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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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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06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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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DUMMY

"기사는 홀로 우뚝 서는 존재가 아니다."




렘피룬트의 말이 시작됨과 동시에 모두가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짧은 검으로 보이는 막대기로 자신의 옆에 세워진 네모 반듯한 판을 툭툭 쳤다.




"알다시피 고블린을 포함하여 '집단'을 이루는 종이 존재한다. 그중 대표적인게 고블린일 뿐이지. 자, 그럼 다른 집단종엔 뭐가 있을까."


"코볼트입니다."


"실버팽입니다."




하나둘, 정석적인 답이 나오자 렘피룬트가 옅게 웃더니 고갤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고블린보다 우월한 종이 있다. 훨씬 결속력이 강하고, 뛰어나다. 각 개체의 힘은 별볼일 없지만 그 어느 종보다 위험하다."




모두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렘피룬트가 잠깐 뜸을 들였다가 말하였다.




"인간이다."


"엇."


"인간이……?"




모두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예상치 못한 답에 혼란스러워한 것이다.




"한 명의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아니, 다른 종이 가진 특성을 꺾을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오크의 타고난 투쟁심? 머맨의 수중 활동력? 코볼트의 땅굴? 페어리의 마법? 트롤의 생존력? 놀의 날렵한 다리? 그렘린의 수적 우세?"




렘피룬트는 고갤 저었다.




"인간이 가진 건 없다. 싸우고자 하는 마음과 무모함도 없고, 물 속에선 3누츠(분) 이상 버틸 수 없으며, 맨손으로 자기 허리까지 굴을 파기 위해 손을 버려야 한다. 마법도 수만 명 중 한 명 꼴로 간신히 깨치고 조금이라도 많은 피를 흘리면 목숨이 위태롭다. 빠르지도, 힘이 세지도 않고 번식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헌데…… 인간이 델브라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엘더 포레스트, 브라슐 사막, 멕스킨 산, 루데런의 바다…… 미지의 영역을 제외하고서라도 이 대륙에 행사권을 지니고 있다. 왜인가?"




그의 말을 듣고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게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물음대로 의문이 셈솟았다. 어떻게? 그리고 그 답은 렘피룬트가 곧장 말해주었다.




"아까 말한 '집단'에 해답이 있다. 혹시 이 중에 칼릭소 공작 각하의 저서, '기사론'을 읽은 이가 있나?"




유일하게 손을 든 건 큼지막한 안경을 쓴 네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지도 알겠군?"


"세 머리의 공식을 말씀하려는 것 아닙니까?"


"맞다."




렘피룬트의 답에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수근거렸다.




"세 머리?"


"앞발에도 머리가 달렸다는 헬하운드 말 하는 거지?"


"무슨 소리야 그게."




렘피룬트가 나무판을 막대로 치면서 주의를 끌었다.




"인간은 셋 이상일 때 최고의 힘을 발휘한다. 이것이 이 공식의 핵심이다. 주된 이론으론 공격과 방어, 마지막으로 지휘를 셋에게 분배함으로서 인간이 가진 본연의 힘을 끌어올릴 수 있단 소리지. 우리는 이걸 '트라이앵글 편제'라고 부른다. 아는 사람이 있나?"


"점이 되는 셋을 배치함으로서 '삼각형의 형태'로 이끄는 것을 얘기합니다. 대표적으로 기사와 그 옆에서 조언을 하거나 생각을 도와주는 보조기사, 잡일을 하며 기사가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게 해주는 종기사, 이 셋입니다. 이런 트라이앵글 편제를 갖지 못하고 보조기사나 종기사 중 하나가 없거나, 혹은 둘 다 없는 경우를 자유기사, 혹은 방랑기사라고 지칭합니다."




네보의 구체적이고 확실한 설명에 아이들이 감탄을 했고, 렘피룬트는 만족하여 고갤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이 맞다. 그리고 이 형태는 전쟁 시에도 발휘한다. 모든 것을 지휘하는 지휘자와 그 옆에서 지휘를 위한 전략 및 전술을 얹어주는 부관,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병사…… 이런 삼각 형태를 만들기도 하고, '보급대'에선 공급할 물자를 선정하는 이와 선정된 물자의 수량을 결정하는 이, 마지막으로 물자를 운반하는 이로 나뉘어 지원한다. 곳곳에서 이런 법칙이 통용되고 있고, 델브라에선 이걸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최소의 수로, 최대의 효율, 단독이 아닌 단체가 시작되는 시작점, 이것이 세 머리 공식이다."




