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178
추천수 :
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1.03.15 11:00
조회
1,291
추천
9
글자
18쪽

숙원 홍씨 87. 그들의 이향

DUMMY

숙원 홍씨 87. 그들의 이향


백겸과 창이, 도화가 기방 후원 정자 계단에 앉아 술을 마셨다.

백겸과 창이는 이향을 만난 후유증으로 넋이 나가 있었다.

백겸과 창이는 도화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는 침묵을 지켰고, 화려한 붉은 꽃의 도화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자를 밝히는 등불만이 이따금씩 움직일 뿐이었다.

도화는 삼년에게 이향이 왔다는 이야길 듣고 어찌된 일인지 알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술이나 따르고 있는 신세에 열이 받아 술을 물마시듯 들이켜 취기가 올라있었다.

도화는 백겸이 군관이란 사실에 안도했다. 허나 창이가 자신의 나비문신을 보여줬고 이향은 창이를 품었으나 만일, 이들이 나비문신을 잡지 못한다면, 이들의 존재를 조정에서 알게 된다면 창이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고. 백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한 모두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허니 빨리 나비문신을 잡아야 했다.

도화의 머리에선 이제 시작이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마음은 이향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이제 됐다. 더는 숨기지 않아도 되고, 숨지 않아도 되고, 신분도 밝혀졌으니까...”

도화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래도...문종이 그런 식으로 너희들의 입을 열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창이도 툭 나왔다.

“내 말이.”

백겸과 창이는 아직도 눈앞에 이향이 있는 것 같았다.


백겸이 끌려가려는 찰나 창이가 함께 가겠다고 나섰으나 이향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도 못할 말이었다.

‘너는 갈 수 없다.’

향이 백겸을 보고 다시 창이를 보았다.

‘백겸이 네게 죄가 있다고 실토한다면, 그때 네 죄를 물을 것이다. 허니 나서지 말라.’

‘백겸이 네 죄를 발설치 않는다면 너는 살 것이다.’

‘너만 살 것이다.’


백겸과 창이는 그때를 떠올리자 다시금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도화가 백겸과 창이를 보았다.

“문종은 너희들을 만나기 전부터 입을 열거라 확신했어....진짜 전략이 뛰어나. 하긴, 이것도 싸움이고 전쟁이고. 병법에 밝으니까 화차도 만들고 새로운 진법도 펼쳤겠지...피를 보지 않고도 이기는 법을 알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얻는 법도 알고.”

도화가 잠시 있다 덧붙였다.

“어떻게 보면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세종 이도의 가장 좋은 유전자를 다 가진 것 같아. 뛰어난 건 알았지만 존경스럽다.”

창이의 입이 열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이가 무심히 먼 산에 시선을 두었다. 산이 가까워지는 듯싶더니 이향이 걸어와 창이 앞에 섰다. 그 깊은 눈이 창이를 보고 있었다.


‘네 목숨을 거두어 수백의 원수를 갚아야 하겠지.’

‘허나, 네 목숨 하나가 수백의 목숨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네 목숨 하나가 수천의 피눈물을 닦아줄 수 있겠느냐!’

‘너를 죽인다면 그저 하찮은 목숨 하나를 거둔 것이 될 것이다. 해서 나는 너를 살려둘 것이다. 해서 너를 귀하게 쓸 것이다. 네 하찮은 목숨 하나를 살려 수백의 목숨을 대신하게 할 것이고 수천의 피눈물을 닦아주게 할 것이다.’

....

‘고려인으로 하찮게 죽겠느냐? 조선인으로 귀히 살겠느냐?’

‘나는 오늘 너에게서 아무것도 못 보았다.’

‘다음에 봤을 때 너는 아무것도 없어야 할 것이다.’


짜증나게 멋있네.

