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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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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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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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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숙원 홍씨 90. 이향, 양주로 향하다-1

DUMMY

숙원 홍씨 90. 이향, 양주로 향하다-1


“내금위 별감을 죽인 놈들도 마을 사람을 모두 죽인 놈들도 나비문신이 분명하거늘, 해서 확실하게 하기 위해 별감들 시신을 살피고 왔어야 했거늘. 한시가 급하거늘, 어찌해서 한성부 출입을 막는단 말이냐!”

....

....

“이게 다 네놈들 때문이다!”

....

....

“네놈들이 하루만 더 빨리 입을 열었어도 내금위 별감들이 죽진 않았을 것이다!”

....

....

“네놈들의 그 잔수로, 무고한 백성을 죽게 하고 왈패들을 죽게 하더니, 내금위 별감들까지 죽게 하고. 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됐다. 모든 것이 네놈들 탓이란 말이다!”

.....

.....

“안평 네 탓이다! 네가 그 궁녀에 관해 내게 먼저 의논했었다면 이런 참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사방이 울긋불긋 단풍진 산이고. 그 아래에 펼쳐있는 넓은 들판에 이름 모를 노란 꽃들이 가득 피어있고. 시원한 바람에 꽃향기가 불어오고.

가을 하늘은 높고도 청명하고, 그 맑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는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들판의 버드나무 아래에 네 마리의 말이 묶여 있고. 말들은 풀을 뜯어먹으며 이따금씩 말머리를 들고 콧김을 내뱉고 있고.

그 옆에 회색 무사복을 입은 백겸과 창이가 진양의 화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진보라 답호를 입고 갓을 쓴 진양은 백겸과 창이를 보며 한바탕 해대고 있고.

푸른색 답호를 입은 안평은 그만하라고 하고 싶었으나 더 화를 낼까 싶어 가만히 있었다. 안평 역시 속이 상하고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백겸과 창이는 아침부터 진양의 집에 가서, 진양의 입궐소식을 듣고 단진을 떠올리고, 걱정할 겨를도 없이 한 마을 사람이 모두 죽었다는 참담한 소식을 듣고, 순포의 입을 열어야겠다고 찾았으나 순포는 없고, 순포의 처소를 뒤졌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순포가 뒷산으로 다니는 것 같아 숲도 뒤졌으나 소득이 없었고.

진양이 집에 오자마자 따라오라고 하더니.

도성 밖을 조금 벗어난 이곳에 와서는. 백겸과 창이가 내금위 별감과 마을 사람들의 죽음에 참담해 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퍼붓고 있었다.

진양의 가슴이 들썩였다. 하다하다 이제 한성부에 들어가는 것조차 못하는 한심한 인사가 돼 있었다. 저하께 별감들 시신을 먼저 살피고 아뢰는 일조차 하지 못하는 신세가 돼 있었다.

안평이 진양을 보다가 말했다.

“모든 게 다 내 탓이오 형님. 허니 그만 고정하시오!”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느냔 말이다! 이제 내 발로 문지방도 넘어서질 못하고 있질 않느냐!”

“형님, 저하의 말씀 벌써 잊으셨소? 그들은 50년을 준비해왔지만 우리는 아무 준비가 없고. 그들은 우리를 잘 알지만 우리는 그들을 알지 못한다 하지 않으셨소. 또한 그들은 우리를 보고 있으나 우리는 그들의 그림자조차 어디 있는지 모르니. 참담해 할 시간도 비통해 할 시간도 없다 하질 않으셨소!”

백겸과 창이가 보았다.

“어찌 모르겠느냐! 저하의 말씀을, 저하의 뜻을 어찌 모르겠느냐! 알기에...”

....

“알기에 화가 나서 그런다...그 비통한 심정을 누르고 누르고 계실 저하를 생각하니...이런 망극한 때가 어딨단 말이냐! 허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느냐!”

....

“그 잔인무도한 놈들에게 화가 나고. 아무것도 안하고 이리 살 바엔 차라리 죽겠다 큰소리치더니, 고작 한다는 게, 모두 죽었습니다...벌하여 주시옵소서...이리 말하는 내게 화가 나서 그런다...”