막대 끝이 나무판 위를 춤추었다. 그러자 그 움직임을 따라 흰 궤적이 그려지면서 3개의 원을 그렸다. 이어서 그 앞엔 삼각형 하나를 그려졌다.





"하지만 무조건 셋 이상이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세 머리의 공식은 매우 현실적인 이론이기도 하나, 몹시 이상적인 가설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전히 제국에서 정식으로 이 말을 인정하고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번에도 네보가 손을 들었지만, 답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셋이 하나보다 못한 경우는, 셋 중 하나가 나머지 둘의 전력을 깎아먹을만큼 나약하거나, 그 셋이 심리적으로 단결되어있지 않는 불신의 상태에 있거나, 하나가…… 압도적으로 강한 경우입니다."





제트의 말에 렘피룬트가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도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시선이 제트에게 잠시 머물다가 다시 아이들에게로 옮겨졌다.





"제트의 말이 맞다. 이 공식이 무조건적으로 맞지 않는단 반증이지. 간혹 가다 벌어지는 수십 명 사이를 헤집고 무사히 살아난 기사나 홀로 적장의 목을 벤 장군의 얘기는 허황된 게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게 나다크의 아버지, 리호데 백작 각하이시지."





나다크가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갤 들었다. 그러다 다시 목을 축 늘어뜨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리호데 백작 각하는 왕궁에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고, 명망 높은 큐스머 후작가의 핏줄을 물려받으셨지. 헌데, 갑작스럽게 스스로 방랑기사가 되겠다며 종기사 하나를 데리고 가문을 나섰다."





자기가 생각해도 교육이 좀 지루하다 여겼는지, 어느 샌가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거리는 얘기를 시작했다. 리호데 백작이라면 포스티어 제국을 통일 제국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개국공신이자, 칼릭소 공작과 비하크마 대공과 더불어 검을 든 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기사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유명해진 이유는, 높은 관직을 거절하고 백작위에 머무르는 겸손함 뿐만 아니라 출중한 무위와 귀가 번쩍 뜨이는 무용담이 한 몫 했다. 그리고 렘피룬트가 풀어내는 이야기 역시 그중 하나였다.


때는 수십 년 전, 리호데 백작, 도스텔라가 기사 서임을 받고 3년이 지난 시기였다. 방랑기사가 되겠다고 선포한지 1년이 지날 무렵, 게름이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도적단이 나타났다. 이 때가 아무리 긴 전쟁으로 곳곳에서 싸움과 약탈이 벌어지는 시기라지만, 도적단이 벌인 참상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주변 마을은 물론, 그 땅의 영주에게도 알려졌지만 긴 전쟁으로 쇠약해진 그들이 내린 조치는 '방치'였다.


리호데 백작, 도스텔라는 분노했다. 피끓는 젊은이로서도, 기사도 정신을 깨우친 자로서도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종기사 도돈을 데리고 산적단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두령에게 일기토를 신청했다. 단독으로 극악무도한 산적들을 찾아가 그런 일을 벌이다니! 아이들은 그 뒷내용을 기대했으나, 이어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참패를 당하였다. 종기사 도돈은 한쪽 팔이 날아갔고, 리호데 백작 각하께선 흠씬 두들겨 맞았지. 그 상태로 삼일 밤낮을 말에 묶여 끌려다니고 버려졌다."




아이들의 표정이 무너져내렸다. 도스텔라는 포스티어가 델브라를 통일하기 이전부터, 각 영지의 기사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의 기사였다. 헌데 고작 산적들에게 두들겨 맞고 내쫓겼다니! 모두의 꿈이 박살나려던 찰나, 렘피룬트가 말하였다.




"그리고 그분께선 한 달. 한 달이란 시간을 도돈과 함께 수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 산적단을 찾아갔다. 결과가 궁금하나?"




이번엔?




