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181
추천수 :
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1.01.18 11:00
조회
1,558
추천
10
글자
17쪽

숙원 홍씨 79. 진양, 사저로 백겸과 창이를 부르다

DUMMY

숙원 홍씨 79. 진양, 사저로 백겸과 창이를 부르다


진양의 집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집안 곳곳의 모든 등불과 마당의 석등과 화톳불까지 밝혀져 있었다. 환한 불빛과는 달리 집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불을 밝히며 다니는 가노들도 진양의 눈치를 살피느라 발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진양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검붉은 무사복을 입은 진양이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연푸른 무사복을 입은 안평이 생각에 잠겨 있고 양가와 문가가 진양의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대문이 열리자 진양의 눈길이 그곳으로 향했다. 순포가 달려 들어왔다. 진양은 당장이라도 저놈을 죽이고 싶었으나 애써 눌렀다.

“어찌 되었느냐?”

“찾았사옵니다 대군마마!”

진양이 문 쪽을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헌데 어찌 혼자 온 것이냐?”

“조금 전 백겸과 창이가 기방으로 들어갔고. 형님들이 지금 기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기다린다?”

진양의 눈에 불길이 솟았다.

“당장이라도 잡아왔어야지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이냐! 이놈들이 진정 정신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다가온 안평이 말했다.

“형님. 진정하시오.”

안평이 순포를 힐끗 가리켰다. 그제야 진양은 숨을 깊게 내뱉었다.

순포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성격 급한 진양이 이리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이상했다. 또한 이제껏 순포 옆에 사람을 붙여 오도 가도 못하게 하더니 오늘은 백겸과 창이를 찾으러 나가라고 했다. 집안은 대낮처럼 밝았다. 대체...

진양이 순포를 보았다.

“너는 서둘러 가서 놈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잘 감시하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집으로 데려와야 한다.”

“예 대군마마.”

진양이 덧붙였다.

“놈들이 내금위 별감들을 죽였다.”

순포가 놀라 보았다. 순포는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진양은 순포를 살폈다. 이놈이 들켜서 당황하는 것인가, 정녕 알지 못하는 것인가.

“여차하면 죽여도 좋다.”

순포가 진양을 보고만 있자 진양이 다가섰다.

“어찌 그러느냐? 자신 없느냐?”

순포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옵니다 대군마마. 명 따르겠사옵니다.”

진양이 양가에게 말했다.

“너는 순포를 따라가거라.”

양가와 순포가 함께 나가자 진양의 가슴이 들썩였다.

안평이 진양에게 말했다.

“형님 어찌 그리 속을 내보이시오? 저하께서 내색하지 말라 이르지 않으셨소!”

진양이 울그락붉으락해져서 말했다.

“모든 게 다 내 탓이니, 내 어찌 속에서 천불이 나지 않겠느냐!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저놈을 알아챘어도,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놈들의 입을 열었어도,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저하께 찾아가 아뢰었어도 내금위 별감들이 죽진 않았겠지!”

“형님, 앞서가지 마시오. 내금위 별감들이 없어졌다 했지, 죽은 시신이 발견된 건 아니질 않소! 또한 아직은 누가 그랬는지.”

“한가한 소리 집어치우거라! 지금 놈들이 저하의 안위를 살피는 내금위까지 손을 뻗었단 말이다!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저하의 안위가 위협을 받고 있단 말이다. 이게 다 내 불충이다. 이런 망극할 때가 어디 있단 말이냐!”

“흥분한다 해서 일이 해결되겠소?”

“허면 흥분하지 않으면 해결된다더냐?”

안평은 화를 내는 진양이 못마땅했으나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안평도 속이 타들어가긴 마찬가지였다. 분명 공양왕의 소식을 알려준 궁녀가 죽었단 소식이 곧 당도할 것 같았다.

진양은 평소답지 않게 자책이 길었다. 진양은 향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해서 모든 일을 다 완벽하게 해서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들고 가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일이 이렇게 엉망이 돼 버렸다. 퇴궐하기 전에 내금위 별감 둘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양은 확신했다. 죽었을 거라고. 그때그때 보고했더라면 내금위 별감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진양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저하...다른 길로 가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저하...역당의 무리가 도처에 있사옵니다....저하....”

