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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188
추천수 :
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1.01.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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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글자
23쪽

숙원 홍씨 82.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3

DUMMY

숙원 홍씨 82.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3


향이 미소 지으며 백겸을 보고 있었다.

백겸은 누군지 알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그저 보고만 있었고. 창이도 궁금했으나 감히 무슨 일이기에 웃느냐고 물을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진양과 안평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하...”

향이 진양을 보았다.

“저하...누군지 알 것 같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여쭤도 되겠사옵니까?”

향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말 그대로다.”

향이 최 무사를 보았다.

“확인해 보면 알 터.”

그 순간 최 무사는 향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를 알아채고 놀라 백겸을 보았다. 최 무사의 반응을 본 박 내관은 궁금해 백겸을 보고 최 무사를 보았다.

진양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하...”

그때였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저는 아무 죄가 없어요...살려주세요...”

“대군마마!”


향과 진양, 안평, 백겸, 창이가 밖으로 나와 보니 웬 거지가 별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향의 곁에는 최 무사와 권 무사가 바짝 붙어 있고 그 옆으로 진양과 안평이 서 있고 그 옆으로 백겸과 창이가 보고 있었다.

김가가 진양에게 다가왔다.

“대군마마. 혹시나 싶어 집 주변을 둘러봤사온데, 이 거지가 짚단을 쓰고 숨어있었사옵니다. 이 거지가 저는 죄가 없고 자객이 숨어있다고 소리치기에. 그곳에 가봤으나 자객은 없고 이 거지가 도망치려 하는 걸 잡아왔사옵니다.”

불야성처럼 밝은 집안에 누더기를 걸친 삼년은 한눈에 봐도 거지였다. 끌려오지 않으려 몸부림치다 짚신과 버선이 벗겨져 한쪽 발에만 낡은 버선이 신겨져 있었다. 삼년은 짚단을 꼭 끌어안고 겁에 질려 있었다.

진양이 삼년에게 다가오자 삼년은 바들바들 떨었다. 마치 진양이 육갑을 죽이던 그때로 돌아간 듯 공포에 휩싸였다.

진양이 삼년을 살폈지만 검을 쓰는 자는 아니었다. 지금은 한가하게 이런 놈을 상대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끌고 가 가두거라. 내가 직접 문초할 것이다.”

김가와 은가가 삼년을 일으켰다. 삼년은 일어서면서도 마치 방패라도 되듯 짚단은 꼭 끌어안고 있었다.

백겸과 창이는 삼년을 알아보고는 놀라 서로를 보았다.

향이 삼년의 상처투성이 발을 보았다.

“보내 주거라.”

그때였다. 멍청한 삼년이 죽음을 재촉하는 말을 내뱉었다.

삼년은 향에게 애원했다.

“저하...살려주십시오...소인은 죄가 없습니다...저하...”

그 말에 내금위 별감들이 검을 뽑아 삼년에게 겨누었다.

진양이 다시 돌아서 삼년을 향해 사납게 물었다.

“네놈이 어찌 저하를 아는 것이냐?”

삼년은 기겁해 주저앉았다.

“네놈이 어찌 저하를 아느냐고 물었다!”

“하...한성부에 잡혀 있을 때 뵈었사옵니다...괴문서를 쓴 역당의 잔괴라는 누명을 쓰고 잡혀 있었는데...저하께서 오시어 다 풀어주라 하셨사옵니다...그때 뵈었습니다...”

향이 삼년을 보았다.

백겸과 창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말을 안하는 편이 나았을 것을.

진양은 삼년의 낯이 익었다. 저 평범하고 밋밋한 얼굴을 어디선가 분명 보았다. 진양이 눈짓하자 김가가 삼년의 얼굴을 치켜들었다.

진양의 날카로운 눈길이 삼년을 향하자 겁에 질린 삼년의 눈동자가 허둥댔다. 그러다 삼년의 눈에 백겸과 창이가 들어왔다.

진양은 눈썹과 눈만 있는 용모파기를 하도 많이 봐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네놈이로구나.”