"물론 패배하였다. 전보다 더 지독하게 두들겨 맞았지. 회복 불능의 상처까지 입고 내버려졌다."




회복 불능의 상처란 말에 나다크의 표정이 움찔 떨렸다. 그의 머릿 속에 자리잡은 아버지의 등이 떠올랐다.




"그리고 반 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이젠 아이들의 눈빛이 죽어갔다. 후세에 전설이라고 불려도 좋을 사람의 망가진 과거를 듣고 싶지 않았다. 렘피룬트는 그들의 기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산적단의 악명을 날로 드높아져갔고, 당연히 그만큼 세력도 불어나고 두령도 젊은 피로 바뀌었다. 다친 몸으로 험한 수련을 겪은 리호데 백작께선……"


"한 명 당 한 번씩."




렘피룬트가 말을 멈추었다.




"보이는 대로, 한 명에게 딱 한 번의 검격을 행사했고 산적단의 소굴에 입성한 지 3분 만에 스물에 달하는 산적을 베어넘겼다."




나다크의 나긋한 목소리는 아이들의 귀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최후에, 두령에게 도달하였을 때 그의 부하는 전부 리호데 백작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두령 홀로 그분과 결전을 벌였고…… 단 세 합만에 목을 베였다."




아이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왠지 모를 먹먹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세상은 그를 가리켜 무모하다 하지 않았다. 산적단에게 패배하였다고 헐뜯지 않았다. 다시 도전하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는 걸 어리석다 하지 않았다. 위험에 뛰어드는 걸 욕하지 않았다. 그저 세상은……"




뜸을 들인 나다크를 향해, 모두가 숨을 죽이며 바라봤다.




"그저 세상은 그를 '승리자'라고 불렀다. 죽기 직전까지의 수련, 한 길만 걷는 올곧음, 무모하기까지 한 도전 그리고 쟁취하는 그 모습을 보며…… 세상은 리호데 백작을 그렇게 불렀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땐 아이들은 가슴이 묵직해짐을 느꼈다. 그건 감동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거웠고, 격정이라기엔 잔잔했으며, 존경이라기엔 끈끈했다. 이 감정은 대체……? 나다크는 묘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보다가, 렘피룬트의 이어지는 말에 주의를 돌렸다.




"잘 말해주었다, 나다크. 녀석의 말대로 리호데 백작 각하께선 홀로 수십에 달하는 산적단을 궤멸했다. 그리고 그 공적과 기개를 높이 사, 전 왕께선 그에게 남작의 작위를 하사하려 하셨지. 허나 그는 그 직위를 거절하였다. 그저 자신이 부족하단 이유로 직위를 거절하고 수행에 나섰다. 방랑기사 델트포스 경, 용병군주 르티마, 현상금사냥꾼 윌러 벡스…… 검을 들었다는 이들이라면 빠짐없이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리고 포스티어 제국이 통일전쟁을 벌이던 그때, 홀연히 나타나 수십, 수백에 달하는 적군을 쓰러뜨리고 당당히 개국공신이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남겼다."




리호데 백작의 일대기는 아이들에게 몹시 큰 충격이었다. 편한 귀족 자리를 마다하고 고된 길을 택한 기사 중의 기사, 검을 든 이라면 누구든 동경할만한 가치가 있는 자, 그야말로 진짜 기사가 아닐까.




"그리고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리고 지금도, '세 머리의 공식'의 예외사항으로 항상 언급되지. 뿐만 아니라 기사도란 어떤 것인지, 정신 시험의 마지막 관문인 '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될 때도 예시로 나올 정도로 그는 '정석'이라고 부를만한 사나이다."




렘피룬트는 이어서 몇 마디의 교육만 더 하고, 자유로운 수련법을 제안했다. 정신 시험은 기사로서의 마음가짐을 단련하는 교육인만큼, 육체적인 수련에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겠다고 하였다.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나다크를 새로운 시선을 보았다. 이전에도 여유로운 강자의 여유가 있었지만, 리호데 백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나니 그 경외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런 대단한 분의 아드님이라니, 모두의 눈에 담긴 호기심과 존경에 나다크의 골머리만 썩어갔다.




"너밖에 없다."


"응?"




