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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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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1.02.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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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숙원 홍씨 84. 용무용, 이향을 만나다

DUMMY

숙원 홍씨 84. 용무용, 이향을 만나다


용무용이 관복을 갖춰 입었다. 석이 이제껏 김종서가 창이를 처단해야 한다고 이향에게 간청했다고 아뢰었다.

이향이 창이를 죽이지는 않을 터. 그것이 바로 고려인의 피를 딛고 서서 고귀한 듯 살아온 자의 위선이지. 도적질을 해 남의 나라를 빼앗아놓고 인심을 베푸는 것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었다.

용무용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놈들의 뻔뻔하고도 그 잔인한 웃음을 이 손으로 반드시 끊어낼 것이다.

용무용이 전립을 쓰고 갓끈을 묶었다.

“너는 안에서 대문이 열리기 전에 내금위 별감들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막아라.”

“예 형님.”

용무용이 나가려다 석을 서늘히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향이 나가기 전에 별감들이 들어와선 아니 된다.”

“예 형님.”

용무용이 신발을 신고 내려와 어두운 마당을 잠시 보았다.

용무용이 별채를 나가는 동안 석은 담장을 뛰어넘었다.

용무용이 성큼성큼 안채로 향했다. 용무용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이향을 베고 또 베었다.

안채로 들어서니 방안에서 밝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집안 곳곳을 등불이 훤히 밝히고 있었다. 내금위 별감들이 안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 앞에서 창이가 서성이고 있었다. 용무용은 창이를 눈에 담은 채 걸어갔다.

창이는 이제껏 김종서가 자신을 처단해야 한다고 한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허나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보다 거흘합족이 수상하다, 증좌를 찾아오겠다고 한, 그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창이 부족과 거흘합족은 다른 부족인데. 앞뒤가 맞지 않았다. 김종서의 이야길 들어보면, 마치 창이가 부족의 족장쯤 되는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창이는 앓아누웠을 때 분명, “형님” “형님의 지시” 란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또한 규모도 훨씬 컸고 나이가 많은 자들도 있었다. 뭔가가 맞는 듯하면서도 전혀 맞지가 않았다.

거흘합족은 나비문신이 없으니 다른 부족인 건 맞는데.

거흘합족은 대체 정체가 무어란 말인가. 헌데 거흘합족은.

그때였다. 창이의 눈에 용무용이 보였다. 용무용이 창이를 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용무용이 입은 관복이 불편했고 갓의 구슬 끈이 흔들릴 때마다 묘하게 거슬렸다.

창이는 몸을 돌려 용무용을 보았다. 이제껏 창이를 주시하고 있던 내금위 별감들의 눈이 일제히 용무용을 향했다.

용무용은 창이에게 눈을 둔 채로 그대로 지나쳤다.

창이가 불렀다.

“잠시만요.”

용무용이 멈춰섰다.

창이가 용무용 앞으로 갔다.

“당신이 거흘합족의 족장이었습니까?”

“그건 어찌 묻느냐?”

“이름이 하도 이상해서, 대체 누가 그런 이름을 지었나 궁금해서요.”

“나도 궁금하구나. 네놈이 실없는 농을 주고받을 정도로 나와 친했느냐?”

창이가 피식 웃었다.

“허면 실없는 농담은 빼고.”

창이가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당신네 부족은 문신이 뭡니까?”

“뭐라?”

“당신이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야인들의 몸에는 온갖 문신이 있다고. 헌데 당신들 부족은 문신이 없는 것 같아서. 전에 슬쩍 봤거든요.”

용무용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빛에서 살기는 사라졌어도 예리한 감은 그대로였다. 용무용은 자신이 키운 최고의 살인병기인 창이를 보았다.

허나 용무용은 실망스러웠다.

내가 그리 가르쳤더냐.

“없는 것 같다와 없는 건 전혀 다른 것이다. 죽이고 싶다와 죽였다와 같이. 너무도 다른 것이다. 확실하지 않은 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용무용이 창이에게 닿을 듯 가까이 다가섰다.

“잘”

.....

“찾아 보거라.”

용무용이 창이를 지나쳤다.

창이가 돌아보았다.


이향이 있었다.

