상흔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잘못 본건가'




그 생각을 하며 넘기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하크가 표정을 구기며 카나르를 끌어안았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거기엔 라호드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딘지 모르게, 평소의 그와는 달리…… 눈가를 좁히던 하크는 카나르를 뒤로 숨겼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여긴 불을 밝게 비출 수가 없어서 많이 위험하단다……"




하크는 ​고갤 끄덕이며 카나르를 품에 최대한 끌어안고 몸을 돌렸다. 라호드는 눈을 끔뻑거리며 그를 지그시 보다 그가 누구인지 떠올리고 고갤 끄덕였다.




"너는 …… 가끔 마당이나 공터를 쓸던 아이로구나…… 듣자 하니 말을 못한다던데…… 미안하구나, 괜히 대답을 기다려서 민망하게 만들었구나."




그 따뜻한 말에 하크의 경계심이 무너졌다. 방금 느꼈던 이질감도, 카나르의 낯선 모습도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만큼, 방심하고 말았다. 하크가 머리를 주억거리자 라호드가 돌아서며 한 발 앞서나갔다.




​​​​"어서 오거라. 여기서 뭘 하려했는진 모르겠지만…… 비밀로 해줄테니, 어서 따라오거라."




하크는 카나르를 내려다주고 서둘러 그를 따라갔었고, 다행히 카나르의 비밀은 들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카나르에게 뭔가 비밀이 있는 걸까? 그 생각을 하던 하크는, 방금 들어와 산통을 깨놓은 두 아이를 떠올리며 창고 밖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알아보면 되겠지…….​


















"시험은 그냥 보면 돼. 어차피 검술이라 해봐야 렘피룬트 교관의 것을 배우는 것일 뿐이고, 반쪽도 아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까."




로이트의 말에 피블론과 보에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기껏 큰 기대를 품었는데, 로이트에게서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기본적인 검술이라도 줄줄 알았다. 헌데 아주 일부밖에 주지 않는다니. 검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그들이라도 그런 어정쩡함은 좋지 않단 걸 알고 있었다. 진실을 알고 나니 아카데미에 대한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과연 여기가 정말……​ 기사를 만들어내는 교육 기관이란 말인가?




"만일 조원한테 말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게 좋아. 너도 나처럼 되고 싶지 않겠지?"




로이트가 그 말을 하며 홱 돌아섰다. 그는 말없이 창고 안으로 들어섰고, 라호드와 인사를 나누었다. 피블론은 짠한 눈으로 로이트의 뒷모습을 보았다. ​




​"가자."


"어……​?"


"우린 교육받은대로 시험을 치르자고."




​보에르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피블론은 그를 잡아 이끌었다. 그러더니 씩 웃어보였다.




"​우린 정신 시험에서 최고가 되자. 적어도 우리가 든 검만이라도 깨끗해야지."


"……​응."


​​


​피블론과 보에르가 체력 시험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를 뽑아내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모두가 자기만의 방식대로 준비해나갔다. 돈이 많은 자는 뒷돈을 더 찔러넣었고, 힘밖에 믿을 수 없는 자들은 체력을 단련했다. 간혹 피블론처럼 '반칙'을 쓰기 위해 온갖 조사를 하는 녀석도 있기도 했고, 정신 시험에 모든 걸 걸려고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 진실에 대해선 알지 못했고, 당연히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포기한 녀석들은 운에 모든 걸 맡기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험 날이 다가왔다.
























​"시험은 마련된 천막 안으로 한 명씩 들어가서 치른다. 시험이 끝난 인원은 반대쪽으로 나오는 길이 있으니 그대로 나가면 되며, 이름을 부르는 대로 들어가면 된다. 알겠나."




