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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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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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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DUMMY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아바마마 소자 청이 있사옵니다.”

고즈넉한 후원 정자에서 향과 부왕이 담소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모습은 평화로웠다.

부왕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귀뚜라미 소리에 선선한 바람이 더해지니 따뜻한 차 맛이 한결 좋았다. 부왕은 오늘따라 유난히 차 맛이 좋다면서 향에게 권했다. 부왕은 하얗고 긴 손으로 찻잔을 잡는 향을 보았다. 정자에 밝혀진 등불이 향의 모습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었다.

부왕은 차를 목으로 넘기며 낮의 일을 떠올렸다.


향은 강녕전에 들어 오늘 어전회의에 있었던 일들을 보고했다.

야인 족장에게 ‘김 선’ 이란 이름을 내리고 양인 신분과 종 5품 한성부 판관의 직책을 주고 무예감독을 겸하게 했다. 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의 백성이 된 김 판관이었다. 김 판관에게 숭례문 밖에 가옥과 살림을 챙길 노비를 내주었다. 허나 호판을 비롯한 대신들이 당분간 김 판관을 김종서 집에 머무르며 일을 배우게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종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예판은 처음 조선인이 된 김 판관을 위한 작은 연회를 열겠다고 해서 허락했다.

부왕과 향은 호판을 따르는 대신들이 김종서를 경계하기 위함임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허나 속내가 어찌 됐든 조정 대신들이 서로 일을 하겠다고 나서고, 책임을 나눠지겠다고 자청하고 있으니 이는 반길 일이었다.

향은 왈패들과 농가의 부부가 죽은 살인사건 이야길 꺼냈다.

부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참담한 일이구나. 어찌 그런 일이...”

“예 아바마마. 열네 명의 백성이 무참히 죽었사옵니다. 괘서사건의 배후와 관련이 있는 듯하옵니다. 해서 더는 묵과할 수가 없사옵니다.”

“해서 어찌할 것이냐? 이 일을 한성부와 형조가 공조하게 할 것이냐?”

“아니옵니다 아바마마. 괘서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선 아니 되옵니다. 그리되면 무고한 백성들이 잡혀가 고신을 당하고 죽어 나갈 것이옵니다.”

“허면?”

“믿을만한 자들에게 은밀히 맡겨야 하옵니다.”

“믿을만한 자라...”

부왕은 잠시 있다가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세자에게 소개해 줄 사람들이 있다. 일간 한번 보도록 하거라. 그들을 세자의 사람으로 쓰고 안 쓰고는 세자가 결정하거라.”

“예 아바마마.”

향이 잠시 부왕을 보다가 말했다.

“아바마마 소자 청이 있사옵니다.”


마침 중전이 드는 바람에 향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허나 부왕은 알고 있었다. 향이 먼저 입을 열지 않는 걸로 미루어보아 어려운 청이고 꼭 들어줘야 할 청이었다.

부왕은 속으로 되뇌었다. ‘청이라.’

부왕은 찻잔을 내려놓고 조선의 국본인 세자를 보았다.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지금 당장 용상을 내주어도 자신보다 더 나은 조선을 만들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선위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고 신하들은 세자가 만대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될 거라 여기기에 선위를 반대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세자가 보위에 제대로 오르길 바라고 있었다.

부왕은 세자 책봉식이 떠올랐다. 어린 세자는 하루 종일 걸리는 책봉식에서 단 한 순간도 찌푸린 적이 없었고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들조차도 오랜 시간을 한 자세로 있지 못했지만 어린 세자는 꼿꼿했다.

세자 자리에 오르고 나서 단 한 번도 학업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고, 힘들다 한 적이 없었고, 어찌나 총명한지 배우는 속도를 가르치는 스승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단 한 번도 부왕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속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연이어 세자빈 폐위를 할 때에도 세자는 말이 없었다.

부왕은 가슴 한켠이 시려왔다. 부왕이 세자에게 흠집을 낸 건 세자빈을 잘못 간택한 일이었다. 어찌 사람 보는 눈이 이리도 부족하단 말인가. 부왕은 지혜로운 중전을 떠올렸다. 성상께선 이리도 덕이 많은 중전을 골라주셨는데.