병풍 앞 비단 보료 위에, 용문양이 들어간 비단 옷을 입고, 섬세하게 세공한 은빛 상투관에 비녀를 꽂은 이향이, 아주 고귀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향이 앉은 비단 보료는 고려인의 살로 만든 것이고, 이향이 입은 비단 옷은 고려인의 뼈로 만든 것이고, 이향의 장신구는 고려인의 피로 만든 것이다.

이향의 고귀한 미소는 고려인의 한 맺힌 원한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향과 진양, 안평, 김종서와 백겸의 눈길이 모두 용무용을 향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최 무사와 권 무사가 용무용을 주시했다.

용무용은 들어서자마자 감격스러운 듯 이향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저하...조선인 김선 세자저하께 인사 올리옵니다.”

용무용은 엎드린 채 말했다.

“저하...미천한 소신을 조선인으로 받아주시고. 일천한 소신의 재주를 높이 사주시어 판관의 자리를 주신 이 은혜,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저하...소신 저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보답코자 목숨을 걸고 저하께 충성하겠사옵니다.”

“일어나 가까이 오거라.”

용무용이 일어섰다.

용무용은 향에게 다가와 인사하고 진양과 안평을 보았다. 진양의 눈빛은 차가웠고 안평의 눈빛은 불편했다.

“대군마마. 오랜만에 뵙습니다.”

용무용이 김종서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의아한 듯 백겸을 보았다.

“앉거라.”

“예 저하...”

용무용은 향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향이 용무용을 보았다.

“김 판관이 잘하고 있다 들었다.”

“망극하옵니다 저하...”

용무용이 백겸을 힐끗 보자 향이 물었다.

“저자를 아느냐?”

“전에 본 적이 있사옵니다.”

“어디서 보았느냐?”

“한 번은 한성부에서 무예시합이 있던 날이고, 다른 한 번은 기방에서 봤사옵니다. 모두 밖에 있는 창이란 자와 함께였사옵니다.”

“그게 전부더냐?”

“예 저하...헌데 어찌 그러시옵니까?”

김종서가 조용히 나무랐다.

“저하께서 하문하시면 대답을 올리면 되는 것이다. 어찌 저하께 되묻는 것이냐?”

용무용이 향에게 엎드렸다.

“송구하옵니다 저하...소신 아직 조선의 법도를 다 익히지 못해 무례를 범하였사옵니다.”

백겸은 거슬렸다. 용무용이 말과 행동으로 굽히고 있으나 눈빛은 기세등등했고. 엎드린 채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거흘합족을 조심하라 했다면, 증좌를 찾아오겠다고 했다면, 저자가 감추고 있는 게 무얼까.

향이 물었다.

“그때 무슨 이야길 나누었느냐?”

용무용이 고개를 들고 백겸을 잠시 보고는 향에게 말했다.

“북방의 나비문신이 있는 자들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사옵니다.”

“해서 뭐라 했느냐?”

“나비문신이 있는 자들을 알면서도 모른다고 했사옵니다. 야인들의 몸에는 온갖 문신이 다 있기에 그리 대답했사옵니다.”

향이 잠시 있자 김종서가 물었다.

“허면 너는 나비문신이 있는 자들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느냐?”

“대감, 나비문신이 있는 자들은 알지 못하오나...”

용무용은 입을 다물었다.

향이 물었다.

“어찌 그러느냐?”

“저하...확실치 않기에 소신 조심스러워 아뢰기가 송구하옵니다.”

“괜찮으니 말해 보거라.”

용무용은 백겸에게 눈길을 잠시 두고는 향에게 말했다.

“지난번 이들이 소신에게 나비문신에 관해 물었을 때,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사옵니다. 헌데 창이란 자의 무예실력을 본 터라 짚이는 게 있었사옵니다. 나비문신이 있는 자들이 이들을 찾아 도성까지 왔다는 건. 이들의 무예실력을 알고도 쫓았다는 게 아니옵니까. 그렇다면 이들을 쫓는 자들 역시 무예실력이 뛰어나고. 그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는 자들이라면.”

....

“그 이름 없는 부족의 살수들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이름 없는 살수라 하였느냐?”

“예 저하...북방에는 어려서부터 살수로 키워지는 자들이 있사옵니다.”