그렇게 시험은 시작되었다. 우선 1조부터 차례대로 이름이 불리고 새까만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보에르는 그 천막을 보며 거대한 괴물이란 생각을 하며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그저 기둥을 쪼개면 되는 것일뿐인데 괜히 긴장되었다. 고블린과 싸울 인원을 뽑을 때만큼이나 가슴이 떨렸다. 아랫도리가 저려대서,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한 명, 두 명, 그렇게 1조 전원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간혹 절규의 소리가 들리기도 하면, 우렁찬 기합과 함께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들리기도 했다. 이번엔 2조가 되었다. 피블론이 들어가고 하나둘, 2조원이 사라졌다. 그렇게 보에르는 자기 차례가 되어서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보에르."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 마련된 직사각형 탁상에 앉아있는 네 명의 노인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그 사이에 거대한 사내가 걸어와선 물건 하나를 떡 하니 내려놓았다. 바닥이 평평한 십자가 펴져있는 쇳기둥에 팔뚝만한 반듯한 나무 기둥이 꽂혀져 있었다. 옆에서 다른 사내가 다가오더니 보에르에게 검을 건넸고, 감독관 노인 중 하나가 말하였다.




"​기회는 다섯 번 주겠네. 오로지 올려치기로만 기둥을 베어야 하네. 절대 내려쳐서는 안되며, 가로 베기까진 허용하겠네. 나무 기둥이 부러져도 인정하고, 반파 되어도 합격점에 들어서니 긴장하지 말게나."




보에르는 손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진검을 느끼며, 그의 말에 고갤 끄덕였다. ​엘더 포레스트로 갈 때도 느껴본 것이지만 진짜 검의 무게는 굉장했다. 그저 무게적인 느낌보단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켠이 무거워지는 심리적인 느낌이 강했다. 보에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두 걸음 나아갔다. 그리고 눈 앞에 세워져있는 나무 기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근육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힘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아이의 몸으로 이런 날도 제대로 안 선 묵직한 검으로 질긴 나무를 베라니! 그것도 무게를 실어 내리치는 것도 못하게 하고 말이다. 다행히 겉껍질이 박살나, 보에르에게 자신감이 붙었다. 두 번째 베기 땐 나무의 흰 속살에 검자국이 좀 남았고, 세 번째, 네 번째 땐 조금씩 검이 파고 들더니 마지막 검격엔 기둥의 절반이 패였다. 감독관들의 눈에서 감탄이 어렸다. 그리곤 자기들끼리 수근거리더니 이제 그만 가보란 말을 남겼다. 보에르는 표정을 가라앉히며 고갤 숙였고, 밖으로 나섰다.


​피블론이 엄지를 세우며 반기자, 보에르가 힘없이 웃어보였다. 사실 시험을 본단 긴장감 때문에 가슴이 떨렸는데 그 모습을 보니 단번에 긴장이 풀려버렸다. 곧이어 3조가 시험을 치렀고, 라인이 나왔다. 그는 콧김을 푹푹 뿜으며 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런 젠장! 조금만 더 하면 부러진건데, 그 껍질이 달랑거리는 바람에……​!"




라인의 분통터지는 말에 보에르와 피블론이 어리둥절해 하였다. 왠지 절반을 벤 걸로 끝낸 것 같지 않았다.




"얼마나 부쉈는데?"


"끙……​ 기둥 목이 꺾이기만 했어. 젠장……​ 남들은 다 부러뜨렸는데 나만 못 한 거 아냐."




지금 라인이 얼마나 ​​​멍청하고 굉장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지금 라인의 말을 듣고 황당해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중 누구도 라인의 말처럼 기둥 목을 꺾은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이 절반, 혹은 엇비슷한 깊이로 베어냈을뿐이었다. 아무리 다섯 번의 기회를 주긴 했으나 그 횟수 이내로 기둥을 완파에 가까운 상태로 만든 건 손에 꼽거나 아예 없었다. 제트는 결과를 말해주지 않았지만 완파를 했거나 그에 근접한 결과가 나왔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외다. 고블린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오크를 쓰러뜨린게 그가 아닌가! 나다크는 아직 시험을 치르지 못해서 모르겠으나 그도 제트와 비슷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아무튼 그 말 이후로 라인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하나같이 그를 괴물 보듯이 했고, 라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성과(?)를 질시하는 눈빛이라 생각하며 더욱 수련에 힘쓰기로 마음 먹었다. 피블론은 그저 좋은게 좋은거라 생각하며 말하지 않았고, 보에르는 동네 친구의 바보스러움을 알고 있기에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4년째 아카데미에 붙들려 있는 로이트였다.




