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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아들이 인조를 찢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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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닌
작품등록일 :
2024.07.22 15:58
최근연재일 :
2024.09.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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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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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전쟁을 기다리며 (2)

DUMMY

따라서 호거가 조선군의 움직임을 물은 건 단순한 호기심 따위로 볼 수 없다.

트집을 잡기 위한, 더 나아가 확실히 견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하지만 의도가 뻔하다고 해서 엄연히 한 사람의 지휘관으로서 회의에 참여한 자에게 정보를 제한할 수는 없는 일.

일단은 적당히 맞춰 줄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저희는 조공으로서 산동을 향해 선봉으로 나설 우익의 진격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산동으로 향하며 어찌 청산관을 넘는 우익을 돕는단 말입니까?”


“허허, 숙친왕께서는 위위구조(圍魏救趙)라는 말도 듣지 못하셨습니까? 명의 군사들은 주로 장성과 그 너머의 거성들에 의지하고 있는 와중인데 그보다 한참 남쪽인 등주 항구에 적이 진입하면 어찌하겠습니까?”


산동의 해안 도시인 등주가 파괴되고 나면 북으로는 북경 인근 항구로 나아가며 운하 종점을 위협할 수 있고, 연안을 따라 더 남쪽을 향하면 남경이 속한 남직례 일대를 바라볼 수 있다.


명이 수시로 약탈해대는 청나라를 상대로 꿋꿋하게 버티는 건 내가 홍타이지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 운하라는 생명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위협하는 이들을 가만히 두고만 보겠는가?

북쪽으로 한껏 쏠린 균형이 흐트러지는 건 자명한 일이다.


이는 원 역사의 무인년 원정에서는 없었던 일.

오직 내가, 우리 조선이 돕기에 가능한 조공이었다.


“조선 수군이 명으로 하여금 운하의 안위마저 염려할 정도로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기엔 우리 숙부님께서 귀국의 강화도로 드는 길이 참으로 수월하셨던 듯한데?”


호거는 병자호란 당시 우리 군이 강화도 방비에서 보였던 졸전을 꼬집었다.


“이는 예친왕께서 인근에 거주하던 향화호인(向化胡人, 청의 성립 과정에서 조선으로 망명한 여진족)을 잘 포섭하시어 대선이 지나지 못할 만큼 수위가 낮아지는 때를 파악하신 까닭이지요. 숙친왕께서는 그에 앞서 강화도로 향하던 청나라 전선들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 잊으신 모양입니다?”


강화도가 뚫린 건 우리 수군이 못 싸워서가 아니다.

서해의 빌어먹을 조수간만의 차가 함선의 이동을 막아서지.

물론 그걸 몰랐던 게 아닌 만큼 그에 맞는 소형선들도 준비가 되어야 했지만, 지금은 그 전훈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니 말은 바로 하셔야지요. 예친왕의 전공은 우리 조선 수군의 무능함 덕을 본 게 아니라, 오히려 겨우 제 한 목숨 구하자고 폐하의 깃발 아래로 숨어든 그 명나라 출신 해적 놈들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이뤄진 것입니다.”


“해적이라니! 엄연한 대청의 장수들로 이미 폐하께 왕작까지 받은 이들입니다!”


“허허, 그런 대단한 자들이 고작 모적(毛賊, 모문룡)의 휘하에 있었단 말입니까? 호랑이가 호랑이를 낳는 법이라면, 개의 휘하에 머무르던 것들 역시 개가 아닐런지요?”


“이는 모욕입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대청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 그리고 이를 품으신 폐하께도!”


“전하의 말씀이야말로 모욕이지요. 대청의 제일번국이 성심을 다하여 파견하는 자들을 고작 목숨이 아까워 도피한 자들의 아래로 여기시다니요? 폐하께서 저를 친히 맞이하시며 기뻐하신 일이 고작 닷새 전의 일입니다.”


“이는···!”


“숙친왕, 그쯤 하십시다.”


나와 호거 양쪽 모두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도르곤이 곧장 중재에 나섰다.


경건한 회의장에서 언성을 높인다는 건 그 자체로 난동.