부왕은 세자를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 완벽한 세자빈을 골라주려 했다. 허나 이미 세자는 완벽했기에 그에 맞는 세자빈이 없었다. 부왕이 심사숙고한 세 명의 세자빈은 덕이 부족했고 명이 부족했다.

부왕이 고른 세자빈은, 모두가 세자에게 여인으로 사랑받고자 했으나 세자의 눈길 조차 얻지 못했다.

세자는 또다시 세자빈을 들이고자 할 때에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의사표현을 분명히 했다. 세자빈을 맞지 않게 해달라 부탁하지 않았다.

세자는 단 한 번도 청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세자가 청을 하고 있었다. 또한 쉽게 입을 열지 않고 부왕을 보고만 있었다.

부왕은 이젠 아비로서 아들을 보았다.

아들이라고는 하나 깊은 눈에 무엇이 있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비로서 모든 면이 완벽하고 원칙주의자인 아들이 가끔은 어려웠다. 아비에게 기대기도 하고 허점도 보이고 야단맞을 일도 하고 떼를 쓰기라도 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었다. 허나 배부른 투정이었다. 아비로서 늘 아들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런 아들이 있어 아비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있었다.

더 없이 복된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처음으로 아비에게 청을 하고 있었다.

부왕은 사내로서 향을 보았다. 흠잡을 곳 없는 사내였다. 명나라까지 소문이 자자할 만큼 향의 외모는 출중했다. 고귀한 아름다움이었다.

허나 그 고귀한 마음을 얻는 여인이 없었다.

부왕은 소싯적에 현명하고 어진 중전을 좋아했다. 대신들이 후궁을 들이라 하면 중전이 있으니 필요 없다고 호통을 쳤다. 허나 후궁들은 늘어갔고 발길은 후궁 처소를 향했다. 부왕은 책 읽을 시간도 없이 바빴지만 꽃봉오리처럼 물오른 나인들을 보면 그날 밤 책을 덮었다. 해서 자식이 스물 여섯이었다.

허나 향은 달랐다. 여색을 멀리 하고 늘 서책에 묻혀 지내고 틈이 날 때면 활쏘기를 즐겼다. 이제껏 부왕이 본 언행일치가 되는 유일한 사내가 향이었다.

향은 사내로서 까다로웠다. 마음이 가지 않는 곳에 몸이 가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리 뛰어난 미모의 여인을 봐도 향은 움직이지 않았다.

충신이 한 임금을 섬기듯 향은 한 여인을 향한 마음 밖에 없는 것인가.

가슴이 서늘해졌다.

세자가 처음으로 청을 하고 있었다.

부왕은 향의 깊은 눈을 바라보았다. 문득 햇살 같이 웃던 단진이 떠올랐다.

부왕이 물었다.

“말해보거라.”

향이 부왕을 보았다.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 있사옵니다.”

부왕은 긴장했다.

.....

“소자, 아바마마께 천거할 인재가 있사옵니다.”

부왕의 입에서 다행인지 실망스러움인지 모를 숨이 빠져나왔다.

부왕이 물었다.

“지난번에 말했던 믿을만하다던 그들이냐?”

“예 아바마마.”

“어디 소속돼 있는 사람이더냐?”

향이 잠시 있다가 말했다.

“아바마마, 조정에 출사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질 못하옵니다.”

부왕이 향을 보았다.

향이 말을 이었다.

“허나 누구보다 뛰어나고 누구보다 청명하고 누구보다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큰 인재들이옵니다. 아바마마께서 보시고 그들을 소자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면, 그들에게 크나큰 힘이 될 것이옵니다.”

“천출이더냐?”

향은 말이 없었다. 부왕은 잠시 있다가 말했다.

“한번 보도록 하자.”

향이 웃으며 부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바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부왕은 궁금했다. 누군데 세자가 이토록 기뻐하는 것인가.

