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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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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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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2.3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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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숙원 홍씨 76. 모두 목멱산에 오르다

DUMMY

숙원 홍씨 76. 모두 목멱산에 오르다


앳된 별감이 겁에 질려 검을 내밀었다.

어차피 상대가 되지 않는 걸 알지만 그래도 명색이 내금위 별감이었다. 마음과는 다르게 검을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놈이 역당이었구나. 어떻게든 이 사실을 상호군께 알려야 했다.

용무용이 물었다.

“그자를 왜 찾는 것이냐?”

“그건 말할 수 없다.”

결의 검이 별감의 팔을 벴다. 별감이 검을 떨어뜨리고 뒤뚱거리자 이번엔 결이 검을 별감의 허벅지에 찔러 넣었다. 별감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내질렀다.

용무용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두 번 묻지 않는다.”

.....

“네가 말한다면 너만 죽일 것이다.”

별감이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네 혈육을 모두 찾아 사지를 찢어 죽일 것이다.”

별감의 뇌리에 내금위 별감이 됐다고 좋아하던 부모님의 얼굴이 스쳤다.

용무용이 결에게 눈짓하는 순간 별감이 입을 열었다.

“저...저하를...저하의 곁을 맴돌아 그래서 찾는 것이오...”

앳된 별감은 아는 걸 모두 실토했다. 끝남과 동시에 결의 검이 그를 벴다.

용무용이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오던 호가 용무용 앞에 섰다. 용무용이 호와 결을 싸늘히 보았다.

“이게 그리도 어렵더냐?”

결과 호가 고개 숙였다.

“송구합니다.”

용무용이 호에게 말했다.

“넌 서둘러 가서 진양이 퇴궐하는 대로 뒤를 밟아라. 누구를 만나는지 무얼 하는지, 단 하나도 놓쳐선 아니 된다.”

“예 형님.”

호가 달려가자 용무용이 결에게 물었다.

“윤은?”

“모두 처리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도성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용무용이 걸어갔다.

용무용은 차분했으나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오늘 진양과 안평이 입궐한 사실을 아침에서야 알았다. 더 일찍 알았더라면. 손과 발이 묶인 순포가 아쉬웠으나 이미 흘러간 물이었다.

호와 결, 석은 시키는 일은 잘 하지만 순간의 판단력이 없었다. 내금위에서 누굴 찾는지 알아보라 했으나 뒤만 쫓을 뿐이었다. 해서 용무용이 직접 나선 것이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이제부터는 용무용이 직접 움직여야 했다.

용무용은 다시 국밥집 골목으로 들어섰다.

대체 왜 백겸이 이향의 곁을 맴도는 것인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왜...


“창이란 자가 호위무사가 아니었다는 말이구나.”

비현각 창으로 햇살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밝은 햇살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향이 앉아 있고 양 옆으로 진양과 안평이 앉아 있었다. 향의 옆으로 박 내관과 상호군 최 무사가 서 있었다.

진양은 이제껏 알아낸 모든 것을 향에게 보고한 터였다.

“예 저하. 처음 그 자를 본 것은 운종가였사옵니다. 소신을 하도 빤히 보기에, 눈빛이 마음에 들어 눈여겨봤는데, 그날 기방에서 또다시 그자를 봤사옵니다. 예사 인물은 아니었사옵니다. 해서 호위무사로 들어오라 했더니 싫다고 거절했사옵니다.”

향은 이제껏 들은 걸 정리했다.

백겸과 창이가 역병으로 기억을 잃어 신분도 알지 못하고, 함길도에서 나비문신이 있는 자들에게 쫓겨 도성까지 왔는데, 나비문신이 도성에 있었다, 나비문신을 찾기 위해 용무용에게 물었으나 모른다고 했다.

진양의 집에 있는 간자 순포의 어깨에 나비문신이 있다. 순포가 무예시합장에서 창이를 죽이려 한 것은 원한이 있던 게 분명하다, 해서 확인을 하려 불렀더니 백겸이란 자를 보고도 그런 반응을 보였다. 백겸과 창이는 진정 순포를 모르는 게 확실했고. 순포는 그들을 알고 있었다.

