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강철이 복사가 된다니까!(2)
“조선의 미래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하루 5만 근.”
“?”
“모련위를 정벌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하루 5만 근의 선철을 한 가마에서 뽑아낼 수 있사옵니다.”
“선철이라 함은 무쇠를 이름이냐?”
향이 단호한 얼굴로 끄덕였다.
“예.”
세종이 깜짝 놀라 눈썹을 꿈틀거렸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5만 근이라니,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그려.”
“다른 이가 말했다면 허황된 이야기라 치부했겠으나, 세자 저하께서는 연철로를 만드신 분이 아닙니까. 무언가 방법이 있으신 것일까요?”
영의정 류정현이 병조판서 조말생을 다그쳤다.
“이보시오 병판. 세자 저하께 언질 받으신 게 있소?”
조말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언질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저하의 말씀을 듣고 이야기하시지요.”
두 사람의 대화를 주시하던 신하들이 고개를 주억이며 향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말 하루 5만 근의 무쇠를 한 가마에서 뽑아낼 수 있다는 말이냐. 대체 어떻게?”
“아바마마도 아시다시피 무쇠는 무질부리가마에 판장쇠와 잡철을 섞어 만드옵니다. 강철에 비해 손이 덜 가는 것이지 만만치 않은 공력이 들지요.”
무쇠, 즉 선철(銑鐵)은 가마에서 철이 완전히 완전히 녹아 쇳물 상태로 뽑혀 나온다.
이 쇳물은 탄소함유량이 4% 이상으로 틀에 넣고 굳혀도 기포가 생기지 않아 주조(鑄造)에 적합하다.
한마디로 쇳물과 틀만 있다면 철물(鐵物)이 복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쇠를 완전히 녹이는 것은 상당한 고온이 필요하므로 선철을 뽑아내는 기술은 상당히 고도의 기술이다.
15세기 전반을 기준으로, 유럽에서 선철을 뽑는 기술은 도입된지 1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나름 최신(?)기술일 정도였다.
15세기의 과학 강국인 조선쯤이나 되니 무쇠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기술이다 보니 조선식 선철 생산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쇠를 완전히 녹일 정도로 높은 고온을 만드는 것에는 실패해 철광석을 곧바로 선철로 만들지 못했다.
그럼 어떻게 쇳물을 뽑냐.
고철과 판장쇠라는 것을 넣어 녹는 점을 낮췄다.
탄소가 풍부하고 일부 환원된 잡철의 녹는 점이 순수한 철보다 낮으므로 쇳물이 생기는 원리인데..
그냥 쇳물을 만들려면 원재료로 판장쇠와 고철이 필요하다는 것만 알면 된다.
판장쇠는 철광석을 녹여 만든 판 모양의 쇳덩어리를 일컫는다.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쇠부리 가마에서 쇠를 녹여 잡쇠덩이를 만들고 이물을 제거하는 등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아무튼 오지게 귀찮고 힘이 많이 든다.
강철보다 낫다 뿐이지 생산량이 형편없는 건 매한가지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루에 5만 근의 선철을 뽑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세종을 비롯한 신하들이 놀랄 수밖에.
향의 폭탄선언에 잠시 당혹해하던 세종이 정신을 가다듬고 물었다.
“네가 무쇠, 아니 선철을 만들 방도가 있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그것이 모련위의 정벌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모련위에서는 역청탄(瀝靑炭)이 나옵니다.”
“역청탄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구나.”
“예. 새로 발견한 석탄의 특성을 보고 이름 지은 것이옵니다.”
“기존의 석탄과 무엇이 다르냐.”
“석탄은 크게 셋이 있사옵니다. 첫째는 무연탄(無煙炭)으로, 화력이 좋고 연기가 나지 않지만 쇠를 녹이기에는 부족함이 있사옵니다. 그리고 둘째인 갈탄(褐炭)은 습기가 많아 탁 트인 공간에서 불을 땔 때나 쓸만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무연탄과 갈탄의 중간이라, 아주 신묘한 특성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세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향이 정리한 석탄의 구분은 중국의 서적에도 적혀 있지 않은 내용이었기에 세종이라 할지라도 단박에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이 동한 세종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신묘하다? 무엇이 신묘하다는 것이냐.”
“역청탄은 나무를 건류하면 역청이 나오듯이 건류했을 때 역청을 뽑을 수 있사옵니다.”