'……​잘 하려나'


​​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로이트가 시험장으로 들어섰다. 달가워 하지 않는 그들의 표정. 로이트는 몹시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내가 건네주는 검을 받으며 시험에 임했다. 지금 이 자리에 1년 전에도, 2년 전에도 섰다. 3년 전에도……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달라지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시험을 치렀다. 그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섰고, 자신을 가로막았다. 로이트가 이를 악물었다. 엘더 포레스트 때부터 흔들렸던 그의 심성이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 들고있는 검도 날이 무딘 걸 떠나 굉장히 무거웠다. 5세커(1세커는 1kg의 모래의 무게를 나타내는 무게 단위)는 할까, 아니, 여기서 몇 세커는 더해진 거 같다. 일부러 무거운 합금으로 만든게 분명하다. 로이트가 한 발 앞서 다가갔다. 나무 기둥이 보인다. 저기엔 무슨 짓을 해놓았을까.


꽉 쥐어진 무거운 철검이 그의 손에서 빛을 발했다.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진 검. 가로로 베는 자세였지만 살짝 밑에서 위로 솟구치는 선이 그려졌다. 나무 기둥을 때렸다. 어마어마한 충격이 로이트의 손바닥에서 터졌고, 그의 검은 기둥에 붙었다. 말도 안돼. 마치 돌을 때린 듯한 타격감이었다. 기둥에 검을 대고 생각하던 로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 번 더. 하지만 둔탁한 소리가 날뿐, 기둥은 멀쩡했다. 나무로 만들었는데도 이렇게 단단하다니! 힘이 모자른 건가? 그래서 다시 한 번 휘둘러봤지만 껍질만 바스라질뿐, 조금도 베이지 않았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기둥에 검을 대고 있는 로이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눈이 핑 돌았다. 언제나, 언제나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또 공정한 방식으로 자신을 떨어뜨렸다고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나무 기둥이 조금 부스러지는듯 했다. 그리고 로이트는 보았다. 나무가 찢기면서 그 안에서 빛을 발하는 검은 금속을.




'철심.'




​숨이 가빠졌다. 전신에서 식은 땀이 흐르고 핏줄이 터질 정도로 피가 빠르게 돌았다. 로이트의 손바닥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실핏줄이 돋아나고,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팔이 떨렸다. 온몸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나? 꼭? 대체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핍박하는가! 어떤 권리로 자신을 찍어누르는가! 이유가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는가! 뭘 얻으려고 이런 ​짓을 하는가!


이게…… 이게 기사를 만드는 교육기관이 벌이는 짓이란 말인가! 그저 부모님이 근심없이 살게 해드리려고 기사가 되려는 꿈을 짓밟고, 새싹을 뜯어내는 것이 아카데미에서 하는 일이란 말인가!


울분. 그간 쌓아온 모든 것. 엘더 포레스트에서도 터지지 않았던 것이 기어코…… 모든 것이…… 폭발했다!




"​으아아아아-!!"




로이트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감독관이 놀라고, 도우미도 놀랐다. 갑작스럽게 터진 그의 발작 때문에 모두의 행동이 굳어졌다. 로이트는 찢어진 손바닥으로 검을 놓지지 않고, 기둥을 후드렸다. 묵직한 십자 받침대가 흔들리고, 겉에 싸여있는 나무껍질은 진즉 박살났고 그 안의 철심이 찡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만!"