이번 원정의 책임자로서 도르곤이 제지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 세자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제가 제안하고자 하던 바이기도 합니다. 숙친왕께서 말씀하신 대로 강화도에서 그 위용을 직접 확인한 사람이 바로 저 아니겠습니까? 이는 지리가 돕지 않았을 뿐이니, 저는 말씀하신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해서 그 중요한 역할을 오롯이 조선군에 맡기시겠단 말씀입니까?”


도르곤이 내 손을 들어주며 정리하려 하자, 호거가 다시 발끈하며 물었다.


“숙부님께서 믿으실지는 몰라도,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우리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나라의 군대가 홀로 대업을 맡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호거는 여전히 우리 조선군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그리고 이 실상 날 겨냥한 공격은 단순히 능력을 의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설사 그 실력이 조선 세자가 우쭐대는 것처럼 훌륭하다 해도 온전히 그 실력을 다할지 알 수 없지요. 아니, 오히려 그 실력을 토대로 그 고루한 의리를 들먹이며 다른 속셈을 내비칠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 이것 봐라?

우리 조선이, 그리고 내가 명나라와 밀통할 가능성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떠들어?

설마 이놈이 뭘 알고 이러는 것인가?


나는 호거의 망동에 바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판단을 확실히 하기 위해 질문 하나를 슬쩍 흘렸다.


“다른 속셈이라니요? 혹, 폐하께서 숙친왕에게 따로 이르신 바라도 있습니까?”


“이르신 바라니? 허! 지금 내가 제기하는 이 당연한 의혹을 두고 설마 지고하신 폐하께 서운한 감정이라도 품으려 그러십니까? 심양관에 억류되어 사람 하나 제대로 만나지 못해도 당연한 처지에 이렇듯 후한 대우를 받고도 하소연이나 하려 하십니까?”


발끈하며 오히려 새로운 흠집을 찾으려 한다, 라.

더군다나 뭘 감추려 한다기보다는 이야기가 엄한 데로 흐를까 바짝 감정이 올라온 듯한 느낌이다.


그렇다는 건 지금 놈이 벌이는 이 망동에 홍타이지의 의사는 들어있지 않다는 뜻이다.

독대 과정에서 내가 헌책한 바는 여전히 그와 나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거지.


하기야, 만약 그가 이걸 호거에게 흘렸다면 날 견제하겠다는 뜻인데, 그럴 것 같았으면 애초에 헌책을 마다하면 그뿐이었다.


더군다나 그 견제의 끝은 본인이 비공식적으로 허가한 일을 내 흠으로 만드는 길이 될 테고, 이는 최소 사형이다.

제 뜻대로 휘두를, 그리고 장차 번국의 왕으로 세워 후방을 든든하게 해줄 자로 날 낙점해두고 그런 결과를 기대할 리가 없다.


“아, 역시 그렇군요. 어쩐지 폐하께서 저를 독대하시며 하신 말씀과 숙친왕의 그 의혹이 너무나 상반된 지라, 혹 제가 폐하의 뜻을 곡해하였나 하였습니다.”


“폐하의 뜻이라니요?”


“허허, 아닙니다. 폐하께서 이르시지도 않은 것을 어찌 제가 입에 담겠습니까? 폐하께서 숙친왕을 생각하시는 정도가 그러한 것을, 감히 신하 된 자로서 함부로 달리 여길 수는 없지요.”


“폐하께서 날 생각하시는 바가 어떻다고···!”


“뭐긴 뭐겠습니까? 서자지요.”


호거는 홍타이지의 자식들 가운데 가장 맏이로 당연히 자신이 그의 뒤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그는 서자다.

만주족이 명이나 조선처럼 유교적 종법 질서를 따르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모친 쪽 배경이 변변치 않다는 건 분명한 약점이 된다.


더불어 만주족식 계승, 형제 또는 자식 가운데 가장 실력 있는 자가 정점을 차지하는 이들 전통에서는 장자라는 게 실력을 먼저 갖출 수 있다는 장점 외에는 큰 의미를 주지도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맏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가치가 있었다면, 홍타이지가 죽기 직전 그를 위한 안배를 하나도 해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따라서 후계자는 자신이란 호거의 생각은 철저히 망상.

