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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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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3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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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DUMMY

졸업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시기는 이틀 뒤지만, 아카데미의 졸업식은 나름 중요한 파티이기도 했기에 몇 가문에선 이미 그 주변에 마련된 숙소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바빠진 건 아카데미 소속 사람들이었고, 손이 하나라도 필요한 시점에서 누군가가 없단 건 치명적이었다.


'씨벌······'


렐프는 아카데미에서 제법 오래 일을 했다. 그래서 졸업식 파티가 이렇게 분주해지기 시작한 시기를 알고 있었다.

바로 밀레트가 입학하기 전부터였다. 어떻게 안 건지, 라르카 백작의 후계자가 입학한다는 소식에 그 해에 자녀를 입학시킨 귀족은 물론, 별 관계없는 졸업생의 귀족들까지 찾아왔다. 가장 압권인 건 아카데미에서 불량배를 모아 깽판을 친 경력이 있는 학생의 졸업식에, 여태껏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던 귀족이 기사단을 이끌고 나타난 일이다. 당시엔 누가 봐도 허접하기 짝이 없는 수작질이었는데, 생각이 짧은 녀석들은 그것이 백작의 눈에 띌 기회이자 수단이라 생각했었나보다. 이제까지 관심은 커녕, 재활용을 위해 아카데미에 보냈던 그들이 태도를 싹 바꾼 것이다. 물론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이들 중 대부분이 그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상처 입은 마음은 그것마저 달갑게 받을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고, 졸업식은 갈수록 성대해져갔다.

이제까지 교관들끼리의 파티나 신경썼던 렐프로선 참으로 귀찮은 일이었다. 학생들의 파티야 가볍게 열어주면 그만이었으니, 교관들은 눈도장이나 찍을 겸의 일이라 여기면 되었다. 그러나 졸업식 파티가 점점 발달함에 따라 그들의 요구는 고급스러워졌고, 좋든 싫든 그 요구를 받아주어야했다.

물론 아주 일부일 뿐이다. 파티 준비로 예산이 늘어날 때마다 교관들의 파티가 더 풍성해졌으니까.


"개새끼들."


물론 그들에게 떨어지는 건 적었다. 그놈들이 밑의 사람을 생각하는 건 떼먹을 게 있을 때 뿐이었다. 그게 아니면 누가 신경 써줄까.


"젠장. 파티 끝나고 보자고."


격하게 투덜거리던 렐프는 눈을 부릅 떴다.

그의 눈에 보인 건 가슴팍에 뭔가를 숨기고 가는 로이트였다.







로이트는 재활을 위한 산책이란 변명을 하고서 창고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품엔 손질되고 상해버린 메실리아의 씨앗이 낡은 천에 감싸져 있었다. 냄새는 어떻게 막긴 했지만 그 부피까지 숨길 수 없어서 간신히 가슴에 품고 가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누가 봐도 수상했다. 그러나 쉽게 건드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그를 신경쓸 정도로 여유가 없었고, 설사 거슬리는 게 있다 해도 몰래 먹을 빵 정도겠거니 싶었다.

물론 렐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야!"


다시 한 번 들려온 호통. 로이트는 움츠러들어선 멈춰버렸다.

렐프는 성큼성큼 다가가선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땡땡이를 쳐? 지금이 얼마나 바쁜지 알아 몰라!"


고함은 아주 컸다. 지나가던 학생들도 그 소리에 돌아볼 정도였다. 로이트는 그들의 시선에 눈이 흔들렸다. 렐프의 폭력과 폭언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비밀이 중요했다. 아무 이유없이 자신을 억압했던 놈들이다. 그런데 수상하기 짝이 없는 지금의 모습을 그냥 넘어갈리 없었다.

그래서 렐프에게 잡히자마자 힘빠지게 웃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죄, 죄송해요. 정말 배가 고파서 주워먹다가 그만······"

"그럼 왜 지금 멀쩡히 움직이는데! 진작에 나은 거 아냐? 그럼 빨리빨리 돌아오지 않고 뭐하는데!"

"그게······"


그때 렐프가 그의 가슴팍에 눈에 들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 안그래도 불편했던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게 보이니 배알이 꼴렸다.


"이게 뭐야!"


그가 손을 뻗기 직전.


'어.'