감독관의 외침에 도우미 사내들이 달려들어 로이트를 붙잡았다. 로이트는 검을 놓친 뒤로 축 늘어져서 끌려나갔다. 감독관 데퍼빌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냈다. 뭘까 방금 그 모습은…… 마치 어미를 잃은 맹수의 발악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냥 기둥을 때렸을 뿐인데, 로이트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서 소름이 끼쳤다. 자신이 그 기둥을 대신해 서있고, 그에게 얻어맞는 상상을 해버렸다. 침을 꿀꺽 삼켰다. 데퍼빌의 두 눈이 다른 감독관을 보았다. 그들도 잠시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로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게 있었다. 바로 파괴된 나무 기둥 안에 음푹 패여있는 철심…… 그걸 본 데퍼빌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고, 나머지도 그걸 보고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직 성인도 아닌 녀석이, 어떻게 저런 힘을 낸 것일까.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모두가 이를 떨었다. 그저 나가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감독관들은 서로 수런거리더니 이내 말을 멈추고 천막을 나섰다. 마치 이 일을 잊기라도 한듯, 그들은 태연히 정신 시험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끌려나오는 로이트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손바닥에 피를 쏟으며 널부러진 그를 보며 학생들이 두런거렸다. 싸운 건가, 자해라도 한 건가. 천막 밖까지 새어나오던 로이트의 고함에, 각자 자신의 생각을 내뱉으며 로이트의 모습을 보며 떠들어댔다. 로이트의 두 눈이 ​​​허공을 보았다. 무언가를 보는 듯 하나, 아무것도 보지 않는 시선. 그걸 본 보에르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자 피블론이 팔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 도리질 한 번. 보에르가 울상이 되어 그를 바라보자, 피블론은 그저 참으란 말만 했다. 여기서 그를 도와주다간 제대로 찍힌다. 그 생각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학생이 하고 있었다. 피를 쏟는게 안쓰럽긴하지만 괜히 나섰다가 밀레트에게 찍힌다면……? 각자의 사정으로 아카데미에 들어온 아이들이다. 스스로를 희생하며 누군가를 돕기엔 아직 너무 어렸다.


그때, 누군가 나섰다. ​그는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나무 기둥이 단단했나보네."




무심한 말투, 나긋나긋한 목소리. 나다크가 로이트를 내려다보며 말하더니, 그의 어깨를 잡아세웠다.




"​사람 안친게 용하다."




그 말을 하고서 나다크는 로이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로이트는 허망한 표정으로, 그와 반대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더니 흐느적거리며 걸어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






















"​카나르?"




창고지기 라호드 노인은 없었다. 대체 그가 어디로 간 것일까. 사실 그런건 안중에도 없다. 자신을 위로해줄, 이 터질 듯한 분노를 달래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크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가 창고에 올 때가 아니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몰랐기에 진즉 포기하였다. 그래서 로이트가 찾은 곳은 창고 안에서 몰래 키우고 있는 카나르였다.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불안하게 이곳저곳을 쏘아보던 로이트는 구석에서 꼬리를 바짝 세우고 있는 카나르를 발견했다.




"거깄었구나……"




로이트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애달프게 울렸다. 훤한 대낮인데도 문 틈으로 기어들어오는 햇빛이 아니었다면 코 앞도 못 볼 만큼 어두운 그곳에서, 로이트는 '정'을 원했다. 여태까지 갈구하지 않았던 것을 원하며 카나르에게 다가갔다. 불안한 정신이 인지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지 않은 것일까. 카나르의 충혈된 눈과 위협적인 울음에도, 로이트는 경계하지 않고 다가가 녀석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녀석은 발톱을 세웠다. 송곳니를 꺼냈고, 사냥꾼의 마음가짐을 일깨웠다. 코를 축축히 적시는 비린 핏내가 녀석의 야성을 들깨웠다. 카나르가 힘껏 로이트의 오른손을 깨물었다. 잠깐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로이트가 상황을 인지하기 위해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뒤이어 찾아온 아찔한 격통에 비명을 지르며 카나르를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녀석은 집요했다. 카나르의 덜 자란 송곳니는 피부를 파고들었고, 발톱은 손등과 손목에 박혀 고정되었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파!!


