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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177
추천수 :
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0.12.21 11:00
조회
1,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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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글자
21쪽

숙원 홍씨 73. 다시 돌무덤으로

DUMMY

숙원 홍씨 73. 다시 돌무덤으로


“아니면 산 채로 잡아 묶어놓고 옷을 벗겨 확인했느냐? 만약 그랬다면 나비문신이 있는 건 어찌 알고 옷을 벗겨 확인했느냐?”

백겸이 여전히 머뭇거리자 창이가 말했다.

“둘 다 아닙니다.”

진양이 창이를 보았다.

“놈들은 야인이라 옷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생각은 미처 못했구나.”

진양이 껄껄 웃었다.


밤이 깊어갔다. 기방 여기저기서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가야금소리가 담을 타고 넘어 들어왔다. 술에 취한 젊은 사내가 기녀를 껴안고 별채로 들어왔다가 진양을 보고는 도망치듯 나갔다.

진양이 사발에 술을 따라 돌리고 있었다. 진양이 먼저 사발 가득 술을 따라 마시고 백겸에게 주었다. 백겸이 마시고나면 창이가 마셨다.

“술은 이리 사발에 마셔야 제 맛이다. 그렇지 않으냐?”

백겸과 창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창이는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술이 들어가니 진양을 죽이면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이란 놈은 몸 안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하는 건 그리움을 끄집어내는 일이었다. 단진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당장이라도 궐 담을 넘어 단진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창이는 진양을 보았다. 진정 진양을 죽이면 단진과 함께 돌아갈 수 있을까.

백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지난번처럼 목까지 차서 한 모금도 더는 마실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진양이 백겸에게 잔을 내밀었다. 백겸이 입에 대다가 속에서 올라와 잠시 있었다.

창이가 빼앗듯이 잔을 가져가 벌컥벌컥 마셨다.

진양이 웃었다.

“벗을 위해 대신 술을 마셔주는 것이냐?”

창이의 눈빛이 사나워진 걸 진양은 알았다.

“갈증이 나서 마신 겁니다.”

진양이 창이에게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했느냐? 네 계집 생각을 했느냐?”

안평이 또 건드린다고 나무라듯 진양을 보았다. 백겸은 순간 술이 확 깬 듯 창이를 보았다.

창이가 진양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대군께서 이리 찾으시니, 정식으로 기적에 이름이라도 올려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진양이 박장대소했다. 한참을 웃던 진양이 비단 주머니를 창이 앞에 툭 던졌다.

“오늘 내 부름에 답해준 값이다.”

창이가 비단 주머니를 진양에게 다시 밀었다.

“오늘 술값입니다.”

진양은 또다시 껄껄 웃었다. 갑자기 웃음을 멈춘 눈빛은 날카로웠다.

진양은 잠시 보다가 옷섶에서 용모파기를 꺼냈다.

“수레를 끌던 놈의 용모파기가 나왔다.”

백겸과 창이가 일순 당황하는 그 순간을 진양은 놓치지 않았다. 진양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백겸과 창이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진양이 용모파기를 백겸과 창이 앞에 내놓았다. 갸름한 얼굴에 눈썹과 눈만 그려져 있는 용모파기를 본 백겸과 창이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진양이 말했다.

“왈패들과 부부가 죽던 날, 검은 복색을 한 세 명의 자객들이 들어갔다고 한다. 허면 그들이 왈패와 부부를 죽였을 가능성이 크다. 헌데, 왜? 왜 죽였을까? 왈패들은 죽기 전 여섯 자루의 장검을 들고 다니며 자랑했다고 하고, 그 부부는 집 앞에 떨어진 돼지로 사람들에게 베풀었다고 한다. 다 무언가를 얻고 나서 목숨을 잃었다.”

진양이 용모파기를 손으로 톡톡 쳤다.

“이놈은 알고 있을 것이다. 돼지가 든 수레를 끈 놈이다.”

백겸과 창이가 서로를 보았다.

“이놈의 얼굴을 완성해주면 도성에 가옥 두 채를 내릴 것이다.”

창이가 물었다.

“헌데 그걸 어찌 우리가 알거라 생각하십니까?”

진양이 말했다.

“그 세 놈 말이다. 나비문신이 있는 놈들 같아 그런다. 허니 너희들과도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진양이 잠시 보다가 덧붙였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알려준다면 가옥 두 채 뿐 아니라, 평생 먹고 살 재물을 내릴 것이다.”