모두가 놀라 보았다. 조금 전 김종서가 말한 자들과 같은 자들을 말하고 있었다.

김종서가 모른 척하고 물었다.

“허면 그들은 어떤 부족이냐?”

“부족의 이름조차 없습니다.”

향이 물었다.

“허면 그들이 고려인이더냐?”

용무용은 바로 답했다.

“소신이 잘은 모르오나 고려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사옵니다. 북방에는 수많은 짐승의 종처럼, 수많은 종족들이 섞여 있사옵니다. 죄를 짓고 도망친 조선인부터 명나라의 죄인들, 또한 살아남은 고려인들까지. 다양하옵니다.”

모두가 보았다.

“조선의 선왕이신 태종대왕께서 고려인들을 배에 태워 유배를 보내라하고는 수장시켰다 들었사옵니다.”

진양이 발끈했다.

“네 이놈, 감히 저하 앞에서 어찌 그런 망발을 입에 담느냐?”

향이 나무랐다.

“진양...”

“송구하옵니다 저하...”

“계속 하거라.”

“소신, 들은 대로 아뢰겠사옵니다. 그때 배를 수장시켰으나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다 하옵니다. 해서 그들이 북방으로 와 자리를 잡았다 했사옵니다. 허나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죽었다 하기도 하고. 명으로 갔다고 하기도 하고. 그들이 살수를 키워낸다고도 하고. 여러 설들이 돌았사옵니다. 허니 그 살수들이 고려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사옵니다.”

안평이 물었다.

“허면 북방에 고려인들이 많다는 것이냐?”

“많든 적든 있습니다 대군마마. 허나 야인들은 고려인이든 조선인이든 관심이 없습니다.”

진양이 물었다.

“허면 그 이름 없는 살수들이 그토록 뛰어나다면, 너희 부족과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을 터, 그들과 싸운 적이 있느냐? 그들의 부족이 살던 곳이 어디냐?”

“대군마마. 무식하고 잔인한 짐승과 같은 게 야인들입니다. 허나 무식하고 잔인한 짐승 같기에 제 살 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싸워 득이 없다 여기면 검을 겨누지 않습니다. 비슷한 실력이나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는데 무엇 하러 검을 겨누겠습니까!”

....

“우리 부족이 그들과 싸웠다면 서로가 수십, 아니 수백의 피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누가 득을 보겠습니까. 주변의 약삭빠른 야인들입니다. 해서 힘센 짐승일수록 서로의 영역은 넘보지 않는 게 야인들의 보이지 않는 규칙입니다. 해서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이제껏 가만히 있던 백겸이 입을 열었다.

“헌데 김 판관은 어찌해서 조선인이 되기로 한 것이오?”

“사람답게 살아보기 위해서요.”

“사람답게 살기 전에는, 조선에 해가 되는 어떤 악행을 저질렀소?”

모두가 백겸을 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용무용은 백겸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향을 보았다.

“저하...아뢰옵기 송구하오나...소신, 조선에 해를 끼치는 악행을 너무도 많이 저질러 일일이 말씀 올릴 수 없사옵니다. 또한 너무도 잔인해 말씀 올릴 수 없사옵니다. 또한 소신, 조선인이 되기로 하고 그 모든 것을 내려놨기에 말씀 올릴 수 없사옵니다. 모든 걸 말씀 올리고 조선인으로 살 수 없기에 말씀 올릴 수 없사옵니다...”

.....

용무용이 엎드렸다.

“저하...부디 지난날을 용서하시고...조선인 김선으로 살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용무용이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진양은 용무용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뛰어난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평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무용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끔 만들어놓고 납작 엎드리고 있었다. 무서운 자였다.

허나 백겸은 고집스러웠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이오? 어깨에 나비문신이 없다는 걸 확인시켜 줄 수 있소? 혹 당신도 고려인이오?”

김종서가 조용히 나무랐다.

“그만 하거라. 김 판관의 악행을 밝힌다 해서 그자의 죄가 덮어지는 건 아니다.”

......

백겸은 그제야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백겸은 엎드려 있는 용무용을 보았다.

