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분노
장인들이 가져온 것은 가운데 목제 원통이 박혀 있는 기묘하게 생긴 기물이었다.
원통에는 굵은 철사 여럿이 고깔 모양으로 끼워져 있었다.
장인들이 철제 원통의 밑에 달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러자 꽤 큼지막한 철제 원통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세종이 빙빙도는 원통을 유심히 보다가 손뼉을 쳤다.
“보아하니 물레방아에 쓰이는 원리를 이용했구나! 바람 대신 사람의 발이 누르는 힘을 썼고.”
‘사람인가..?’
보자마자 기계의 원리를 꿰뚫는 세종을 보고 향이 당혹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종은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원통이 빠르게 회전하고, 그 밖에 둥글게 말아 박은 철사가 여럿 있다라.. 저 철사가 무언가 역할을 하겠구나? 맞느냐.”
“그렇사옵니다.”
“어서 보여보거라. 기대되는구나.”
세종의 재촉을 받은 향이 눈짓으로 장인들을 채근했다.
그러자 장인 몇이 보리 이삭을 가져와 원통을 굴리는 장인에게 이삭을 건넸다.
이삭을 건네받은 장인이 이삭을 회전하는 원통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이삭에 붙어있던 낱알들이 원통의 철사와 충돌해 빠르게 분리됐다.
수 초 만에 이삭 한 묶음에 맺혀 있던 낱알들이 모두 탈곡되었다.
향이 만든 기물의 이름은 바로 족답식 탈곡기.20세기 초반 개발된 수동식 탈곡기의 끝판왕이다.
성능은 20세기 물건답게 완벽.
‘100포인트가 아쉽지 않아.’
심지어 100포인트도 회수됐다.
탈곡기 발명의 보상으로 100포인트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종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기기의 신묘함이 마치 요술 같구나. 저 기계의 이름이 무엇이냐?”
“탈곡기라 하옵니다.”
“탈곡기라 직관적인 이름이구나.”
“백성들이 외우기 편한 이름이 좋으리라 생각해 그리 이름 지었사옵니다.”
“옳다. 백성이 편히 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기물이지. 하지만.. 쇠가 많이 들어가고 생김새가 복잡한 것을 보아 많이 생산하는 게 어려울 것 같구나.”
“예. 분업해 만들더라도 당장은 충분히 생산하기 어렵사옵니다. 그래서 하나에 백미 열섬 정도 하옵니다.”
세종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기구를 쓴다면 추수철에 백성의 노고가 크게 줄어들겠지. 다만 그럼에도 뭇 백성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비싸다는 게 아쉽구나."
잠시 쓰게 웃던 세종이 얼굴을 펴며 물었다.
"다음은 무엇이냐. 좋은 기물을 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레는구나!”
“추수에 관한 물건들을 보여드렸으니 이번엔 파종에 관한 물건들을 보여드리겠사옵니다. 먼저 파종기이옵니다.”
“파종기? 파종을 돕는 물건인가?”
“바로 보여드리겠사옵니다.”
장인들이 기물을 가져왔다. 앞 뒤로 두 개의 바퀴가 달려 있는 모습이 마치 작은 자전거 같았다.
“파종기는 돌같은 이물을 골라내는 평판과 땅을 파는 쟁기 그리고 쟁기가 판 땅에 씨앗을 뿌리는 종자판으로 구성되어 있사옵니다. 파종기를 밀면 일정한 간격으로 씨앗이 떨어져 허리를 숙여 일일 파종할 필요가 없사옵니다.”
향이 눈짓하자 장인들이 쟁기로 갈아놓은 땅에 파종기를 밀었다.
향이 이야기한 대로 일정한 간격으로 씨앗이 땅에 떨어졌다.
세종이 손뼉을 치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백성들은 씨앗을 심을 때 그냥 밭에 뿌린다. 허나, 그리하면 작물의 간격이 고르지 않아 대부분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를 막기 위해서는 씨앗을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야 한다. 하지만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 그리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세종이 파종기를 가리켰다.
“그런데 네 파종기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씨앗을 땅에 심겠다고 일일이 허리를 숙일 필요가 없으니 적은 노고로 파종을 끝낼 수 있으면서 수확은 크게 늘겠구나!”