진양이 눈썹만 있는 삼년의 용모파기를 톡톡 쳤다.


백겸과 창이, 도화는 밤길을 걸었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찾아와 시답잖은 보고로 귀찮게 하던 삼년이 오늘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승무에게 잡혀간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돼 찾아가고 있었다.

백겸과 창이는 진양과 있었던 일들을 도화에게 이야기했다. 가는 도중에 백겸은 두 번이나 토했다.

백겸이 또다시 속이 울렁거려 담벼락을 붙잡고 토했다. 이제 더는 나올 것도 없어 헛구역질만 했다. 창이가 등을 두드려주자 백겸이 손짓으로 하지 말라며 몸을 일으켰다. 도화가 걱정스레 보았다.

창이가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너 말고 이 담벼락. 500년 전이나 후나 더러운 건 다 담벼락이지. 얘는 무슨 죄야!”

백겸은 기운이 없어 대꾸하지 않았다.

도화가 말했다.

“못 마신다고 하지. 이기지도 못하는 술 왜 죽자고 마시냐?”

창이가 말했다.

“지기 싫어 그러겠지. 여름이 지는 거 싫어하잖아.”

창이가 얄밉게 덧붙였다.

“그런데 3년 내내 태희 너한테 지고 어떻게 살았나 몰라.”

백겸이 벙찐 얼굴로 창이를 보고는 인적이 없는 길을 물끄러미 보았다.

‘죽였느냐?’

“진양, 진짜 보통 사람은 아니야.”

창이가 말했다.

“수양대군이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친한, 제 동생을 죽이고 어린 조카를 죽이고 그 자리에 앉았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화가 나무랐다.

“조용히 해! 너희들 미쳤어? 그런 말은 입에 담지도 마! 만일 누가 듣는 순간.”

“알아 알아 연모잖아!”

창이는 웃었지만 백겸과 도화는 웃지 않았다.

창이는 터덕터덕 걸어갔다. 창이의 발자국이 쓸쓸했다. 창이의 얼굴에 닿는 바람이 차가웠다. 술이란 놈이 그리움을 끄집어내더니 얄밉게도 하얀 꽃이 날리는 들판에 데려다놓았다.

창이는 그곳에 있었다. 하얀 꽃이 날리는 들판에서 단진은 향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창이는 차마 볼 수 없었다. 그 아름다움이 어찌 자신의 몫이 아닌지 운명을 한탄했다.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지만 그런다한들 바뀌는 건 없었다.

창이는 그날 이후로 승무를 찾아 도성 안팎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나비문신이라도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 같아 승무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창이에게 나비문신보다 더 중요한 건 역사를 바꾸는 일이었다. 창이는 이제 확실하게 믿었다. 삼년의 그 허무맹랑한 말을.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돌아가기만 하면 다 되는 일이었다. 그 희망을 안고 창이는 단단히 버티고 섰다.

백겸과 도화는 창이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 하지 않고 걸었다.

백겸은 자신의 신분을 알 수는 없었으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창이의 어깨에 있는 나비문신. 그들이 역당이기에 그들을 자신들이 잡지 않는다면 창이까지 역당으로 몰리게 돼 있었다. 해서 백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손으로 나비문신을 잡아야 했다.

주막등 불은 여전히 밝혀져 있었으나 밤이 깊어 졸고 있는 듯했다. 담장 너머로 술이 거하게 취한 사내 둘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떠들고 있을 뿐이었다.

퉁퉁한 주모는 불 꺼진 가마솥을 청소하고 있었다. 담장 너머로 훤칠한 백겸과 창이를 보자 주모는 또다시 춘삼월이 됐다. 하루의 지친 피로가 싹 풀리는 듯 했다. 돈도 돈이지만 이런 낙도 있기에 그지 발싸개 같은 놈을 쫓아내지 않은 것이다.

창이가 먼저 들어와 방문을 열었지만 삼년은 없었다. 백겸과 도화도 텅 빈 방을 보았다.

도화가 퉁퉁한 주모에게 다가가 물었다.

“얘 어디 갔는지 아세요?”

퉁퉁한 주모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웬일로 오늘 종일 코빼기도 안보이던데. 그 그지 발싸개 같은 놈이 밥 처먹고 나서도 부엌에서 주먹밥 훔쳐 먹는 게 일인데. 오늘은 밥도 안 먹었어.”