그 순간 삼년이 말했다.

“저...저는 수레를 끈 죄 밖에 없습니다...정말입니다...”

향이 백겸을 보았다. 진양과 안평도 백겸과 창이를 보았다.

“저는 수레를 끈 죄밖에 없습니다...정말입니다...저는 수레를 끈 죄밖에 없습니다...”


백겸이 나섰다.

“저하...저자는 죄가 없사옵니다.”

창이가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저하...저자는 소인들을 도운 죄밖에 없사옵니다.”

삼년이 외쳤다.

“맞사옵니다 저하...저들이 자객을 죽여 소인이 수레로 시신을 옮긴 것이옵니다...저는 아무 죄가 없사옵니다...”

향이 물었다.

“헌데 어찌해서 도왔느냐?”

삼년의 입이 뻐끔댔다.

진양이 사납게 말했다.

“네 이놈. 저하께서 하문하시는데 어찌 아무 말이 없는 것이냐?”

진양이 한걸음 다가갔다. 삼년의 얼굴에서 땀줄기가 흘러내리고 하도 바들바들 떨어 땀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네가 아는 모든 걸 말해야 살 것이다.”

삼년이 엎드렸다.

“저...저하...기녀 도화가 저들을 도와주라고 했사옵니다...”

백겸과 창이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평이 진양을 보았다. 진양은 이제야 그날의 여백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향이 물었다.

“너도 역병을 앓았느냐?”

“예 예 저하...역병을 앓고 일어나보니 끌려가고 있었사옵니다...”

“허면 백겸과 창이를 아느냐?”

삼년이 백겸과 창이를 보았다.

“알긴 아오나, 기녀 도화가 그들을 도와 달라 해서 그때 처음 알았사옵니다.”

향이 말했다.

“그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하거라. 네가 본 그대로를 말하거라. 그리하면 보내 줄 것이다.”

“예 예 저하.....”

삼년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쏟아내듯 말했다.

“소인은 노름한 적이 없는데 노름빚이 있다 했사옵니다. 해서 왈패들에게 쫓겨 다니고 있었는데. 기억을 잃어 아는 사람도 없던 터에, 하얀 벌판에서 봤던 기녀 도화를 보게 됐사옵니다. 해서 도화에게 돈을 빌려 달라 따라다녔사옵니다.”

.....

“왈패들이 손과 다리를 자른다 하여 살기 위해 그날도 기녀 도화를 미행하고 있었사옵니다. 헌데 저자들이 기녀와 함께 국밥집 골목으로 가다가 갑자기 멈춰섰사옵니다. 어떤 검은 옷을 입고 장검을 든 자들이 저들을 스쳐지나갈 때였습니다.”

.....

“멈춰섰던 저들이 갑자기 달려갔사옵니다. 그러자 기녀가 그 뒤를 쫓았고 저 역시 따라갔사옵니다. 검은 옷의 자객들이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단검을 꺼내들고 저것들은 뭐지? 하고 말했사옵니다. 그러더니, 저 작은 것부터 해치우자!”

창이가 튀어나가려 하자 백겸이 잡았다.

“단검을 던지려는 순간 창이가 그 자객에게 뭘 해치우는데? 하고는 잽싸게 단검을 빼앗아 목에 겨누고는 끌고 가려고 했사옵니다. 아마도 유인을 하려 했던 것 같사옵니다. 헌데 자객들이 저하를 향해 달려가자 창이가 단검을 던져 한 자객을 죽였사옵니다. 그리고는 잡고 있던 자객의 검을 빼 그를 베고 달려갔사옵니다.”

....

“어느새 백겸이 자객들을 향해 달려가서 막아섰사옵니다. 백겸과 창이는 검을 들고 있지도 않았는데 싸워 모두 이겼사옵니다. 순식간의 일이라 소인도 놀라 숨어 있는 것도 잊고 그들 앞에 섰사옵니다. 헌데 저들이 넋이 나가 피 묻은 손을 보며 벌벌 떨고 있는 것이옵니다. 해서 도화가 소인에게 시신을 옮기게 도와주면 돈을 줄 거라 했사옵니다.”