백겸이 용무용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고, 백겸이 용무용을 의심에서 꺼내 준 격이 됐다. 백겸의 실수로 더는 용무용의 부족이 수상하다 증좌를 찾아야한다는 말을 더는 거론할 수 없게 됐다.

지금 용무용은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으며 이향에게 죄를 실토했고, 이향은 그 죄를 덮어주어야 했다. 또한 김종서는 더는 거흘합족이 수상하다는 말을 꺼낼 수 없게 됐다.

김종서가 향에게 말했다.

“저하...송구하옵니다...모든 건 소신의 부덕이옵니다...”

향이 백겸을 보았다.

“백겸은 나가 있거라.”

백겸이 용무용에게 시선을 둔 채로 일어섰다.


백겸이 밖으로 나오자 창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이왕 쫓겨날 거 벗기지 그랬어?”

.....

“너 졌어.”

백겸이 한숨을 내뱉으며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을 응시했다. 거흘합족의 수상함을 백겸이 찾아냈으나, 결국 거흘합족의 수상함을 백겸이 덮어버린 꼴이 됐다.

백겸은 뭔지는 모르지만 거흘합족의 수상한 점을 찾아야 창이의 부족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창이가 멍하니 있는 백겸에게 말했다.

“져서 속상해서 그래? 늘 졌잖아. 새삼스럽게.”

“난 진 적 없어.”

“연모해!”

창이가 입술을 내밀었다.

“아까 나와 같이 죽겠다며! 감동 받았어. 뽀뽀해줄게! 원빈이 보다는 못하겠지만.”

백겸이 창이를 밀쳤다.

“이 와중에 농담이 나와?”

“나와!”

“너 역당으로 죽게 생겼다고!”

“네가 살려줄 텐데 뭘.”

“빨리 따라오기나 해.”

백겸과 창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불 꺼진 별채로 들어섰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백겸과 창이는 사뿐히 마루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온 백겸과 창이는 문을 닫았다. 백겸이 불을 밝혀 촛불을 들고 방안을 비추면서 살폈다.

“이 거흘합족이 숨기는 무언가를 찾으면, 너희 부족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창이가 문갑을 열어 보며 말했다.

“우리 부족은 대한민국이야.”

창이는 아까 용무용과 스쳤을 때를 떠올리고는 진지해졌다.

“김 판관, 그 야인 말이야...자기 입으로는 짐승 같은 야인이라 하지만 아니...모든 걸 다 꿰뚫고 있어.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도. 대체 정체가 뭘까...”

백겸이 벽장을 찾아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어.”

“뭘 찾는데? 설마 USB에 범행을 담아두기라도 했을까봐? 너 뇌 두고 온 거 맞아!”

“뇌 두고 온 건 너지! 제가 역당의 무리입니다? 그냥 나 혼자 의금부에 갔으면 알아서 나왔을 거야!”

“영혼이 나왔겠지!”

“나비문신은 왜 보여줘? 어이가 없어서 진짜!”

“진짜 어이가 없는 건 나야! 문종이 나보다 더 머리가 좋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적당히 둘러댔어야 했어.”

“적당히 둘러댄다고 넘어갈 사람들이 아니야. 나만큼 머리가 좋아. 너만큼 머리 나쁜 사람 없어 여기.”

“나비문신만 안보였어도 역당이 되진 않았지!”

“이미 흘러간 물이야.”

창이가 씨익 웃으며 백겸에게 어깨동무했다. 백겸은 짜증을 내며 밀치고는 촛불을 불어 끄고 제자리에 놓았다. 백겸이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 너무 놀라 한 걸음 물러서며 창이의 팔을 움켜잡았다. 창이가 보니 문 앞에 작은 형체가 있었다.

“너희들 여기서 뭐해?”


백겸과 창이가 마당에 서서 인옥을 보고 있었다. 백겸은 생각지도 않은 인옥의 등장에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고. 인옥은 태평하게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창이가 웃었다.

“여름이 천적이 원빈이 말고 또 있었네.”

백겸이 물었다.

“넌 여기서 뭐해?”

인옥이 소곤거렸다.

“저하께서 오셨다고 해서, 혹시라도 봄이가 다시 왔나 해서 가봤더니. 독고준이 서 있잖아. 계속 돌멩이 던졌는데도 모르더라. 돌멩이가 너무 작았나봐. 아...봄이랑 원빈이 여기 왔었다는 얘기 해주려고 따라온 거야...”