창이는 왜 무예시합장에 왔을까?

백겸과 창이는 무언가를 알고 있지만 숨기고 있었다. 왜?

백겸과 창이는 기방의 기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둘 다 키가 컸다.

향이 최 무사를 보았다. 최 무사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 무사가 알아듣고 품에서 용모파기를 꺼냈다.

햇살이 용모파기 위에 내려앉았다. 그곳에 백겸이 있었다.

향이 진양과 안평에게 물었다.

“혹, 창이란 자와 함께 있던 자가 이자더냐?”

진양이 용모파기를 보고 놀라 되물었다.

“예 저하...저하께서 백겸을 어찌 아시옵니까?”

안평도 놀라운 듯 용모파기를 보았다.

“저하. 혹 이자가 무슨 일을 저질렀사옵니까?”

향이 용모파기를 보았다.

“아니다.”

최 무사가 설명했다.

“이자가 저하의 곁을 맴돌아 찾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저하께서 미행을 나가셨을 때 이자가 저하를 보고 있었습니다. 수상쩍어 의금부로 추포해가려 했으나 기녀로 보이는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내가 보내주라고 했다. 헌데 며칠 후에 상호군이 그전에도 이자를 본 걸 기억해냈다.”

최 무사가 말했다.

“그날입니다. 저하께서 형판대감댁에 가실 때 운종가에서 저하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이자를 어디서 본 것 같아, 이자를 보느라 옆에 있던 자를 제대로 보질 못했습니다. 키가 큰 무사란 것만 기억합니다. 허니, 분명 이자의 옆에 있던 자는 창이란 자가 확실한 듯합니다.”

진양과 안평이 서로를 보았다.

최 무사가 말을 이었다.

“또한 그날 저하께서 환궁하실 때, 등 뒤에서 살기를 느꼈습니다. 헌데 그 살기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날 같이 있던 내관이 자객을 봤다고 했습니다.”

박 내관은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그날 밤 장대비가 쏟아졌고. 그 다음 날, 돼지가 그 마을에 떨어져 있었고, 왈패들이 장검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안평이 말했다.

“왈패들은 모두 여섯 자루의 검을 들고 나타났다고 하옵니다. 돼지를 떨어뜨리고 간 수레자국이 왈패들의 소굴로 향해 있었고. 허면 이는 수레에 여섯 자루의 검이 들어 있는 게 확실하옵니다.”

향이 말했다.

“검만 들어 있었겠느냐?”

진양의 가슴이 들썩였다.

“저하. 모든 게 들어맞사옵니다. 이자들은 그날, 그곳에 있었사옵니다.”

향이 끄덕였다.

진양이 말했다.

“저하, 둘 중 하나이옵니다. 이자들이 자객이어서 왈패들과 그 부부를 죽였거나, 이자들이 자객을 죽이고 시신을 치워. 자객의 무리들이 왈패들과 부부를 죽인 것이...”

진양은 이제야 모든 게 맞춰지는 것 같았다.

“저하...”

향이 끄덕였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그들의 조직이 큰 듯싶구나.”

진양과 안평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보았다.

향의 눈길이 허공의 햇살에 머물렀다.

“50년을 준비했으니 그러하겠지.”


향이 장계를 펼쳐 보여주었다. 진양과 안평이 그 장계를 보고 향을 보았다.

“최근 공주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헌데 왈패들이 죽은 사건과 흡사하구나. 십수 명이 죽었는데 원한도 아니고 이유도 모른다는구나. 또한 사체검시결과에 따르면 검술이 뛰어난 한 사람의 소행이라고 한다.”

안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하...이 중동골은, 소신에게 공양왕의 후손이 살아있다고 알려준 궁녀가 숨어있던 곳이옵니다.”

향이 되물었다.

“지금 그 궁녀가 거처를 옮겼다 했지?”

