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물들(2)
“좋아. 어디 새 사업이 얼마나 잘 됐나 확인해볼까~”
향이 휘파람을 불며 서류를 뒤적였다.
“유리가 얼마나 팔렸을까나.”
지난 수주 간, 향은 유리장들을 부려 대량의 유리 제품을 만들었다.
유리잔, 유리 물병, 유리 접시 등 여러 제품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 개발한 화장품을 유리에 담아 고급화 마케팅도 했다.
“후후.. 이번엔 1만석 쯤 벌어들이지 않을까? 돈을 벌면 뭘 하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장부를 펼쳤다.
그리고 경악했다.
“뭐 70개? 유리 용품 1천 500개를 만들었는데 70개가 팔렸다고?!”
장영실이 향의 눈치를 보았다.
“저하.. 그중 20개는 저하께서 만드신 기준에 따라 환불되었사옵니다.”
“그럼 50개가 팔렸다는 말이잖아. 이게 그렇게 안 팔릴 상품인가..?”
당황한 향은 곧장 원인 분석에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조악한 성형 수준.
AI를 이용해 유리를 성형하는 법을 여럿 알려줬으나 기술자들의 수준이 성숙하지 않았다.
불량도 많고 완성품의 질도 떨어졌다.
이건 향도 알았다. 그럼에도 향은 판매 호조를 장담했다.
“이전까지 알려졌던 유리제품에 비해 압도적인 투명도와 뛰어난 내식성! 안 사고 베길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우선 투명도가 발목을 잡았다.
돈 좀 있는 몇몇 호사가가 유리 제품을 사서 이곳저곳에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유리에 비하면 좀 모자란 투명도로는 잠깐 시선을 끌 뿐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리고 장점인 내식성 역시 그리 주목 받지 못했다.
내식성으로는 유리와 맞먹는 도자기가 이미 있는 데다 내식성을 따져서 보관해야 할 물건이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리는 도자기에 비해 훨씬 잘 깨졌다.
결과적으로, 유리는 조선의 상류층에게 도자기의 열화판으로 취급됐다.
결과적으로 향의 유리 사업은 크게 실패했다.
투자된 금액은 백미 천섬!
“크아악-!”
향이 절규했다.
백미 천섬은 갑옷을 팔고 남은 돈의 절반이 넘는 거금이었다.
그를 한 번에 날린 것은 너무 뼈아픈 손실이었다.
하지만 향은 굴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오히려 오기를 부리며 결국에는 성공을 해내고야 마는 오뚜기 같은 정신으로 향은 유리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잠시 정자에 다녀오겠네.”
향은 후원 연못가에 있는 정자로 향했다.
바로 옆에 커다란 물레방아가 반쯤 지하에 매립된 채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훗날 향원지라 불리는 경복궁 후원의 연못가에 수차를 연결해 이를 통해 수력 풀무와 해머를 만들었다.
이전에 비해 생산 효율이 크게 늘어나 장인들이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향은 그 물레방아 옆에 작은 정자를 짓고, 사색에 잠긴 척 AI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단순한 유리가 안 된다면 고오급 유리로 승부를 본다!”
첫 번째로 만들 제품은 거울!
은을 치덕치덕 바른 은거울을 맛본다면 구리로 만든 동경(銅鏡) 따위나 쓰던 여염집 아낙들이 쌈짓돈을 싸들고 달려들리라!
‘치지야 은거울을 만드는 법을 알려줘.’
-은 거울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투명도가 높고 반짝이는 물체가 필요합니다.
“오.. 웬일로 바로 답을 하네?”
-빛을 잘 반사하는 물체로는 대머리가 있으며, 대표적인 대머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솔리니, 마오쩌둥, 푸틴..(공학 레벨 2)
“..”
향은 조용히 공학 레벨을 4까지 올렸다.
‘빡대가.. 아니, 치지야 다시 알려줘.’
- 은거울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질산에 은을 녹여 질산은 용액을 만든다.
2. 질산은 용액에 암모니아수를 넣어 암모니아성 질산은 수용액을 만든다.
3.수산화칼륨이나 수산화나트륨을 섞어 검은색 시약을 만든다.
4.깨끗이 세척한 유리(세척시 황산을 사용하면 좋습니다.)
5.포름알데히드를 유리 표면에 고르게 분사한 뒤 질산은 용액을 유리 표면에 고르게 발라줍니다.