박 내관의 읍소에도 향은 장터로 들어섰다. 박 내관은 불안해하며 종종걸음으로 향을 따랐고. 최 무사와 권 무사, 성 무사, 정 무사가 곁을 따랐고 멀찍이 십여 명의 내금위 별감들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향이 최 무사를 보았다.

“내금위에 들어온지 일 년도 안된 별감들이라 했지?”

“그러하옵니다 저하...”

향은 잠시 있었다.

“반드시 찾거라.”

“예 저하...”

최 무사는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제 수하들의 생사도 알지 못하니 속이 타들어갔다. 아직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죽었다고 확신했다. 검은 복색의 사내들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최 무사는 경험이 적은 별감 둘을 한 조로

보낸 일을 자책했다. 또한 최 무사가 가장 걱정하는 건 별감들이 무슨 말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저하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저하...모든 게 소신의 불찰이옵니다.”

향이 멈춰서 최 무사를 보았다.

“허면 그자를 찾으라 한 내 탓이더냐?”

최 무사가 고개를 숙였다.

“저하...받잡기 민망하옵니다. 말씀 거두어주시옵소서...”

“내 탓이 아니라면, 네 탓 또한 아니다.”

......

“일을 벌인 그자들 잘못이다.”

주막등이 밝혀진 국밥집 골목으로 들어서자 구수한 냄새와 함께 시끌벅적한 소리가 쏟아졌다. 대부분이 신세한탄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로 시작해 양반들 욕으로 이어지고 임금에 대한 원망으로 끝이 났다.

국밥집 사거리에 이르렀을 때 사내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술 가져와! 술!”

향이 멈춰서 국밥집 안을 보았다.

이미 술에 잔뜩 취한 사내 둘이 술을 마시고 있고. 그 옆으로 세 명의 사내가 푸념을 하며 술을 마시고. 한 잔 들이켜고 한숨 한 번 내쉬는 사내들이 있었다.

주모가 고함친 사내에게 이것만 먹고 가라면서 술병을 내밀었다.

코가 벌건 사내가 술을 따라서 들이켜고 술잔을 탁 소리 나게 놓았다.

“니미럴 하루 죙일 뼈가 빠지게 일해도, 남는 건 빚이지...지난 가뭄 때 먹을 게 없어 쌀을 빌렸는데...올해는 농사가 잘돼 새끼들 끼니 걱정 안하나 했더니...옘병...농사가 잘됐으니 빌려간 쌀의 이자를 곱절로 갚으라는 걸세...이런 법이 세상 천지에 어딨단 말인가...허면 우린 뭘 먹고 살란 말이여...”

옆 자리에 앉은 사내가 눈치 없이 말했다.

“그건 법으로 금지된 거 아니여?”

“법? 옘병. 우리 같은 놈들한텐, 하늘의 별보다 멀리 있는 게 법이지. 고향서 살 때 현감이 하도 등쳐먹어, 먹고 살기 힘들어 고향 떠나왔드만.....등쳐먹는 놈 이름만 바뀌었지. 백성 등쳐서 그 윗선으로 나르고 날라 나눠먹기 하는 걸, 궁에서만 모르지.”

“임금은 대체 뭘 하는 거여?”

“뭘 하긴, 먹성도 좋다던데, 저 좋아하는 책 뜯어먹겠지!”

박 내관이 놀라 향을 보았다. 향은 차분히 듣고 있었다.

“입 조심혀. 그래도 지금은 임금님이 좋으셔서 살기 좋은 거지.”

“양반들이나 살기 좋겠지...양반들은 그 뭣이여 상소다 뭐다하며 지들 하고 싶은 말 다 하는데. 우리 같은 상놈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들을 귀가 있나? 괜히 입 잘못 놀렸다 황천길 가지...”

“하기사...법으로 살인은 금한다 했지만 맞아죽는 상놈이 어디 한둘인가...”

“상놈이 사람이여?”

코가 벌건 사내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와 담장 앞에서 바지춤을 풀었다. 오줌이 졸졸 나오자 갑자기 몸을 홱 틀었다.

“궁이 이 쪽이지...옛다!”

박 내관이 망극해하며 향을 보았다.

“저하...”

별감들이 그 사내에게 다가가려 하자 향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향은 백성들의 원망과 한숨 소리를 고스란히 마음에 담아 자리를 떴다.