.....

“소인은 서둘러 가서 수레를 훔치고 돼지까지 가져 왔사옵니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저들이 정신을 못 차리니 기녀가 저들의 뺨을 후려쳤사옵니다.”

진양과 안평이 백겸과 창이를 보았다.

“살아야 한다고. 아직 신분도 모르고, 자객이어도 살인은 죄가 되니 도망가라고. 키가 크니 눈에 띄기 쉽다면서 빨리 도망가라고 재촉했고 저들은 자리를 떠났사옵니다. 해서 소인이 수레를 끌고 기녀가 머슴 옷으로 갈아입고 수레를 밀었사옵니다. 헌데 얼마 안가서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이 나타났사옵니다. 이 야밤에 무얼 끌고 가냐고 해서 먹고 살기 위해 돼지를 옮기는 거라 했사옵니다.”

....

“헌데도 그들은 짚단을 확 젖혔사옵니다. 돼지가 있는 걸 보고도 더 확인하려 했는데, 마침 순라군이 나타나자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사옵니다. 소인은 수레를 끌고 민가로 들어갔는데, 그 죽은 부부의 집에 불이 켜지면서, 비가 너무 쏟아지니 농사가 걱정된다면서 나오려 했사옵니다. 해서 수레를 멈췄는데. 그때 돼지가 땅에 떨어졌사옵니다.”

....

“그걸 다시 올릴 경황이 없어 그냥 끌고 가 오르막을 오르는데 천둥번개가 쳤사옵니다. 그때 기녀가 갑자기 시신들의 몸에 무언가가 있는지 확인했사옵니다. 소인은 빨리 가자고 재촉했으나 기녀는 시신을 다 살폈사옵니다. 갑자기 백겸과 창이가 다시 나타나자 기녀가 화를 냈사옵니다. 헌데 백겸과 창이가, 도망갈 곳은 없다! 우리는 정당방위다!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 지킨 거다! 하고 말했사옵니다.”

향이 백겸을, 창이를 보았다.

“그러고는...왈패들 소굴에 수레를 옮기는 걸 함께 했사옵니다. 이후에 그날 봤던 자객이 소인을 알아보고 쫓았사옵니다. 소인을 죽이려 했사옵니다. 해서 저들과 함께 있어야 소인이 안전하다 여겨 따라다니며 심부름을 하는 것이옵니다. 이게 전부이옵니다...”

향과 진양, 안평, 최 무사. 박 내관을 비롯한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향이 물었다.

“헌데 너는 어찌해서 왈패들 소굴에 시신을 옮겨놓은 것이냐?”

삼년이 쭈뼛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 왈패들이 소인을 하도 괴롭혀...그곳에 시신을 가져다 놓으면, 다른 왈패들의 소행인 줄 알고 두 패거리가 싸울 거라 여겨...복수하고 싶어서 그리하였사옵니다.”

진양이 물었다.

“허면, 돼지는 왜 가져온 것이냐?”

“혹시라도 시신에서 피가 흐를 수 있으니, 돼지의 피라고 하기 위해서였사옵니다. 성공은 했사옵니다. 자객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사옵니다.”

진양이 낮게 으르렁댔다.

“해서 네놈의 얕은 수 때문에, 죄 없는 부부가 죽고 왈패들이 모두 죽은 것이다.”

삼년이 애원했다.

“살려주십시오...”

안평이 물었다.

“헌데 너는 어찌해서 이 집을 염탐하고 있었느냐?”

“이집을 염탐한 게 아니옵니다. 기녀 도화가.”

백겸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진양대군께서 백겸에게 술을 왕창 먹일 걸 걱정했사옵니다.”

향이 진양을 보았다. 진양과 안평이 서로 보았다.

“해서 백겸과 창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보고하라고 해서 숨어서 보고 있었사옵니다. 헌데 소인 앞에 두 자객이 있었사옵니다. 정말이옵니다.”

최 무사가 앞으로 나섰다.

“검을 들고 있었느냐? 얼굴을 보았느냐?”