한순간 느껴진 오싹함. 렐프는 손을 뻗다말고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렐프! 창고 여유분 빨리 잡아야지!!"


프롭의 외침이 들렸다. 마구간지기인 그가 여기까지 온 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방금 느낀 이질감이 그의 판단을 흐렸다.


"운 좋은 줄 알아. 빨리 쳐돌아오지 않으면 죽도록 맞을줄 알아."


렐프는 그렇게 으름장을 놓고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는 로이트를 노려보았다. 프롭은 렐프를 부르고 멀리서 로이트를 살펴보았다.


'아마 저것도 비밀 지령이겠지.'


알 수 없는 오해. 프롭은 로이트가 나간 걸 본 게 우연이 아니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점점 선명해졌고, 결국 말도 안되는 오해를 낳았다. 물론 이건 로이트에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프롭은 그런 생각을 떠나 방금 자신이 잘못 봤나 싶었다. 로이트가 뻗기 직전의 손. 그건 분명 무언가를 잡아채기 위한 손이었다. 만일 가슴팍의 지령(?)을 지키는 거라면 가슴 어림으로 뻗어야 할 텐데······


'아니겠지.'


설마 목을 노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프롭은 렐프와 함께 창고로 향했다.


'대체······?'


그때 로이트는 눈을 슥슥 비비다 프롭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째선지 쓰레기장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자신을 도와주는 기분이었다. 혹시 동정? 그럴린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3년 내리 자신을 방치하지도, 폭력에 가담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러면 무엇일까.

무엇이 그를 조력하게 만들었나.

일단 지금은 위기를 벗어났단 것에 안도해야 했다.

만일 자신의 도박이 맞다면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다. 그렇게 로이트는 부던히 달려 라호드가 지키는 창고로 갔다.







검술 지도에 대한 계획이 밝혀졌다.

렘피룬트는 이틀 뒤에 있을 행사를 즐기라면서 이땐 수업이 없다고 밝혔다. 이 말에 대부분 기뻐했다. 특히 검술을 배우게 된 3조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아했다. 얼마 안있으면 기사에 한 발 앞서간다. 다른 무엇보다 검술을 익힐 기회를 받았단 것이 중요했다.

이제 더 이상 이론이 아닌 실전에 돌입한다!


"젠장."


3조원들의 기뻐하는 모습에 1조원들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들이 그들에게 밀린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 이유는 제트가 직접 검술 지도를 거절했단 말을 들어서이기도 했다.

하나로 통일됐던 1조의 마음은 단숨에 부숴졌다. 그에게 남은 건 오직 반발뿐. 혹시나 개인적으로 검술을 가르치기 위한 초석이었다면 미리 말을 해주었어야한다. 지금와서야 아무리 말해봐야 늦는다.


"자, 자. 다들 왜 그렇게 불편해 하는 거야. 검술 못 배운 건 못 배운 거고, 곧 있으면 파티라고. 이런 기회가 흔해?"


고르든이 1조원 한 명의 어깨에 팔을 걸며 말했다. 참으로 능청스러운 아이였다. 아니 그것보단······


"요즘 바쁘던데 봉사하러 안 가?"

"아. 나는 개인적으로 말해서 빼달라 했지."

"뭐······?"


그 아이의 반응에 고르든은 낄낄 웃으면서 등을 짝 때렸다.


"아무튼 다들 기운 빼지 말고들 있어. 그 밀레트 '님'의 졸업식 파티잖아? 듣자 하니 지원금이 어마어마 했다던데 눈호강, 입호강 좀 하자고."

"그, 그래······?"

"하긴 라르카 백작님의 입김이 닿는데 소소할리가 없지."


어느새 얘기는 파티에 대한 것으로 넘어가있었다. 제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들은 고르든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조짐이다. 제트는 신경쓰지 않으려 했지만 고르든에게 몰리는 아이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제트는 이 불길함을 애써 무시했다. 지금은 들떠있는 3조에게 집중하였다.


'재수없는 새끼.'







독의 배합.

그것은 몹시 까다로운 작업이다. 재료가 서로 상쇄할 수도 있고, 작업 환경에 따라 성질이 변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쪽에 지식이 없이 작업을 한단 건 큰 문제가 있었다. 설사 독극물 배합에 성공한다 쳐도 자칫 잘못하다간 제작자가 중독될 수 있다.

해독하지 못하면 죽는다.

