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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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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09,561

작성
21.03.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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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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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19쪽

숙원 홍씨 86. 낙엽비

DUMMY

숙원 홍씨 86. 낙엽비


향이 문자를 보았다.

니은, 이응, 거꾸로 쓴 시옷, 티읕 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박 내관은 가슴이 바들바들 떨려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부왕을 알아보고 잽싸게 나무 뒤에 숨었던 공두가 슬그머니 나와 박 내관 곁에 섰다.

하트 문양 속에 단진이 있고 향과 부왕이 문자를 보고 있었다.

향이 단진을 잠시 보고 부왕을 보았다.

“아바마마.”

부왕은 여전히 문자에 눈길을 둔 채로 말했다.

“세자, 이것이 서양의 문자라는구나.”

향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단진을 보았다.

부왕이 단진을 보았다.

“다시 말해 보거라. 이것이 무엇이냐?”

“예 전하. 이는 서양의 문자이옵니다.”

김 내관이 낮게 말했다.

“어디서 전하께 거짓을 아뢰느냐? 사실을 고하지 못할까!”

박 내관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단진이 조선의 문자를 쓰고 이젠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고 있었다.

부왕이 향을 보았다.

“세자, 내가 보기엔 내가 아는 문자 같은데, 이 아이는 서양의 문자라 하는구나. 어찌 생각하느냐?”

향도 단진이 당황해 둘러댔다 여기고 부왕에게 간청하려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소자가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모든 건.”

“저하...”

단진이 작은 목소리로 향을 불렀다. 향이 단진을 보았다. 단진의 눈빛은 사실이라고, 믿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향이 물었다.

“이것이 서양의 문자가 맞느냐?”

“예 저하. 서양의 알파벳이란 문자이옵니다. 이를테면 천자문 같은 그런 것이옵니다. 다만 이 문자 하나하나에 뜻은 없사옵니다.”

부왕이 김 내관에게 일렀다.

“서고에 다녀 오거라.”


타타타타타타

내딛는 발자국 소리가 짧고도 요란했다. 박 내관은 서고를 향해 내달렸다. 김 내관에게 자신이 다녀오겠노라 하고는 잽싸게 달려가고 있었다. 만일 단진의 말이 거짓이라면 서고에 불이라도 내야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전하의 눈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궁 밖으로 내보냈더니 결국 들어와서 한다는 짓이, 전하의 눈앞에서 조선의 글을 쓰다니.

박 내관은 짧은 다리로 미친 듯이 달렸다.

저게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조선의 글자를 썼단 말인가. 만약 전하께서 대업을 위해...단진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허면 저하께서 단진을 살리기 위해 어찌 나오실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박 내관은 저하에 대해 다 안다고 여겼으나 사내인 이향은 알지 못했다. 예측조차도 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도, 부왕 앞인데도 불구하고, 단진을 위해 향은 모든 걸 각오한 듯한 눈빛이었고. 그 짧은 순간 단진을 바라보던 향의 눈에서 애틋함이 흘러넘쳤다.

박 내관은 하도 빨리 달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서고에 도착하자마자 서양 문자에 관한 책을 달라고 했다. 박 내관은 서고 책장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박 내관이 서책을 받아 촛불 가까이에서 넘겨보았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홍단진이 서양 문자를 알 리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행여나 비슷한 거라도 있길 바랄 뿐이었다.

“있어야 돼...있어야 돼...없으면...”

“없으면, 서고에 불이라도 낼 생각이냐?”

“그래야지. 불이라도 내야지.”

박 내관이 놀라 보니 김 내관이 있었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전하께서 서책을 가져오라 하셨지! 네놈에게 읽으라 하셨느냐?”

“사...사...상선영감...”

김 내관이 서책을 낚아챘다. 김 내관은 함께 온 강녕전 내관에게 서책을 주었다. 내관이 서둘러 서고를 나갔다.

박 내관은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김 내관이 손을 번쩍 치켜들고는 박 내관을 향해 내리쳤다. 박 내관이 붕 뜨듯이 날아가 책장에 부닥쳤다. 서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보고 있던 공두가 너무 놀라 서책을 내렸다.