“얼굴은 못 보았사옵니다. 헌데 장검을 들고 있었사옵니다. 소인이 왔을 때는 한 명이었는데. 또 다른 사람이 왔사옵니다. 해서 둘이 이야길 나누고. 백겸과 창이가 집안으로 들어가다가 돌아보자 숨었사옵니다.”

백겸과 창이가 서로를 보았다.

“백겸과 창이가 안으로 들어가자 한 자객이 걸어 나와 대문을 뚫어져라 보았사옵니다. 그리고는 검을 치켜들고는 그 자리를 떠났사옵니다. 헌데 한 명이 계속 있어서 소인은 나가지 못하고 있었사옵니다. 헌데 저 나으리들이 갑자기 나타나자 그 자객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소인은 도망가려 했는데 다리가 저려 넘어지는 바람에 잡혔사옵니다...”


향이 말했다.

“보내 주거라.”

최 무사가 말했다.

“저하...환궁하셔야 하옵니다.”

박 내관이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저하..환궁하셔야 하옵니다.”

향이 웃었다.

“무에 걱정이냐. 용맹한 안평이 있지 않으냐.”

안평이 멋쩍어 했다. 향의 눈길이 백겸과 창이를 향했다.

“확인할 게 있다. 모두 따라 오거라.”

향과 진양, 안평, 백겸과 창이가 밤길을 걸었다. 최 무사와 별감들은 조금 전에 본 자객으로 인해 바짝 긴장해 있었다.

백겸과 창이가 대문을 나섰을 때 살기가 느껴졌다. 해서 그곳으로 가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허나 무언가가 이상해 보니 나무 위였다. 그 순간 자객이 뛰어내려와 도망쳤고 백겸과 창이가 달려갔으나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박 내관은 안절부절못하며 향에게 환궁해야 한다고 애원했으나 소용없었다.

향은 앞서 걸었고 진양과 안평, 백겸과 창이가 뒤를 따랐다. 내금위 별감들은 바람 소리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변을 살폈다.

진양이 말했다.

“저하...오늘은 너무 위험하옵니다. 도처에 역당이 깔려있사옵니다.”

안평이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저하...또한 사라진 내금위 별감들의 행방도 찾지 못하였사옵니다...저들은 살인을 함에 있어 망설임이 없사옵니다.”

향이 말했다.

“허니 더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

“하오나 저하...”

“지금 그 자객들의 정체를 알아낼 유일한 길은 순포란 자구나.”

진양이 말했다.

“저하! 소신이 무슨 수를 써서든 입을 열겠사옵니다.”

“그들이 지키는 건 사람이 아니다. 대의다. 허니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향이 멈춰서 창이를 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방도가 있겠느냐?”

창이가 향을 보았다.

“저하...그들을 겪어봤으나,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누군가를 지키려 하지도 않사옵니다. 오로지 그들의 대의를 이루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있사옵니다. 허니 어떤 방법으로도 순포의 입을 열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창이가 덧붙였다.

“허나...”

모두가 창이를 보았다.

“그가 실수를 할 수는 있을 것이옵니다.”

“실수를 한다?”

“무예시합 날에도 순포는 진검을 빼들었고. 대군마마께서 불시에 그자를 저희들과 한자리에 앉히셨사옵니다. 해서 그자가 저희들을 안다는 것을 알아내셨사옵니다. 그자가 들킨 것이옵니다. 그자는 또다시 그 같은 실수를 할 것이옵니다.”

향이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백겸이 말했다.

“창이 말이 맞다고 사료되옵니다. 오늘 시합 때도 소신에게, 우리 형제의 원수! 라 말하며 반드시 죽이겠다고, 감정을 내보였사옵니다.”

백겸이 덧붙였다.

“잘은 모르오나 소신에게 원한이 깊은 듯하옵니다.”

향이 보았다.


어두운 별채의 담장을 휙 넘어섰다.

호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도록 가만히 있었다. 별채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당의 등불이 꺼져있는 걸로 봐서 모두가 모여 있다는 신호였다.