부왕은 궁금했다. 세자가 홍단진이란 그 아일 곁에 두고 싶다고 말했다면 자신이 무어라 했을지.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향의 눈길이 동궁전 나인들을 향했다. 향의 눈길에 아주 잠깐 사내의 애끓는 마음이 드러났다. 그 찰나를 부왕은 놓치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길을 단진이 달리고 공두가 뒤쫓았다. 백겸과 창이, 도화와 인옥 역시 달렸다. 삼년을 끌고 간 왈패들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조금 전 국밥집에 나타난 왈패들에게 삼년이 끌려가는 걸 단진은 보고만 있었다. 창이도 백겸도 단진에게 선택할 시간을 주었다.

삼년의 비명소리가 멀어지자 단진은 튀어나갔고 모두가 그 뒤를 쫓았다.

백겸이 단진에게 궁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삼년을 찾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공두는 뒤늦게 시간이 지체된 걸 깨닫고 단진에게 궁으로 가자고 난리쳤지만 소용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모두가 멈춰섰다.

분명 이 골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담장 너머의 집에서 나오는 불빛만이 있을 뿐이었다. 담장을 타고 넘었다고 해도 인가였고 이렇게 조용할 수는 없었다. 또한 왈패들은 자신들이 따라오는 걸 알지 못하니 도망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어디로 감쪽같이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진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곳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보자!”

공두가 단진을 붙잡고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가긴 어딜 가! 걔 찾아서 뭐하게! 너 이재열 싫어하잖아!”

‘너 민혁 싫어하잖아!’

단진은 육갑 때와 같은 말을 했다.

“싫어한다고 죽길 바라지는 않아.”

공두가 지랄지랄 했다.

“야! 그럼 나는! 네가 좋아하는 나는! 좋아한다고 살길 바라지는 않는다는 거냐! 지금 궁에 안 가면 나는 죽어! 야! 닭!”

공두가 단진을 노려보다가 백겸의 멱살을 잡았다.

“봤냐! 봤어? 네 쌍둥이 닭 때문에 이제 내가 죽게 될 거야! 내가...죽어서도 네놈에게 원수를 갚을 것이다!”

창이가 공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장난할 때냐?”

공두가 자신의 뒤통수를 잡고 창이를 노려보았다.

“네 이놈! 감히 나에게 배운 재주로 무예시합 일등을 거머쥔 놈이, 어찌 이리 은혜를 모른단 말이냐!”

창이가 손으로 공두의 얼굴을 밀어냈다.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인지 집안에서 문을 여는 기척이 들렸다.

도화가 성질을 팍 냈다.

“조용히 해!”

도화의 눈에 그제야 인옥이 들어왔다.

“너 집에 아직도 안 갔어! 돌겠네 진짜! 빨리 안 가!”

인옥은 금세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단진의 등 뒤로 숨었다.

도화가 단진을 잠시 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서봄. 너한테 결정하라고 했지 해결하라고는 안했어. 네 뜻 알았으니까 이재열은 우리한테 맡기고 빨리 궁으로 돌아가!”

그때였다.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니 그들이 놓친, 한 사람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좁은 골목이 있었다. 단진이 먼저 들어가려 하자 백겸이 확 밀쳐냈다. 뒤뚱거리는 단진을 창이가 잡아주었다. 창이가 백겸을 따라가고 그 뒤를 단진이, 인옥이 들어갔다. 도화는 화를 누르며 들어가고 공두는 지랄지랄 하며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을 벗어나니 불빛과 함께 숲으로 가는 길목이 보이고 넓은 마당에 허름한 이층집이 있었다. 왈패들과 삼년의 모습이 보였다. 두들겨 맞아 기절했던 삼년이 깨어나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야!”

창이가 말했다.

“걔 다시 줘라!”


마당에는 곳곳에 횃불과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모닥불에는 새끼 돼지를 굽고 있었다. 새끼 돼지에서 떨어지는 기름이 모닥불을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하고 있고 잘 익은 고기의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모닥불 주변에서 늦은 저녁을 준비하던 왈패들이 일어섰다. 부지깽이로 불을 살피던 왈패는 불이 붙은 장작을 들고, 새끼 돼지의 살점을 발라내던 왈패는 낫을 든 채로 일어서고 다른 왈패는 짱돌을 들고 그들을 보았다.