6.은이 부착된 이후, 물로 잔여 시약을 깨끗이 씻어냅니다.
7.은층을 보호할 보호도료를 뒷면에 발라준 뒤 말립니다.
8.완성된 거울의 코팅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틀 등에 부착합니다.
“답이 없군.”
수산화나트륨과 수산화칼륨을 제외하면 당장 만들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림의 떡 그 자체였다.
‘치지야, 화학적 공정이 적은 좀 더 쉬운 방법이 있으면 알려줘.’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있습니다.
“응?”
-17세기 베네치아 장인들이 거울을 만들던 방법이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
******
“이천을 야장총제(冶匠摠制)로 삼아 후원의 대장간에서 세자를 돕게 하겠다.”
세종의 선언에 대사헌이 곧장 반발하고 나섰다.
“전하, 이천은 세자가 사고를 당할 때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이를 미리 막지 못했사옵니다. 죄를 줘도 모자랄 자에게 새로운 관직을 내리시다니요. 이는 바른 일이 아니옵니다.”
대사간이 말을 보탰다.
“맞사옵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 모두가 이천을 벌하고 세자의 대장간을 폐하시라 간하고 있사옵니다.”
“이천을 벌하고, 대장간을 폐하소서!”
“폐하소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병조판서 조말생이 시뻘게진 얼굴로 대사간과 대사헌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 무슨 망발이오!”
정승과 판서, 참판등 편전에 든 고관들이 고개를 저었다.
“또 시작이군.”
“어느 순간부터 저하를 공박하는 이만 보면 저리 날뛰니.”
“저하께서 직접 오셔서 화를 내도 저렇게 방방 뛰지는 않겠소.”
조말생은 고관들이 자기 흉을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향을 옹호했다.
“대장간은 국용이 들어간 시설로 나라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시설입니다. 철물의 생산은 물론 승자총과 중갑의 생산 역시 대장간의 일입니다. 폐하다니요.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향이 다양한 사업과 사고를 벌이던 사이, 조정에서는 승자총의 대량생산이 결정됐다.
군비를 줄여야 한다는 대간들과 일부 젊은 신료들의 반발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기존 총통에 비해 저렴하고 성능이 확실한 승자총을 대량 생산하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기에 작은 반발은 무시됐다.
아무튼 조말생은 대장간이 총기 생산의 핵심 거점임을 강조하며 대장간 폐지를 반대했다.
패착이었다.
대사헌 하연이 조말생의 말에 담긴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게 문제예요. 병판, 병장(兵仗)에 관한 건 모두 병조에서 관리해야지 대체 왜 세자 저하의 대장간에서 무구를 만드는 것입니까? 그 때문에 군기시가 유명무실(有名無實)해졌어요! 병조판서라면 대장간의 업무를 군기시로 이관할 생각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소임을 다하세요.”
“..”
조말생의 말문이 막혔다. 대사헌의 말대로 군무는 자신의 관할이었다. 세자가 만든 무구라 하나 무구가 생산된 이상 병조에서 관리하는 것이 마땅했다.
‘계속 세자의 편을 들다가는 내 입으로 내 권한을 줄이자는 말을 해야 하는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제약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면서 동시에 자신과 세자의 밀월이 손해를 감수할 만큼 깊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조말생이 할 말을 잃자 대사간 유현이 대사헌의 편을 들고 나섰다.
“그뿐이 아닙니다. 얼마 전 세자가 중궁전에 바칠 분과 연지를 만들기 위해 독액을 만들었다가 하옥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몸을 소중히 해야 할 국본이 독액을 다룬 것은 일어나서는 안 될 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민생이나 군국의 일이 아니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세자의 대장간을 혁파(革罷)하소서!”
‘애비도 빡쳐서 감옥에 가둘 막장짓을 했잖아! 대장간 뿌셔!’라는 말이었다.
이쯤 되면 조말생으로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팩트로 후두려 패는데 뭘 어쩐다는 말인가.
“경들은 조용히 하라.”
세종의 한마디에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럽던 편전이 조용해졌다.
“승자총과 중갑의 생산은 군기시로 이관하겠다.”
대사헌과 대사간의 낯빛이 밝아졌다.
“영단(英斷)이시옵니다!”
“대장간을 폐하고 세자가 정학(正學)을 공부하게 하소서!”