“저하께 그런 모습을 보이실 작정이오?”

......

“형님...나라고 어찌 화가 안 나겠소.”

진양이 안평을 보았다.

“저하께서는 더 하실 것이오.”

......

“형님, 저하께서 당도하실 때가 되었소. 역당을 잡을 때까지 사사로운 감정은 접으라 하지 않으셨소.”

.......

‘그들을 잡을 때까지, 다시는 내게 너희들의 사사로운 감정을 보이지 마라.’

진양은 향의 엄한 눈길이 떠오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양이 걱정스레 보고 있는 안평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너는 어찌 이리 한가한 것이냐? 나만 그리 보고 있으면 어쩌자는 것이야! 저하께서 오실 길목을 살펴야지. 놈들이 어디 숨어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니냐!”

안평은 그제야 진양이 다시 돌아온 것 같아 안도했다.

백겸과 창이는 말없이 진양을 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반박했을 터인데 창이는 말이 없었다. 창이도 백겸도 무고한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진양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저하께서 오실 길을 살폈으나 수상쩍은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허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놈들은 분명 보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는데 키가 껑충 큰 두 놈이 진양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들을 일찌감치 부른 이유는 함께 별감들 행방을 찾기 위해서였다.

진양은 잠시 그들을 보았다.

바람에 백겸의 긴 머리가 나부끼고 창이의 덥수룩한 앞머리가 흩날렸다. 참으로 닮은 듯하며 닮지 않은 놈들이었다. 말로는 다 네놈들 때문이라고 해댔으나 속으로는 이들이 있어 안심이 됐다. 또한 진양은 창이를 믿었다. 저하를 지킬 최고의 방패는 백겸과 창이였다.

진양이 다가가 진지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거라.”

.....

“놈들이 지금 이곳 어딘가에서 우리를 보고 있을 수도 있고, 우리가 가는 그곳에 매복해 있을 수도 있다.”

백겸과 창이도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만일에 말이다. 놈들이 공격해 모두가 죽어나간다 해도, 너희들은 저하의 곁을 떠나선 아니 된다.”

......

......

“설령 내가 죽는다 해도, 저하께서 나를 구하라 명하셔도, 명에 불복종해 너희들이 죽는다 해도, 너희들은 저하의 곁을 떠나선 아니 된다.”

안평이 말했다.

“내가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꼭 그리해야 한다. 꼭 저하의 곁을 지켜라. 부탁한다.”

백겸과 창이가 보았다.

창이가 진양을 보았다. 까무잡잡한 얼굴의 눈에는 총기와 결기가 가득했고 뜨거웠다. 거침없는 사랑이었다. 향의 둘도 없는 충신이었다.

백겸이 안평을 보았다. 하얀 얼굴에 눈빛은 조용했으나 강하고 뜨거웠다. 외사랑이었다. 향의 둘도 없는 충신이었다.

진양이 단단히 보았다.

“알겠느냐?"

창이가 진양을 보았다.

“그리하겠습니다!”

백겸이 진양을 보고 안평을 보았다.

“제가 저하를 지키겠습니다!”

일순 백겸과 창이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훗날 어찌되든 그들은 이미 한배를 타고 있었고 살아도 죽어도 함께였다. 나비문신을 잡을 때까지 한 편이었다.

그때였다. 너른 들판에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란 들판 사이로 달려오는 향의 모습이 보였다.

향과 십여 명의 별감들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감색 답호를 입고 갓을 쓴 향이 달려오고 있었다.

맑은 하늘 아래 향이 날아오는 건가 싶은 착각이 들었다. 구름 한 점이 향을 따라오는 듯했고 노란 꽃들이 일제히 흔들흔들 인사하는 듯했다.

백겸은 영화관에서 스크린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향이 쓴 갓의 구슬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향의 눈길이 진양과 안평에게, 백겸과 창이에게 머물렀으나 그대로 달려갔다.

백겸과 창이가 뒤늦게 인사했으나 향은 저만치 가고 있었다.

진양과 안평, 백겸과 창이가 서둘러 말에 올라탔다.


단진이 다소곳이 서서 말했다.