나다크가 대뜸, 목에 팔을 걸자 네보가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렸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바라보는 네보의 이마를 툭 때린 나다크가 그를 끌고 자신만의 장소로 향했다.






















크르릉-


낮은 울음 소리. 작게 일렁이는 등잔불들만이 보이는 새까만 공간에, 로이트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털 끝만치의 기대감, 혹시나 했던 그 마음은 이제 티끌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 역시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힘이 있으면서, 그렇게 해줄 힘이 있으면서 왜 자신을 외면했을까? 그 생각이 점점 질척하게 번져 그의 몸뚱이를 잡아먹었다.


고갤 슬쩍 든 로이트의 눈에 으르렁거리는 카나르의 모습이 보였다. 예전보다 많이 컸다. 날카롭진 않아도 이빨도 빽빽히 났고, 발톱은 날카롭게 구부러져서 바닥을 긁었다. 울음 소리도 이젠 개라고 보기엔 이상할 정도로 굵직했다.


완벽함 적대. 꼬리를 빳빳이 세우며 붉은빛이 감도는 검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로이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카나르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아무리 녀석이 성장하고 겉보기엔 별 문제가 없어 보여도, 로이트의 무자비한 주먹질로 다친 몸은 다 낫지 않았다.


타박-


로이트의 헤진 구둣발 소리가 창고를 울렸다. 카나르는 점점 다가오는 로이트의 발걸음에 귀와 꼬리를 늘어뜨렸다. 기선제압. 이미 한 번의 폭력을 겪은 카나르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약자임을 인정했다. 그래서 로이트가 코앞까지 다가오고, 검무더기에서 삐죽 나온 것에 궁둥이를 찔릴 때까지 뒤로 밀려나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




"카나르."




카나르의 두 눈에 맺혀있는 건 괴물이었다. 희미한 등잔불빛을 등지고 서있는 무시무시한 괴물. 본능을 자극하는 공포를 흘리는 포식자. 압도적인 강자. 폭력을 거리낌 없이 벌일 수 있는 짐승. 덜덜 떨리는 은색의 털가죽을, 로이트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잡아눌렀다.


낑-!




"카나르?"




로이트는 계속 해서 녀석의 이름만을 불렀다. 정말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건지, 흔들리는 눈은 카나르를 내려다보면서 그 어떤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자, 카나르…… 카나르……! 카나르!! 이름을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지!!"




카나르의 몸이 힘없이 들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바닥에 내리치……


끄응…… 끙……




"하크?"




로이트의 우직한 팔을 붙든 건, 검은 머리의 소년 하크였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카나르는 다시 한 번 피떡이 되었을 것이다. 로이트는 그제서야 흐려진 눈빛으로 자신의 손에 붙들려 덜덜 떠는 작은 생명을 인지했다.


하크는 한 손으로 로이트의 팔뚝을 잡고서, 다른 손으로 그의 뒷목에 손가락을 놀렸다.




[말로 해]


"말로……?"


[그래 충분히 말로 어르고 달랠 수도 있는 거잖아. 이렇게 두들겨 팬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로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고갤 끄덕였고, 하크는 손을 놓았다. 로이트의 두 손이 조심스레 카나르를 안아들었다. 꼬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녀석이 로이트를 바라보았다.




"카, 카나르…… 미안해……"




그 말을 하며, 로이트는 카나르를 꽉 안아주었다. 위협적인 기세가 확 사라지자, 카나르도 뒤늦게 자신을 거둬주고 보살펴준 로이트를 알아보았다. 축축한 코를 벌름거리며 로이트의 뺨에 대더니, 할짝할짝 혀를 놀렸다. 찝찔한 눈물이 섞여들어도, 카나르는 계속 로이트의 뺨을 핥아댔다. 하크는 이 모습을 보다가, 둘만 남겨두고 창고 밖으로 나섰다.



























​"소드윙 나이츠 2단 소속, 펠곤 리트렛 보고드립니다."




이번엔 갈로스가 아닌, 그의 밑에 있는 기사 펠곤이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수정구를 만지는 마법사 역시 ​기사단 직속 마법사 엘번이 아닌, 급하게 구한 통신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그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래."