단진이 이향을 바라보던 눈길이 떠오르자 창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숨을 내쉬면 무언가를 인정하는 것 같아 숨이 더는 나오지 못하게 막기라도 하듯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백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백겸은 이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사람을 검으로만 죽이는 것이 아니다. 너의 침묵이 지금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있다!’

‘나는 내 백성을 살려야겠다. 너 또한 내 백성이기에 살리려 하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 의금부에 간다면 너는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누군지 알 것 같구나.’

향이 미소 지었다.

‘백겸은 나를 보거라.’

‘너는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나 조선의 군관이다. 또한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나 맡은 임무를 다하지 못하였다.’

‘네가 맡은 소임을 다하거라.’


아찔했다. 매 순간 순간 예측할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다 주었다 다 가져갔다, 죽였다 살렸다 하는 것 같았다. 검을 들지 않았으나 날카로웠고 손발을 묶지 않았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

백겸은 오늘 하루, 전쟁터에 나가기 전의 결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적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적들의 손에 소중한 벗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다 끝났다고 여긴 순간 적이 아닌 아군이어서 안도하기도 하고. 알고 보니 아군의 한 사람임이 밝혀져 그들의 무리였으나, 결코 손을 잡으면 안 될 사람의 손을 잡았기에 또다시 날을 세우고 버텨야 했으며. 뱅글뱅글 돌다 폭포를 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다 또 떨어지고 결국 백기를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향의 손바닥이었다. 이향은 처음부터 죽일 생각도 다치게 할 생각도 없었다. 이향이 손바닥을 살살 흔들었을 뿐인데 백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백겸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도화는 다 타고 나서 재만 남은 듯한 얼굴의 백겸과 창이를 보았다. 그럴 만하다 여겼기에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많았으나 꾹 참고 술로 입을 달랬다.

.....

.....

.....


창이가 백겸을 툭 치며 침묵을 깼다.

“좁아. 서여름, 우리는 왜 이 넓은 곳 다 놔두고 이 좁은 계단에 앉아 있는 거야. 너는 왜 나한테 바짝 붙어있는 거야! 날 연모하지 말랬지! 네가 아무리 목숨 걸고 내 마음을 얻으려 해도 안돼!”

백겸이 어이없다는 듯이 보았고 도화는 또 시작하는 걸 보니 정신이 돌아왔다 여겼다.

창이가 벌떡 일어나 백겸의 옷섶을 잡고는 집어던졌다. 백겸은 부지불식간에 당한 터라 술병과 함께 나동그라졌다.

“뭐하는 거야? 미쳤어?”

“미친 건 너지!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날 연모해서, 네가 날 갖고 싶어 해서, 네가 날 차지하려고 일을 벌인 바람에 못 볼 꼴을 본 거야. 안 봐도 될 걸 봐서, 내가 정신이 나갔잖아!”

백겸은 일어나기도 귀찮은 듯 주저앉은 채로 말했다.

“또 유부녀 얘기야? 지겹다 진짜. 그냥 너 좋다는 월이랑 사귀어! 예쁘던데!”

“서여름!”

창이는 사귀라는 말에 벌떡 일어났고 예쁘다는 말에 도화는 날이 섰다.

도화가 버럭 소리 질렀다.

“조용히 해! 장난칠 기력 있으면 계획이나 세워! 문종이 거흘합족 증거 찾으라잖아. 그건 문종도 거흘합족이 수상하다 여기는 거고.”

도화가 창이를 보았다.

“너는 나비문신 찾아야 할 거 아냐! 나비문신 못 찾으면 다 죽는 건 시간문제야! 돌무덤 옆에 나란히 눕고 싶어? 아, 우리가 이런 식으로 역사를 바꾸나보네. 나비문신 못 찾으면 문종이 우리 살리고 싶어도 조정에서 다 끌고 가서 죽일 거고. 어쩌면 진양도 죽겠네. 우리가 이렇게 역사를 바꿀 수도 있겠네!”

.....

.....