호가 서둘러 마루 위로 올라갔다.

“호입니다.”

안에서 석이 문을 열었다. 호가 안으로 들어가니 용무용과 윤과 결이 앉아 있었다.

용무용은 호가 앉기도 전에 물었다.

“이향이 환궁했느냐?”

“송구합니다. 갑작스레 백겸과 창이가 쫓아와 몸을 피하느라...”

용무용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허면, 이향이 환궁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냐?”

호가 고개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형님. 어떤 거지가 숨어 있는 걸 모르고 그만. 그놈이 끌려들어가는 바람에 이리 되었습니다.”

용무용이 탁자를 ‘탁’ 소리 나게 쳤다.

“변명을 듣자 했더냐? 환궁했느냐 물었다!”

용무용은 노여웠다.

“대체 언제까지 내가 일일이 말을 해줘야 하는 것이냐? 어제는 내금위 별감이라 조심스러워 그랬다 하더니, 오늘은 거지 때문이라? 네놈들이 정신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네놈들이 진정 대업을 망칠 작정이더냐?”

“송구합니다 형님.”

“50년을 준비해 온 대업이다. 바로 눈앞에 와 있으나 순간의 실수로 50년의 준비가, 50년의 희생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허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

용무용은 깊게 화를 내뱉고 호와 결, 석, 윤을 보았다.

“이향을 죽이기 위해 다 죽여야 한다면 죽여라. 이도를 죽이기 위해 조선 백성을 다 죽여야 한다면 죽여라. 놈들이 우리의 부모와 형제를 다 죽인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할 것이다. 부모 앞에서 자식의 사지를 찢어죽일 것이다. 자식 앞에서 그 부모의 배를 가를 것이다. 그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며 울부짖을 때, 놈들이 한 것처럼 우리는 웃을 것이다.”

용무용의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호와 결, 석과 윤의 눈에는 분노가 타올랐다.

“잊지 마라. 눈앞에서 죽어간 형제들을, 피를 토하며 죽어간 우리 부모를...”

......

“이 조선은 우리 고려의 것이다. 우리는 이씨 도적놈들을 척살하고 우리의 고려를 되찾을 것이다! 우리가 다 죽더라도 우리의 고려는 되찾을 것이다! 우리의 피는 조선에 뿌려지고. 우리의 뼈는 반드시, 고려의 땅에 묻힐 것이다! 알겠느냐?”

“예 형님. 명심하겠습니다.”

용무용의 눈은 사나웠다. 진양이 백겸과 창이를 불렀다고만 여겼으나 이향이 나타났다. 이향이 진양의 집으로 갔다면 뭔가 조짐이 있었을 터인데 그걸 알아채지 못하다니. 또다시 이런 실수가 생겨선 아니 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날짜가 잡힐 것이다. 그전에 어떻게 해서든 이향을 만나야 했다.

용무용이 윤을 보았다.

“너는 확실히 처리한 것이냐?”

윤의 살기 가득한 눈에는 인정이 없었다.

“예 형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조리 처리했습니다.”

윤은 자신의 우상이던 창이가 백겸과 함께 있는 걸 목도했다. 윤은 둘 다 직접 죽이고 싶었다. 윤이 용무용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형님.”

용무용이 보았다.

“백겸의 기억이 돌아온다면 낭패가 아닙니까? 제가 처리하게 해주십시오.”

“너는 할 수 없다.”

“하오나 형님.”

“창이가 할 것이다.”

모두가 놀라 용무용을 보았다.

“백겸의 기억이 돌아온다면 창이 역시 돌아올 것이 아니냐!”

“예 형님. 허면 이향이 환궁했는지 직접 살피고 오겠습니다.”

호가 말했다.

“이향은 이미 진양의 집을 나섰습니다. 어디로 간지는 모르오나, 이향과 진양, 안평, 백겸 창이 형님 모두 함께 나왔습니다.”

“모두 함께 나왔다?”

“예 형님.”

용무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두 함께?