그리고 그 망상에 흠집이 되는 서자라는 말은 그에게 발작 버튼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호거가 보일 반응은 결국.


“이자가 지금!”


금방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호거는 본인이 앉아 있던 의자를 요란하게 넘어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바로 칼을 뽑을 듯한 자세를 취했으니.


“숙친왕, 고정하십시오.”


주장의 자리에 앉아 언쟁을 지켜보던 도르곤이 싸늘한 음성을 흘렸다.


“군략에 대한 의문이라면 내 얼마든지 귀담아들을 것이나, 그깟 감정싸움이나 벌인다면, 더욱이 이 중대한 회의 자리에서 칼이라도 뽑는다면, 그때는 주장이 군령을 세우는 법도를 보일 것입니다.”


호거의 눈엔 도르곤이 동맹인 날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도르곤에게 명분은 충분하다.

단순히 말로 그치지 않고 결단에 나설 수도 있단 말이다.


겨우 새로 등장한 정적을 좀 긁어보려 나섰다가 본인이 흥분하는 바람에 목을 내놓을 텐가?

절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크흠···.”


결국, 호거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성질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분은 가득하여 날 바라보는 눈빛이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단 건 도발은 본인이 먼저 했으면서, 그런데도 열이 오를 만큼 올라 기어코 결단을 내고 싶단 말이지?


그래, 좋다.

내가 아주 너른 마음으로 친히 기회를 한번 주마.


머릿속에 꽤 그럴듯한 생각이 떠오른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다시 입술을 뗐다.


“정 그렇게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렇게 하시지요.”


“허! 무엇을? 어찌?”


“숙친왕께서 귀히 여기시는 그 명나라 출신 해적들도 우리 조선군의 진군에 함께하도록 하시지요. 그들은 숙친왕과 마찬가지로 폐하께서 친히 관장하시는 팔기 아래 있으니, 폐하의 장자로서 그들을 추가로 종군케 하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네가 믿는 그놈들을 내게 붙여라.

시일이 다소 촉박하긴 하겠지만, 스스로 자신하는 바와 같이 황제의 장자라면 그쯤이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왜, 자신이 없으십니까?”


“그럴 리가!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요!”


“그렇다면 더 논할 필요도 없겠군요. 예친왕 전하, 이렇게 하시지요.”


호거의 호언장담을 받아낸 나는 도르곤에게 바로 결정해줄 것을 청했다.


도르곤은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내가 먼저 꺼낸 발언인 동시에 추가 부담은 호거가 지겠다고 한 만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해로를 따라 나아가 발해의 군도를 장악하고 산동을 위협하는 그 일은 조선군과 우리 대청의 수군이 공조하는 것으로 하지요.”


이에 호거는 아직도 분이 남은 듯 씩씩거리면서도 어디 네 뜻대로 될지 보자는 식으로 날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 입에선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호거, 이건 네가 좋다고 한 일이다?

과연 네가 바라는 대로 될지 두고 보자고.

그 적개심으로 덧붙인 전력은 내 아주 요긴하게 써주마.


그렇게 정쟁이나 다름없던 군사회의는 내게 청나라 수군이 더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회의가 끝나고 예친왕부를 나서려던 차, 도르곤이 날 은근히 붙잡으며 물었다.


“호거가 수군을 동원하게 되면 어찌 될지 몰라서 그러십니까? 해상에서 벌어지는 일의 공적을 나누려 들거나 아예 그 일을 방해하려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폐하께서 약속하신 보상도 줄어들 터. 이는 저하는 물론이고 제게도 좋지 않습니다.”


“허허, 이는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아들이 되어 아비의 속뜻도 모르고 망동하여 무슨 뜻을 이루겠습니까? 그가 내어줄 수군은 제가 아주 요긴하게 쓸 예물이 될 것입니다.”


“예물이라니요?”


전쟁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단어 선택에 도르곤이 곧장 의문을 띄웠다.


“혹, 호거와 언쟁하며 슬쩍 언급하신 그 폐하의 뜻에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입니까?”


“예.”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셔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저하, 저희는 이미 한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몰라서 좋을 것이···.”