향은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준비 중이었다. 조정 신료는 물론이고 특히 지방 관아의 부패한 관리들을 대거 몰아내고 새 인재를 등용할 생각이었다. 이는 파란을 불러올 것이나 해야 할 일이었다.

향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찌해서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이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단 말인가. 어찌해야 썩은 뿌리를 다 도려낸단 말인가. 어찌해야 다시는 썩지 않게 한단 말인가.

향이 걷는 길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도화의 처소에 백겸과 창이, 도화가 둘러앉았다. 도화는 붉은 꽃문양이 들어간 저고리에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있었다. 창틈으로 가야금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운종가에서 백겸은 창이를 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순포 일행과 맞닥뜨린다면 단진이 달려올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창이는 단진과의 짧은 시간이 못내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화가 먼저 기방으로 가고 백겸과 창이는 국밥집에 있다가 조금 전에야 들어왔다. 헌데 진양의 집에서 사람이 와 있었다. 진양이 찾는다면서 백겸과 창이를 진양의 집으로 오라고 했다.

창이가 바로 따라가려 했으나 백겸이 기다리라 하고는 들어와 고심하고 있었다.

“매번 기방으로 찾아오더니 왜 오늘은 집으로 부른 걸까?”

“만나면 물어봐!”

창이가 빙그레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노안 왔어? 나 울고 있는데!”

“농담 할 때야?”

“그럼 자야 할 때야?”

백겸이 짜증을 팍 냈다.

“가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냐!”

“어디에 세워? 네 머리에?”

창이가 피식 웃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어차피 대책은 없어. 우리가 입을 열든가 닫든가 둘 중 하나고. 우리가 먼저 실토하든가 그들이 찾아내든가. 둘 중 하나잖아. 그리고 지금으로선 진양이 우릴 어떻게 할 수는 없어.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으니까.”

도화가 맞장구쳤다.

“맞아. 진양이 100프로 심증만으로는 우리를 어쩌진 못해. 그러니까 애가 타 술이라도 먹여 입을 열려는 거고. 증거는 수레를 끌던 이재열뿐이잖아!”

창이가 벌떡 일어나 백겸을 보았다.

“여기 앉아서 백날 진양의 의중이 무얼까 궁금해 하느니, 가서 부딪치자!”

백겸이 일어서자 도화도 일어섰다.

“너희들이 할 말은, 이미 다 말했다고만 하는 거야. 여름이 너는 술 못 마시겠다고 하고.”

창이가 웃었다.

“여름이 평생 2등만 하면서도 1등 못했다는 소리 못하는 애야. 죽으면 죽었지 못 마시겠다고 안할걸!”

백겸이 어이없어 했다.

도화가 쌀쌀맞게 창이에게 말했다.

“독고준 너나 잘해! 욱하지 마. 진양이 너희의 수를 다 읽고 있어. 그래서 욱하라고 던진 말에 춤추지 말라고. 알았어?”

창이가 웃었다.

“그렇게 잘 알았으면 내가 1등 했지!”

도화가 짜증을 팍 냈다.

“내가 꼭 따라가야겠어?”

백겸과 창이가 동시에 답했다.

“아니!”


백겸과 창이가 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었다. 가야금 소리와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백겸은 무심히 담장 너머를 보았다. 기방은 참으로 이상한 곳이었다. 기방의 등불이 밝으면 밝을수록 어둠은 더욱 짙어보였고 기녀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날수록 눈물이 흘렀다.

도화의 잔소리는 계속됐다.

“명심해! 진양이 대단하다고 여기지도 마. 그러는 순간 말려드는 거야. 진양이 대단해봤자 우리랑 나이도 동갑이야. 그리고 우리가 진양에 대해 더 잘 알아.”

“어머머...”

언제 왔는지 월이 까르르 웃었다. 노란 꽃문양의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붉은 연지를 바른 월은 요염했다. 월이 움직일 때마다 꽃이 바람에 날려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성님. 이리 죽고 못 살아 어쩌려고 그러시오! 행수어른이 찾고 난리가 났소! 꽃 바위가 그리도 좋소?”

월이 도화에게 윙크를 하고는 창이를 보았다.

“헌데 눈치 없는 우리 열매바위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나보오. 우리 성님 심기가 불편한 걸 보니.”

