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맞다이로 들어와!(4)
향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초중전차!
크디크고크디큰 왕전차였다.
“향아. 지금 한번에 데울 수 있는 도가니의 수가 몇이냐?”
세종이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다섯 개 정도이옵니다.”
세종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밖에 안 된다고?”
“대장간에서 여러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보니 당장 쓸 수 있는 인력에 한계가 있사옵니다. 그리고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이상은 만들 수가 없사옵니다.”
“왜 그런 것이냐.”
“철광석과 역청탄이 너무 모자라옵니다. 충분한 양의 재료가 확보돼야 제대로 강철을 생산할 수 있사옵니다.”
“흐음.. 재료가 충분하다면 도가니를 하루에 몇개나, 그리고 몇번이나 운용할 수 있겠느냐.”
“재료가 충분하다면 지금 인력으로는 도가니 20개를 하루 3번 운용할 수 있사옵니다.”
“하루에 중갑 60벌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구나.”
“예. 1년이면 21,900벌이지요.”
“중앙군인 삼군의 정병들이 모두 중갑으로 무장하는데 한해면 되겠구나.”
“예, 하오나 소자는 이것도 모자르다 생각하옵니다.”
“모자르다?”
세종은 향의 선언에 깜짝 놀랐다. 수만 대병을 한 해만에 완전무장시킬 수 있는 기술을 얻었으면서 어찌 부족하다고 말한다는 말인가.
“예. 소자가 만들 새로운 기물들에도 강철이 필요하다는 걸 생각하면 적어도 하루에 도가니 100개는 운용할 수 있어야 하옵니다.”
“100개나. 어떤 기물들을 만들기에 강철이 그리 많이 필요한 것이냐.”
세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향이 만든 기물들은 대다수가 연철이나 선철로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기물들이었다.
“군국의 일에 쓰기에도 빠듯한 강철을 써야 한다니.. 네가 무기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기물이라면 그 쓰임새가 정말 대단할 것 같구나.”
“그렇사옵니다. 그에 대해서는 차차 말씀드리겠사옵니다.”
세종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긴 대화를 나눌 상황은 아니구나.”
“예, 미래보다는 화급을 다투는 일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맞다 사료되옵니다.”
“그리 급한 일이 있느냐.”
“철광석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공철제를 완전히 혁파하고, 약조하신 대로 모련위를 정벌하소서.”
세종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그래, 둘 다 해야 할 일이지. 헌데 말하지 않은 일이 하나 더 있구나.”
세종이 고개를 돌려 신하들 사이에 있는 최문손을 바라봤다.
“좌정언 최문손은 이리로 오라.”
‘올 것이 왔구나.’
최문손이 눈을 질끈 감고 세종의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세자가 강철 생산에 필요한 핵심 재료를 구하지 못해 강철을 뽑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내심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세자가 치기 어린 말로 허세를 부리다가 결국 밑천을 드러내는구나!’
하지만 오늘 현장에서 세자가 강철을 뽑는 모습을 보고 최문손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세자는 객기(客氣)로 떠들어댄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실리를 따져 이야기했다. 범의 아가리에 들어갔으면서 그것도 모르고 천방지축 날뛴 것은 오히려 나였구나!’
최문손이 참담한 심정을 감추며 세종의 앞에 섰다.
“좌정언 최문손은 나와 수많은 신료 앞에서 세자가 강철을 생산한다면 직을 내려놓겠다 선언했다. 이를 기억하는가.”
최문손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기억..하옵니다.”
세종이 근엄한 얼굴로 준엄하게 선고했다.
“좌정언 최문손을 파직하고 다시는 조정에 출사하지 못하도록 한다. 허나 죄를 짓지는 아니하였으니 따로 벌을 내리지는 않겠다.”
최문손이 고개를 푹 떨군 채 부들부들 떨었다.
막상 선고를 들으니까 너무 억울했다.
‘세자의 난행을 꾸짖었다고 파직이라니 억울하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불의에 저항하다가 어쩔 수 없이 물러난 참선비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 재야(在野)로 물러나더라도 선비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빈한하나마 생활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반드시 이 치욕을 갚으리라!’
최문손이 이를 앙다문 채 사모를 벗어 조용히 내려놓곤, 세종을 향해 엎드렸다.
“불민(不敏)한 신하가 성심을 흔들어 성상께 누를 끼쳤음에도 치죄하지 않으시고 다만 사직을 허락하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사모를 내려놓은 최문손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수백의 신료들이 그가 떠나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봤다.
향이 그런 최문손을 보며 쿡쿡 웃었다.
‘후후.. 유교꼰대 처리했다!’