“박 내관님, 그간 제가 심려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어제도 문자를 써서 전하께서 보시어, 박 내관님께서 많이 놀라시고 고초를 겪으셨지요! 박 내관님께서 역병을 앓고 일어나 기억도 온전치 않은 저를 돌봐주시고 감싸주신 은혜, 죽을 때까지 갚겠습니다. 평생 은인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박 내관은 청소하는 벌을 끝내달라고 청을 할 거라 여겼다.

“흠...네가 이제야 철이 드는 모양이구나.”

“이제야 철이 들어 송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단진이 맑은 눈이 반짝였다. 단진이 한 걸음 다가서 소곤소곤 청을 말했다.

박 내관이 눈을 부릅뜨고 단진을 잡아먹을 듯이 보았다.

단진이 배시시 웃었다.

“잠깐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

“형판대감 댁에 중요한 물건을 두고 와서 그럽니다.”

박 내관이 한 걸음 다가서자 단진이 한 걸음 물러섰다.

“한 시진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박 내관이 한 걸음 더 다가오고 단진이 다시 물러섰다.

“반 시진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박 내관이 또다시 다가오자 단진이 물러섰다.

“허면...이각만...”

.......

단진이 양손을 모으고 검지를 치켜세웠다.

“허면 일각만이라도...”

박 내관이 다가왔지만 단진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단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야 했기에 눈에 힘을 팍 주고 말했다.

“그간 쌓인 게 많으시면 한 대 치시고, 깔끔하게 없던 일로 하시지요. 저하께서 다치지 말라 하셨기에, 저는 다치면 안됩니다.”

박 내관이 뒷목을 잡았다.

“허나 박 내관님께서 한 대 때리셔도 저는 다치지 않겠습니다. 또한 함구하겠습니다. 허니 맘껏...”

박 내관의 손이 단진을 향하자 단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박 내관은 문을 열었고 단진은 갑자기 등 뒤가 허전해 허우적거리며 비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잖아도 속 시끄러운데 대체, 후원에서 낙엽을 쓸고 있었을 이 사고뭉치가, 어떻게 그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다른 핑계를 대고 있었으나 분명 나가려는 이유는 하나였다.

단진은 양손을 모으고 검지를 치켜들고 애원하고 있었다.

박 내관이 던졌다.

“지금 때가 어느 땐 줄은 아느냐? 역당을 잡는 일이라면 모를까, 그냥은 나가게 할 수 없다.”

단진이 덥석 물었다.

“저는 역당을 잡으러 가는 것입니다!”

박 내관이 놀란 듯 물었다.

“그래? 그런 큰 뜻이? 방법이 있느냐?”

“있습니다. 먼저 내금위 별감들 주검이 발견된 곳 일대를 샅샅이 탐문하겠습니다. 분명 자객을 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허니 제가 찾아내겠습니다. 박 내관님...지금 어딨는지 알지도 못하는 역당이 백성을 죽이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위험천만한 곳에 저하께서 나가 계십니다. 허니 제가 역당을 찾도록 내보내주십시오!”

“진정 그리할 수 있겠느냐?”

“예.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제 삼촌이 역당만 수십 명을 죽였습니다. 해서 저는 그들의 머릿속이 훤히 보입니다!”

박 내관은 마치 전장에라도 나갈 기세인 단진을 보자 끓어올랐다. 이 사고뭉치가 진정....아까 저하 앞에서 모른 척한 게 떠올라 꾹 참고 물었다.

“헌데 아까는 어찌해서 저하께 모른 척한 것이냐? 어찌해서 위험하니 가지 마시라 말씀 올리지 않은 것이냐?”

“.........”


“그건...”

단진은 눈길을 떨구고 잠시 있었다.

단진의 눈빛에 그늘이 들어차자 햇살이 단진의 얼굴에 다가왔다. 단진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햇살이 반짝였다.

“....제가 아는 척하면 저하의 근심만 더 깊어지실 것이고....저하의 백성이 죽었는데, 그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조차 없으니...저하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그 백성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까...”

.....