“짜증나게, 돌아가는 머리는 있는데 쓸 일은 없고, 손목 운동하다 인대 나가겠어! 옘병, 대가리도 없는 놈들한테, 술이나 따르고 따르고 또 따르고. 아! 짜증나!”

도화가 한바탕 해대고 나서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창이가 조용히 앉았다.

“태희야, 전통복 입고 욕은.”

도화가 노려보자 창이가 씨익 웃었다.

“딱이야! 한복엔 욕이지!”

백겸이 도화를 보며 말했다.

“거흘합족, 내가 봐도 수상해 보이지만 나비문신도 없는 것 같고. 방을 뒤져봤는데 그 어떤 것도 없어.”

도화가 백겸을 바라보는 눈길은 싸늘했다.

예쁘잖아.

이 와중에 그 말이 머리에 박혔다는 것 자체가 더 짜증났다.

도화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서여름! 뇌 두고 왔어? 아무 것도 없는 게 수상하단 증거잖아!”

백겸은 벙찐 얼굴로 보았다.

“엽전 하나 안 나왔다며? 김 판관이 호판과 판부사에게 빌붙어 한자리 해먹겠다고, 대놓고 굽신굽신 탐욕을 부리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이상한 거 아냐? 그리고 그자는 탐욕스러운 자가 아니야. 딱 보면 몰라? 그 정도 머리 안 돌아가?”

백겸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도화가 또다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백겸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창이를 보았다.

창이는 백겸이 참 눈치 없다 싶어 말했다.

“몰라? 하긴 그러니까 공부를 못했지.”

도화가 술병을 떼고 말했다.

“빨리 나비문신을 잡아야 서봄 있는 궁에 들어갈 거 아냐! 궁에 들어갈 방법도 찾았잖아!”


장작이 타닥타닥 타들어갔다.

기방의 후미진 곳에 있는 바깥 부엌이었다. 기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아궁이였다. 흙으로 만든 부엌은 허름했으나 숲이 바로 앞에 있어 눈이 호강하는 곳이었다.

백겸은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고는 준비해둔 인두를 달구었고, 창이는 장작이 쌓여 있는 아궁이 위에 걸터앉아 무심히 숲을 보았다.

타닥타닥

불길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백겸과 창이는 정신이 돌아왔고 멈췄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껏 정신이 없어서 백겸은 궁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허나 지금 내금위에 복귀할 수 있다 해도 창이를 두고 혼자서는 들어갈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나비문신을 잡고 그 공을 창이에게 돌리고 김종서에게 부탁해 함께 궁에 들어가야 했다.

창이는 눈앞에서 궁의 문이 활짝 열리는 듯했다. 백겸이 내금위 소속이니 궁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그 정도의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머리가 지쳐있었다. 당장이라도 직접 달려가고 싶었으나 지금으로선 백겸이라도 궁에 들어갈 수 있다 여기니 안심이 됐다. 단진에게 갈 방법이 있다 여기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창이가 백겸을 보았다.

“나비문신도 거흘합족도 내가 쫓을 테니까, 너는 김종서든 문종이든 다시 부탁해서 내금위에 복귀해. 그래서 궁에 들어가. 봄이 혼자 있잖아.”

백겸이 인두를 꺼내보니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들어가고 싶어도 너 때문에 궁에 못 들어가!”

“나는 괜찮으니까 너라도 들어가서 봄이 살펴!”

백겸이 일어나 짜증을 냈다.

“독고준, 너야말로 뇌 두고 왔어? 네가, 제가 역당의 무리입니다! 말한 순간, 이미 나도 역당이랑 한 패야! 역당을 잡지 못하는 한, 궁은커녕, 태희 말대로 우린 다 죽어. 진짜 이러다 진양이랑 같은 배 타고 같이 죽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러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옷이나 벗어!”

창이가 윗옷을 벗자 상처투성이 근육질 몸이 드러났다. 함길도에서 화살에 맞았던 상처자국이 백겸의 눈에 들어왔다.