최문손이 완전히 사라지자 세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강철을 쇳물로 뽑아낼 수 있게 됐으니 이는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다. 허나, 제아무리 길일이라 할지라도 국무를 손에서 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당하관 이하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직무를 보고 당상관 이상은 편전으로 모여 공철제를 혁파하는 것과 두문(豆門), 벌시온(伐時溫)을 아우를 도호부를 세우는 것에 대해 논하겠다.”
대신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향도 마찬가지였다.
‘아바마마가 칼을 제대로 빼드셨구나!’
모련위를 모련위가 아니라 원래 지명인 두문과 벌시온으로 불렀다는 건 모련위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
모련위에 한해서는 명을 아예 무시해버리겠다는 세종의 각오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웅크리고 있던 조선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
“그거 들었나. 이제 철광에서 부역을 하지 않아도 된다네.”
개돌이는 갑작스레 들린 희소식에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부역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개돌이 사는 마을은 10리 너머에 질 좋은 철광석이 나오는 광산이 있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개돌의 마을 사람들은 철 때문에 고통받았다.
그의 아버지 때까지는 철을 직접 바쳐야 했다.
철을 캘 수 있는 사람은 철을 캐다 바쳤지만, 그럴 여유가 안 되는 사람은 웃돈을 주고 철을 사서 바쳐야 했기에 흉작이라도 들면 철값을 대느라 배를 곯아야 했다.
다행히 나라님이 바뀌면서 철장도회라는 걸 만들어 공납을 없애주었기에 살림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철장도회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농사일이 없는 농한기마다 먼 길을 걸어 철을 캐는 부역을 하러 가야 했기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부역이 없어진다니.
개돌은 오히려 불안감을 느꼈다.
“혹시 다시 공납을 하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이 사람아. 그럼 내가 이리 헤벌쭉 웃고 있겠나! 나라님 원망이나 하고 있었겠지.”
“그럼 부역이 그냥 없어진다고? 어떻게..?”
“세자께서 나라님에게 청원해 철광에 유민들을 그러모아서 품삯을 주고 일을 시키기로 했다네. 그래서 부역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럼 쇳값이 올라가지 않나?”
“무슨 상관인가! 우리야 부역만 안 하면 만사형통이지.”
“그건 그러네 그려. 그나저나 자네는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나?”
“철광에서 나온 유민에게 직접 들었네. 그치가 말하길 처음엔 철광에 잡아 가두길래 부역만 시키다 죽이려나 보다 했다네. 그런데 하루 먹을 곡식보다 많은 곡식을 품삯으로 내어줬다지 뭔가. 그래서 남는 곡식으로 면포라도 얻을까 해서 우리 마을에 교환하러 왔다더군.”
“유민이라며. 추쇄(推刷)한 사람이 이리저리 오가게 그냥 둔다는 말인가.”
“이 사람아. 밥도 잘 줘, 옷감 살 품삯도 줘, 집도 있어. 부족한 게 없는데 도망을 왜 가겠나? 관군들도 그걸 아니 그냥 오가게 놔두는 게지.”
“..”
친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개돌이 생각에 잠겼다.
“뭐야, 갑자기 왜 조용해지는 감?”
“그게.. 자네 말이 맞으면 농사일을 쉴 때 나도 쇠를 캐러 갈 수 있을까 했지.”
개돌의 친구가 기겁했다.
“그게 무슨 말인감?! 겨우 쇠 캐는 일에서 벗어났는데 거길 왜 가!”
“품삯을 준다며. 유민들에게도 품삯을 그리 후하게 주는데 평생 쇠를 캐던 우리에게 품삯을 안 줄 리가 있나. 품삯만 주면 가서 열심히 캐야지!”
기겁하던 친구가 개돌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
“그건.. 자네 말이 맞구만. 지금 바로 촌장님께 가서 물어보세.”
“그러자고!”
개돌은 밝은 표정으로 친구와 함께 촌장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분 좋은 생각 덕이었다.
‘임금이 바뀔 때마다 살기가 좋아지는구나. 앞으로는 또 얼마나 좋아지려나!’
개돌만이 아니었다.
가깝게는 개돌의 마을 주민부터 멀게는 조선 땅 곳곳의 철장도회에서 향과 세종을 칭송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초중전차를 얻기 위해 향이 벌인 여러 소동이 빠르고 확실하게 조선을 바꾸기 시작했다.
******
“이겼다!”
향은 최문손을 물리친 것이 너무 기뻤다.
마음에 안드는 상대를 쫓아냈다는 일차원적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최문손이 마음에 안 들기는 했다.