“하여 말씀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들으시면 저, 그리고 조선이 진 위험을 함께하셔야 할 것이니. 일이 영 좋지 않게 될 경우, 예친왕마저 곤궁해지신다면 퍽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이기에···.”


“정 그러시다면, 듣고 바로 잊으십시오.”


그래도 의문을 차마 떨치지 못하기에, 나는 도르곤의 귓가로 다가가 짧은 말을 흘렸다.


“명 황제를 속일 것입니다.”


“······!”


“아는 이가 많아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그러니 절대 말이 흘러나가는 일이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일을 그르치게 되면 폐하께서는 이것만큼은 절대 보호하지 않으실 것이니.”


내 말에 돌아온 답은 오직 침묵, 그리고 한 차례 느릿하게 끄덕이는 도르곤의 고갯짓뿐이었다.


“그럼···.”


“저하!”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물러가려던 와중, 저쪽에서 우리 심양관 인원 하나가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심양관 밖에서 이리 경망스럽게 구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송구하옵니다. 그, 다름이 아니오라, 조선에서 원군의 도착 기일과 이를 지휘할 자들의 소식을 전해온지라···.”


“주장과 조방장이 누구라 하던가?”


“주장은 평안병사 유림이옵고, 조방장은 전 의주부윤 임경업이라 하옵니다.”


유림, 그리고 임경업이라.


“그럼 전하, 저는 이만 물러가 조선 장수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우리 장수들의 도착 소식을 들은 나는 바로 도르곤에게 정중히 인사하고는 심양관으로 길을 잡았다.


***


파병 소식이 들려온 뒤, 조선군은 스스로 고지했던 시일에 큰 차질 없이 도착했다.

함선을 수십 척 동원한 만큼 군은 요동반도 끝의 항구에 주둔한 뒤 유림과 임경업만이 소수의 인원을 대동하고 심양으로 들어왔다.


좋든 싫든 번국의 장수로서 청의 수도에 든 만큼 각종 외교 절차와 홍타이지에 대한 접견을 치러야 했고, 나와 편안히 마주 앉아 긴밀한 이야기를 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여 시간은 벌써 어둑해지기 시작한 저녁쯤.

두 사람은 내 앞에 나란히 엎드려 예를 갖췄다.


“저하, 그간 강녕하셨나이까?”


“그대들이 염려해준 덕인지 내 아주 무탈하오.”


“어찌 이에 신들의 덕이 있겠나이까? 신은 참으로 무능하고 불민하여 병자년에 청군의 진격을 막아서지도, 정축년에 억류되신 저하를 구출하지도 못했나이다.”


그런 가운데 임경업이 병자호란의 패배, 그리고 내가 포로로 끌려온 그 모든 것이 천추의 한이라도 되는 듯 비통한 음성을 흘렸다.


후대에 이 두 사람, 특히 임경업을 두고 부정적인 평가가 나오기도 하지만, 이는 다소 과도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가 친명배금한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시대 조선에 그런 생각에서 벗어난 자가 있긴 하던가?

이는 주화나 척화나 마찬가지, 현대로 치면 한미동맹 같은 개념이다.


더군다나 현재 패전을 겪은 후인 조선 장수들의 명과 청에 대한 입장은 이 두 사람보다 더하면 더하지 결코 덜하지 않다.


한 예시로, 당장 현시점에서 청이 가장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조선 장수가 누구냐 하면 바로 임경업이다.

그나마 청에 그 정도 예의라도 갖추는 장수는 거의 그뿐이었으니까.

만주족 인사들 가운데 조선에 가장 우호적인 인사가 내 건강 상태를 의심한답시고 내 처소까지 들이닥치던 잉굴다이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임경업은 오랜 기간 북방에 머무르며 조선 서북 민심을 아우른 것은 물론이고 만주의 정세에도 밝아 각종 첩보와 교역을 주도한 바 있다.