향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사옵니다. 새 쟁기와 파종기를 같이 사용한다면 더 적은 노고와 인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니, 백성들에게 큰 여유가 생길 것이옵니다. 남는 시간에 베를 짜거나, 혹은 다른 활동을 할 수 있사옵니다. 예컨대 저수지나 둑을 만들고 길을 닦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세종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향의 의중을 살폈다.
“길은 그렇다 치고 저수지와 둑이라.. 그 이야기를 들으니 농기구를 보여주는 것 말고도 네게 생각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사옵니다. 그에 대해서는 마지막 기물을 보여드리며 말씀드리겠사옵니다.”
향이 뚜벅뚜벅 걸어 마지막 기물 앞에 섰다.
어른 2~3명이 일렬로 설 수 있을 것 같은 사각형 기물이었다. 사각형 틀 안에는 나무와 쇠로 보강된 틀이 작게 놓여 있었다.
세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전 물건과 달리 이것은 어디에 쓰는 기물인지 도통 모르겠구나. 이것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이앙법으로 벼를 심을 때, 벼를 미리 생육할 묘판을 정렬하는 기물이옵니다.”
“이앙법..?”
세종이 말을 흐렸다.
이앙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잘 알았기 때문에 말을 흐린 것이다.
이앙법.
흔히 모내기법이라고도 불리는 방식으로 벼 종자를 미리 묘판에 길러뒀다가 논에 벼를 심는 방식이다.
제대로 자라지 못할 벼를 걸러낼 수 있고, 벼를 일정한 간격으로 심을 수 있어 벼의 성장이 고르고 벼 사이에 난 잡초를 뽑기 쉽다.
요약하면 이앙법으로 농사를 지으면 벼가 훨씬 잘 자란다.
이는 결과적으로 같은 종자로 생산할 수 있는 쌀의 양을 크게 늘린다.
그 효율은 씨앗을 사방에 뿌려 키우는 기존 농법인 직파법을 압도한다.
현대의 벼농사가 모내기법을 쓰는 논농사로 통일된 것도 이런 효율성 때문이었다.
세종이 잠시 고민하다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이앙법이라.. 확실히 물만 충분히 댈 수 있다면 소출(所出)이 크게 늘어나는 좋은 농사법이다.”
향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사옵니다. 여러 기물을 국용을 들여 각지에 나눠주고, 이앙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면 나라의 소출이 크게 늘 것이옵니다.”
세종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려해봄 직하다.”
“아니되옵니다!”
신하무리에서 신하 하나가 튀어나와 크게 외쳤다.
“사헌부 지평 조극관이 성상께 아뢰옵니다. 지금 세자가 하는 이야기는 시세에 맞지 않은 말이니, 물리치셔야 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전하-! 아조는 민본(民本)으로 세워진 나라라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해 적은 조세만을 거두옵니다.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조정에서 쓸 국용의 양이 적사옵니다. 그러므로 국용은 필요한 곳에 쓰여야 하옵니다. 헌데, 세자가 말한 기물들은 잡기(雜器)라, 농사에 도움이 되기는 하나 국용을 쓸 물건이 아니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소서!”
‘가뜩이나 나라에 돈이 없는데 저딴 장난감에 예산을 써야겠니?’라는 말이었다.
세종의 얼굴이 붉어졌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더 있사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세자는 대장간에서 만든 기물로 수천 섬의 재물을 얻었사옵니다. 그러한 일은 장사치의 일이라 나라의 국본이 할 일이 되지 않사옵니다. 심지어 세자는 그렇게 얻은 재물을 검은 돌 몇 개를 얻기 위해 낭비하였사오니 이는 바른 일이 아니옵니다.”
조극관은 세자가 대장간에서 생산한 물건을 하사하거나 국용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문을 남겨 팔았다는 사실이 아주 못마땅했다.
전조부터 임금이 좋은 물건을 갖게 된다면 이를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게 관례였다.
좋은 무구를 만들고도 이를 무관들에게 하사하는 것이 아니라 판매한 것은 이런 관례를 깨는 것이었다.
세종이 이를 지적했다.
“왜, 하사품을 받지 못해 서운하더냐? 세자가 네 부인에게 화장품을 내리지 않고 팔아치운 게 그리 못마땅하더냐!”
“아니옵니다!”