“대장간은 폐하지 않는다. 또 대장간에서 무기를 다루는 것 역시 지금과 같이 하겠다. 세자의 공부 역시 더하거나 빼지 않고 지금과 같게 하라.”
조말생의 얼굴이 밝아졌다.
“영명(英明)하신 결단이옵니다!”
두 대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세종이 대간들을 달랬다.
“두 대간의 뜻을 내 어찌 모르겠소? 세자가 총통을 다루다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나도 심히 놀랐소.”
“하옵시면..”
“허나.”
세종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모로서의 정을 놓고 군주로서 보자면, 신하가 국가에 보탬이 될 좋은 무구를 만든 것이오. 그 과정이 고됐다고는 하나, 그 결과를 폄훼할 수는 없는 법. 그러니 세자와 우군 동지총체 이천은 오히려 상을 받아 마땅하오. 그러니 이천을 야장총제로 두는 것에 대해서는 재론치 말길 바라겠소.”
“..”
두 대간이 뚱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세종이 슬쩍 운을 띄웠다.
“그럼 경연에서 토론을 해보겠소?”
“아, 아니옵니다!”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학문에 대해 논하는 공부 시간이다.
보통 경연은 학문에 밝은 신하들이 토론이라는 방식으로 임금을 집단으로 난타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정운영의 기본이 되는 명분을 얻어낸다.
신하들은 그 명분을 활용해 국가의 정책을 정할 때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펼쳤다.
그렇기에 신하들은 경연 시간을 늘려 임금을 학문으로 두들겨 패려 노력했고, 역대 임금들은 경연을 피하거나 경연시간을 줄이려 했다.
세종은 아니었다.
천재적인 두뇌와 학문에 대한 사랑으로 중무장한 세종은 일대 다수라는 지극히 불리한 구조임에도 경연에서 신하들을 압도했다.
-예기에 따르면..
-그게 맞소? 내 생각은 다른데.
무슨 책을 꺼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신하들은 세종을 이길 수 없었다.
되려 신하들이 경연을 무서워할 지경이 된 지 수해가 흘렀다.
그런 상황에서 경연이라니!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두 대간이 벌벌 떨며 쭈뼛거리자 세종이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리 떨 필요 없소. 경들이 이 자리에서 ‘재론치 않겠다’라고 한마디만 한다면 경연에서 이에 대해 논하지 않겠소.”
두 대간이 헐레벌떡 입을 열었다.
“재, 재론치 않겠사옵니다!”
“소신도 마찬가지 옵니다!”
“좋소. 그럼 오늘 조회는 이만 마칩시다!”
******
“후후.. 그럴 줄 알았지.”
박 내관을 통해 편전의 일을 전해받은 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총을 이곳에서 만드는 이상 아바마마는 무조건 대장간을 지키려 하실 것이다.”
오직 향의 대장간에서만 강선총이 만들어졌다.
세종의 지시 때문이었다.
세종은 조말생과 병조참판 최지강, 삼군도총제부의 최고 지휘관인 세명의 도총제, 내금위 절제사 등 군사와 관련된 극소수의 최고위 관료들에게만 강선총의 존재를 확실히 알렸다.
강선총을 대량 생산할 기술을 확보하기 전에 강선총의 정보가 명나라 유출돼 외교 분쟁이 벌어질 것을 막으려 한 것이다.
그 결과, 강선총은 세종을 호위하는 금군과 정예 기병대인 겸사복, 그리고 중앙군에 배속된 소수의 저격수에게만 배분됐다.
그러니까 향의 대장간은 국방을 위해 반드시 유지돼야 했다.
“그럼 한시름 놨겠다 다시 사업을 시작해볼까?”
향이 대장간 한편을 바라봤다.
유리장들이 거둬들인 유리제품을 녹여 향이 원하는 모양으로 재가공하고 있었다.
거울은.. 아니었다.
“베네치아식 거울은 만들어볼 만하지만, 아직 핵심 재료가 부족하고 위험도가 높아.”
무턱대고 시도했다간 자칫 목숨을 잃을 게 뻔했다.
뒤가 없는 직진남 이향조차도 꺼릴만큼 베네치아식 거울의 제작은 위험했다.
그러니까.
“거울 제작은 당분간 연기!”
짝하고 손뼉을 친 향이 유리장들에게 다가갔다.
이제는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할 차례였다.
“‘용기’는 다 완성됐는가?”
“예! 당장이라도 만들 수 있사옵니다!”
“후후.. 그럼 작업을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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