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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183
추천수 :
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1.03.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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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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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숙원 홍씨 85. 단진, 부왕과 마주치다

DUMMY

숙원 홍씨 85. 단진, 부왕과 마주치다


용무용이 어둑한 별채로 들어섰다. 용무용은 댓돌에 올라 신발을 벗으려다 돌아보았다. 용무용의 눈빛이 서늘했다.

방으로 들어온 용무용은 불을 밝히지도 않은 채 앉았다. 어둠 속에서도 누군가 방에 들어온 사람이 있음을 알았다. 촛대의 위치가 바뀌었고 서랍장 문이 열려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 알았고 또한 잃어버릴 게 없기에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용무용은 이향을 떠올렸다. 용무용이 짜놓은 판에서 이향만이 돌을 올려놓지 않았다. 용무용의 계산에 의하면 이향이 할 말은 하나였는데 예측에서 벗어났다. 당황했으나 잠시 뿐이었다. 쉽게 잡으면 재미가 없을 터, 또한 이향은 늦게 놓는다 해도 반드시 용무용이 원하는 대답을 할 것이다. 허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용무용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속은 끓어오르고 있었다. 애써 누르고 있었으나 쉽지 않았다.

대체 이향의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그러고 보니”

....

“궁금하구나.”

.....

“창이와 김 판관이 겨룬다면 누가 이기겠느냐?”

용무용은 일순 당황했다.

“저하...소신 겨뤄본 적이 없어 알 수가 없사옵니다.”

“김 판관은 창이의 실력을 봤으니 물은 것이다.”

....

“허면 김 판관은 그 이름 없는 살수들의 실력을 안다 했으니, 그 부족의 무예실력이 창이와 비등하더냐? 창이를 뛰어넘느냐? 아니면 창이를 이길 자가 없느냐?”

“소신...그들의 실력을 모두 본 적이 없어 말씀 올리기 어렵사옵니다.”

향이 용무용을 보았다.

......

향이 웃으며 말했다.

“무예를 하는 김 판관의 소견을 묻는 것이다. 틀렸다 책망하지 않을 것이니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거라.”

용무용은 향이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기분이었다.

“저하...소신 직접 본 적은 없사오나, 소신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진양과 안평, 김종서가 용무용을 보았다.

“창이를 뛰어넘는 자는 없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허면, 거흘합족은 어떠하냐?”

....

“거흘합족에도 창이를 뛰어넘는 자는 없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저하...”

용무용이 덧붙였다.

“창이 그자는 타고난 검객이옵니다. 노력한다 해서 따라잡을 수 있는 자가 아니옵니다.”

“허면 김 판관은 창이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를 본 적이 없느냐?”

용무용은 잠시 말이 없었다. 용무용이 향을 바로 보고 말했다.

“딱 두 사람 보았사옵니다.”

“그들이 누구더냐?”

“둘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옵니다.”

향은 더는 묻지 않았다.

용무용이 물었다.

“하온데 저하...창이에게 어찌 그리 관심이 많으신지 여쭤도 되겠사옵니까?”

“창이는 내 사람이다.”

향이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용무용의 눈에 열린 서랍이 들어왔다. 결국 잃어버렸다. 가장 중요한 게 남의 손에 들어갔다. 용무용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나라를 훔친 도적놈의 핏줄에게 가장 아끼는 검을 도둑맞았다.

이향, 그 검이 너를 향할 것이다. 반드시. 또한 이향 너를 죽이기 전에 네가 가진 중요한 것을 먼저 빼앗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용무용이 주먹으로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고개를 들거라.”

마당의 밝은 불빛 속에 향이 서 있었다. 향은 창이를 보고 있었다.

창이가 향을 보았다. 또다시 향의 깊은 눈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향이 창이의 거침없는 눈을 보았다. 여전히 뜨거웠으나 한없이 순수했다.

향이 잠시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나, 네 손에 묻힌 피가 사라진 건 아니다. 너는 수백의 목숨을 네 손으로 거두었고, 그로 인해 그들의 아비와 어미, 형제와 자식, 수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

.....

“네 목숨을 거두어 수백의 원수를 갚아야 하겠지.”

.....

“허나, 네 목숨 하나가 수백의 목숨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네 목숨 하나가 수천의 피눈물을 닦아줄 수 있겠느냐!”

....

“너를 죽인다면 그저 하찮은 목숨 하나를 거둔 것이 될 것이다. 해서 나는 너를 살려둘 것이다. 해서 너를 귀하게 쓸 것이다. 네 하찮은 목숨 하나를 살려 수백의 목숨을 대신하게 할 것이고 수천의 피눈물을 닦아주게 할 것이다.”

창이의 가슴이 들썩였다.

“너를 곁에 둘 것이다. 너는 너로 인해 죽어간 수백의 목숨을 안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백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

“허나 선택은 네가 하거라.”

....

“고려인으로 하찮게 죽겠느냐? 조선인으로 귀히 살겠느냐?”

창이가 무릎을 꿇었다.

“저하..소신 조선인으로 살겠사옵니다. 또한 역당을 제 손으로 반드시 잡겠사옵니다.”

“일어서거라.”

창이가 일어나 향을 보았다.

향이 창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나는 오늘 너에게서 아무것도 못 보았다.”

창이가 놀라 향을 보았다.

“다음에 봤을 때 너는 아무것도 없어야 할 것이다.”