이층집과 천막에서 십수 명의 왈패들이 도끼와 짱돌을 들고 나타났다.

왈패들의 소굴이었다. 대두 왈패들과는 다르게 점박이 왈패는 벌이가 꽤 있고 이곳은 노름빚으로 빼앗은 점포의 창고로 쓰던 곳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 옆에 삼년이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삼년은 이미 왈패들에게 한바탕 얻어터진 후라 입은 찢어지고 피와 땀이 범벅이 돼 사람 꼴이 아니었다. 삼년의 손이 통나무 위에 있었다. 배가 불뚝 나온 왈패가 삼년의 손목을 자르기 위해 도끼를 들고 있었다.

삼년은 공포에 질려 자신을 구하러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삼년은 자기 꾀에 넘어가 죽게 생겼다. 이게 아니었다. 왈패들을 국밥집으로 부른 건 삼년이었다. 모든 이야기가 잘 끝나고 왈패들이 들이닥치면 백겸과 창이가 자신을 구해주는 걸로 마무리될 줄 알았다.

삼년도 자신이 단진에게 살인자라고 몰아붙일 줄은 몰랐다. 감정의 밑바닥까지 드러낼 줄은 몰랐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으니 공포에 질려 보이는 게 없었다.

삼년의 눈에는 주변에 널려있는 낫이며 곡괭이, 이가 빠진 녹슨 칼이 보일 뿐이었다. 공포가 커지가 왈패의 손에 든 도끼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삼년이 동공이 풀린 채 비명을 질러대자 왈패가 구정물을 삼년에게 끼얹었다.

삼년의 눈동자가 천천히 다시 돌아왔다.

삼년은 들창코 왈패를 보며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나...나는 노름의 노자도 몰라요. 노름빚 내가 쓴 거 아니에요...”

“아따 시벌. 전에도 말했잖냐! 돈 빌린 적 없다고 오리발 내미는 놈은 봤어도, 노름한 적 없다고 하는 놈은 네놈이 처음이라고. 싸게 싸게 끝내자.”

두 왈패가 다시 삼년을 잡아 손을 통나무에 올려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묶었다. 삼년이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들창코 왈패가 도끼로 손톱을 다듬으며 말했다.

“여기 구경꾼도 오셨으니께 싸게 싸게 끝내야지. 대신 구경값은 후하게 치르고 가시오!”

왈패들은 하늘색의 애기씨에 노란 전모를 든 기녀에 쓰개치마를 쓴 마님에 무사 둘을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보았다. 한 왈패는 단진과 도화를 번갈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창이가 그 왈패의 시선을 막아섰다.

겁에 질려 소리치던 삼년의 눈에 하늘색 치마가 보였다. 왈패들 사이로 단진이 있었다. 단진이 삼년을 보고 있었다.

삼년이 단진을 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서봄...살려줘...제발 살려줘...제발...”

들창코 왈패가 엄청 황당해했다.

“아따 시벌! 내가 너무 오래 산 겨? 우리를 대적할 자가 애기씨여?”

왈패들은 시커먼 이가 드러나도록 껄껄 웃어젖혔다.

들창코 왈패가 뒤로 휘청이는 척했다.

“으미 무서운 거. 으미 무서워 뒤져버리겄네. 무서워 황천길 가겄네.”

왈패들이 또다시 껄껄 웃었다.

들창코 왈패가 한 걸음 다가서자 창이가 단진이를 한 팔로 꽉 안았다.

“근디 둘은 엿이여? 어째 요로코롬 붙어 있는다냐? 으미 시벌. 붙어서 안 떨어지는 겨? 도끼로 짜개줘야겠구먼.”

창이가 말했다.

“걔 다시 줘라!”

들창코 왈패가 황당해 했다.

“으미 시벌. 줬다 뺐는 겨? 고건 상도에 어긋나지.”

“상도 좋아하네! 좋게 말할 때 내놔! 더 못생겨지기 전에!”

들창코 왈패가 소리쳤다.

“아따 시벌. 조선 건국 이래 그런 황당한 말은 처음이네. 말로 해서는 안 되겄네.”