김 내관이 서슬 퍼런 눈으로 말했다.

“감히 저하를 모시는 놈이, 저하께서 그릇된 길로 가시는 걸 보면서도 눈감고, 감히 저하를 모시는 놈이 시정잡배들처럼, 얕은 술수로 저하와 전하까지 능멸하려 드느냐! 저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네놈의 죄는 차후에 물을 것이다.”

김 내관이 가려다 덧붙였다.

“진정 전하께서 궁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른다 여기느냐?”

박 내관은 일어서려 했으나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전하께서 단진이 조선의 문자를 아는 걸 알고 계셨다.

다. 알고 계셨다.

공두가 슬그머니 나왔다. 공두는 박 내관이 한 대 맞은 걸 보니 날아갈 듯이 기뻤다. 너무도 좋아 입에서는 풋풋 웃음이 새어나오고 몸이 저 혼자 춤을 춰댔다. 너무 쌤통이라 ‘단진의 죄는 곧 공두의 죽음’ 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엉덩이를 미친 듯이 흔들어대다 갑자기 멈춰섰다. 이제 보니 박 내관의 말투는 상선영감을 따라 한 것이었다. 공두라고 해서 못할 것도 없지 싶었다.

공두가 박 내관을 내려다보며 건방지게 말했다.

“짧은 다리로 그간 수고하셨습니다. 박 내관님은 푹 쉬시지요. 저하는 앞으로 다리 긴, 제가 잘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구나. 서양의 문자였구나!”

불빛에 단진의 눈이 반짝였다. 단진은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서 있고 향은 단진을 보고 있었다. 믿는다 했으나 다 믿지 못해서였을까. 어찌나 가슴을 졸였던지 향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

부왕의 용안이 밝아졌다. 부왕은 서책을 들고 땅에 써진 문자를 보고 있었다. 부왕도 향도 조선의 문자만 생각하다 보니 다른 걸 떠올릴 정신이 없었다. 조선의 문자라 여겨지니 그 잣대로 본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L O V E 니은, 이응, 거꾸로 쓴 시옷, 티읕.

“그래 그렇구나. 서양의 문자였구나. 읽어 보거라.”

“예 전하. 엘. 오. 브이. 이. 라 읽사옵니다.”

부왕은 서책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 많은 부왕은 잔뜩 들떠 있었다.

“맞구나. 놀라운 일이구나. 허면 서양의 문자를 다 아느냐?”

“예 전하.”

“네가 어찌 서양의 문자를 아는 것이냐?”

단진이 향을 보았다. 향이 끄덕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인이 기억을 잃어 어찌 아는지는 잘 모르옵니다.”

“그래. 헌데 이 서책엔 이 뜻은 적혀있지 않구나. 이 문자를 합치면 어찌 읽는 것이냐?”

단진이 향을 힐끗 보았다.

“.....러브라 읽사옵니다.”

부왕이 단진을 보았다.

“러브.”

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러브라. 허면 뜻이 무엇이냐?”

단진이 머뭇거렸다.

김 내관이 낮게 야단쳤다.

“전하께서 하문하지 않으시냐!”

단진이 향을 한 번 보고는 부왕에게 말했다.

“이 문양과 이 글의 뜻이 같사옵니다. 이 문양은 하트라 하옵니다. 서양에선 심장을 뜻하는 것이옵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심장이 뛰기에...”

향이 단진을 보았다.

향과 눈이 마주친 단진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단진은 눈길을 떨구고 말했다.

“이 뜻은...사랑이옵니다. 연모이옵니다.”

부왕이 향을 보았다. 부왕은 오늘 처음으로 향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 향의 눈빛은 연모하는 이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이었다. 그 눈길이 너무도 뜨겁고 애틋했다.

부왕이 단진을 보았다. 단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리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저 아이의 빛은 가려지지 않는구나.

이 작은 아이가 향의 마음에서 무엇을 끌어낸 것인가.

서양의 문자를 아는 아이라.

부왕이 단진을 잠시 보다가 물었다.

“헌데 어찌해서 이 문자를 적은 것이냐?”

단진은 잠시 향을 보고는 말했다.