백겸이 잔소리를 해댔다.

“독고준. 진짜 모자란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함길도에서도 봐. 그 넓은 들판 다 두고 절벽 위에서 도망가래! 어디로?”

“날개 있는 줄 알았다니까!”

“갑자기 도망가! 소리치더니 화살에 맞아 나까지 떨어지게 만들고. 하루 종일 매달리고, 질질 끌고 동굴까지 왔더니. 엄살이란 엄살은 다 부리더니, 그때도 한양으로 먼저 가! 어떻게? 나가면 바로 화살받인데! 나를 그 고생을 시켜놓고...”

“추억 만들어주려 그랬지.”

“이젠 역당과 한패로 만들어놓고 궁에 들어가라고?”

“가지 마! 됐지?”

백겸이 달궈진 인두를 보고 나비문신을 보았다.

창이는 백겸이 긴장한 것 같아 웃으며 어깨를 가리켰다.

“죽이지만 마!”

백겸이 심호흡 하고는 달궈진 인두를 가져다 댔다.

.........

창이는 이를 악물고 버텼고 지지직 소리와 함께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백겸은 마치 자신에게 인두가 닿은 듯 잔뜩 찌푸렸다. 백겸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 터라 놀라 서둘러 인두를 떼어냈다. 나비문신은 온데간데없고 불에 덴 벌건 자국만이 남아있었다. 상처가 꽤 크고 깊었고 뜨거웠을 것 같아 창이의 눈치를 살폈다.

창이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했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백겸이 말했다.

“완벽하게 지워졌어.”

“.....그랬겠지...고문하듯 지져댔으니.”

백겸이 준비해둔 으깬 약초를 상처 부위에 올리며 뻔뻔하게 말했다.

“그렇게 해야 속에 스며든 문신까지 다 지워지지.”

창이가 벙찐 얼굴로 보았다.

“너 모자란 거 맞어!”

여린 풀냄새 같은 약초의 향이 코끝으로 들어왔다.

백겸은 못들은 척하고는 하얀 천으로 상처부위를 싸매고는 다시 아궁이 앞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애써 다시 돌아가던 머리가 나비문신을 지우는데 다 허비했는지 멈춰버렸다.

창이도 꼼짝하기 싫어 벽에 기댔다. 한쪽 다리를 올리고 나비문신이 있던 곳의 팔을 올려두었다.

숨 쉴 여유가 찾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움이란 놈이 들어왔다.

보고 싶다...

생각만으로도 창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창이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목멱산으로 데리고 갔다.


다홍댕기를 나풀거리며 단진이 창이를 보고 있었다.

단진의 눈 속에 오롯이 창이만이 들어 있었다.

‘준아!’

창이가 잠시 보다가 서운한 듯 말했다.

‘마마...오늘 잊으신 게 있습니다.’

창이는 더는 말하지 못하고 괜히 발로 흙을 툭툭 찼다.

단진이 창이를 향해 팔을 활짝 펼쳤다.


“보고 싶다...”

창이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었으나 그 끝은 모든 걸 잃은 듯 쓸쓸했다.

백겸은 타들어가는 불꽃을 보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반짝였다.


‘다시 한번 읽어주겠느냐?’

‘.....러브. 라 하옵니다.’

‘러브.’

....

‘연모라.’

단진의 처소에 열린 창으로 반짝이는 별이 보였다.

방안 곳곳에 촛불이 밝혀져 있고 단진은 방에 걸터앉아 색색의 낙엽을 보고 있었다. 단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부왕이 날아가게 두라고 한 글자의 낙엽을 모두 가져와 방에 펼쳐놓았다.

LOVE

이 낙엽의 이름은 연모였다. 향이 불러준 이름이었다.

이 글자에 삼촌이 있고 아빠가 있고 향이 있었다.

단진은 복잡한 감정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코끝이 시큰해졌으나 울지 않았다. 울고 있던 단진을 달래주듯 향은 또다시 단진을 달래주었다.