백겸과 창이가 동시에 물었다.

“어딜 와?”

“여기!”

백겸은 신경이 곤두섰다.

“서봄 나원빈 궁에 안 들어갔어?”

“그게 아니고, 나 데려다 주러 왔다가 김종서...아...아버님...봄이가 아버님이라고 해야 한대. 그래야 집에서 살 수 있대....아무튼 아버님한테 딱 걸려서 집으로 들어왔어. 원빈이가 나 때문에 저하 심부름도 못하고. 멍든 눈도 나 때문이라고 하니까.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며 나를 멀리 보낸다고 했어.”

.....

“전에도 내가 한번만 더 나가면 멀리 보낼 거라고 했거든. 그런데 봄이가 김종서님에게. 아닙니다! 모든 건 제가 잘못한 겁니다! 여기 온 것도 저고. 마님을 끌어올린 것도 저고. 마님을 별채에서 기다리라고 한 것도 저입니다!”

백겸은 못마땅한 듯 한숨을 내뱉고 창이는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봄이가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질 테니까. 나를 믿어달라고 했어. 그리고는 앞으로 궁 밖에 나올 때마다 이곳에 오게 해달라고 했어. 그래서...김 선생님이 앞으로 봄이랑 원빈이 우리 집에 언제든 놀러오라고 허락하셨어...잘됐지?”

백겸이 물었다.

“궁으로 들어간 거 확실하지?”

“응. 이 집 가노가 궁 앞까지 바래다주고 왔어.”

창이는 아쉬웠다. 조금 기다리지. 그랬다면 얼굴 볼 수 있었을 텐데.

“나 이제 여기서 봄이 안 기다려도 돼. 이 아저씨 눈치 안 봐도 되고...”

백겸은 인옥에게 재빨리 물었다.

“너 혹시. 여기 있는 그 야인 족장이랑 얘기한 적 있어?”

“많이 했지!”

“무슨 얘기?”

“여기 들어오게 해달라고 부탁하면, 그때마다 안된다고 했어.”

“또 다른 건?”

“없어. 나 못 들어오게 문을 잠가두고 담으로 넘어 다니는 것 같았어.”

“담으로?”

그때였다.

“마님! 마님!”

인옥이 후다닥 가자 백겸과 창이는 서로를 보았다. 도화의 말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이 별채가 몰래 드나들기 가장 좋다는 말이. 백겸과 창이의 눈길이 동시에 담장을 향했다.


향과 진양, 안평, 김종서, 용무용 앞에 각자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향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용무용은 북방 야인의 삶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이는 살아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생생한 이야기여서 모두가 빠져들었다. 거흘합족은 사냥을 즐겼고 호랑이 사냥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해 진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또한 용무용은 한성부의 관원들에 대해, 앞으로 관원들을 뽑을 때 기준을 높여야하고 실력과 인성 두 가지를 함께 갖춘 자들을 등용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사사로이 뇌물을 받는 관원들에 대해 엄벌을 내려야 하고, 구체적인 계획까지 이야기해서 향을 놀라게 했다. 향이 원하는 걸 용무용이 제시하고 있었다.

김종서도 진양도 안평도 용무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향이 말했다.

“그 짧은 시간에 그 많은 걸 알아내고 많은 걸 준비했구나. 참으로 놀랍구나.”

“저하...망극하옵니다.”

향이 용무용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라. 네게 술 한 잔 내리고 싶구나.”

“저하...망극하옵니다...”

용무용이 일어나 향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향이 용무용을 보았다. 용무용의 눈빛은 여전히 거친 듯 보였으나 너무도 단정했다.

“김 판관은 참으로 우물 같구나. 속이 깊어 보이지 않으나, 퍼도 퍼도 계속해서 나오는 우물 말이다.”

용무용은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술잔을 잡았다. 향이 술을 채워주었다.

“마시거라.”

용무용이 고개를 돌리고 술을 삼켰다. 목구멍으로 고려인이 쏟은 피가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저하...미천한 소신에게 저하께서 친히 귀한 술을 내려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향이 용무용을 보았다.