“전하...실은 저하께서 밖에서 근심을 가져오시는 것 같아, 이 화살표를 따라 걸으시는 동안만이라도 근심을 내려놓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표시한 것이옵니다.”

....

“화살표를 따라 걸으시며 단풍을 보시고, 아름다운 가을에 둘러싸인 경회루를 보시고, 연못에 담긴 하늘을 보시고,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시며, 오늘 하루 시름을 잠시라도 잊으셨으면 했사옵니다. 또한 이곳에 주머니를 그려 넣어 근심을 담아두시고 침소에 드시라 말씀 올리려 했었는데...저도 모르게 이렇게...이 문자를 썼사옵니다.”

부왕이 글자를 보았다.

“연모라...”

부왕이 단진을 보았다.

“신하로서의 연모구나.”

.....

부왕은 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단진이 입을 열었다.

“예 전하...”

부왕이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변치 말거라. 세자 덕분에 내 시름도 잊었구나.”

부왕이 걸어가자 향이 따랐다. 단진을 두고 가는 향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구나. 어찌 그런 일이...”

강녕전으로 들어와 부왕이 앉았다. 향이 그 앞에 앉았다. 향은 오늘 밖에서 있었던 일들을 부왕에게 고했다. 허나 창이의 어깨에 있는 나비문신을 확인한 건 함구했다.

“적진에 잠입했으나 역병으로 기억을 잃었다니. 또한 적이었던 자 역시 역병을 앓고 일어나 기억을 잃고. 서로 도와 도주를 했다니.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구나.”

부왕이 향을 보았다.

“거흘합족을 조심하라....그래,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군관 백겸과 창이라 하옵니다.”

“백겸과 창이라...”

.......

“내금위 별감들 소식은 내금위장에게 들었다. 아직도 찾지 못하였다 하더구나.”

“예 아바마마.”

“역당들이 점점 대범해지고 있구나.”

“그러하옵니다 아바마마. 내금위 별감뿐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죽음 또한 많을 거라 사료되옵니다.”

“그들이 그토록 뛰어나니 그들을 상대할 자들은 백겸과 창이란 자가 적임이겠구나.”

“예 아바마마. 소자, 그들이 만든 검으로 그들을 칠 것이옵니다.”

부왕이 향을 보며 끄덕였다. 부왕의 믿음직하고 든든한 세자로 돌아와 있었다.


단진은 연못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단진의 눈가가 촉촉했다.

부왕과 향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마음 한켠이 이상하게 저릿저릿하고 울적했다. 무얼까. 부왕이 단진에게 향에게 더는 다가서면 안된다는 말을 돌려 말해서 서운했던 걸까. 향이 부왕과 함께 가서 서운해서일까. 무엇일까.

그러다 단진은 왜 마음이 저릿저릿해진 줄 알 것 같았다. 낙엽으로 만든 화살표와 하트와 글자는 단진이 처음 만든 게 아니었다.

삼촌 필호였다.

‘봄아. 낙엽은 떨어진 순간부터 진가를 발휘하는 거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낙엽을 방송 타게 해야 돼.’

단진이 옆을 보니 진호가 있었다. 진호가 모니터를 보며 ‘컷’ 을 외치고 있었다.

이곳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날이 참 좋았다. 가을밤 진호가 촬영을 하고 있고 교복 차림의 단진이 삼촌 필호를 대신해 감시하러 왔었다. 삼촌이 마지막 장면에 하트를 넣고 LOVE를 넣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고 진호는 미치지 않고서야 조선시대에 무슨 하트냐고 난리를 쳤었다.

단진이 화살표를 만들어 이 자리에 하트를 만들고 글자를 적어 삼촌 소원이니 해달라고 애원했다. 결국 LOVE는 빼고 하트만 넣는 걸로 마무리됐다. 임금이 정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그 장면이 어찌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지, 그해 가을 경복궁에 낙엽이 남아나질 않았었다.

이 자리에 아빠가 있었다.

단진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단진이 애써 삼키려 했지만 이내 콧등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맺혔다.

아빠...

단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왕의 싸늘한 눈초리가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끌어올린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 남기로 마음을 정해 죄스러운 마음이 아빠를 불러낸 것인가.

아니 아빠가 단진을 부르고 있는 것인가.