도화와 백겸은 물론 창이까지도 걱정스런 얼굴이 됐다.

도화가 물었다.

“어제 밤에는 있었어요?”

“어제는 있었지! 부엌에서 주먹밥 훔쳐 먹다 나한테 딱...”

퉁퉁한 주모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아. 이제 알겄네. 오늘 그 애기씨 왔었어. 왜 있잖어. 지난번에 그 그지 발싸개 같은 놈이랑 싸워대던 애기씨.”

백겸과 창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창이가 서둘러 주모에게 다가갔다.

“봄이가 왔었다구요?”

“맞어. 맞어. 점심장사 시작할 때 왔었어. 봄. 봄이 서문에 있을 테니 그리 오라고 전해 달랬어. 그래서 전해줬더니. 그 뒤로 나가 안 들어오네.”

창이와 백겸이 동시에 튀어나갔다.


어두운 숲속에 낙엽 밟는 소리와 함께 불빛 하나가 움직였다.

횃불을 든 창이와 백겸, 도화가 숲속으로 들어섰다. 창이와 백겸이 튀어나갔지만 도화가 쏜살같이 쫓아가 잡았다.

도화는 지난번에 백겸이 동문 밖에서 내금위 별감들에게 걸려 경비가 삼엄해졌을 텐데 거길 가면 어쩌냐고 노발대발 했다. 또한 지금까지 궁 밖에 있을 리가 없으니 좀 기다리라고 했다.

도화가 주모에게 엽전을 내밀자 아주 자세히 이야기해줬다. 단진은 기분이 좋아보였다고 했다. 또한 음식이 든 것 같은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고 했다. 단진이 주모에게 다가와 이야기할 때 구수한 냄새가 나서 보따리를 힐끗 봤다고 했다.

결국 도화가 생각한 곳은 이곳이었다.

“서봄 약점 있잖아. 서여름. 너! 너 때문이라도 더는 사고 안쳐! 딱 보면 답 안 나와? 정리하려고 나온 거잖아. 너 때문에!”

백겸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도화가 창이를 보았다.

“서봄 또 나올 거야! 또 나온다고! 어련히 알아서 잘 들어가고 때 되면 안 나올까.”

도화가 백겸과 창이를 번갈아보았다.

“서봄 얘기만 나오면 용수철이야! 그러다 불구덩이로 들어가면, 서봄은 누가 지켜?”

창이는 삼년이 단진에게 또다시 상처 주는 말을 했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화는 창이의 말이 들리기라도 하듯 말했다.

“야! 이재열이 서봄 못 이겨!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서봄 똑똑해!”

도화는 걸어오는 내내 창이와 백겸에게 지랄지랄 했다.

“생각 좀 하고 행동하자. 제발 좀! 튀어나가서 어디 가려고? 궁 근처 가서 내금위에 잡혀가려고? 서봄이 낮에 나왔는데 아직도 있겠어? 궁에 들어갔겠지. 서봄이 나와서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는 건, 이재열 만나고 급히 들어간 거야. 먼저 정황을 살피고, 어떤 게 최선인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거 아냐?”

창이가 말했다.

“머리 나빠 그래. 알면 우리가 일등 했지.”

도화가 멈춰서 창이를, 그리고 백겸을 노려보았다.


하얀 꽃이 날리는 들판을 바라보던 백겸의 목에 검이 겨눠졌다. 최 무사가 백겸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순식간에 어딘가에서 나타난 십여 명의 내금위 별감들에게 백겸은 포위됐다. 최 무사의 지시에 따라 정 무사를 비롯한 별감들은 향에게 달려갔다.

백겸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모든 별감들이 검을 뽑아 백겸을 겨누었다.

최 무사가 자신의 검을 내리고 물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

최 무사의 눈은 사나웠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 묻질 않느냐? 누굴 보고 있었느냐?”

백겸은 당황했지만 차분히 말했다.

“들판이 아름다워 보고 있었습니다.”

최 무사가 백겸에게 빼앗은 장검을 들고 보며 물었다.

“검을 들고 들판이 아름다워 보고 있었다? 끌고 가라.”

숨어서 보고 있던 도화가 쓰개치마를 쓰고 튀어나왔다.

“저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최 무사가 도화를 보았다. 도화도 백겸 옆에 무릎을 꿇었다.

도화가 애원했다.