“그 무거운 백성들의 죽음을 가슴에 안고 저하께서 이곳에 계신다한들 마음이 편하시겠습니까!...해서 말씀 올릴 수 없었습니다. 다녀오시는 동안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오시길 바래서...”

“그렇구나...그렇구나...”

단진의 눈에 애틋함이 들어찼다.

“또한 말린다한들 저하께서 들으셨겠습니까! 백성을 향한 저하의 마음은 그 누구도 막아설 수 없을 것입니다. 허니...우리의 저하지요...”

단진은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고 보았다.

“저하께서 저하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저는 제 일을 할 것입니다! 저하께 불구덩이니 가시면 아니 된다 해서 아니 가시겠습니까! 아니 된다는 말만 내뱉는 한심한 신하들은 조정에 넘치고 넘쳤습니다! 허니 저는 먼저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불을 끄는 그런 신하가 되겠습니다.”

......

단진이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

“허니 당장 나가 역당을 잡아오겠습니다!”

박 내관이 끄덕였다.

“신하란 무릇 그래야지...헌데 어찌 알았느냐? 너는 후원에 있었을 터인데.”

“예. 제가 저하가 뵙고 싶어 몰래 비현각 뒤뜰에 왔다가 다 들었습니다.”

“그랬구나...그랬구나...알았다! 너는 지금 이 시간부로 비현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단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박 내관이 눈을 부라리며 다가왔다.

“그런 법 여깄다 여기! 내 분명, 오늘은 후원에 있으라 했다...너는 지금부터 비현각을 청소해라. 나뭇결이 안 보일 때까지 닦고 또 닦아라.”

단진이 입을 열려 하자 덧붙였다.

“내 허락 없이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오면 장 내관을 갈기갈기 찢어죽일 것이다!”

........


휴....

박 내관은 밖으로 나왔다.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연이은 비보로 침통해하실 저하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고, 이런 와중에 궁 밖으로 나가신 저하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하께서 전하를 찾아뵙고 다녀오겠다고 했을 때도 전하께서 말려주시길 바랬으나 그러지 않으셨다.

해서 박 내관도 데려가 달라 애원했으나 소용없었다. 전하의 명으로 내금위장이 저하보다 앞서 군관들을 그곳으로 보냈고, 박 내관도 은밀히 내시부 내관들을 보냈으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헌데 저 사고뭉치까지 보태다니. 저하의 당부가 없으셨으면 깜빡 속을 뻔했다.

휴....

헌데 저하께선 어찌 아셨을까...

박 내관이 돌아보았다.


저하께서 환복하고 동궁전 밖으로 나오시는데 단진이 다가왔다.

단진이 해맑게 인사했다.

‘저하...미행 나가시옵니까? 와...저하 오늘은 더 멋지시옵니다. 저하 의복의 나뭇잎 문양을 보니 가을 같사옵니다. 갓의 정자에도 나뭇잎이 있사옵니다. 와...정말 멋지시옵니다...저하...소인을 데려가 달라 청하면 안 들어주시겠지요! 허니 소인 대신 가을을 맘껏 보시고 담아다 주십시오. 저하...다녀오십시오...소인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단진이 저하를 보며 웃었고 저하께선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셨다.

박 내관은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단진이가 말려주길 바랬으나 후원에 있었으니 알 리가 없다 여겼다. 헌데 저하께서 멈추시고는 돌아보셨다. 단진이는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저하께서 다시 걸음하시며 말씀하셨다.


‘단진이가 궁 밖에 나간다고 할 것이다. 위험하니 내보내지 말거라.’


저하께선 이제 단진의 눈빛만 봐도 아시는 걸까...

헌데 저 홍단진이 모자란 것이 넘쳐서 모자란 것인지...말은 청산유수였다.

저하 걱정만으로도 숨이 찰 지경인데 저 사고뭉치까지 감시하고 있어야 하다니. 허나 어찌한단 말인가. 저하의 귀한 서책이니.

저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단진은 처소에 있어야 했다. 저하께서 상심이 크실 터인데 저 사고뭉치라도 있어야 저하께서 웃을 수 있으실 테니.

쓰윽

꽃향기가 코끝에 전해졌다.

박 내관이 돌아서자 꽃다발 얼굴이 있었다.