단진은 갑작스런 슬픔에 목이 메어왔다.

잊고 있었다. 자신들이 없다면, 엄마를 떠나보내고 그토록 힘들어하던 아빠인데, 자식들마저 잃는다면.

아빠...

무슨 일이 있어도 여름이 집으로 돌려보낼게...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미안해...아빠에게 이렇게 미안한데 나는...

단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다리를 뻗고 설 수 있었고 처음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곳에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빠가 있는 그곳엔 잠시 다녀간 것인지도.

아빠...


향은 강녕전에서 나와 단진의 처소로 향했다. 처소의 문을 열자 어둠과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왔다. 또다시 단진을 이런 곳에 있게 하는 미안함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직 처소로 돌아오지 않은 것인가.

향은 서둘러 경회루로 향했다. 부왕이 바람에 날아가게 두라고 했기에 낙엽으로 만든 화살표는 그대로였다.

하트 모양에 LOVE 글자도 그대로였다.

단진이가 보이지 않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연못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단진이 보였다.

향은 안도했다. 향이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단진은 여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향이 단진을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단진의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향은 잠시 있었다.

향이 단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이냐?”

단진이 고개 들어 향을 보았다.

눈물에 젖은 단진의 얼굴을 보자 향의 마음이 무거웠다.

“저하...”

단진이 서둘러 눈물을 닦고는 일어섰다.

“저하...오늘 소인 때문에 놀라셨지요? 소인은 어찌 이리 잘못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송구하옵니다.”

향이 일어나 단진을 보았다. 향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 더 기다렸다.

......

......

......

......

“....송구하옵니다...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만...”

향은 그제야 한 번도 단진의 부친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아버지가 기억이 났느냐?”

....

“아버지께 다녀오겠느냐?”

“다녀올 수 있는 길이 아니옵니다.”

“멀어도 괜찮으니 다녀오도록 하거라.”

단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길을 찾는다 해도, 갈 수는 있어도 올 수 있는 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리 되면 다시는 저하를 뵐 수 없사옵니다. 그 길은 다시는 저하께 돌아올 수 없는 길입니다.

해서 갈 수 없사옵니다. 갈 수 없기에 이리 눈물이 나는 것이옵니다...

“저하...아버지 기억이 나질 않사옵니다. 그저 그리워서...저하...걱정하게 해드려 송구하옵니다...”

단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자 향이 닦아주었다. 향이 촉촉한 단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단진아.”

“예 저하...”

“너로 인해 놀라도 괜찮고, 너로 인해 걱정해도 괜찮고. 너로 인한 모든 건 다 괜찮다.”

“저하...”

“대신.”

........

“내 곁에만 있거라.”

“저하...”

단진이 향을 보았다.

연못에 드리워진 달빛이 일렁였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일제히 달빛을 따라 일렁였다. 연못에 들어앉은 향과 단진이 가까워졌다.


향은 단진과 함께 화살표를 거꾸로 따라가며 경회루 주변을 걸었다. 향은 단풍진 나무들을 보며 이야기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별자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궁 밖에 나가서 무엇을 했냐고 묻자 단진은 벗을 만났다고 했다. 단진은 김종서 집에 갔던 일을 이야기했고 향도 그 댁에 갔었다고 했다. 그러자 단진은 손뼉을 치며 신기한 일이라고 종알종알 떠들었다. 향은 그 모습을 보는 내내 참 좋았다.

다시 글자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을 때 단진의 눈물은 마르고 입가에 미소가 번져있었다.

향이 문자를 보고는 여전히 놀라운 듯 말했다.

“네가 서양문자를 아는 줄은 몰랐구나.”

향이 하트 속으로 들어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글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등의 불빛에 낙엽들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바람 탓인가, 낙엽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단진이 향의 곁에 앉았다.

향은 하얗고 긴 손으로 글자를 따라 썼다.

L O V E

향이 단진을 보았다.

“다시 한번 읽어주겠느냐?”

단진이 향을 보았다.

“.....러브. 라 하옵니다.”

“러브.”

향이 웃었다.

“연모라.”

향이 단진을 보았다.

“나는 너를 연모한다.”

........