로이트는 창고에 들어서고 구석에 둔 메실리아 꽃에 다가갔다. 강렬한 향의 꽃이어서 발견되기 쉬웠어야 했지만 헝겊으로 덮어둔 덕인지 그대로 있었다.


"카나르."


한동안 보지 않았다지만 카나르의 경계는 누그러들어있었다. 로이트는 조심스레 다가온 카나르의 머리를 붙들었다. 작은 강아지가 어느새 웬만한 강아지보다 커져있었다. 품에 안기도 버거울 정도의 크기. 그러나 녀석은 아직 어렸다.

아니, 로이트에게 압도되어 있었다.


"이젠 내 말 잘 들을 거지?"


압박.

그건 잔잔한 말이었지만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끔찍한 폭력을 겪은 카나르에겐 그건 악몽을 되새기는 짓이었다.

끼잉.


'좋아.'


아직까지 완전한 복종은 없었다. 하지만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억누르게 한 건 좋은 시도였다. 물론 작정하고 벌인 게 아니었다. 카나르를 보자 무심코 한 행동이었다.

슥-


"윽······"


헝겊을 열자 지독한 냄새가 퍼졌다. 단번에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의 악취였다. 거기다 이 점액은 뭐란 말인가. 로이트는 여기에 몰래 품어온 씨앗을 내려놓았다.


'이걸 쓴다면······'


씨앗은 쭈글쭈글해져선 껍질이 쉽겨 벗겨졌다. 그가 먹고 중독된 건 이 안쪽 부분. 먹자마자 입쪽에서부터 격통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그건 치명적이지 않았다. 아주 조금 먹은 걸론 누군가를 죽게 할 순 없었다. 당장 로이트가 버텼다면 '그'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더 치명적으로 변해야 한다. 당장 움직이지도 못하고 죽을 듯이 괴로워야 한다!


'기회는 최소 세 번.'


얼마나 써야 되는지, 어떻게 섞어야 되는지 모른다. 거기에 한정된 재료와 도구!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기회는 많이 없었다. 신중해야 된다.


'제발.'


로이트는 두 재료를 노려보며 손을 움직였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는 즙을 내서 섞는 것이다. 재료를 짓이기는 거야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검 손잡이로 찍으면 되지만 담을 것이 없었다. 접시가 없으니 바닥에 흩뿌려야 하는데 이런 냄새나는 것의 흔적을 남길 순 없었다. 가뜩이나 환기도 잘 안되는 공간이다.

헝겊으로 냄새를 덮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로이트는 말도 안되는 방법을 떠올렸다. 재료를 쉽게 짓이기고 몰래 숨길 수 있는 방법. 그러나 미친 짓이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흔적을 남기진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로이트는 꽃과 씨를 집어들었다.








'빛이 강렬해졌다.'


같은 날 밤. 카나르의 붉은 빛은 선명해졌다. 그걸 쳐다보는 남자는 검의 손잡이를 꽉 잡으며 결의를 다졌다.

켈빈 리어센. 본래 세이지의 호위로 남겨진 기사였으나 그는 이곳으로 보내졌다.


"빛이 향하는 곳은 이곳이다!"


세이지의 말에 켈빈은 망설임 없이 달려갔다.

포스티어 제국의 아카데미!

켈빈은 하루 동안 말을 몰아세우곤 쉬지 않고 감시에 집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국에 대해 알아냈던 정보를 토대로 아카데미를 분석했다.

그리고 델브라를 피로 적실 괴물은 단 하나뿐이었다.

격동의 64기.

제국의 기둥이라 불리는 대귀족들. 그들의 후계자가 반 이상이 이곳에 있었다. 학살자라 불리는 비하크마 대공의 장남 역시!


'괴물같은 놈.'


비하크마 대공은 그가 있었던 나라를 궤멸시킨 자였다. 일기토에서 커맨드 나이트 퓨센을 죽이고 연달아 다섯의 기사를 상대했다. 그런데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군대를 독려하며 휘몰아쳤다.

그런 괴물의 자식이다.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어릴 때 오크를 잡았다고 했단다. 그리고 그건 결코 거짓이 아닐 것이다. 거짓말로 광고를 할 정도의 인물이 아니다. 축소시키려면 축소시켰지, 과장할 자가 아니었다.


'제트 르몽드.'