물론 이것이 지방 반란을 항시 의심하던 인조의 눈에 좋지 않게 보여 북방에서 반발이 있으면 으레 그가 부추긴 것이라 단언하며 파직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그에 더해 의주에 머무르며 청과 조선 사이에 사절이 왕래할 때는 명나라에 하던 예를 그대로 따라 괜한 분란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원 역사의 무인년 파병이 최악의 형태로 이뤄져 곤란해질 위기에 처했을 땐 직접 심양으로 와 홍타이지의 화를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그런 그가 청의 요구에 미적거리기 시작한 건 청의 전쟁이 더는 조선의 강역이나 이익을 위한 전쟁이 아니게 되었을 때부터.

최명길, 김자점 등이 파병을 틈타 명에 상황을 설명하고 군 피해를 최소화할 것을 주문한 뒤부터다.

그리고 사람들이 비난하는 이 행적은 그가 드물게 인조에게 칭찬과 상을 받은 명목이 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훗날 드러나 외교 문제가 되니, 소위 횡의 사건이라 부르는 일이다.

이에 최명길은 여러 중신이 함께하여 임경업에게 시킨 일을 오직 그와 임경업 둘이 한 일이라 항변하며 청에 잡혀가길 자청했고, 임경업 역시 심양에 압송될 처지에 놓였다.


최명길 덕에 압송을 피한 자들은 조선이 완전히 청에 경도될 것을, 명의 힘을 빌릴 길이 완전히 끊길 것을 염려하여 그의 망명을 획책한다.

그 염원을 안고 탈출하여 명에 들어갔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멸망하기 시작한 명나라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 장수 손에 붙잡혀 청에 압송된다.

정말 세계가 뒤집히고 말았음을 목도하고, 그에 따라 다시 선택을 고려할 기회 자체가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과거에 그에 대해 가졌던 호감, 조선 북방 민심과 대명의리를 아우르는 그의 승복이 갖는 의미를 고려해 청 조정은 그에 대한 용서와 항복을 종용하지만, 임경업은 이를 거부한다.

모든 계획이, 전망이 무너진 마당에, 뜻을 함께하던 자들도 죄인이 되었거나 죄인이 될 예정인 와중에 혼자 빠져나가는 것이 그에겐 가당치 않았으리라.


따라서 그는 죄인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갔고, 그를 통한 외교전략을 구사하던 자들이 역모 혐의로 주살되는 과정에서 함께 옥사한다.


이후 그에 대한 조선 조정의 평가는 철저한 반역자 취급.

애초에 그의 죄를 묻고자 한 사람이 그를 후원했던 김자점인 이상, 신원 가능성은 없었다.

심지어 왕은 최명길이 혼자 감당하겠다고 할 때는 칭찬하며 보내놓고, 그가 심양에 가자 왕에게 책임을 넘길 수 있다며 삭탈관직한 인조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평가가 반전된 것은 숙종 이후, 소중화를 나라의 이데올로기로 삼으며 그 마스코트로 삼을 인물이 필요해진 뒤다.

따라서 숙종은 그를 위한 사당을 지어줬고, 정조는 후대가 그를 비난하는 근거로 삼는 충렬비를 세워주며 ‘대명충신’이란 글귀를 박았다.

그를 오직 소중화에 헌신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전기를 지은 것도 정조대의 일이다.


애초에 혼자 벌인 일도 아닌, 심지어는 후대에 명에서도 드문 대명충신이 우리 조선에서 나왔으니 우리가 소중화라는 주장을 목적으로 금칠된 이력을 가지고 그를 오직 모화주의자였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저 “청은 우리의 원수” 같은 소리나 할 뿐인 자들이 군부의 태반을 이루는 현시점에서, 이 인선은 조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런 말 마시오. 장군은 내가 남한산성을 나와 심양으로 오는 동안 유일하게 날 구하고자 한 사람이오. 그런데 설마 내가 그걸 서운하게 여길까?”


나는 그런 임경업을 적당히 위로하며 슬슬 본론을 시작했다.


“오는 길에 별 탈은 없었소?”


탈이란 혹 수군을 몰고 오는 과정에서 이전에 최명길이 언급했던 진홍범과의 마찰은 없었는가 하는 뜻이었다.


“분개하며 의심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살아 북경으로 돌아가 사세를 고해야 할 자로서 차마 거친 행보는 보이지 못하였나이다.”