“남녀가 유별하여 야밤을 통해,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몰래 만나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이 죄라면 죄이오나, 한번만 봐 주십시오. 제발 보내 주십시오!”

최 무사는 도화에게 쓰개치마를 내리라 하더니 얼굴을 살폈다. 최 무사의 눈빛은 엄격했다. 일말의 인정도 베푸는 눈빛이 아니었다.

최 무사가 둘 다 추포해 끌고 가라고 하는 순간 향이 걸어왔다.

“이들이냐?”

최 무사가 향에게 다가갔다.

“저하, 가까이 가지 마시옵소서. 이자는 검객이옵니다.”

향이 다가왔다.

도화는 납작 엎드리고 있어 향의 신발 앞코가 보였다. 고개 숙인 백겸의 눈에 용포의 끝자락이 보였다. 용포 뒤로 저만치 단진의 하늘색 치마가 보였다.

향이 백겸을 보며 말했다.

“고개를 들거라.”

최 무사가 말했다.

“고개를 들라하질 않느냐!”

백겸이 향을 올려다보았다. 별감들이 든 횃불에 향의 얼굴이 보였다.

향이 백겸을 잠시 보다가 말했다.

“일어서거라.”

백겸이 일어서자 최 무사와 정 무사가 검을 들고 더욱 가까이 향에게 붙었다.

백겸이 향과 마주섰다. 서로 엇비슷한 키라 눈이 마주쳤다.

백겸은 향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백겸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했다.

향은 잠시 백겸의 눈을 보았다.

“보내주거라.”

향은 걸어갔다.


“어떤 경우에도 궁 근처에 가지 마!”

도화가 가려다 멈춰서 짜증을 팍 냈다.

“날이면 날마다 술 따르고. 술 따르고 있으면 예인이라 그러고. 예인이라 하면 천한 기생년이니 술 따르라 그러고. 술 따르고 있으면 예인이니 시를 지으라 그러고. 시를 지으라 그러고는 술이나 따르라 그러고. 가야금 타라 그러고. 와 진짜 돈다 돌아. 하나만 하자 하나만. 아주 이제 춤 안 추면 관비로 내친다고 지랄하고. 옘병. 하나만 하자 하나만!”

도화가 쌓인 울화를 쏟아내자 백겸과 창이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무릎까지 꿇어야겠냐...제발 나도 다리 좀 펴고 살자.”

.....

“우리가 할 일은 집에 가는 거야. 그거 하나만 하자. 그때까지 살아 있자. 그러니까 좀. 가만히 좀 있어라.”

도화는 씩씩거렸다. 이제껏 참고 또 참고 있었는데 폭발이라도 하듯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백겸과 창이가 승무를 찾아다니는 동안 도화는 걱정이 돼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해서 그들과 함께 찾아다니다가 기방에 붙어있지 않는다고 행수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또한 다시 한 번 기방을 비우거나, 다시 춤을 추지 않으면 관비로 내치겠다고 겁박했다.

도화는 오늘도 백겸과 창이가 진양을 만나고 있는데 술이나 따르고 있으니 화딱지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든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여서 홧김에 술을 많이 마신 터였다.

창이도 백겸도 걷다 보니 단진이 궁으로 들어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허나 창이는 삼년을 찾으면 그곳에 단진이 함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의 불씨는 남겨두고 있었다.

백겸은 조급했다. 단진이 별 탈 없이 궁으로 들어갔다 여기면서도 삼년에게 확인을 해야 했다. 백겸이 서둘러 걸어가다 멈춰섰다.

어둠 속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창이와 도화가 긴장해서 백겸을 보았다. 백겸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건가 싶었다.

그때였다.

어둠 속 나무에 뭔가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백겸이 창이의 손에서 횃불을 가져가 그곳에 비췄다.


돌무덤 앞 큰 나무에 삼년이 목을 맨 채로 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었다. 막상 목은

맸는데 죽기는 싫은지 목에 맨 올가미를 손으로 잡고 벌게진 얼굴로 버둥댔다.

삼년의 발아래에는 나무줄기와 지푸라기로 꼬아 만든 끊어진 올가미와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있었다.

백겸이 횃불을 든 채로 삼년을 보았다.

도화가 한심한 듯 말했다.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창이가 말했다.

“얘 자살하는 거지?”

삼년의 눈에 백겸과 창이, 도화가 들어오자 살려달라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올가미가 더욱 깊게 조여 얼굴이 터질 듯 벌게졌다. 삼년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도화가 말했다.