"​경위를 먼저 설명해드리자면, 로이트란 이름의 아이를 가진 집을 검색하였고 그곳에서 나이를 선별하였습니다. 그렇게 선출된 열다섯 가구를 찾아본 결과, 다섯 가구는 아직 그곳에 있었고 세 가구는 실종, 두 가구는 여아였습니다. 나머지 다섯 곳을 뒤져보니 세 곳은 인상착의와 완전히 달랐고, 남은 두 곳은 집이 비어있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였다. 로이트가 제국에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이거나, 그의 가족이 전부 죽었거나. 펠곤은 헐떡이는 마법사를 위해 잠시 지체하였다가 말하였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비어있는 두 가구를 집중적으로 수색했고, 한 곳에서 로이트란 이름의 아이가 4년 전 쯤에 아카데미에 입교하기 위해 떠났었단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소문 하며 정보를 캐냈는데…… 어미는 병들어 죽고 전염병이 돌 우려 때문에 불에 태웠고, 아비는 실종되었답니다."




보고가 끝나고, 수정구는 대기 상태를 뜻하는 깜빡거림만을 보였다. 그리고 제법 시간이 흐른 후, 수정구에서 답이 왔다.




"​이 근처를 찾아봐."




펠곤은 말을 기다렸다.




"녀석의 아버지가 이곳에 들렀단 소리가 있었어. 그리고 소동을 부렸단 소리도 있었고, 아마 아카데미 주변이면 찾을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수정구가 꺼지고 펠곤은 마법사에게 고갤 돌렸다. 그리곤 검지를 입에 세우며 바라보았고, 마법사는 진땀을 흘리며 고갤 끄덕였다.


​​​


"비밀을 지킬 거라 생각하오. 우리가 그들에게 겁을 먹을 필요도 없지만, 괜히 알려질 필요도 없지 않겠소?"


"도, 돈은……?"


"내 정체를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그곳에 가서 요금을 청구하시오. 아시겠소? 이 일은 함구하시오. 전쟁과 명예를 위해서가 아닌 일로 검에 피를 묻히고 싶진 않소."




그 유명한 귀족 가문의, 이름난 기사단이니 결코 사기는 아닐 것이다. 마법사는 그러겠노라 약조하고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포스티어 제국을 대표하는 검은 총 셋이다. 명실공히 황제 폐하를 제외한 포스티어 제국의 1인자 비하크마 대공, 검과 전투 지휘 능력만 본다면 대공 각하와 비등하다 할 수 있는 칼릭소 공작, 마지막으로 수많은 기사의 우상이자 단독 전투능력은 최고라 할 수 있는 리호데 백작."




세 개의 세력도를 표시한 나무판 위로, 예의 그 막대기가 툭툭 맨 위의 그림을 두드렸다.




"비하크마 대공 각하의 로열블루 나이츠는 '매너톤'이란 청색 금속으로 제련한 장비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 총 다섯 개의 단으로 나뉘어진 로열블루는 황제 폐하께서 유일하게 '로열'이란 이름을 허락했을만큼 정예 중의 정예들만 모여있는 곳이다. 아마 황실 기사단보다 이곳에 드는 게 훨씬 힘들 거야."




렘피룬트는 로열블루란 이름을 적어놓고 다음 세력도를 두드렸다.




"유일하게 색으로 구분되는 대공 각하의 기사단과는 달리 나머지 두 기사단은 표식으로만 구분된다. 그 이유는 이들이 전부 제국에서 정한 기준 양식의 장비를 착용하기 때문이다. 칼릭소 공작 각하의 기사단, 키메라헌터. 이분들 역시 조금의 꾸밈없이 기본적인 장비만을 고집한다. 키메라헌터는 교차된 검 위로 사자가 그려져있는 문양을 사용하는데, 이는 칼릭소 공작 가문의 문양인 산양과 몹시 대비된다.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나?"




렘피룬트는 이 말을 하며 네보를 힐긋 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주저없이 훌륭한 답을 내놓았다.