하지만 향이 고작 그것 때문에 한 사람의 밥줄을 끊을 정도로 몰상식하고 치졸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향은 최문손과의 내기를 강행했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향에게 최문손과의 대결은 정치적 생사결이었다.
그리고 향의 상대는 최문손 개인이 아니라 최문손으로 대표되는 대간들이었다.
대간들은 향이 벌이는 여러 사업을 ‘난행’이라는 명목으로 향을 옭아매길 원했다.
향이 머리에 총통을 쏘고 최해산에게 똥을 먹이지 않았더라도 대간들은 향이 하는 일을 난행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하들은 신권의 향상을 원한다.
절대군주가 내리는 지시를 고분고분히 수행하고 싶은 신하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임금을 움직여 자기 뜻대로 국정이 흐를 수 있게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왕인 세종을 상대로 이를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임금을 쥐고 흔들 수 있던 세종의 치세 초반, 세종의 뒤에는 철혈군주 태종이 있었다.
태종은 강상인의 옥으로 세종의 치세에 방해가 될 것 같은 신하들을 숙청하며 신권이 왕권을 넘보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태종이 죽은 뒤에는 세종의 치세가 이미 자리 잡았다.
게다가 세종은 괴물이었다.
걸어 다니는 유교 경전인 임금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전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그런가? 그럼 경연에서 한번 자세히 논의..
-저,전하의 분부가 옳은 것 같사옵니다!
-아니 그래도 경연을 해야..
-히, 히익!
그런데 향은 상황이 달랐다.
젊은 세종이 향을 싸고돌아 함부로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철벽인 세종에 비하면 공략 난이도가 낮았다.
그래서 신하들은 향을 길들이기 위해 매의 눈으로 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신권의 상징인 대간들이 있었다.
대간들은 세자를 옳은 길로 이끌기 위해 바른말을 한다는 명목으로 향의 삶을 이리저리 쥐고 흔들 생각뿐이었다.
향은 그 사실을 빙의한 후 1년 동안 절절히 느꼈다.
향이 무언가 하려 하면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대간들이 반응했다.
현대인 대식의 기억을 가진 향에게는 정말 숨막히고, 답답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향은 세종이 가진 단 하나의 결점을 알게 됐다.
‘아바마마의 후계 교육은 글러 먹었다!’
세종은 유학적으로 완벽한 군주였다.
본인 스스로가 최고의 유학자였으며,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조율해 최선의 결과를 내는 인군(仁君)이었다.
왕권은 반석에 섰고, 강력하고 바른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가 빠르게 발전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세종이 자신의 후대 역시 자신처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점이다.
세종은 향을 엄히 훈육해 유학적으로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려 했다.
똑똑하고 착한 원래의 향은 세종의 바람대로 열심히 유학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대식과 하나가 된 이후, 향은 자신이 하는 공부에 의문을 품게 됐다.
‘인성교육 좋고, 민본도 좋다 이거야. 그런데 그러자고 하루 절반을 유학 토론에 태워? 이게 맞냐!’
향은 유학으로 세종을 흉내 낼 수 있을지언정 세종 이상이 될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훗날 태어날 향의 자식과 그 후손들도 같으리라.
유학은 나라를 발전시키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군왕을 얽매고 나라의 발전을 저해하는 암 덩어리가 될 게 뻔했다.
‘상복을 얼마나 입을지나 무덤을 어디에 지을지 따위를 두고 병신같은 입씨름이나 하다가 나라를 말아먹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대간들과 유학 놀음이나 하다간 초중전차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마차 하나 만들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향은 판을 뒤집기로 결심했다.
대간들이 어린 향을 한 수 아래로 얕잡아보고 있을 사이에 빠르고 급진적인 개혁으로 기선을 제압하려 한 것이다.
그를 위해 향은 대장간을 차렸고, 세종을 설득했으며, 대간과 충돌해 결국 이겼다.
그 결과, 최문손의 낙향을 계기로 향이 벌이는 일들은 ‘난행’이 아니라 ‘국가 발전을 위한 사업’으로 바뀌었다.
향이 세종조차 뒷배가 되지 못할 막장 짓을 하지 않는 이상에야 대간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향의 사업을 공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향은 그 사실이 너무 기뻤다.
“후후.. 이제야 뭘 좀 해볼 수 있겠군.”
초중전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조선은 아주아주 많이 발전해야 했다.
그리고 그 발전들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그리 뒤바꿀 것이었다.
‘대개혁.’
향이 앞으로 할 일이었다.
‘가장 처음은 할 일은 정해졌어.’
조선이라는 나라의 뼈대를 새로 잡을 첫 번째 개혁.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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