집안에 남아 있던 왈패들까지 무기를 들고 밖으로 나와 그들을 에워쌌다.

단진과 도화는 왈패들 수가 많아 당황했다. 인옥은 겁에 질려 단진의 뒤에 숨어 벌벌 떨었다. 공두는 골목에 숨어서 보고 있었다.

백겸과 창이는 서로를 보았다. 백겸과 창이는 단진과 인옥 도화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섰다. 백겸이 검을 뽑았다. 백겸은 검을 바닥에 던지고 검집을 잡았다. 창이도 검을 뽑아 바닥에 던지고 검집을 손에 잡았다.

들창코 왈패가 상당히 불쾌해 했다.

“으미 시벌. 지금 장난하는 겨? 지금 나 무시한 겨! 뜨거운 맛을 봐야 아 뜨거 하는 겨! 그려, 맛 좀 보여줘라!”

들창코 왈패가 신호를 보내자 십수 명의 왈패들이 백겸과 창이에게 동시에 덤벼들었다. 왈패들의 기세는 대단했으나 실력은 하찮았다.

낫을 휘두르던 왈패는 백겸의 검집에 맞아 나가떨어지고 짱돌을 휘두르던 왈패도 창이의 손에 나가 떨어졌다. 백겸은 덤벼드는 왈패를 잡고 날듯이 뛰어넘어 뒤에 있던 왈패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백겸과 창이가 움직일 때마다 바람소리가 났다. 힘은 어찌나 좋은지 한번 휘두를 때마다 왈패들은 붕 떠서 날아갔다. 왈패들이 하나 둘, 창고에 부닥치고 땅에 곤두박질치고 모닥불에 주저앉은 왈패는 불이 붙었다고 난리법석을 떨어댔다. 왈패 소굴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단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백겸과 창이를 보고 있었지만 왈패들이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움찔거렸다. 주먹 쥔 손이, 가슴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단진은 십 개월을 엄마 뱃속에 함께 있던 백겸을 보았다. 백겸은 어릴 적부터 폭력을 싫어해 시비가 붙어도 주먹을 쓰지 않았다. 백겸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다. 백겸이 싸우는 걸 본 적은 딱 한 번이었다. 초등학교 때 단진에게 미친 정신병자라고 놀리던 남자아이를 죽도록 팼다. 그 남자아이는 이가 부러지고 코뼈가 나가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다. 단진은 손에 묻은 그 아이의 피를 바라보던 백겸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백겸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부터였다. 단진이 ‘미친 서봄’ 이라 불리기 시작했을 때가. 단진은 이후로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을 직접 혼내줬고 백겸을 지키기 위해 뛰어다녔다. 하지만 백겸을 지키기는커녕 늘 사고뭉치였다.

그런 백겸이 무서운 눈으로 싸우고 있었다.

배가 불뚝 나온 왈패가 단진에게 덤벼들자 도화가 전모로 후려쳤다. 뒤뚱거리는 왈패를 힘껏 걷어찼다. 백겸이 도화를 보았다.

들창코 왈패가 백겸의 뒤에서 도끼를 휘두르자 창이가 검집으로 내리쳤다. 들창코 왈패는 한방에 나가 떨어졌다.

왈패들은 자신들이 적수가 되지 않음을 깨닫고 네발로 기듯이 도망가야 했다. 그래도 들창코 왈패는 ‘두고 보자’ 는 인사말은 남기고 떠났다.

창이가 멍하니 있는 단진을 보았다.

“괜찮아?”

“괜찮지 그럼.”

단진은 웃었지만 긴장한 터라 입술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창이가 단진을 바라보았다.

백겸이 창이를 보았다. 단진을 바라보는 창이의 눈빛이 뜨거워 백겸은 시선을 돌렸다.

단진의 눈길이 삼년을 향했다.

창이가 단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검을 들고 삼년에게 다가갔다. 구정물에 눈물 콧물에 땀과 피로 뒤범벅이 된 삼년은 참으로 추했다. 창이가 삼년의 묶인 팔을 끊어주었다. 삼년이 어찌나 바들바들 떠는지 몸에서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단진은 삼년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대로 돌아섰다.