도화가 설레설레 저었다. 어쩌면 저리도 일관되게 주제가 바뀌지 않는지 대단하다 여겼다.

월이 창이의 팔짱을 꼈다.

“열매바위. 눈치는 뒀다 뭐하시오! 어찌 열린 내 방으로 안 오시고 어찌 닫힌 방문을 자꾸 연단 말이오!”

창이가 팔을 뺐지만 월은 더욱 다가갔다.

“방문을 연다한들 들어갈 수 있겠소! 저리도 떡하니 꽃바위가 버티고 있는데!”

창이가 툭 던졌다.

“나는 일편단심이라. 도화성님 밖에 없소!”

월은 훤칠한 키에 야성미가 흐르는 얼굴에 눈빛은 한없이 순수한 창이를 올려다 보았다. 월이 야릇하게 웃었다.

“입으로는 도화성님이고. 마음은 복숭아 애기씨면!”

창이가 서늘히 보았다.

“허면 몸은 내게 주는 게 어떻겠소?”

그때였다.

“네놈들이 진정 죽고 싶은 것이냐?”

김가와 은가가 있었다. 김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군마마께서 기다리신다 한지가 언제인데. 계집들과 노닥거리느라 감히...감히 누굴 기다리게 하는 것이냐?”

창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리 급했으면 미리 예약을 하지 그랬소!”

“네 이놈!”

은가가 김가를 말리고는 눈짓했다.

김가가 서둘러 백겸과 창이에게 말했다.

“빨리 따라오너라.”


백겸과 창이가 북촌으로 들어섰다. 집집마다 한 집 건너 다른 집의 대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고 담장 역시 높았다. 고관대작들이 사는 동네여서인지 높은 담장에서 품계와 위세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고즈넉한 길에 흙 밟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창이는 그 소리를 들으며 단진을 떠올렸다.

목멱산 절벽 위에서 단진의 다홍 댕기가 나풀나풀 날리고. 단진의 눈에 오롯이 창이만이 있었다. 단진의 품에 오롯이 창이만이 있었다.

“봄이 잘 들어갔겠지?”

백겸은 벌써 몇 번째 묻는 거냐고 뭐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창이의 목소리에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백겸은 무심히 하늘을 보며 걷고 있는 창이를 보았다. 창이의 어깨에 있는 나비문신을 지웠어야 했다.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 진양을 만나고 돌아오면 바로 나비문신을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신경질적인 발자국소리가 가까워졌다.

순포와 양가였다. 양가는 김가에게 귀엣말했다.

순포가 백겸과 창이 앞에 섰다. 순포의 눈이 백겸을 향했다. 백겸은 차분히 봤으나 순포의 눈에는 검이 번뜩였다. 순포는 백겸을 볼 때마다 눈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상처가 실룩였다.

순포는 오는 내내 생각해봤으나 이들이 내금위 별감을 죽일 리는 없었다. 진양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형님이 그렇게 만든 걸까? 형님은 그냥 죽이면 죽였지 그리 얕은 수를 쓸리는 없었다. 허면 무어란 말인가?

순포가 백겸을 빤히 보고 있자 창이가 말했다.

“눈싸움 하는 거야?”

순포가 창이를 노려보자 창이가 말했다.

“말은 입으로 하는 거야!”

창이가 백겸을 데리고 순포를 스쳐 지나갔다.

순포의 얼굴이 벌게졌다. 자신과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창이가 원수인 백겸과 함께 있을 때면 그 분노는, 그 배신감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없었다.

백겸이 돌아보니 순포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순포의 나비문신을 확인하고 싶었다. 순포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저 입을 열까.

진양을 닮아 기세등등한 기와집 앞에 김가가 멈춰섰다.

백겸이 사뭇 긴장된 얼굴로 창이를 보았다. 창이가 빙그레 웃었다.

“이런 집 두 채 준다 그러면 이재열 던져주자.”

백겸과 창이가 계단을 올라가다 동시에 멈춰섰다.

살기가 느껴졌다.

백겸과 창이가 돌아서서 어둠 속을 응시했다.

순포가 재촉했다.

“빨리 들어가지 않고 무얼 하느냐?”

백겸과 창이가 몸을 돌리자 순포가 어둠 속을 힐끗 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호가 나무 뒤에서 나왔다.