“얘가 이 지경인 거 보니 서봄은 궁에 잘 들어갔네.”

백겸이 다가갔다.

“구해야지!”

창이가 말렸다.

“그냥 둬. 기다렸다 죽으면 민혁 옆에 묻어주자. 여기 땅도 넓네.”

백겸은 무심히 창이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돌무덤 옆은 여러 개의 무덤을 만들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삼년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미친 듯이 다리를 버둥댔다.

“사...살려...살려... 켁...켁...”

삼년은 육갑이 죽은 이후 처음으로 그를 찾아왔다. 삼년은 육갑의 무덤을 잡고 울고 또 울었다. 미안함을 토해내고 또 토해냈다. 울다 지쳐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자 그리움이 몰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또한 육갑이 떠나고 이 낯선 곳에서, 외롭고 비참한 삶을 또다시 살아야할 생각을 하자 더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외면했는데, 모든 걸 토해내고 나니, 이상하게도 살고 싶지가 않았다.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걸 끝내면 간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적어도 그곳엔 육갑이 있으니까.

외로이 살 바에는, 하나뿐인 친구 곁으로 가자.

삼년은 죽기로 마음먹고 목을 매려고 올가미를 만들었지만 여러 차례 실패했다. 그럴 때마다 더욱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져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절대 부러질 것 같지 않은 튼튼한 나무에 올가미를 걸고 통나무 위에 올라가 목에 걸었다. 통나무를 걷어찼다.

됐다. 성공했다는 기쁨은 잠시. 막상 올가미가 끊어지지 않자 이대로 죽는구나 싶으니 너무도 살고 싶어졌다. 너무도 간절히 살고 싶었다.

삼년의 동공이 풀려 죽기 직전이 됐을 때 창이가 검을 뽑아 밧줄을 잘랐다.

삼년이 바닥에 퍽 하고 떨어졌다.

헉헉헉....켁켁켁....삼년은 목의 밧줄을 느슨하게 하며 별의별 짐승의 소리를 다 내고 숨을 내뱉었다.

창이가 삼년 앞에 섰다.

“봄이 어딨어?”

삼년이 정신 나간 눈으로 창이를 보았다.

“혁이가 죽기 전에...나를 살리려 그랬대...재열이도 데려가야지...내가 배신한 줄도 모르고...”

“서봄 이걸 주려고 나온 거야.”

도화가 돌무덤 앞 보자기 위에 차려진 술과 과일, 음식을 보았다.

백겸과 창이가 육갑의 돌무덤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그들은 돌무덤을 물끄러미 보았다.

백겸과 창이는 처음 돌무덤을 봤을 때만해도 충격에 말을 할 수 없었다. 육갑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육갑의 죽음이 무거워 들고 있기 버거울 정도였다. 허나 지금은 떨어진 낙엽 하나를 보듯 무심히 보고 있었다. 도화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돌무덤이었다.

백겸이 술병을 들고 남은 술을 돌무덤에 뿌렸다.

도화의 무심한 시선이 돌무덤 옆의 넓은 그곳에 닿았다. 이 숲속에 유독 이곳만이 평평하니 준비된 듯했다. 무엇을 위해. 도화와 백겸의 시선이 닿았다.

그때 뒤에서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낙엽 밟는 소리가 묵직했다.

창이가 삼년을 어깨에 들쳐 업고 쌕쌕거리며 숲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차라리 죽지 이 자식아. 땅도 넓던데. 아 짜증나.”

횃불을 들고 앞서던 백겸이 멈춰섰다.

“줘. 내가 들게.”

창이는 멈춰서 숨을 몰아쉬었다.

“싫어. 내거야. 이거 들고 가서 진양한테 던져주고 평생 먹고 살 재물이나 받을 거야.”

백겸이 삼년을 살피다 말했다.

“코 곤다.”

창이는 삼년이 기절한 게 아니고 자는 걸 알고는 물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숲속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맑은 물이 졸졸 흘러가고 있었다. 창이가 삼년을 물에 확 집어던졌다.

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삼년은 물에 빠지자마자 정신을 차렸다.

삼년은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허우적거리며 미친 듯이 살려달라고 외쳤다.

“사람 살려...사람 살려...사람 살려...”

창이가 소리쳤다.

“일어나 이 자식아...”