“오, 그것만으로도 쓸모가 있구나. 역청은 항시 쓸모가 있는 물건이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그게 선철을 만드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건류한 역청탄은 구멍이 숭숭 뚫린 회색 덩어리가 되옵니다. 소자는 이를 골탄(骨炭)이라 부르옵니다. 이 골탄은 역청을 바른 숯이나 무연탄보다 화력이 훨씬 세지요.”
향이 이야기한 골탄은 코크스(Coke)로 코카콜라의 원료.. 는 아니고, 현대 철강산업의 핵심 소재다.
오직 코크스만이 쇠를 녹일 화력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가성비 좋은 연료이기 때문이다.
세종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럼 네 말은 건류한 역청탄을 쓰면 철광석을 단번에 무쇠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냐?”
“예. 역청탄과 철광석만 충분하다면 단 하나의 가마에서 쉬지않고 쇳물을 뽑아낼 수 있사옵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강철도 대량으로 뽑아낼 수 있게 되옵니다.”
세종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강철, 지금 강철을 뽑아낼 수 있다고 하였느냐?!”
세종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강철.
정철 또는 참쇠라고도 하는 강철은 질기면서 단단해 쉬이 구부러지지도, 깨지지도 않는다.
사람이 쓰기에 가장 좋은 철이 강철인 것이다.
하지만 조선에서 강철의 생산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쇠부리 가마에서 잡쇠덩이를 만들고, 이를 다시 분쇄하고 정련해 강철 덩이를 만들기 위해 수백, 수천 번의 망치질과 막대한 양의 숯이 소모됐다.
그래서 귀한 강철은 무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면 잘 쓰이지 않았다.
심지어 너무 비싼 나머지 강철로 된 무구는 갑사(甲士)도 구비하기 어려워했다.
지방이 더 심각했다.
좋은 철을 구할 길이 없는 지방에서는 무쇠로 무기를 만들었다.
감찰을 피하기 위한 보여주기용으로, 몇 번 휘두르면 부러지는 폐기물이었다.
다른 나라라고 다르지 않았다.
15세기 전반을 기준으로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명나라조차 강철의 대량생산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있었다.
일본? 21세기에는 기술 강국일지 몰라도 15세기 일본은 조선과 명나라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이류 국가였다.
이런 상황에서 강철을 쇳물로 쭉쭉 뽑아낼 수 있다?
조선은 군사적, 산업적으로 크게 도약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세종이 흥분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향이 씨익 웃었다.
“맞사옵니다.”
세종이 체통조차 내려놓고 호통치듯 물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선철은 잘 깨지고, 연철은 너무 무릅니다. 그래서 둘 다 효용이 있으나 쓰임에는 한계가 있었사옵니다.”
“그랬지.”
“그런데 만약 연철과 선철을 섞어 쇳물로 만든다면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
지혜로운 세종은 향이 말하려는 바를 단숨에 파악했다.
“선철처럼 잘 깨지지 않고, 연철처럼 무르지 않은 쇳물이 되겠구나!”
“예.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긴 하고, 생산량 역시 한계가 있으나 어찌 됐든 강철을 쇳물로 뽑을 수 있사옵니다.”
“그 한계가 얼마나 되느냐?”
“으음.. 못해도 하루에 수천 근은 나오지 않으려나 하옵니다.”
웅성웅성.
신하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강철이 매일 수천 근이 쏟아진다니.. 그럼 한해에 수십만 근의 강철이 나온다는 말이 아닙니까.”
“아니지요. 하루 3천근만 되도 한 해 백만근이 넘는 강철이 나온다는 이야기예요!”
“허, 3천 근이 뉘집 애 이름입니까?”
“연철로에서 매일 나오는 쇠가 2천 근인데 3천 근이라고 불가능하겠습니까?”
“그건.. 그렇소만..”
신하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세종은 진중한 표정으로 향을 바라봤다.
그에게는 현실이 보였다.
“네 얘기대로 여러 철을 만들려면 아주 아주 많은 철과 그 이상의 역청탄이 필요하겠구나.”
“그렇사옵니다.”
“모련위.”
세종의 한마디에 수군거리던 신하들이 입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무거운 침묵이 후원에 내려앉았다.
세종이 중신(衆臣)들을 두루 살피며 말을 고르다가 선언했다.
“정벌한다.”
짧은 선언이었으나 백마디 말보다 많은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신하들의 엄청난 반발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사대주의에 물든 신하들이 명과 대적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며 드러눕겠지. 그리고 나를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칠 거야.’
그래도 해야 했다.
‘초중전차를 만들려면 이깟 반대쯤은 견뎌야 한다!’