“예 저하. 해서 아까 말씀 올렸듯이, 지금 사병들이 수소문해 찾아갔사옵니다. 곧 연통이 올 것이옵니다.”

향은 말이 없었다. 진양도 안평도 말이 없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궁녀가 새로 마련한 은신처 역시 피로 물들어 있을 것이 자명했다.

비현각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햇살이 슬며시 모습을 감추었다.

향이 잠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죽어선 아니 된다. 서둘러 찾아야 한다.”

“예 저하.”

“결국 자객들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선, 그자들의 입을 열어야겠구나.”

진양이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저하. 저하! 소신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안으로 알아내겠사옵니다.”

향이 말했다.

“아니다. 내 이들을 직접 만나봐야겠다.”

향이 백겸의 용모파기를 보았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목멱산 초입에 들어서자 백겸이 멈춰섰다. 백겸은 단진이 국밥집에 들어온 직후 바로 이곳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공두에게 궁에 진양과 안평이 입궐해있다는 것과 그간 단진이 아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백겸이 돌아보았다.

단풍진 나무들 사이로 단진과 인옥이 손을 꼭 잡고 걸어왔다. 단진과 인옥은 쓰개치마를 푹 눌러쓰고 그 작은 공간 사이로 서로를 보며 재잘재잘 떠들고는 까르르 웃었다.

그럴 때마다 공두가 몸으로 단진을 밀쳤다. 튕겨져 나갔던 단진이 온 힘을 모아 공두에게 돌진했다. 그럴 때마다 창이는 고개를 젖히고 웃어댔다.

단진이 쓰개치마를 내리자 공두가 쓰개치마를 잡고는 단진의 얼굴에 아예 씌워버렸다. 단진이 쓰개치마 속에서 버둥대자 공두는 재밌는지 주먹으로 단진의 머리를 콩콩 때렸다.

인옥이 하지 말라고 애원하자 재밌는지 공두는 더 해댔다.

창이가 공두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목을 팔로 감았다.

그들의 무리에 끼지 못한 삼년은 골이 난 아이처럼 입을 툭 내밀고 있었다.

도화는 말없이 단진을 보고 있는 백겸을 살폈다.

인옥이 단진의 쓰개치마를 벗겨주자 단진은 공두를 살짝 째리고는 활짝 웃었다.

단풍진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반짝였다.

“와!!! 예쁘다!!! 우리 단풍놀이 온 거야?”

그 모습을 보며 창이가 웃었다.

“예 마마. 단풍놀이 왔습니다!”

창이의 팔에 끼어있는 공두가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며 지랄지랄 했다.

“누구맘대로! 누구맘대로! 나는 산 체질이 아니다! 나는 마포나루로 갈 것이다! 난 뱃놀이를 갈 것이다!”

단진이 쓰개치마를 던지고 땅에 떨어져 있는 낙엽으로 비를 뿌렸다. 단진이 낙엽을 한아름 안고 공두에게 뿌렸다.

“야! 닭! 너는 오늘 끓는 물에 들어갈 것이다! 용서치 않을 것이다!”

창이가 공두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공두는 몸을 뒤틀며 난리를 치고 단진은 팔을 활짝 펴고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인옥도 단진과 함께 뛰어다니고 있었다.

“소이야! 여기 앉아 봐!”

인옥이 낙엽 위에 앉자 단진이 낙엽을 뿌려주었다.

“와! 이쁘다 이쁘다!”

인옥도 흥에 겨워 주위에 있는 낙엽을 뿌려댔다.

창이에게 벗어나느라 진이 빠진 공두가 철퍼덕 주저앉으며 말했다.

“저 조류들은, 쌍으로 미친 거야? 아니면 원래 미친 것들끼리 쌍이 된 거야!”

단진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단진이 숨을 들이켰다. 단진이 창이와 눈이 마주쳤다.

단진이 활짝 웃자 창이의 불안했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저 웃음은 오롯이 창이의 것이었다.