‘너로 인해 놀라도 괜찮고, 너로 인해 걱정해도 괜찮고. 너로 인한 모든 건 다 괜찮다.’

‘대신.’

........

‘내 곁에만 있거라.’


단진은 낙엽비 속을 거닐며 향에게 약속했다.

늘 곁에 있겠다고.

단진은 잠시 글자를 보다가 서책이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박 내관이 공부하라고 가져다준 서책이 문갑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단진이 일어나 서책을 집으려다가 따로 놓여 있는 오래된 서책을 보았다. 서책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이건 뭐지? 낯이 익은데.”

서책에 손을 댄 순간 창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낙엽이 날리자 단진은 서책에서 손을 떼고는 서둘러 가서 창을 닫고 낙엽을 주워 모았다.

박 내관이 가져다준 서책 한 권을 펼치고는 낙엽을 하나씩 끼워 넣었다. 낙엽을 넣다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코팅을 하면 좋을 텐데...”

단진의 등 뒤로, 단진의 손이 닿았던 서책이 바람에 날리듯 펼쳐졌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서책이었다. 첫 장에 눈물 자국이 있었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 단진이 돌아보았을 땐 이미 서책은 덮여 있었다.

단진이 다시 낙엽을 책에 끼워 넣었고 그 오래된 서책은 그대로 있었다.


백겸이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려고 발을 내딛었다. 발이 허공을 디뎠다. 문 밖은 천길 낭떠러지였고 백겸의 몸은 그곳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잠에서 깼다. 백겸은 숨을 삼키며 벌떡 일어났다.

힘껏 숨을 토해냈다.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고 가슴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도화의 처소였다.

도화와 창이가 잠들어 있었다.

안도감에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흠뻑 젖은 얼굴을 세수하듯 닦아냈다.

눕자마자 바로 잠에 빠져들었는데.

왜 왜 그런...

이상한 꿈이었다.

아버지 진호가 꿈에 나왔다. 백겸이 스키장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백겸은 자신을 기다려준 아버지가 반가워 서둘러 들어가려는데, 아버지가 어찌해서 혼자 왔냐고 물었다. 백겸은 단진이와 함께 왔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어찌해서 혼자 왔냐고 되물었다. 백겸은 같이 왔다고 하며 돌아봤지만 단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단진의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들어왔는데 단진이 없었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봄이는 어쩌고, 왜 혼자 왔어?’

백겸은 분명 같이 왔다고 말하고는 집 밖에 있는 것 같다며 데리고 들어오겠다고 했다. 백겸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허나 천길 낭떠러지였다. 백겸이 발을 허공에 내딛어 떨어지는 순간 잠에서 깨었다. 꿈에서 깨는 그 찰나의 순간에 백겸의 눈앞에 돌무덤이 있었다.

돌무덤은, 하나가 아니었다.

백겸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가슴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꿈이란 말인가. 백겸이 단진의 손을 잡고 걸은 건 일곱 살 때 이후로 없었다. 헌데 꿈에서 분명 백겸은 단진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단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됐다.

단진은 분명 집으로 간다고 했는데 어찌해서 집에 가지 못하는 꿈을 꾸었을까.

왜 혼자 왔냐고 말하던 진호의 눈길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원망의 눈길이 아니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슬픈지 백겸의 가슴이 바들바들 떨렸다.

백겸은 무심히 창을 보았다. 바람이 부는지 창으로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손짓인가 작별의 손짓인가. 불안함이 두려움으로 백겸의 몸을 휘감았다.

‘봄이는 어쩌고, 왜 혼자 왔어?’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7 cr*****
    작성일
    21.03.15 12:43
    No. 1

    이번화는 아련하고 슬프네요 ㅠ 매번 너무 잘 읽고 갑니다, 작가님!!