"키메라헌터는 통일 전쟁 당시, 변절자 기모스의 호문쿨루스들에게 희생된 알터 기사단을 기리며 만든 기사단입니다. 본래 목적은 강한 힘과 쉽게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가진 호문쿨루스를 상대하기 위함이었으나, 언제부턴가 가장 선두에서 적병을 베는 흉성의 검사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모든 기사단에게 부여되는 '나이츠'란 이름이 제외되어 키메라헌터란 이름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그래. 그리고 칼릭소 공작 각하께선 이 악명을 지우기 위해 그 당시 썼던 톱날검과 가시갑옷, 송곳장갑을 버리고 제국 기본 장비를 고집하게 되었지. 로열블루 나이츠는 고고하고, 단단한 고목과도 같다면 키메라헌터는 이리저리 베이고 꺾여있는 나무와도 같다. 그리고 그만큼 키메라헌터의 검술은 거칠고, 강인하지. 실제로 훈련도 기사단 중 최악이라고 하더군."




키메라헌터란 이름을 적어놓고 마지막 세력도를 가리켰다.




"이제 남은 건 리호데 백작 각하의 소드윙 나이츠다. 가드 부분이 매의 날개로 되어있는 검이 이 기사단의 문양인데, 특이한 점을 꼽자면 온갖 병장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단 것이다. 병사들이 사용하는 창이나 활 뿐만 아니라 공성병기의 원리, 폭약에 대한 이해, 마법의 상성 관계 등, 전투 쪽에 대해서라면 키메라헌터보다 뛰어나다고 볼 수 있는 곳이 소드윙 나이츠다."




소드윙이란 이름이 쓰여지고 그는 막대를 늘어뜨렸다.




"이런 세력을 설명한 이유는 기사가 되면 제국에 일조한다는 암묵적인 서약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가 교육을 받고 검을 들고서 기사란 이름을 쓸 수 있는 건 제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서약은 방금 언급한 세 기사단에도 적용된다. 예외란 없지. 그러니 기사가 되기 이전에 제국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세력도를 설명해준 것이다."




아이들은 여전히 멀뚱한 표정이다. 그의 말에 수긍을 하는 건 네보나 피블론같은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는 아이나 제트나 나다크같은 이 사회를 직시한 아이들 뿐이었다.




"너희가 기사가 된다면 이 세 기사단 출신의 기사는 까마득한 선배가 된다. 그것도 쉽게 말조차 걸 수 없는 그런 선배가 되는 거지. 너희는 이 아카데미에 온 순간부터 '기사지망생'이었고, 이분들의 '후배'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위계질서'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마을이 있으면 촌장이 있고, 무리가 있다면 대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직접 경험하지 않는 한 모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말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정해지고 있었고, 간파하고 있으니까.




"자, 설명을 마무리 하지. 기사단은 방금 언급한 세 기사단 외에도 수많은 기사단이 존재한다. 제국 황실 기사단 로열골드 나이츠, 라르카 백작의 기사단 포츈 나이츠, 하이크라 후작의 기사단 우드실드 나이츠 등…… 사실 제국의 귀족을 전부 파악한다면 기사단 역시 파악이 가능하지만 너희에겐 그것이 무리일테니, 세 기사단만 이해하여도 너희는 반은 성공한 것이다."




이번 수업은 여기까지란 말과 함께 아이들은 저마다 뭉쳐져 흩어졌다. 늘 그랬듯, 로이트는 홀로 주변을 서성이다가 일을 하기 위해 사라졌고, 아이들은 로이트를 힐긋거리며 수근거렸다.


물론 리든도 그중 하나였다. 그의 착 가라앉은 눈은 로이트의 뒷모습을 깊이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돼지처럼 멱따는 소리를 내는 펠빅의 뒤를 따랐다.



























공터에 앉아 검을 닦는 로이트의 뒤로 그림자가 일렁였다. 로이트는 자신을 괴롭히려는 아이가 왔다고 생각하며 말없이 고갤 돌렸다. 근데 의외의 사람이 서있었다.


윤기가 없이, 색이 죽은듯한 금발. 지루하게 내려다보는 졸린 눈. 나다크였다.




"뭐해."




얼떨결에 이상한 소리로 답했지만, 자기가 말해놓고도 무슨 소린지 기억을 못했다. 로이트는 옆에 풀썩 주저앉는 나다크를 애써 무시하며 검을 닦았다. 메마른 헝겊의 감촉과 차가운 검의 촉감이 느껴졌지만 온 신경이 나다크에게 쏠려 있어서 느끼지도 못했다.