“김 판관.”

“예 저하...”

“네 그 우물 속에 무엇이 있든 그건 중요치 않다.”

.......

“조선을 위한 것만을 꺼내거라. 조선의 백성을 위해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그런 맑은 물만을 퍼 올리거라. 그리하면 되는 것이다.”

용무용이 향의 눈을 보았다. 날카로운 검이 번뜩였다. 역시 이향은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었다. 무얼 알고 있는 것인가. 모든 걸 용서한다는 말이었으나 겁박이었다. 이제부터 조선에 해가 되는 일을 해선 안된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용무용이 납작 엎드렸다.

“저하...소신, 저하의 말씀, 뼛속까지 깊이 새기겠사옵니다.”

용무용은 잠시 있다 고개를 들고 향을 보았다.

“저하...소신 저하께 제 어깨에 나비문신이 없음을 확인시켜드리고 싶사옵니다.”

진양과 안평, 김종서가 보았다.

“소신 비록 조선에 해가 되는 악당이었으나 역당은 아니었사옵니다. 저하...부디 허락해주시옵소서...”

향이 잔에 술을 따랐다.

“되었다.”


용무용은 뒷걸음으로 물러나 자리에 와서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진양과 안평이 서로를 보았다. 역당이 아니란 증거를 백겸이 준 꼴이 됐다.

진양이 용무용을 보았다. 역당이 아니라고는 하나 자꾸만 거슬렸다. 발톱을 숨긴다 해서 발톱이 사라지겠는가. 대체 저자의 정체가 무어란 말인가. 허나 지금은 나비문신을 잡는 게 시급했다. 진양은 용무용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결국 순포 밖에 없는 것인가.

용무용이 향에게 말했다.

“저하...아뢰옵기 송구하오나...소신 청이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저하...함길도에 남아있는 부족에 관한 일이옵니다.”

......

“소신은 이리 판관의 직책을 얻고 자리를 잡았으나, 아직 그곳에 있는 소신의 부족들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소신이 자리를 잡으면 다 데리러 오겠다고 약조를 했으나, 그것 또한 여의치 않다는 걸 알고 있사옵니다. 허나...소신은 제 부족이 모두 조선인으로 살고, 또한 조선인과 혼인하여 조선에 터를 잡아 살게 하고 싶사옵니다.”

“그건 전하께서 가장 바라시는 일이다.”

“해서 말씀 올리는 것이옵니다...”

....

“저하...명나라에 조공을 보내는 해동청과 매를 비롯한 동물과. 가죽을 소신의 부족이 잡아서 진상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저희 부족은 무예실력만큼이나 뛰어난 것이 사냥이옵니다.”

.......

“허나 아무리 좋은 짐승을 사냥한다 해도 직접 거래를 하게 되면 이문이 너무도 적사옵니다. 해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도와주십사 청하는 것이옵니다.”

김종서는 용무용이 장터를 다니며 가죽의 시세를 알아보러 다닌 일이 떠올랐다.

김종서가 향에게 말했다.

“저하...늘 명나라에 조공으로 보내는 해동청과 매를 잡지 못해 애를 태웠사온데, 이들이 그 수량을 맞춘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향이 용무용을 보았다.

“그리하도록 하자.”

“저하...망극하옵니다...언제든 수량을 맞출 준비를 갖추도록 함길도에 연통을 넣겠사옵니다.”

진양이 용무용을 보았다.

“너희 부족의 사냥 실력이 그토록 뛰어나단 말이냐?”

“예 대군마마. 소신의 부족은 걷기도 전에 활부터 잡았사옵니다...대군마마.”

용무용이 들뜬 얼굴로 진양을 보았다.

“대군마마께서 조선의 신궁이라 들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신다면 대군마마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용무용은 말과는 다르게 눈빛은 오만했고 그것이 진양의 심기를 거슬렀다.

진양이 잠시 보다가 되물었다.

“자신 있느냐?”

용무용이 고개를 숙였다.

“소신 일천하여 자신은 없습니다. 허나, 져본 적 또한 없습니다!”

진양은 날이 섰다.

“져본 적이 없다?”

“예 대군마마.”