용무용은 이향을 떠올렸다. 고귀한 듯 웃고 있으나 그 눈 속에 날카로운 검이 도사리고 있는 걸 용무용은 분명 보았다.

이향이 그냥 백겸과 창이를 만나러 나오진 않았을 터.

이향이라면 확실하게 계책을 세웠을 테고. 그들이 아는 모든 걸 알아냈을 것이다. 허면 이향이 그들에게서 알아낸 걸로, 이향은 무엇인가를 추측해 냈을 것이다. 추측했다면 그 다음은 확인하고 싶겠지. 허면 확인하기 위해...

용무용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용무용이 호에게 물었다.

“어느 방향으로 갔느냐?”


“아버님...편히 주무십시오...”

정자관을 쓴 김종서는 촛불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고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 전 인옥이 문안인사를 하고 갔다. 병을 앓기 전에는 어찌나 반듯하고 심성이 고운지 흠잡을 곳 없는 며느리였다. 허나 병을 앓고 일어나서 이제껏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나가게 해달라고 빌던 인옥의 입에서 아버님 소리가 나왔다.

단진이 떠올랐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저하께서 믿어주셨습니다...’

단진의 맑은 눈의 기개는 전장을 누비는 장수의 눈빛이었다. 어찌 그런 작고 여린 아이의 눈에 그런 결기가 있을까.

백겸이 떠올랐다.

어찌 그토록 닮았을까. 어찌 그토록 닮을 수 있을까.

백겸이 살아있다는 말이 뜬구름 같았으나 믿고 싶었다. 허나 너무도 허황된 말이라 믿기지 않았다. 백겸인데 백겸이 아니라니. 눈을 마주쳐도 모른다니.

백겸이 살아있다면 찾아왔을 터.

김종서의 입에서 남아있던 미련이 새어 나왔다.

함길도 도절제사로 발령받았을 때였다. 때마침 내금위에서 군관들을 뽑았다. 그 중에 검술실력이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자가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야인들의 침략이 계속되자 전하께서 무예가 출중한 내금위 군관들을 북방으로 파견하시겠다고 하셨다. 헌데 백겸은 무관으로 합격함과 동시에 자원했다. 해서 내금위에서 하루도 지내지 않고 바로 김종서의 수하가 되었다.

함길도의 무수히 많은 밤을, 뼛속까지 에이는 추위를 견디며 여러 해의 겨울을 함께 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야인들의 공격이 이어져, 하루도 거르지 않고 피 냄새를 맡아야 했고.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도...그리 고단한 김종서를 백겸은 묵묵히 위로했고, 어떤 경우에도 실망시키지 않았으며, 숨소리만 들어도 김종서의 마음을 알아챘다.

그런 수하였다.

그리 뛰어나 먼저 갔던가. 이제껏 살아있을 거라 믿었는데, 막상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보니 백겸이 죽은 건가 싶었다.

왜 거흘합족을 조심하라 한 것이냐...왜 그런 숙제를 주고 간 것이냐...

.....

김종서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무심히 짚신을 보았다.

‘저하께서 믿어주셨습니다...’

갑자기 단진의 말이 떠오르며 번쩍하고 번개가 내리쳤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저하께서 왜 연회를 궁에서 전담하겠다고 하셨는지. 박 내관을 직접 보내시어 좋은 차가 들어왔다고 챙겨 주시고. 조선인이 된 용무용의 축하연회는 수라간 나인과 상궁들이 모두 맡아서 하게 하셨는지.

김종서의 집 며느리가 역병을 앓고 일어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걸 아셨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김종서는 그저 저하께서 용무용이 조선인이 된 게 너무도 기쁘셔서 그리 하셨다 생각했다니.

김종서의 입에서 부끄러움이, 자책이 쏟아졌다.

머리가 희끗해질 동안 먹은 세월은 다 뭐란 말인가.

이 불충을 어찌한다. 이 불충을...

그때였다.

“아버님!”

김종서가 보니 승규가 서둘러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아버님.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김종서가 놀라 일어섰다.


어두컴컴한 마당에 향이 서 있었다.

김종서가 버선발로 달려 나와 향의 앞에 섰다.