단진은 더없이 좋았다. 단짝 친구 인옥이 있고, 단진을 보며 웃고 있는 창이가 있고, 눈만 마주치면 짜증내지만 더없이 가까운 공두가 있고, 무뚝뚝하게 보고 있는 도화가 있고, 싸늘하지만 단진의 하나뿐인 쌍둥이 백겸이 있었다.

그리고.

부러진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낙엽을 발로 툭툭 차고 있는 삼년이 있었다.

단진과 삼년의 눈이 마주쳤다. 단진의 입가의 미소가 햇살이 구름에 가리듯 사라졌다. 허나 미움이 아니었다. 원망이 아니었다. 그저 서먹서먹함이었다.

삼년도 마찬가지였다. 삼년은 괜히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시선을 돌렸다.

“봄아!”

인옥이 단진의 땋아 올려 다홍색 댕기를 맨 머리에 은행잎을 끼웠다.

“봄아. 이게 나인 머리구나...너무 귀엽다.”

이번엔 인옥이 단진의 귓가에 노란 은행잎을 끼워주자 단진이 빙그레 웃었다.

“예쁘다! 봄아! 봄아......”

인옥은 단진이 달라졌음을 알아챘다.

“봄아...너...너무 예뻐졌어!”

인옥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곤거렸다.

“너 진짜 사랑에 빠진 거야?”

단진이 수줍어하자 인옥은 잔뜩 들떠서 단진을 살폈다. 인옥이 단진에게 귀엣말하자 단진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인옥은 더욱 발그레해져 어쩔 줄 몰라 했다.

단진과 인옥은 잠깐이지만 첫사랑에 가슴 뛰는 소녀가 돼 있었다.

인옥이 단진의 미색 저고리와 감색 치마를 살피고는 말했다.

“내가 더 예뻐지게 해줄게! 나 옷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말했지? 내가 예쁜 옷 만들어줄게. 나, 수도 잘 놓는다! 이 치마에 은행잎을 수놓아줄게!”

언제 왔는지 공두가 잽싸게 와서 단진을 확 밀어내고 인옥에게 다가갔다.

작은 인옥이 놀라 한걸음 물러섰다.

“나는?”

“뭐...뭐가?”

“다음에 올 때 내 옷을 한 벌 지어오도록 하거라. 최고급 비단이어야 할 것이다.”

“왜?”

“왜냐? 내가 닭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싫다면.”

공두가 양손으로 단진의 볼을 잡아당겼다. 단진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 아!”

단진이 두 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 인옥이 바로 답했다.

“알았어! 알았어! 제발 놔줘!”

공두는 호구를 잡은 듯 방끗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 중, 조선에서 가장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은 인옥이었다. 닭이 이토록 쓸모가 있다니.

“전낭도 두둑이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닭을 만나게 해줄 것이다.”

단진이 공두를 째리자 공두가 혀를 내밀었다.

단진은 아까부터 무겁게 보고만 있는 백겸을 보았다.

“여름아!”

백겸은 따라오란 말만 남긴 채 걸어갔다. 백겸의 걸음은 표정만큼이나 무거웠다. 단진의 눈에 백겸의 손에 든 장검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헉...헉...

“난 더는...죽어도 못가...”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오르막에서 공두가 멈춰섰다. 공두는 갓을 풀어 던지고 대자로 누웠다.

이제껏 백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산을 올랐고. 도화가 백겸의 옆에서 발을 맞추며 걸었고. 단진과 인옥이 뒤를 따랐고. 공두는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올라오는 내내 한시도 입을 쉬지 않고 지랄지랄 했다.

삼년은 이 와중에도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까를 생각하다가 단진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게 좋겠다 싶어 뒤처졌다. 허나 창이가 있었다. 해서 창이의 뒤로 슬그머니 빠졌다.

단진과 인옥의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도 어느 새 사라지고 가픈 숨소리만이 들렸다. 인옥이 힘들어하자 단진이 인옥을 잡고 함께 올라왔다.

창이가 단진을 등 뒤에서 밀어주었다.