칼릭소 공작의 후계자도 있었지만 여자였고, 라르카 백작은 돈만 부유할 뿐이다. 하이크라 후작은 앞으로 나서는 타입이 아니고 리호데 백작은······


'기사도가 있다.'


적국 포스티어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존재. 몇 번의 굴욕에도 견뎌내고 전장에서도 예를 갖추는 진정한 기사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리호데 백작의 아들이 겁화를 부를 리 없었다.

찰각-

그렇게 켈빈은 나름의 추리를 끝내고 시가지에서 아카데미를 노려보았다. 귀족의 자식인만큼 밖에 나돌아다닐법한데, 그는 시가지로 외출을 하지 않았다. 혹시 놓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잠잠했다.

설마 눈치챈 건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기척이 느껴졌다. 가벼운 발소리지만 그건 켈빈의 신경을 거슬렸다. 그래서 말없이 검을 쥐고 그곳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 공백이 켈빈의 모든 감각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탓-

켈빈은 곧장 뒤로 물러났고 잠시 후 그가 보던 곳에서 걸어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기사인가."


그는 건물 그림자에 숨어 자기 할 말만 뱉었다. 켈빈은 그 묵직한 질문에 답을 할지말지 고민했다.

이미 망해버린 명예를 증명할 것인가, 아니면 거짓을 말하여 없던 명예를 깎을 것인가.

둘 중 어느 것이 마음에 가는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

"그렇군."


부정의 한 마디. 그걸 듣자마자 남자의 행동은 하나였다.

탁-

켈빈보다 무거운 한 걸음. 그러나 움직임은 빨랐다. 단숨에 켈빈 앞으로 치고 나온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어?"


무심코 검을 뽑아들려던 켈빈은 그 손을 보며 어리둥절했다. 공격하려는 게 아니었나? 그 의문은 남자의 허리춤의 검을 보며 해소되었다.

천에 둘러진 검. 그건 검에 남아있을 가문의 특성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물론 뭣도 모르고 따라하는 가짜들도 있었지만 그 날렵한 움직임만으로도 켈빈은 그가 가짜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러면 어느 가문에서 나온 것인가.

이것 또한 중요했다. 어쩌면 왕국을 배신하고 포스티어에 붙은 에이블이 남은 후손을 치려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생각은 빗나갔다.


"혹여 우리와 함께 하지 않겠소?"


난데없는 스카웃 제의. 그건 켈빈의 사고를 흔들어놓기 충분했다.


"······대체?"

"다크나이트였다면 문제가 되었지만 아니라고 하니 일단 애기를 건네는 것이오."


다크나이트.

주인을 배신한 기사. 그야말로 불명예 그 자체였다. 그들은 거의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귀족에 발을 걸치는 위치인 것에 비하면 참으로 처참! 그러나 귀족 사회인 이곳에서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다크나이트로 찍힌 기사는 산속에서 숨어살거나 자결을 택했다. 살아봐야 누구도 대우를 해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이건 기사이고 아니고를 떠나 몹시 실례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켈빈의 검엔 그 어떤 인장도 없었다. 설사 있다해도 이미 멸망해버린 나라의 것이니 다른 기사가 알아보기란 어려울 터.

켈빈의 선택은 옳았다.

지금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비하크마 대공이 차출한 기사였다.

엘단 헤틀.

대공의 직속 기사단인 로열블루의 일원이자 그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그를 믿고 보낸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판단과 결정 때문이었다. 즉석에서 빚어낸 결단력은 멀리 있는 대공을 대리한다 할 정도로 총명했다. 지금 스카웃 역시 대공이 보고 있었다면 곧장 수락했을 것이다.

바른 자세. 기품 있는 말투. 그리고 아직 죽지 않은 눈빛.

그는 결코 다크나이트따위가 아니다!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명예가 뒷받침 되었다면 흐리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모든 것이 위장이었다 해도 잠깐의 망설임이 엘단의 판단을 굳게 해주었다.

양심이 있다.

거짓을 말할까, 진실을 말할까 망설였던 것이다. 이런 인물은 첩자에도 적합하지 않다. 설사 무슨 수작을 부리기 위해 왔다 하더라도 웬만하면 대공이 감당할 수 있었다.

그가 누군가. 황제를 제외한 제국의 1인자가 아닌가. 마음만 먹으면 그가 하위 귀족 하나를 참살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물며 고작 한 명 거두어 들이는 것 정도야.