왈패들의 소굴을 벗어나 좁은 길을 나오자마자 백겸이 단진을 잡았다.

백겸이 단진을 보며 무섭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거야. 그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마.”

단진이 백겸을 보았다.

“민혁 잊어. 민혁을 만난 자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더라도 잊어. 그자를 입에 올리지도 마!”

창이가 단진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도화가 막아섰다.

단진을 잡은 백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가 그자를 살인자라고 하는 순간, 나도 살인자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명심해!”

공두가 갑자기 튀어나와 단진을 잡고 노려보았다.

“네가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순간, 나도 살인자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명심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단진은 백겸이 움켜쥔 검을 보고 있었다.


박 내관 머리의 가마솥이 펄펄 끓다 못해 가마솥이 쪼개지고, 이젠 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궁 밖으로 나간 단진과 공두가 유시 전까지 오기로 했는데 유시가 훨씬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오 내관을 밖으로 내보냈지만 아직 소식이 없었다.

향이 부왕을 강녕전에 모셔다 드리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선선하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더해져 가을 정취가 느껴졌지만 박 내관에겐 찬 서리 같았다.

박 내관은 향을 살폈다.

향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향은 부왕과 집현전 학사들 이야길 하기도 하고 올 가을은 여느 때보다 날씨가 좋다는 이야길 하기도 했다. 농사가 잘 돼서 백성들이 한가위를 잘 맞을 것 같다고 하고. 곧 있을 왕실행사인 사냥대회에 올해도 진양이 우승을 할 것 같다고 했다.

강녕전 앞에 멈춰섰다. 부왕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후원에서처럼 또다시 동궁전 나인들을 보았다. 그 눈길이 박 내관을 향했다. 박 내관의 심장이 요동쳤다. 박 내관은 부왕이 홍단진에 대해 묻기라도 할까 싶어 입이 타들어갔다.

.......

부왕이 눈길을 거두자 이번엔 김 내관의 날카로운 시선이 박 내관에게 꽂혔다.

향은 부왕이 침소에 드실 때까지 잠시 머물렀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박 내관은 부왕의 무언의 말이 무슨 뜻임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생각과는 다르게 박 내관의 지금 소원은 홍단진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해서 저하께서 침소에 드시는 것이다.

박 내관은 단진이 늦게 오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단진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향이 단진을 찾아 나설 것을 알기에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강녕전에서 나온 향의 걸음은 빨랐다.

박 내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걸음에 이름이 붙여지는 건 아니지만 박 내관은 알 수 있었다. 향의 저 걸음은 오롯이 단진을 향한 것이었다.

제등을 든 내관은 뛰다시피 했고 향의 뒤를 따르는 내관 나인들도 뛰듯이 향을 따랐다.

향은 동궁전을 향하고 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심중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박 내관이 향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하...오 내관이 찾으러 나갔으니 홍단진은 금방 돌아올 것이옵니다.”

향의 눈길이 밤하늘에 닿았다.

“궁 밖에 나가는 걸 그리도 좋아하더니 시각을 놓친 듯하구나.”

“예 저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지금쯤 동궁전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옵니다.”

향의 걸음에 설레임이 있었다.


향은 단진에게 눈길을 둔 채로 보고 있었다.

단진은 흰색 저고리에 하늘색 치마를 입고 남색 쓰개치마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

단진이 향의 앞에 앉았다. 단진의 입꼬리는 올라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진이 웃음을 참아보려 입을 다물었지만 금세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단진의 웃음이 향에게도 닿아 향도 연신 웃고 있었다.

“궁 밖에 나가는 것이 그리도 좋으냐?”

“예 저하. 또한...이상하옵니다 저하.”

향이 보았다.

“이리 고운 옷을 입었더니 자꾸 웃음이 나옵니다. 마치 날개를 단 것 같사옵니다. 헌데 날개는 달았으나 날개가 다칠까봐 날기는커녕 오히려 천천히 걷게 되옵니다. 해서 자꾸 웃음이 나옵니다. 저를 위해 옷을 입은 것인데, 제가 옷을 모시고 다니게 생겼사옵니다.”