    찬성: 5 | 반대: 0

  • 작성자
    Lv.16 vo***
    작성일
    21.03.15 13:48
    No. 2

    짜증나게 멋있는 이향! 동의합니다 ㅋㅋ L.O.V.E. 정말 멋진 착상입니다. 우리 작가님 건필하세여^^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6 jj****
    작성일
    21.03.15 23:47
    No. 3

    러브라하옵니다..구절은 설레이고
    봄은 어쩌고 왜혼자왓어..구절은 아리네요ㅜㅜ
    제마음 같네요
    건필하세용^^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6 k1******..
    작성일
    21.03.16 15:58
    No. 4

    역시 너무 재밌어요 이번화가 특히 설레네요 ㅎㅎㅎ

    찬성: 4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숙원 홍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한 주 휴재합니다 21.06.16 66 0 -
공지 숙원 홍씨 월, 목 연재합니다 +2 20.06.21 336 0 -
95 숙원 홍씨 95. 이향, 한성부에 가다 +3 21.04.12 1,101 9 18쪽
94 숙원 홍씨 94. 향을 기다리다 +2 21.04.08 1,118 9 13쪽
93 숙원 홍씨 93. 용무용과 그들 +3 21.04.05 1,133 9 21쪽
92 숙원 홍씨 92. 이향, 양주로 향하다-3 +2 21.04.01 1,149 9 18쪽
91 숙원 홍씨 91. 이향, 양주로 향하다-2 +2 21.03.29 1,173 9 16쪽
90 숙원 홍씨 90. 이향, 양주로 향하다-1 +2 21.03.25 1,200 9 19쪽
89 숙원 홍씨 89. 비보 +2 21.03.22 1,233 9 20쪽
88 숙원 홍씨 88. 단진을 향한 이향의 마음 +2 21.03.18 1,285 9 16쪽
» 숙원 홍씨 87. 그들의 이향 +4 21.03.15 1,291 9 18쪽
86 숙원 홍씨 86. 낙엽비 +2 21.03.11 1,307 9 19쪽
85 숙원 홍씨 85. 단진, 부왕과 마주치다 +2 21.03.08 1,334 9 18쪽
84 숙원 홍씨 84. 용무용, 이향을 만나다 +5 21.02.04 1,384 10 24쪽
83 숙원 홍씨 83. 백겸, 김종서를 만나다 +3 21.02.01 1,439 10 19쪽
82 숙원 홍씨 82.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3 +2 21.01.28 1,484 10 23쪽
81 숙원 홍씨 81.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2 +3 21.01.25 1,515 10 18쪽
80 숙원 홍씨 80.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1 +2 21.01.21 1,527 10 21쪽
79 숙원 홍씨 79. 진양, 사저로 백겸과 창이를 부르다 +2 21.01.18 1,558 10 17쪽
78 숙원 홍씨 78. 단진과 공두, 김종서 집에 들다 +3 21.01.07 1,561 9 20쪽
77 숙원 홍씨 77. 목멱산의 첫 모임 +2 21.01.04 1,583 10 14쪽
76 숙원 홍씨 76. 모두 목멱산에 오르다 +2 20.12.31 1,603 10 23쪽
75 숙원 홍씨 75. 용모파기 +2 20.12.28 1,625 10 17쪽
74 숙원 홍씨 74. 진양과 안평, 입궐하다 +3 20.12.24 1,655 10 26쪽
73 숙원 홍씨 73. 다시 돌무덤으로 +2 20.12.21 1,674 10 21쪽
72 숙원 홍씨 72. 이향의 진귀한 서책 +2 20.12.17 1,703 10 25쪽
71 숙원 홍씨 71. 단진, 육갑을 마음에서 내려놓다 +3 20.12.14 1,722 10 14쪽
70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2 20.12.10 1,733 10 25쪽
69 숙원 홍씨 69. 향의 고백 +4 20.12.07 1,751 10 16쪽
68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3 20.12.03 1,781 9 2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