진양과 용무용이 기 싸움 하듯 서로를 보았다.

향은 승부욕 강한 진양을 보며 웃었다. 그러자 안평 역시 웃었다.

“저하...형님께서는 늘 이기기만 하셨고 김 판관은 져본 적이 없다하니, 겨룬다면 누가 이길지 궁금하옵니다.”

용무용의 가슴이 맹렬히 뛰기 시작했다. 용무용이 짜놓은 판에 진양과 안평이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향이 용무용이 원한 곳에 돌을 놓으면 되는 일이었다.

향이 진양과 용무용을 보고 말했다.

“나도 궁금하구나. 누가 이길지.”

용무용은 아찔했다. 이제 거의 다 됐다.

향이 잠시 있다 용무용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용무용은 생각지도 못한 향의 말에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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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Lv.17 vely4606
    작성일
    21.02.04 15:26
    No. 1

    늘 잼나게 봐요^^ 대단하신 우리 작가님 건필하세요^^

    찬성: 5 | 반대: 0

  • 작성자
    Lv.7 cr*****
    작성일
    21.02.04 18:04
    No. 2

    진짜 이향의 수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하네요! 오늘도 너무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찬성: 5 | 반대: 0

  • 작성자
    Lv.6 k1******..
    작성일
    21.02.04 18:21
    No. 3

    작가님 너무 재밌어요 오늘도 감사합니당!!

    찬성: 5 | 반대: 0

  • 작성자
    Lv.6 jj****
    작성일
    21.02.09 22:58
    No. 4

    중간중간에 잔잔한 웃음과 보는내내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하는 작품이였어요..제스퇄^^ -민호-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16 vo***
    작성일
    21.02.10 09:21
    No. 5

    85화는 언제 올라오나요ㅜㅜ 작가님 명절 잘 쇠시고 다음 이야기 빨리 만나고 싶어요^^ 생각지도 못한 향의 말이 뭘까요?? 너무 궁금 궁금 궁금........

    찬성: 3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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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숙원 홍씨 88. 단진을 향한 이향의 마음 +2 21.03.18 1,283 9 16쪽
87 숙원 홍씨 87. 그들의 이향 +4 21.03.15 1,289 9 18쪽
86 숙원 홍씨 86. 낙엽비 +2 21.03.11 1,304 9 19쪽
85 숙원 홍씨 85. 단진, 부왕과 마주치다 +2 21.03.08 1,332 9 18쪽
» 숙원 홍씨 84. 용무용, 이향을 만나다 +5 21.02.04 1,382 10 24쪽
83 숙원 홍씨 83. 백겸, 김종서를 만나다 +3 21.02.01 1,437 10 19쪽
82 숙원 홍씨 82.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3 +2 21.01.28 1,483 10 23쪽
81 숙원 홍씨 81.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2 +3 21.01.25 1,513 10 18쪽
80 숙원 홍씨 80.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1 +2 21.01.21 1,523 10 21쪽
79 숙원 홍씨 79. 진양, 사저로 백겸과 창이를 부르다 +2 21.01.18 1,553 10 17쪽
78 숙원 홍씨 78. 단진과 공두, 김종서 집에 들다 +3 21.01.07 1,557 9 20쪽
77 숙원 홍씨 77. 목멱산의 첫 모임 +2 21.01.04 1,579 10 14쪽
76 숙원 홍씨 76. 모두 목멱산에 오르다 +2 20.12.31 1,600 10 23쪽
75 숙원 홍씨 75. 용모파기 +2 20.12.28 1,623 10 17쪽
74 숙원 홍씨 74. 진양과 안평, 입궐하다 +3 20.12.24 1,652 10 26쪽
73 숙원 홍씨 73. 다시 돌무덤으로 +2 20.12.21 1,670 10 21쪽
72 숙원 홍씨 72. 이향의 진귀한 서책 +2 20.12.17 1,700 10 25쪽
71 숙원 홍씨 71. 단진, 육갑을 마음에서 내려놓다 +3 20.12.14 1,719 10 14쪽
70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2 20.12.10 1,731 10 25쪽
69 숙원 홍씨 69. 향의 고백 +4 20.12.07 1,749 10 16쪽
68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3 20.12.03 1,778 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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