"검 닦는거지. 그래, 나도 알아."




나다크는 혼자 묻고 혼자 답하며, 말을 이어갔다.




"너, 노예학생이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된 녀석이 이런 걸 알다니, 귀족은 뭔가 달라도 다르단 건가? 로이트는 입술을 꽉 물며 검을 닦았다. 슥슥거리는 마찰음이 위협적으로 들렸지만, 나다크는 그런 걸 신경쓰지 않고 머릴 뒤로 젖히며 말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진 모르지만, 매우 부당하게 그런 처지에 놓인 거 알아. 생각 이상으로 강골인데도 아카데미에서 발탁하지도 않고 억누르고만 있으니, 아무리 멍청한 검잡이라도 눈치채겠지."




이제껏 그가 아카데미에서 한 말 중에서 가장 길 것이다. 그리고 1학년 전반부를 통틀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많은 말을 했을 것이다.


로이트는 관심이 없어보였지만, 나다크는 앞머리를 꼬면서도 검을 닦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고 있었다.




"그때 말했지? 사람 안 친게 용하다고. 넌 지금도 인내심을 갖고 버티고 있어. 그런 면에서 정신력도 굉장하지. 내가 아카데미의 교관이었다면 몰래 빼내서 교육하는 한이 있더라도 널 키울 거야. 렘피룬트 그 자 처럼……"




렘피룬트란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헝겊은 피로 축축히 물들었다. 헝겊으로 덮은 검날을 손으로 꽉 쥐면서 쓸었던 탓이다.


나다크는 조심스러웠다. 늘 태평하고 한가해보이는 겉과는 달리 속은 언제나 능청스럽고, 기민했다. 언제나 두 수 앞을 내다보며 일을 처리했고, 온 신경을 기울였다. 그리고 나다크는 자신의 검술 스승 도돈 파츠의 가르침을 받을 때보다, 리호데 백작에게서 가업을 배울 때보다 훨씬 긴장하고 있었다.


왜? 이유는 모르겠다. 로이트가 자신보다 앞서는 게 뭐가 있을까. 뒷배경? 돈? 지식? 경험? 외견? 대체 뭐가 그를 짓누르고 있는 걸까. 나다크는 그런 고뇌를 하며 로이트의 반응을 살폈다.


상대는 귀족이라면 치를 떨만한 짓을 수없이 당했다. 라르카 백작의 부당한 처사를 떠나, 귀족에 대해 알랑방귀나 끼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 방계 귀족을 포함한 아이들의 악행, 마지막으로 눈곱만큼 남아있던 기대감을 박살난 제트의 대답……. 만일 여기서 나다크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로이트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택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나다크는 인재를 놓친 아쉬움과 후회에 몇 년 간은 마음 고생을 하겠지.




"아무튼 내가 너에게 알려줄 정보가 하나 있고, 이 정보에 대한 풀이까지 들을 거라면 계속 앉아있어."




그리곤 고개를 슥 꺾으며 로이트를 응시하였다. 로이트도 시선을 느꼈는지 힐긋, 눈을 돌렸다.




"잘 들어."




로이트는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뭔가 잘못 되었단 생각부터 들었다. 그저 귀족 출신이어서 반항심을 갖고 귀를 막고 있었건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대답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의 마음의 준비를, 아주 약간의 추측이라도 하고 말을 들으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다크는 대답도 하지 않고 말하였다.




"네 아버지는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고……"




입이 달싹인다. 그러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긴장으로 목이 막힌 것이다. 몸도 딱딱히 굳어서 내 몸같지가 않았다. 나다크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은 진실이 의외의 곳에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안 돼…… 하지마!




"그 후에 이 근처를 떠돌다…… 죽었어."


작가의말

거의.. 전환점 쯤 되는 얘기입니다. 초반.. 그러니까 렘피룬트 살인사건이 일어나기까진 계속 과거 이야기만 나올 겁니다. 다소 지루하고 재미 없겠지만.. .... 파이팅?

그리고 연재 속도도 최대한 박차를 가해보겠습니다. 스릉흡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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