단진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단진은 넋이 나간 듯 향을 보았다.

향이 웃었다.

“나는 너를 연모한다는, 서양 말로 어찌 말하느냐 물은 것이다.”

단진은 얼굴이 벌게졌다.

“아...아...그건...”

그 모습이 어찌나 어여쁜지 향이 웃었다.

허둥대던 단진도 향을 따라 방끗 웃었다.

향과 단진이 일어서자 바람에 낙엽이 비처럼 흩날렸다. 향과 단진의 머리 위로 낙엽비가 내리고 있었다. 단진의 머리 위로 노오란 낙엽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향이 단진의 머리에 내려앉은 낙엽을 떼어주었다.

이리 있거라. 어디 가지도 말고, 언제나 내 곁에 있거라.

낙엽비 속에서 향과 단진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흐흐 흐흐 흐흐흐

박 내관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바람을 어찌 막겠는가. 어찌해서 향과 단진만 만나면 뭐가 이리 쏟아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마음을 어찌 막겠는가.

마음이 가는데 몸이 가는 걸 어찌 막겠는가.

향과 단진의 머리 위로 낙엽비가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박 내관은 저하에게서 단진을 떼어내 연못에라도 던져야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조선의 국본으로서만 살아왔던 저하가, 심장이 뜨거운 사내가 되었다. 사내의 연심을 어찌 막겠는가.

박 내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박 내관이 해야 할 일은 사람의 눈과 입을 막는 일이었다. 해서 주위에 누가 보나 싶어 눈동자를 마구 돌렸다. 그러다 뭘 처먹었는지 단내가 풀풀 나는 공두가 보이자 오늘 밤 안으로 저놈이라도 죽여야 마음이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과 단진이 걸어갔다. 밤하늘의 달과 별들이 속삭이며 그들을 따라갔다.

키가 큰 향과 작은 단진이 걸어갔다. 용문양이 수놓아진 무사복을 입은 왕세자와 새앙머리에 다홍색 댕기를 두른, 옥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나인이 낙엽비 속을 걸어갔다.

햇살이 쏟아지는가 싶다가 석양이 쏟아지는 듯 했다. 그 색색의 낙엽비 속을 향과 단진이 서로를 보며 걸어갔다.

저만치 뒤 낙엽비 속에서 싸리비를 들고 박 내관이 공두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단진이 향을 보았다.

저하...언제나 저하 곁에 있겠사옵니다. 첫눈이 내리면 저하와 함께 눈길을 걷고. 꽃이 피면 저하와 함께 꽃길을 걷고. 그리 저하 곁에 머물 것이옵니다. 또한 소인이 저하를 지킬 것이옵니다. 저하의 머리가 함박눈이 내린 듯 하얗게 될 때까지 그리 오래 사시도록 할 것이옵니다. 소인이 그리 만들 것이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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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7 cr*****
    작성일
    21.03.11 11:25
    No. 1

    생각치도 못한 전개에 빵 터졌네요 역시 예상을 뛰어넘는 단진입니다^^ 그림같은 마지막 장면도 너무 좋아요~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찬성: 6 | 반대: 0

  • 작성자
    Lv.6 k1******..
    작성일
    21.03.11 14:51
    No. 2

    너무재밌어요 잘보고갑니다!!

    찬성: 6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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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숙원 홍씨 76. 모두 목멱산에 오르다 +2 20.12.31 1,603 10 23쪽
75 숙원 홍씨 75. 용모파기 +2 20.12.28 1,625 10 17쪽
74 숙원 홍씨 74. 진양과 안평, 입궐하다 +3 20.12.24 1,655 10 26쪽
73 숙원 홍씨 73. 다시 돌무덤으로 +2 20.12.21 1,673 10 21쪽
72 숙원 홍씨 72. 이향의 진귀한 서책 +2 20.12.17 1,703 10 25쪽
71 숙원 홍씨 71. 단진, 육갑을 마음에서 내려놓다 +3 20.12.14 1,722 10 14쪽
70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2 20.12.10 1,733 10 25쪽
69 숙원 홍씨 69. 향의 고백 +4 20.12.07 1,751 10 16쪽
68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3 20.12.03 1,781 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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