“날이 참 좋습니다.”

꽃다발을 내리자 꼴 보기 싫은 공두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정각 앞에 키가 껑충 큰 공두가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들고 박 내관에게 내밀고 있었다.

박 내관은 벙쪄서 보았다.

공두가 점잖게 말했다.

“박 내관님, 노고가 많으십니다. 어제도 홍단진이 문자를 써서 박 내관님께서 고초를 겪으셨지요...제 속이 속이 아닙니다...상선께 야단맞는 박 내관님을 보며 어찌나 속상하던지...아이 참...그 홍단진을 대체 어찌해야....”

박 내관은 이건 또 뭔 지랄이야 하는 눈빛으로 보았고. 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공두는 뱃놀이 갈 생각에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공두가 맑은 하늘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홍단진이 이리 날이 좋으면 손이 근질거리는 듯싶습니다. 해서 오늘도 문자를 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불안합니다. 해서 제가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 따끔하게 야단 좀 치고 오겠습니다.”

박 내관의 가마솥이 펄펄 끓다 못해 이미 뚜껑이 날아갔다. 박 내관은 깊게 숨을 내쉬며 물었다.

“홍단진은 어디 있느냐?”

“후원에서 낙엽을 쓸고 있습니다.”

“허면 저하께선 어디 계시느냐?”

“저하께선 시강원에 드셨습니다.”

공두가 꽃향기를 맡고는 박 내관의 손에 꽃다발을 쥐어주었다.

“제 마음입니다.”

한 명은 궁 밖에 나가 역당을 잡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한 놈은...

이 천하태평인 놈을 보고 있으려니 박 내관의 가마솥이 통째로 날아갔다.

공두가 윙크를 날렸다.

“이...이 미친놈이...”

박 내관이 꽃다발로 공두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거늘 공두는 꽃다발로 양 싸대기를 맞았다. 공두가 놀라 얼굴을 가리자 이번엔 뭉개진 꽃다발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손으로 등짝을 퍽퍽 때렸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자 발로 걷어찼다.

박 내관은 한 명은 넘쳐서 지랄. 한 명은 모자라서 지랄.

공두가 잽싸게 피하며 말했다.

“낭만이 아니면 역시 재물...제가 다음엔...”

박 내관이 공두의 입에 손을 넣고 찢으려 벌리고 공두는 비명을 내질렀다.


........

........

비현각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향이 늘 앉던 자리에 햇살이 반짝였다.

단진은 멍하니 그 빛을 보고 있었다.

단진은 후원에 낙엽 길을 만들어놓고 향을 만나러 왔었다. 뒤뜰을 쓸고 있으면 향이 창을 열고 내다볼 거란 기대감을 안고 왔었다.

허나 들려온 건 참담한 소식이었다.

진양과 안평이 나가고 바로 장문호가 들어 내금위 별감들의 비보를 전했다. 향은 장문호에게 책임이 크겠다 하며 잘해낼 거라 믿는다 하고는 나가 보라고 했다.

향은 박 내관에게도 나가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잠시 홀로 있었다.

.....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단진은 향의 마음이 들렸다.

단진의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향이 홀로 있는 동안 단진은 그렇게 함께 있었다.

저하...

단진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곳에 이리 혼자 앉아 있는 동안, 얼마나 참담하고 비통하고 외로우셨을까.

........

........

단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하...소인에게 늘 곁에 있으라 하셨지요! 그리할 것입니다...허니 잊지 마십시오. 저하 곁엔 소인이 늘 함께 있습니다.

저하...무탈히 다녀오십시오. 소인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또한.

저하...저하는 저하의 일을 하십시오. 소인은, 소인의 일을 할 것입니다...

단진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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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숙원 홍씨 72. 이향의 진귀한 서책 +2 20.12.17 1,703 10 25쪽
71 숙원 홍씨 71. 단진, 육갑을 마음에서 내려놓다 +3 20.12.14 1,723 10 14쪽
70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2 20.12.10 1,733 10 25쪽
69 숙원 홍씨 69. 향의 고백 +4 20.12.07 1,752 10 16쪽
68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3 20.12.03 1,782 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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