“저하...어찌 이리 야심한 시각에 귀한 걸음을 하셨사옵니까?”

향이 미소 지었다.

“대감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김종서는 향의 그 깊은 마음에 가슴이 저려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하...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향이 걱정스레 물었다.

“대감,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김종서는 눈길을 떨구었다.

“아니옵니다 저하...소신을 부르시지 어찌 이리 오셔서 서 계시옵니까! 송구하옵니다 저하...저하...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향이 웃었다.

“그 전에 대감께 소개할 사람이 있습니다.”

어두운 집안에 등불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었다.

그제야 김종서가 향의 뒤를 보았다. 진양과 안평이 있었다. 그 뒤로 별감들이 있었다.

그리고 키가 큰 두 사내가 있었다.

백겸이 있었다.

김종서는 너무 놀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향이 그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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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원 홍씨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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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한 주 휴재합니다 21.06.16 66 0 -
공지 숙원 홍씨 월, 목 연재합니다 +2 20.06.21 336 0 -
95 숙원 홍씨 95. 이향, 한성부에 가다 +3 21.04.12 1,101 9 18쪽
94 숙원 홍씨 94. 향을 기다리다 +2 21.04.08 1,118 9 13쪽
93 숙원 홍씨 93. 용무용과 그들 +3 21.04.05 1,133 9 21쪽
92 숙원 홍씨 92. 이향, 양주로 향하다-3 +2 21.04.01 1,149 9 18쪽
91 숙원 홍씨 91. 이향, 양주로 향하다-2 +2 21.03.29 1,173 9 16쪽
90 숙원 홍씨 90. 이향, 양주로 향하다-1 +2 21.03.25 1,201 9 19쪽
89 숙원 홍씨 89. 비보 +2 21.03.22 1,233 9 20쪽
88 숙원 홍씨 88. 단진을 향한 이향의 마음 +2 21.03.18 1,285 9 16쪽
87 숙원 홍씨 87. 그들의 이향 +4 21.03.15 1,292 9 18쪽
86 숙원 홍씨 86. 낙엽비 +2 21.03.11 1,307 9 19쪽
85 숙원 홍씨 85. 단진, 부왕과 마주치다 +2 21.03.08 1,335 9 18쪽
84 숙원 홍씨 84. 용무용, 이향을 만나다 +5 21.02.04 1,384 10 24쪽
83 숙원 홍씨 83. 백겸, 김종서를 만나다 +3 21.02.01 1,439 10 19쪽
» 숙원 홍씨 82.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3 +2 21.01.28 1,485 10 23쪽
81 숙원 홍씨 81.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2 +3 21.01.25 1,515 10 18쪽
80 숙원 홍씨 80.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1 +2 21.01.21 1,527 10 21쪽
79 숙원 홍씨 79. 진양, 사저로 백겸과 창이를 부르다 +2 21.01.18 1,559 10 17쪽
78 숙원 홍씨 78. 단진과 공두, 김종서 집에 들다 +3 21.01.07 1,561 9 20쪽
77 숙원 홍씨 77. 목멱산의 첫 모임 +2 21.01.04 1,583 10 14쪽
76 숙원 홍씨 76. 모두 목멱산에 오르다 +2 20.12.31 1,604 10 23쪽
75 숙원 홍씨 75. 용모파기 +2 20.12.28 1,625 10 17쪽
74 숙원 홍씨 74. 진양과 안평, 입궐하다 +3 20.12.24 1,655 10 26쪽
73 숙원 홍씨 73. 다시 돌무덤으로 +2 20.12.21 1,674 10 21쪽
72 숙원 홍씨 72. 이향의 진귀한 서책 +2 20.12.17 1,703 10 25쪽
71 숙원 홍씨 71. 단진, 육갑을 마음에서 내려놓다 +3 20.12.14 1,723 10 14쪽
70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2 20.12.10 1,733 10 25쪽
69 숙원 홍씨 69. 향의 고백 +4 20.12.07 1,752 10 16쪽
68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3 20.12.03 1,782 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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