"다크나이트는 결코 아니오."


그 말을 들었을 때 켈빈의 눈이 빛났다. 귀족으로써 왕국을 배신한 인물이 떠올라서였다. 그 표정을 보고 엘단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혹여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오?"


이건 다크나이트의 경우와는 달랐다. 본래 주인인 귀족이 몰락한다면 기사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그를 대신할 다른 주인을 찾거나, 끝까지 함께 하거나.

이 과정에서 귀족이 떼를 쓴다면 어쩔 수 없었다. 계약과 명예로 묶여있는 그들이었기에 선택권이 있단 건 그나마 존중하는 표현이었다. 그것도 못하게 하고 함께 죽을 것을 강요하는 귀족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물론 그런 자는 인재가 떠나간다. 굳이 조치를 하지 않아도 자멸을 하는 셈이다.

켈빈은 이번에도 망설였다. 기사는 아니다. 그러나 주인이 없진 않았다.

엘단은 여기서도 대공의 선택을 받은 이유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난처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소. 다만 그대가 함께 한다면 좋을 것 같다는 걸 알아 주셨으면 하오."


엘단이 이렇게 말하며 손수건을 건넸다. 켈빈은 그걸 받았고, 엘단은 망설임 없이 떠나갔다.


"이건······"


켈빈은 손수건을 펴보았다. 그리고 이 모습을 한 건물의 3층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고······!"


졸업식 하루 전. 펠빅이 두터운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주방에서 조리중이던 주방장 제리가 얼굴을 빠끔 내밀더니 턱짓을 했다. 그러자 설거지를 하던 하르겐이 입을 삐죽 내밀며 식당으로 나왔다.


"왜 그러냐?"

"주, 죽을 거 같······"


펠빅이 그렇게 말하고 쓰러져버렸다. 뒤늦게 하르겐이 심각성을 깨닫고 그가 먹었던 걸 살폈다.

그저 평범한 샌드위치였다. 독성이 들은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펠빅은 거품을 물기 시작했고, 얼굴이 창백해져갔다. 하르겐은 사색이 되어 제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아무리 하위 귀족에 거의 방계에 가까운 펠빅이라지만 어쨌건 귀족이다. 그가 죽게 되면 주방 사람들은 일제히 처형 당할지도 몰랐다.


"이런 씨발! 뭘 보고만 있어!"


항상 인자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위하던 제리의 입에서 쌍욕이 터졌다. 하르겐은 허겁지겁 펠빅을 들쳐메고 병동으로 달려갔다.







"대체 뭘 먹었길래······"


하스본은 창백해져 돌아온 로이트의 상태가 더 나빠지자 그의 얼굴을 살폈다. 룬을 새긴 침대에 누워도 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하스본은 탄식했다.


"죄송해요······ 배가 고파서······"

"그렇게 먹다가 메실리아 씨 먹고 들어온 거잖아.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너 설마 쉬고 싶어서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로이트로썬 변명할 거리를 생각하지 못해서 대답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스본에겐 그것이 대답이 되었나보다.


"에휴. 그래도 졸업식 파티인데 이렇게 땡땡이 칠 필욘 없잖냐."

"아."


로이트는 그걸 덥썩 물었다.


"죄송해요."

"마법사님!"


하스본은 못마땅한 얼굴로 뭐라 말하려다 자길 부르는 소리에 방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슨 일-"


하스본은 하르겐이 업고 온 펠빅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전형적을 중독됐을 때의 증상이었고, 그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이런 젠장! 저쪽으로 옮겨!"


펠빅은 그대로 룬 침대로 옮겨졌다. 그는 여전히 몸을 덜덜 떨었고, 하스본은 심각한 얼굴로 그를 진단했다.


"어디서 이랬지? 엘더 포레스트인가? 하긴 독에 당할 데가 거기 밖에 없겠지!"

"아, 아닙니다 마법사님. 이 애는 식당에서······"

"식당?"


그 말에 하스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뭘 먹었지?"

"샌드위치를 먹은 듯 한데······"

"그 안에 재료들 전부 말해!"

"그, 그······ 호밀빵에 피클, 얇게 썬 햄이랑 레몬 소스와 양상추입니다."

"다른 건?"