삼년은 입에 들어간 물을 뱉으며 앉았더니 허리도 안 차는 얕은 물이었다. 삼년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창이는 힘들어 숨을 몰아쉬며 물속에 얼굴을 박고 벌컥벌컥 마셨다. 백겸도 속이 빈 터라 물가에 앉아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

백겸과 창이가 서로를 보았다. 같은 생각을 했다. 함길도에서 도망치면서 물가에서 물을 마시던 게 까마득히 먼 옛날 같았다. 그때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날 정도로 더웠는데 지금은 물가에 앉아 있으니 한기가 스며들었다.

도화는 물가의 바위에 걸터앉아 단진에 대해 생각했다.

밤하늘의 달과 주변의 나무들이 물속에 함께 머물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삼년은 어찌나 바들바들 떠는지 도화가 쓰개치마를 던져주었다. 삼년은 두서없이 단진을 만난 이야길 했다. 허나 단진과의 거래에 대해선 함구했다.

“진짜 다 잊을 거래. 역사를 바꾸고 다 함께 집으로 돌아갈 거래.”

다 함께 집으로 돌아갈 거래.

그 말에 창이의 가슴 속 희망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고 백겸은 안도했다. 허나 잠시 뿐이었다.

도화가 말했다.

"이제 작은 산 하나는 넘었네.”

.....

“더는 민혁 죽인 놈 잡겠다고 안 할 거야. 이제 수양대군 잡겠다고 하겠지. 수양이 아직 이름 바뀌기 전, 진양인 건 알테고. 이제 민혁을 죽인 놈이 진양, 아니 수양대군인 걸 아는 일만 남았네.”

.......

“진양이 궁으로 들어가는 걸 막을 수는 없어.”

백겸과 창이가 약속이나 한 듯 어둠 속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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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숙원 홍씨 92. 이향, 양주로 향하다-3 +2 21.04.01 1,149 9 18쪽
91 숙원 홍씨 91. 이향, 양주로 향하다-2 +2 21.03.29 1,173 9 16쪽
90 숙원 홍씨 90. 이향, 양주로 향하다-1 +2 21.03.25 1,200 9 19쪽
89 숙원 홍씨 89. 비보 +2 21.03.22 1,233 9 20쪽
88 숙원 홍씨 88. 단진을 향한 이향의 마음 +2 21.03.18 1,285 9 16쪽
87 숙원 홍씨 87. 그들의 이향 +4 21.03.15 1,291 9 18쪽
86 숙원 홍씨 86. 낙엽비 +2 21.03.11 1,307 9 19쪽
85 숙원 홍씨 85. 단진, 부왕과 마주치다 +2 21.03.08 1,334 9 18쪽
84 숙원 홍씨 84. 용무용, 이향을 만나다 +5 21.02.04 1,384 10 24쪽
83 숙원 홍씨 83. 백겸, 김종서를 만나다 +3 21.02.01 1,439 10 19쪽
82 숙원 홍씨 82.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3 +2 21.01.28 1,484 10 23쪽
81 숙원 홍씨 81.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2 +3 21.01.25 1,515 10 18쪽
80 숙원 홍씨 80.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1 +2 21.01.21 1,527 10 21쪽
79 숙원 홍씨 79. 진양, 사저로 백겸과 창이를 부르다 +2 21.01.18 1,558 10 17쪽
78 숙원 홍씨 78. 단진과 공두, 김종서 집에 들다 +3 21.01.07 1,561 9 20쪽
77 숙원 홍씨 77. 목멱산의 첫 모임 +2 21.01.04 1,583 10 14쪽
76 숙원 홍씨 76. 모두 목멱산에 오르다 +2 20.12.31 1,603 10 23쪽
75 숙원 홍씨 75. 용모파기 +2 20.12.28 1,625 10 17쪽
74 숙원 홍씨 74. 진양과 안평, 입궐하다 +3 20.12.24 1,655 10 26쪽
» 숙원 홍씨 73. 다시 돌무덤으로 +2 20.12.21 1,674 10 21쪽
72 숙원 홍씨 72. 이향의 진귀한 서책 +2 20.12.17 1,703 10 25쪽
71 숙원 홍씨 71. 단진, 육갑을 마음에서 내려놓다 +3 20.12.14 1,722 10 14쪽
70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2 20.12.10 1,733 10 25쪽
69 숙원 홍씨 69. 향의 고백 +4 20.12.07 1,751 10 16쪽
68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3 20.12.03 1,781 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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