​이 순간, 쌓여진 인내가 무너져내리고, 로이트의 모든 감정이 폭발했다. 아픔에 어쩔줄 몰라하던 로이트가 주먹을 꽉 쥐더니 카나르의 옆얼굴을 때렸다. 고된 노동과 힘든 훈련으로 연마된 근력은, 아직 어린 로이트에게도 상상을 불허할 힘을 불어넣었다. 꽉 다물려서 벌어지지 않을 것 같던 카나르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앓는 소릴 내며 바닥에 고갤 처박은 카나르, 고통과 피로 범벅이 된 오른손을 내려다보는 로이트. 평소같으면 카나르에게 사과를 하며 달래주었겠지만, 로이트의 사고는 뒤틀려버렸다. 이를 빠득 물며, 눈물을 쏟았다. 고통에, 분노에, 외로움에, 갑갑함에, 결박된 그의 감정과 이성이 부풀어올랐다.




"이……! 개새끼야……!"




아무리 피맛을 알게 된 짐승이라지만 카나르는 새끼에 불과했다.​ 헌데 로이트의 발길질엔 자비심이 없었다. 녀석은 있는 힘껏 카나르를 차올려 벽에 처박았다. 힘없는 소릴 내며 늘어지는 녀석을 향해 달려든 로이트가 주먹을 들어 머리며, 배며 사정없는 구타를 가했다. 살가죽을 때리며 닿는 물렁한 살과 딱딱한 뼈의 느낌이 고스란히 와닿았다. 피가 터지고, 괴로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콧김을 뿜으며 미쳐가던 로이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의 발치엔 피투성이가 되어 얕은 숨을 몰아쉬는 카나르가 있었고, 광기를 뿜고난 로이트는 마음 약한 소년의 정신으로 돌아와있었다.




"아……"​




​무슨 짓을 한 건가. 무슨…… 짓을…… 로이트의 절규가 창고를 뒤흔들었다. 괴로움, 한이 섞인 외침이 창고를 맴돌았다. 속이 뒤틀린다. 아무리 소리를 쳐도 나아지지 않는다. 로이트의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며, 울던 로이트가 축 늘어진 카나르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뭐가 그리 좋아 웃어?"




렐프가 투덜거리며 술통을 옮기다, 히죽거리는 라호드 노인을 발견했다. 원래 웃는 모습이 저랬던가? 만약 그의 기억이 맞다면 라호드는 그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소름끼치게 웃는 노인일 것이다. 라호드는 솟구치는 광대뼈를 여실히 드러내며 이가 몇 개 빠진 입으로 말했다.




"기다리던 술이 슬슬 익어가고 있더구먼. 조금만 더 기다리면 완벽한 맛을 낼 거야!"




렐프의 표정이 해괴하게 변했다. 그에게서 언뜻 광신도에게서나 느낄법한 미치광이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거 좋겠구만. 나중에 한 잔 달라고."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라호드는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어댔다.




"암, 주고 말고. 맛이 얼마나 기가막힐지 나도 기대되는구만. 흘흘흘……"




​​렐프는 고갤 흔들며 가버렸고, 라호드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이나 웃어댔다. 사람들은 그가 치매에 걸렸다며 수근거렸지만, 라호드의 귀에는 그런 말따윈 들리지 않았다. 저 멀리, 창고에서 태어날 괴물의 울음만이 그의 귀를 간질였다.


​​


작가의말

생각해둔 스토리까지 썼습니다. 이후론... 언제 걸릴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내로 다음 화 써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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