"아, 절인 올리브도 꽂아놓긴 했는데······"


하스본은 펠빅을 두고 진열대 앞으로 향했다.


"햄은 어떤 동물의 거지?"

"돼지였습니다."

"이상해. 알레르기를 일으킬만한 것도 없는데. 최근에 그 재료들이 빠진 요리가 있었나?"

"하나도 없었습니다······"


달각-

하스본이 진열대에서 꺼낸 건 걸쭉한 녹황색 액체였다. 그는 펠빅의 코를 붙잡고 입에다 병을 꽂아넣었다. 내용물은 펠빅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물론 그 역한 맛에 펠빅은 발버둥쳤지만 하스본이 하르겐과 함께 붙든 통에 고스란히 삼킬 수밖에 없었다.


"케흑······!"

"음."


펠빅의 상태를 확인한 하스본은 하르겐을 노려보았다.


"이걸로 완화 되는 거 같지만······ 아무래도 이상해."

"예······?"

"내가 방금 먹인 게 뭘 해독하는 약이라 생각하나?"


하르겐으로썬 알 도리가 없었기에 입만 뻐끔거렸다.


"메실리아의 독이네."







"고블린의 독은 여전히 성분을 알 수 없어. 그저 완화시키고 진정시키는 게 전부야. 그나마 몇 가지 해독제가 만들어졌지만 그건 그야말로 일부지. 고작 몇 십 발자국 떨어진 부족이 쓰는 독엔 안먹힐 수도 있어."

"그래?"


엘키스는 자신이 아는 걸 전부 말하고서 슬쩍 로이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안색이 안좋은데······"

"아냐, 아무것도······"


독극물 제조와 운반을 위해 입에 씹어서 보관했다. 그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밖에서 들리는 소란을 들어보면 펠빅이란 귀족 녀석이 독을 먹은듯 했다.

딱 한 방울이었다. 그런데 다급하게 이곳으로 데려왔단 건 치명적이란 소리였다. 이 성과에 기쁘기도 하면서도 그 전의 있던 일들을 되짚어보았다.


'프롭.'


마구간을 담당하는 관리인으로 자신에게 의문의 친절을 베풀었다. 이게 우연이 아니란 건 그를 다시 만나면서 확인되었다.

독을 만들고 다시 한 번 쓰레기장을 찾았다. 그러자 그가 쓰레기 처리 담당 관리인인 톰을 데려왔다.


"여기서 필요한 게 있으면 이놈한테 말해."

"어어."


프롭은 톰을 소개시켜주고 곧장 떠나갔다. 톰은 머쓱하니 먼저 인사를 건넸다. 로이트는 이때 메실리아의 꽃과 씨를 머금고 있었기에 대답이 쉽지 않았다.


"고마어요."


그러나 다행히 이 장소가 쓰레기장이어서 냄새까지 나진 않았나보다. 그저 우물거리는 말에 톰이 불만스러체 쳐다볼 뿐이었다.


"혹지 담으꺼 인나요?"


담을만한 걸 찾았고, 작은 빈 병을 구할 수 있었다. 유리 세공품은 가격이 비싸다. 당장 병동에서 쓰는 약물들을 보관하는 병도 깨끗이 씻어서 재사용한다. 톰이 건넨 건 금이 가서 쓸 수 없는 것이었기에 흔쾌히 내주었다.


"아, 그이고······"


의외였다. 톰은 로이트의 부탁을 선뜻 들어주었다. 주방에 들어갈 시간을 알려주었고, 로이트는 그 틈을 타 샌드위치 재료 중 하나에 독을 발라두었다.

성공적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건 입에 머금으면서 남은 독이었다.


'회복해야만해.'


이제 졸업식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그 전에 회복하지 않는다면······!

똑똑-

노크 소리. 하스본은 결코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을 찾을 사람도 없었다. 그러면 엘키스를 찾아온 사람인가?

로이트는 혹시나 같은 기수였던 아이들을 볼까 싶어 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를 찾은 건 의외의 사람이었다.


"로이트야."


라호드. 잘 때를 제외하곤 창고 앞을 떠나지 않던 그가 로이트를 찾아왔다.


작가의말

도중에 설정 오류가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메실리아 열매에 독이 있는 게 아니라 씨에만 있는 겁니다! 중간에 하크가 열매를 먹고 목소리를 잃었다는 걸 씨까지 먹어서 그런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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