공두가 누워 헉헉거리자 인옥도 더는 못 가겠는지 주저앉았다.

백겸이 멈춰서 돌아보았다.

“거의 다 왔어. 빨리 일어나!”

“야! 서여름! 네가 저 닭을 꼭대기로 끌고 가 밀어버릴 작정인가 본데, 그럼 닭만 데려가지 나는 왜 데려와서...왜...진양대군 궁에 들어와서 닭을 빼돌렸더니, 돌아오는 건 개고생이야...”

.......

모두의 시선이 단진을 향하고 순간 정적이 흘렀다.

단진은 차분했다. 단진은 국밥집에서 나오자마자 공두가 백겸을 붙잡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향의 곁에 있던 자가 진양이란 사실에 가슴이 들썩이긴 했으나 잠시였다. 단진은 진양을 생각하느라 오늘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다 비운 마음을 진양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해서 단진은 걷는 내내 재잘재잘 떠들며 진양을 밑바닥으로 가라앉혔다.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백겸이 단진의 앞에 섰다.

“진양이 누군지 말해줄게.”

“나도 알아!”

모두가 놀란 눈으로 단진을 보았다.

단진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수양대군이잖아.”

백겸도 창이도 도화도 인옥도 삼년도, 모두가 진양이 육갑을 죽인 놈이라 말할 줄 알고 있었다.

백겸이 말했다.

“진양은.”

단진이 백겸의 말을 막았다.

“진양은 그저 작은 돌멩이야. 네가 작은 돌멩이를 태산을 만들고 있는 거야. 태산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점점 더 커질 거고. 걱정은 더 무거워지겠지.”

모두가 단진을 보았다.

단진이 백겸을 걱정스레 보았다.

“진양이 뭐라고 네가 이 좋은 날. 그렇게 땅만 보고 걸어!”

....

“여름아! 아무 걱정 말고 하늘을 봐! 너무 예쁘잖아! 우리 집으로 돌아갈 거잖아! 조선의 아름다운 하늘을 담아 가자!”

백겸이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진양을 입에 올릴수록 무게감이 점점 커져간다는 걸 깨달았다.

“여름아...”

그제야 여러 날 앓아누워 야윈 단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백겸은 잠시 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서봄. 명심해. 진양을 만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절대 안돼. 진양은 대군이야! 무모한 행동 하지 마!”

단진이 배시시 웃었다.

“걱정 마 여름아! 죽여도 수양대군으로 이름 바뀌고 나서 죽일 거야!”

“서봄!”

“진양을 죽일 일은 일어나지 않아. 왜냐면...”

단진의 눈빛은 단단했다.

“우리 저하께서 오래 사실 거니까!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역사에 수양은 그저 대군으로만 남을 거니까.”


와아...감탄이 절로 나왔다.

모두가 탁 트인 목멱산의 정상에 섰다. 하나의 막힘도 없이 시원스레 뚫린 그곳에서 모두가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맑은 하늘 아래 울긋불긋 물든 나무들이 산을 둘러싸고 있고, 그 아래에 도성이 펼쳐져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과 기와집이 모여 있는 북촌, 고즈넉한 경복궁이, 경복궁을 둘러싸고 있는 백악산과 주변 산들의 푸르고 노랗고 붉은 단풍까지 한눈에 보였다.

단진은 목멱산에서 도성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진짜 조선에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리 탁 트인 곳을 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높게 올라가야 했던가. 빌딩은 높아지고 그 높은 빌딩을 피해 탁 트인 공간을 찾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더 높게 더 높게 올라갔던가.

사람의 손이, 사람의 욕심이 닿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이 아름다운 곳에, 이 아름다운 조선에, 저 아름다운 궁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

단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창이가 단진을 눈에 담고 있었다.

도화가 창이를 보고 단진을 보았다. 창이의 눈에도 보일까? 보이겠지. 단진은 달라졌다. 인옥이 했던 예뻐졌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단진에게선 빛이 나고 있었다. 강인한 빛이. 사랑에 빠진 여인의 빛이.