호가 눈길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윤이 나왔다.

어둠도 윤의 눈 속에 번뜩이는 살기를 감출 수 없었다. 윤은 물끄러미 대문을 보았다. 허나 윤이 보고 있는 건 창이였다.

호의 뒤로 볏단이 살짝 움직였다. 호가 인기척에 돌아보자 볏단은 움직임이 없었다.


백겸과 창이가 진양의 집 대문을 넘어섰다.

진양의 집은 대문으로 들어와 다시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백겸과 창이는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따라 등불이 훤히 밝혀져 있고 집안도 어찌나 밝은지 대낮 같았다.

헌데 참으로 고요했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백겸이 말했다.

“왜 이렇게 조용해!”

“우리 겁먹으라고!”

백겸이 어이없다는 듯이 보았다. 창이가 빙그레 웃다가 얼굴이 굳었다.

백겸이 창이의 시선을 따라갔다.

계단에 올라서자마자 보인 건 수많은 내금위 별감들이었다.

허면.

백겸과 창이의 시선이 안채의 불빛을 향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숙원 홍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한 주 휴재합니다 21.06.16 66 0 -
공지 숙원 홍씨 월, 목 연재합니다 +2 20.06.21 336 0 -
95 숙원 홍씨 95. 이향, 한성부에 가다 +3 21.04.12 1,101 9 18쪽
94 숙원 홍씨 94. 향을 기다리다 +2 21.04.08 1,118 9 13쪽
93 숙원 홍씨 93. 용무용과 그들 +3 21.04.05 1,133 9 21쪽
92 숙원 홍씨 92. 이향, 양주로 향하다-3 +2 21.04.01 1,149 9 18쪽
91 숙원 홍씨 91. 이향, 양주로 향하다-2 +2 21.03.29 1,173 9 16쪽
90 숙원 홍씨 90. 이향, 양주로 향하다-1 +2 21.03.25 1,200 9 19쪽
89 숙원 홍씨 89. 비보 +2 21.03.22 1,233 9 20쪽
88 숙원 홍씨 88. 단진을 향한 이향의 마음 +2 21.03.18 1,285 9 16쪽
87 숙원 홍씨 87. 그들의 이향 +4 21.03.15 1,292 9 18쪽
86 숙원 홍씨 86. 낙엽비 +2 21.03.11 1,307 9 19쪽
85 숙원 홍씨 85. 단진, 부왕과 마주치다 +2 21.03.08 1,334 9 18쪽
84 숙원 홍씨 84. 용무용, 이향을 만나다 +5 21.02.04 1,384 10 24쪽
83 숙원 홍씨 83. 백겸, 김종서를 만나다 +3 21.02.01 1,439 10 19쪽
82 숙원 홍씨 82.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3 +2 21.01.28 1,484 10 23쪽
81 숙원 홍씨 81.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2 +3 21.01.25 1,515 10 18쪽
80 숙원 홍씨 80.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1 +2 21.01.21 1,527 10 21쪽
» 숙원 홍씨 79. 진양, 사저로 백겸과 창이를 부르다 +2 21.01.18 1,559 10 17쪽
78 숙원 홍씨 78. 단진과 공두, 김종서 집에 들다 +3 21.01.07 1,561 9 20쪽
77 숙원 홍씨 77. 목멱산의 첫 모임 +2 21.01.04 1,583 10 14쪽
76 숙원 홍씨 76. 모두 목멱산에 오르다 +2 20.12.31 1,603 10 23쪽
75 숙원 홍씨 75. 용모파기 +2 20.12.28 1,625 10 17쪽
74 숙원 홍씨 74. 진양과 안평, 입궐하다 +3 20.12.24 1,655 10 26쪽
73 숙원 홍씨 73. 다시 돌무덤으로 +2 20.12.21 1,674 10 21쪽
72 숙원 홍씨 72. 이향의 진귀한 서책 +2 20.12.17 1,703 10 25쪽
71 숙원 홍씨 71. 단진, 육갑을 마음에서 내려놓다 +3 20.12.14 1,723 10 14쪽
70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2 20.12.10 1,733 10 25쪽
69 숙원 홍씨 69. 향의 고백 +4 20.12.07 1,751 10 16쪽
68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3 20.12.03 1,781 9 2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