조극관이 관례를 따지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군주는 백성의 공익(公益)을 위하는 자리이지 자신의 사익을 채우는 자리가 아니옵니다. 군주가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면 그 아래 신하들까지 모두가 사익을 쫓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라의 일이 엉망이 될 것이옵니다. 후한의 효령황제(孝靈皇帝)가 십상시와 함께 관직을 팔아 치부하다가 나라가 흔들린 것을 잊지 마소서.”
효령황제, 다른 말로 영제는 내탕고를 늘리기 위해 돈을 받고 관직을 팔았다.
그 결과, 관직에 올라서는 안 되는 이가 관직을 쥐게 되었다.
심지어 그 방식이 정말 악독했다.
영제는 관직을 외상으로 팔았다. 예컨대 누군가 1만 냥에 현령이 되고자 한다 치자.
그럼 그는 황제에게 1만냥을 빚지고 현령이 될 수 있었다.
대신, 관직을 얻은 뒤에 1만냥이 아니라 2배인 2만냥으로 갚아야 했다.
그럼 1만 냥도 없던 이가 2만 냥을 어디서 구했을까?
정답은 백성을 갈취하는 것이었다.
관리가 된 이들은 백성들에게 부당한 조세를 거둬 영제에게 내야 할 외상을 갚고 그 이상의 이득을 얻기 위해 백성을 더욱 착취했다.
당연히 나라는 도탄에 빠졌다.
엉망이 된 나라에 분노해 도적이 들고 일어나니 이것이 황건적(黃巾賊)이라.
난세가 열리고 여러 영웅이 충돌하는 삼국지의 배경이 바로 이 영제가 죽은 이후의 시대다.
조극관의 입장에서는 국본인 세자가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영제의 난행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옥좌에 오르면 관직도 사고 팔려 할지 모른다!’가 조극관의 염려였다.
물론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가진 향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또 지랄이네!’
조극관을 바라보는 향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서 가치를 창출한 것과 매관매직(賣官賣職)이 같은 이야기인가!’
향이 씩씩대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세종은 침착했다.
세종이 무표정한 얼굴로 조극관에게 질문했다.
“또 할 말이 있는가.”
“그렇사옵니다.”
“무어냐.”
“이앙법은 소출이 많이 나는 농법이 맞으나, 물을 제대로 대지 못하거나 농법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면 농사를 망치기 쉬운 작법이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농사를 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으로 엄금(嚴禁)했사옵니다. 하지만 세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여 얼핏 들으면 그럴싸하나 실제에는 쓸 수 없는 농법의 보급을 말했사옵니다. 이는 공부가 부족함이라. 먼저 배움을 키움이 먼저이리라 사료되옵니다.”
‘나라에서 위험해서 금한 것도 모르죠? 실무 어둡죠? 바보죠? 모르면 공부부터 해야겠죠?’라는 세자를 향한 조롱이었다.
이향이 부들부들 떨자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질 듯 위태롭게 요동쳤다.
“그래 할 말은 그게 다냐.”
“세자의 배움이 부족하니 세자의 대장간 출입을 금하고 세자시강원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크게 늘려야 하옵니다. 또한 세자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시강원의 스승을 다른 이로 바꾸소서!”
“끝이냐.”
“예, 전하.”
“다른 대간들의 뜻도 지평 조극관과 같은가?”
세종이 대간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예, 전하!”
“그렇사옵니다!”
“세자가 대장간에 가는 것을 금하소서!”
대간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들 모두가 조극관과 생각이 같았다.
무표정하던 세종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분위기는 더욱 차가워졌다.
세종의 웃음은 냉소(冷笑)였다.
- 작가의말
1. 족답식 탈곡기의 구조.
JETIR, Paddy Threshing Machine By Pedal And Automated Method
2. 탈곡기 운용 영상
(Youtube) 손앙드레, ‘전통 탈곡기 홀태(홀깨)벼 타작하는모습’-제목은 홀태인데 내용은 족답식 탈곡기입니다.
3.홀테 영상
(Youtube) 미푸채널, ‘벼수확 홀테입니다.’-진짜 홀테의 사용 영상입니다.
4. 점파식 씨앗 파종기 JK-70
더 좋은 파종기도 많지만, 조선시대에도 만들 수 있는 단순한 형태의 파종기를 찾다 보니 이 제품이 나오더군요.
5.묘판 정리기
(Youtube) make J, ‘23년형 서서 묘판 정리기’
이 역시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만들 수 있을 법한 정리기를 골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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