그리고 그 빛 속에 이향이 있었다.

도화가 백겸을 보았다. 백겸도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은 마음이 편해 보였다.

백겸은 목멱산에 오르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이렇듯 탁 트인 곳에 있으니 다 잘될 것은 같은 희망적인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도성을 내려다보고 있는 단진을 보았다.

도화가 백겸에게 말했다.

“말 안한건 잘한 거야.”

백겸이 도화를 보았다.

“서봄이 진양이 누군지 알고 있어서 득이 될 게 없어. 그냥 무방비 상태에서 진양과 맞닥뜨리는 게 나아. 무모한 행동 안 할 거야. 그리고 나원빈 있잖아! 나원빈도 모르고 있어!”

단내가 훅 나며 공두의 얼굴이 백겸의 가까이에 있었다.

“내가 뭘 몰라?”

백겸이 얼굴을 뒤로 뺐다. 공두의 멍든 눈이 아까보다 더 퍼렇게 짙어져 있었다. 공두의 살 오른 얼굴이 보기 싫었다. 단진을 챙기지 않은 탓을 공두에게 하는 걸까. 그래야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있는 걸까. 책임을 떠넘기려는 걸까. 갑자기 바람처럼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도 이런 심정이셨을까.

백겸이 쌀쌀맞게 말했다.

“네 눈, 흉한 걸 너는 모른다고!”

공두는 그제야 자신의 멍든 눈을 톡톡 만져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흉해? 흉해? 야! 서여름!”

공두가 백겸의 멱살을 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네 쌍둥이 닭 때문에...”

창이가 말을 막았다.

“입 닫어, 지겨워 임마. 지겹다 못해 지루해.”

“이것들이 진짜!”

공두가 멱살 잡은 손을 탁 놓고 백겸을 보았다.

“백냥. 다음에 백냥 준비해. 안 그럼 내 눈이랑 똑같이 만들어 줄 거야!”

창이가 공두의 얼굴을 밀었다.

“너 백냥의 가치는 알고 말하냐?”

백겸이 말했다.

“원빈이가 언제 알고 말한 적 있어!”

“하긴 말하고도 모르지!”

“저 살찐 것도 모르고. 흉한 것도 모를 걸!”

공두가 눈을 부릅뜨고 비명을 내질렀다.

“야아아아아아!”

단진이 찌푸렸다.

공두가 눈을 부릅뜨고 지랄지랄 했다.

“이것들이, 이 천것들이, 품계 있는 나를 무시해! 서여름! 백냥이고 뭐고,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 빌어! 안 그럼 똑같이 만들어 줄 거야!”

백겸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든가.”

공두는 백겸보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 키가 더 컸고 늘 자신이 내려다본다는 생각이었다. 공두가 고개를 치켜들고 백겸을 노려봤지만 돌아오는 건 무시였다.

“그러든가?”

공두는 백겸을 빤히 보았다.

“그래! 그게 소원이라면. 나 브레인이야!”

공두가 백겸과 눈을 마주치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공두의 뒤꿈치가 땅에서 떨어졌다.

쪼옥.

공두의 입술이 백겸의 눈에 닿았다. ‘쪼옥’ 소리 나게 입맞춤을 하고 공두의 뒤꿈치가 제자리로 왔다.

“이제 썩을 거야!”

단진과 도화, 인옥, 삼년, 창이가 벙찐 얼굴로 보았다.

백겸은 잠시 있었다.

탁 트인 전경을 앞에 두고 백겸은 가장 불쾌하고 더러운 경험을 했다. 백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펄쩍 뛰었다.

“아! 더러워 진짜! 아! 아!”

백겸은 옷섶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아내며 난리를 쳤다. 공두는 백겸의 눈에 그냥 입맞춤만 한 게 아니라 침까지 묻혀 놨다.