그게 향의 각오였다.
그러나 소란은 없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뜻대로 하소서.”
예조판서 황희가 말했다.
“영명(英明)하신 결단이옵니다.”
“따르겠나이다!”
맹사성, 이지강, 최사강 등 6조와 의정부의 고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틈만 나면 향에게 훼방을 놓던 대사간과 대사헌은 물론 조극관을 필두로 한 대간들까지 대세에 따랐다.
‘뭐야.. 왜 지랄을 안 하지..?’
기억의 도서관을 통해 현대에서 겪었던 거의 모든 일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향이었으나, 향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선 초기 신료들의 자주적이고 실용적인 정신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영락제의 베트남 정복이다.
명나라는 태종 7년 5월 1일, 사신을 보내 안남(베트남)을 정복한 것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안남을 정복하게 된 이유와 그 과정, 그리고 결과까지 상세한 설명이 적힌 조서는 사실상의 경고문이었다.
‘나대면 너희도 같은 꼴이 된다.’라는 협박이었다.
이때, 놀란 태종이 명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쌓고 군기를 생산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 신하들은 군말 없이 따랐다.
명이 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하면 당당히 맞서겠다는 태종의 각오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당시 조선의 신하들은 사대보다 조선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향은 국익을 위해 일치단결한 조정의 모습을 보며 감격했다.
‘캬, 이게 나라지!’
세종 역시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한명 한명의 대신들과 눈을 맞췄다.
하지만 만장일치란 그리 쉽게 되지 않는 법.
불퉁한 표정의 사간원 좌정언 최문손이 홀연히 앞으로 나섰다.
“아니 되옵니다! 명은 대국이라. 그저 고을마다 있는 병사를 모아도 능히 백만 대군을 만들 수 있사옵니다. 그런 나라에 맞선다는 것은 스스로 화를 자처하는 우행(愚行)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소국이 대국에 맞서는 것은 예가 아니라 함부로 대국에 맞섰다간 안남 사람들처럼 우리 백성들이 도륙될 것이옵니다!”
“사대의 예를 잃지 마소서!”
최문손에 이어 젊은이의 비중이 높은 당하관(堂下官)들이 하나둘 앞으로 나서 소리쳤다.
나선 이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상경한 이들이었다.
한성에 거주하는 경화사족(京華士族)과 달리 순수하게 유학을 공부해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들이었다.
실리외교를 지향하는 기존 관료들과 달리 유학으로 중무장한 젊은 꼰대들이랄까.
‘또 꼴받게 하네!’
향이 짜증이 한껏 담긴 표정으로 최문손을 노려봤다.
그럼에도 최문손은 흔들림 없이 자기 주장을 이어갔다.
“여진의 습속(習俗)에 예의가 없고, 말을 어기기를 밥 먹듯이 하는 자들이라 하나 말이 통하는 이들이옵니다. 그러니 정 석탄이 필요하면 사면 되옵니다. 대국의 땅을 범하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세종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너는 태조께서 동북면을 다스리셨다는 것을 잊었는가? 황상이 모련위를 설치하기 한참 전에 태조께서 그들을 이끄셨다.”
“지나간 일이옵니다. 선대왕 시절, 태조대왕을 따랐던 동맹가첩목아가 아조를 침입한 것을 상고(詳考)하소서.”
‘응 걔들 다 배신때렸어~’라는 최문손의 팩트폭력에 세종의 입이 닫혔다.
기세등등해진 최문손이 자기 주장을 이어갔다.
“세자가 아직 배워야 할 나이에 정사(政事)를 논한 것은 잘못이옵니다. 세자의 대장간 출입을 금하고, 공부에 집념하게 하소서!”
‘강철이고 나발이고 명나라와 관계가 파탄 날 헛소리는 하덜 말고 공부나 하셔.’라는 조롱에 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조롱 때문은 아니었다.
향이 화가 난 것은 최문손이 강철의 대량생산을 막으려 했다는 점이다.
‘감히 내 꿈을 짓밟으려 해?!’
분기탱천(憤氣撐天)한 향이 뚜벅뚜벅 걸어 나와 최문손의 앞에 섰다.
“야아악-!”
- 작가의말
1. 동맹가첩목아
동맹가첩목아의 다른 이름은 아이신기오르 먼터무로 태조의 의형제인 이지란과 함께 태조를 따랐던 여진족 중 수위를 다투는 인물입니다. 동시에 건주좌위지휘사로서 상당한 세력을 이끌었으며, 그의 후손인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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