향이 웃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만 웃음이 나옵니다.”

“저하. 다녀오겠사옵니다.”

동궁전 마당에 단진과 도포에 갓을 쓴 공두가 향에게 인사했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도록 하거라.”

단진이 활짝 웃었다.

“예 저하.”

향이 단진을 보았다. 향을 보던 단진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저하. 소인이 없어도 오늘 하루 잘 보내셔야 하옵니다...”

향이 웃었다.

“그리도 내 걱정이 되더냐?”

향이 단진의 맑은 눈을 보았다.

“이리 생각하거라. 네가 궁 밖에 나가 나를 떠올리면 내가 잘 못 지내는 것이다. 네가 궁 밖에 나가 마음껏 웃고 즐기느라 궁을 잊어버린다면, 내가 잘 보내는 것이니, 나를 위해 그리하거라. 할 수 있겠느냐?”

단진이 웃으며 말했다.

“예 저하. 그리하겠사옵니다. 또한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겠사옵니다.”


향의 눈에 애틋함이 가득 찼고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향이 동궁전에 거의 다다랐을 때 공두가 달려왔다.

“저하!”

향의 눈은 단진을 찾고 있었다.

공두가 향의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저하. 큰일 났사옵니다. 홍단진이 궁으로 들어오지 못했사옵니다. 홍단진이 정신이 나간 듯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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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숙원 홍씨 93. 용무용과 그들 +3 21.04.05 1,133 9 21쪽
92 숙원 홍씨 92. 이향, 양주로 향하다-3 +2 21.04.01 1,149 9 18쪽
91 숙원 홍씨 91. 이향, 양주로 향하다-2 +2 21.03.29 1,173 9 16쪽
90 숙원 홍씨 90. 이향, 양주로 향하다-1 +2 21.03.25 1,200 9 19쪽
89 숙원 홍씨 89. 비보 +2 21.03.22 1,233 9 20쪽
88 숙원 홍씨 88. 단진을 향한 이향의 마음 +2 21.03.18 1,285 9 16쪽
87 숙원 홍씨 87. 그들의 이향 +4 21.03.15 1,292 9 18쪽
86 숙원 홍씨 86. 낙엽비 +2 21.03.11 1,307 9 19쪽
85 숙원 홍씨 85. 단진, 부왕과 마주치다 +2 21.03.08 1,335 9 18쪽
84 숙원 홍씨 84. 용무용, 이향을 만나다 +5 21.02.04 1,384 10 24쪽
83 숙원 홍씨 83. 백겸, 김종서를 만나다 +3 21.02.01 1,439 10 19쪽
82 숙원 홍씨 82.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3 +2 21.01.28 1,484 10 23쪽
81 숙원 홍씨 81.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2 +3 21.01.25 1,515 10 18쪽
80 숙원 홍씨 80.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1 +2 21.01.21 1,527 10 21쪽
79 숙원 홍씨 79. 진양, 사저로 백겸과 창이를 부르다 +2 21.01.18 1,559 10 17쪽
78 숙원 홍씨 78. 단진과 공두, 김종서 집에 들다 +3 21.01.07 1,561 9 20쪽
77 숙원 홍씨 77. 목멱산의 첫 모임 +2 21.01.04 1,583 10 14쪽
76 숙원 홍씨 76. 모두 목멱산에 오르다 +2 20.12.31 1,604 10 23쪽
75 숙원 홍씨 75. 용모파기 +2 20.12.28 1,625 10 17쪽
74 숙원 홍씨 74. 진양과 안평, 입궐하다 +3 20.12.24 1,655 10 26쪽
73 숙원 홍씨 73. 다시 돌무덤으로 +2 20.12.21 1,674 10 21쪽
72 숙원 홍씨 72. 이향의 진귀한 서책 +2 20.12.17 1,703 10 25쪽
71 숙원 홍씨 71. 단진, 육갑을 마음에서 내려놓다 +3 20.12.14 1,723 10 14쪽
70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2 20.12.10 1,733 10 25쪽
69 숙원 홍씨 69. 향의 고백 +4 20.12.07 1,752 10 16쪽
»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3 20.12.03 1,782 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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