백겸이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 단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백겸은 몸에 손대는 걸 유독 싫어했다. 유일하게 손대는 사람이 창이였다. 창이도 저런 엽기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도화도 어이가 없어서 웃고 인옥과 삼년은 잔뜩 찌푸렸다. 창이는 박장대소했다.

“역시 원빈이야!”

백겸이 닦고 또 닦으며 가려고 하자 공두가 백겸을 잡고는 입술을 내밀었다. 백겸은 움찔했다. 그러자 창이가 백겸을 뒤에서 잡고 공두에게 밀었다.

“네 뜻대로 해!”

“안놔! 놔!”

“이번엔 입술이다!”

공두가 입 운동을 심하게 하더니 입을 닭똥집처럼 쭉 내밀었다.

백겸은 기겁했다.

“하지 마! 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창이가 백겸을 안고 간지럼을 피웠다. 백겸은 짜증내다 웃다 짜증내다 웃다를 반복했다. 창이가 백겸을 잡고 뒹굴었다. 창이가 백겸의 몸 위에 올라타고 누르자 공두가 입을 쭉 내밀며 다가왔다.

백겸이 고개를 돌리며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백냥!”

“이백냥!”

“알았어 이백냥!”

단진은 잠시라도 백겸이 근심을 내려놓은 것 같아 마음이 짠해졌다. 공두가 고맙게까지 느껴졌다. 그러다 백겸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도화를 보았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도화는 단진과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거두고는 쌀쌀맞게 고개를 돌렸다.

도화는 성큼성큼 걸어가 모두를 보며 소리쳤다.

“다들 모여!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이야길 할 거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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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6 k1******..
    작성일
    20.12.31 13:24
    No. 1

    넘 재밌어용! 오늘도 잘보고갑니당!

    찬성: 5 | 반대: 0

  • 작성자
    Lv.7 cr*****
    작성일
    20.12.31 16:59
    No. 2

    너무 잘 봤습니다. 오늘은 단진 일행이 모처럼 즐거운것 같아 같이 흐뭇했네요^^ 다음화도 기대할게요~ 작가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찬성: 2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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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숙원 홍씨 87. 그들의 이향 +4 21.03.15 1,292 9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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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숙원 홍씨 85. 단진, 부왕과 마주치다 +2 21.03.08 1,335 9 18쪽
84 숙원 홍씨 84. 용무용, 이향을 만나다 +5 21.02.04 1,384 10 24쪽
83 숙원 홍씨 83. 백겸, 김종서를 만나다 +3 21.02.01 1,439 10 19쪽
82 숙원 홍씨 82.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3 +2 21.01.28 1,484 10 23쪽
81 숙원 홍씨 81.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2 +3 21.01.25 1,515 10 18쪽
80 숙원 홍씨 80.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1 +2 21.01.21 1,527 10 21쪽
79 숙원 홍씨 79. 진양, 사저로 백겸과 창이를 부르다 +2 21.01.18 1,559 10 17쪽
78 숙원 홍씨 78. 단진과 공두, 김종서 집에 들다 +3 21.01.07 1,561 9 20쪽
77 숙원 홍씨 77. 목멱산의 첫 모임 +2 21.01.04 1,583 10 14쪽
» 숙원 홍씨 76. 모두 목멱산에 오르다 +2 20.12.31 1,604 10 23쪽
75 숙원 홍씨 75. 용모파기 +2 20.12.28 1,625 10 17쪽
74 숙원 홍씨 74. 진양과 안평, 입궐하다 +3 20.12.24 1,655 10 26쪽
73 숙원 홍씨 73. 다시 돌무덤으로 +2 20.12.21 1,674 10 21쪽
72 숙원 홍씨 72. 이향의 진귀한 서책 +2 20.12.17 1,703 10 25쪽
71 숙원 홍씨 71. 단진, 육갑을 마음에서 내려놓다 +3 20.12.14 1,723 10 14쪽
70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2 20.12.10 1,733 10 25쪽
69 숙원 홍씨 69. 향의 고백 +4 20.12.07 1,752 10 16쪽
68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3 20.12.03 1,781 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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