반응이 썩 좋지는 못하였으나, 어쨌든 물러나 북경에 어떤 식으로든 말을 전하기로 하긴 하였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아니, 현시점 명나라의 황제인 숭정제(崇禎帝)는 어차피 신하들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는 자이니, 소식이 전해지기만 했다면 과정이야 어떻든 다를 것 없다.


“내 그대들과 함께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좌상을 통해 충분히 들었으리라 여기오.”


“물론이옵니다. 치욕을 견디며 안에서는 힘을 기르고 밖으로는 명과의 공조를 도모함이 저하의 그 큰 뜻이지 않사옵니까?”


이들은 내가 조선에서 인조와 최명길에게 주창한 바를 곧이곧대로 믿으며 감격한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는 세세히 따져보면 내 진정한 뜻과는 살짝 다르긴 하다.

하지만 당장 일을 도모하는 데 있어 그 차이가 문제 되진 않으며, 오히려 약간의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일을 도모하는 데는 더 용이하다.

그러니 지금은, 잠시 진실을 미뤄도 좋으리라.


“좋소. 그럼 더 시간 끌 것 없이 이번에 청이 구상한 계획을, 그리고 그 속에서 행할 우리만의 계획을 논해봅시다.”


“예, 저하.”


유림과 임경업은 내 말에 군더더기를 붙이는 법 없이 곧장 내 뜻을 따라왔다.


홍타이지와의 밀담.

아지거와의 사업 계획.

호거의 우습기 짝이 없는 견제.

그리고 내 군사와 내 장수들.


내게 필요한, 또는 유용한 그 모든 것들이 갖춰졌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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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세자의 사람들 (1) +15 24.08.21 2,936 129 13쪽
31 명-청 책봉 경쟁 (2) +19 24.08.20 3,007 132 16쪽
30 명-청 책봉 경쟁 (1) +13 24.08.19 3,034 136 16쪽
29 무인사변(戊寅事變) (5) +15 24.08.18 3,127 145 14쪽
28 무인사변(戊寅事變) (4) +9 24.08.17 3,019 131 13쪽
27 무인사변(戊寅事變) (3) +9 24.08.16 3,012 137 14쪽
26 무인사변(戊寅事變) (2) +8 24.08.15 3,206 135 13쪽
25 무인사변(戊寅事變) (1) +8 24.08.14 3,496 143 13쪽
» 전쟁을 기다리며 (2) +11 24.08.13 3,480 154 20쪽
23 전쟁을 기다리며 (1) +11 24.08.12 3,674 151 16쪽
22 복귀 (2) +16 24.08.11 3,765 155 16쪽
21 복귀 (1) +12 24.08.10 3,893 167 14쪽
20 아버지와 아들 (4) +11 24.08.09 3,894 171 14쪽
19 아버지와 아들 (3) +13 24.08.08 3,825 174 15쪽
18 아버지와 아들 (2) +15 24.08.07 3,902 164 15쪽
17 아버지와 아들 (1) +22 24.08.06 4,024 195 14쪽
16 충성스러운 애국노 (2) +12 24.08.05 3,952 170 16쪽
15 충성스러운 애국노 (1) +10 24.08.04 3,979 166 13쪽
14 더러움을 논할 자격 (2) +15 24.08.04 4,085 171 15쪽
13 더러움을 논할 자격 (1) +16 24.08.03 4,132 188 15쪽
12 조선으로 (2) +15 24.08.02 4,170 174 13쪽
11 조선으로 (1) +9 24.08.01 4,276 181 15쪽
10 빚 (2) +13 24.07.31 4,275 192 14쪽
9 빚 (1) +8 24.07.30 4,673 179 15쪽
8 아바하이의 아들들 (2) +5 24.07.29 4,797 193 14쪽
7 아바하이의 아들들 (1) +6 24.07.28 5,056 190 12쪽
6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 (2) +6 24.07.27 5,183 199 15쪽
5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 (1) +11 24.07.26 5,314 211 13쪽
4 연회 +8 24.07.25 5,268 219 14쪽
3 굴마훈 +10 24.07.24 5,577 231 13쪽
2 누굴 잠 못 들게 할 것인가 +8 24.07.24 6,154 228 12쪽
1 회귀 +25 24.07.24 7,058 25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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