.......

향의 뒤쪽에 서 있던 진양과 안평, 김종서가 향을 보았다.

향이 고개 돌려 백겸을 보았다.

“백겸은 나를 보거라.”

“예 저하.”

“너는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나 조선의 군관이다. 또한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나 맡은 임무를 다하지 못하였다.”

.......

향이 백겸에게 닿을 듯 가까이 섰다.

“네가 맡은 소임을 다하거라. 그때까지 너는 군관의 신분이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백겸은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놀라 향을 보았다.

향이 백겸에게 떨어져 창이를 보고 나서 다시 백겸을 보았다.

백겸과 창이가 고개를 숙였다.

향이 걸어가자 진양과 안평, 김종서, 최 무사, 박 내관의 눈이 백겸과 창이에게 머무르고는 향을 따랐다. 내금위 별감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백겸과 창이는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허나 백겸과 창이의 가슴은 거칠게 두방망이질 하고 있었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백겸과 창이가 서로를 보았다.


향과 김종서가 밤길을 걸었다. 그 뒤로 진양과 안평, 최 무사와 박 내관이 뒤를 따랐다.

김종서는 향을 올려다보았다. 창이를 품은 향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향의 크기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초로에 접어든 자신이 향의 그릇에 담겨 있는 작은 씨앗 같았다. 김종서는 조선의 내일이 밝은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요한 밤하늘 아래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향과 김종서는 앞으로 있을 인사개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종서가 말했다.

“그리 다 바꾸겠다 하시면 반발이 클 것이옵니다. 저하...”

향이 웃었다.

“해서 반발이 크니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반발이 크다 해도 나아가시라 말씀 올리는 것이옵니다.”

향이 웃었다.

“소신이 막겠사옵니다. 허니 저하는 저하의 뜻을 펼치십시오.”

“든든합니다 대감.”

.....

“썩은 뿌리를 다 도려낼 수는 없으니 작은 것부터 쳐내려 합니다. 지방의 부패한 관료들부터 잘라내야 합니다.”

“예 저하. 인맥을 타고 등용하는 게 관례처럼 돼 버렸사옵니다. 또한 백성에게서 세금을 착취해 관직을 사고 있사옵니다.”

“그런 자들이 나라의 일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니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성의 고혈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은 끝을 내야 합니다.”

“그러하옵니다 저하...”

“열을 바꾸겠다 하고 그들에게 다섯을 내어줄 생각입니다.”

김종서가 향을 보았다.

“해서 그렇게 많은 관료들을 바꿀 인사안을 만든 것이옵니까 저하?”

“예 대감. 하루아침에 모두를 뽑아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저하. 형조에서 먼저 인사개편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겠사옵니다.”

궁에 다다랐을 때 향이 멈춰섰다.

“대감과 함께 걸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망극하옵니다 저하...”

김종서가 향을 보았다.

“소신...”

향이 보았다.

“소신이 부덕하여 집안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해 저하께 심려를 드렸사옵니다. 또한 소신이 부덕하여 수하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향이 웃었다.

“집안 단속 못하기로 따지면 저만 하겠습니까!”

김종서가 당황했다.

진양과 안평이 놀란 눈으로 향을 보았다.

“저하...받잡기 민망하옵니다. 말씀 거두어 주시옵소서...”

향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그런 말씀 마세요 대감. 대감이 부덕하다 하면 대감을 곁에 둔 제가 부덕한 게 아닙니까. 제가 덕이 많아 대감처럼 덕이 많은 분을 곁에 두었습니다.”

“저하...”

향이 김종서를 보았다.

“훌륭한 인재 하나를 얻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대감께서는 덕이 많으시니, 백겸을 만드신 것처럼 창이도 그리 만들 거라 믿습니다.”

향이 진양과 안평을 보았다.

“대감을 댁까지 잘 모시거라.”

“예 저하!”


“저하께서 어디 가신 걸까?”

“저하께서 어디쯤 오셨을까?”

“궁문이 열린 소리가 들린 것 같지?”

“저하께서 궁으로 들어오셨을까?”

“저하께서 왜 아직 안 오시지?”

“아!!! 아!!! 아파아!”

입궁하자마자 같은 소리를 계속 반복하자 공두가 더는 못 참고 단진을 세게 꼬집었다.

“아파....놔!”

단진이 공두를 확 밀치고는 꼬집힌 팔을 주물렀다.

공두가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닭이어도 그렇지. 내가 몇 번을 말해! 내가 어떻게 아냐고! 내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아냐고! 여기 있으면서 저하께서 어디 계시는지 알면, 내가 집에 갔지! 내 침대에서 잤지! 자고 일어나면 아침마다 불뚝하고...”

잡아먹을 듯이 덤비던 공두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고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단진은 한마디 더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향이 언제 올지 모르기에 시간이 없었다.

단진은 향이 오면 편히 잘 수 있도록 침전을 정리하고 있었고 공두는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서 짜증만 내고 있었다.

단진은 깔아놓은 이불에 먼지라도 묻었을까봐 탁 탁 손으로 털었다.

병풍을 마주보고 앉아 탁자 위의 서책을 가지런히 놓았다. 촛대에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았다. 그래서인지 촛불이 기분 좋다는 듯이 일렁였다.

단진은 마치 향이 마주앉아 있기라도 한 듯 보았다. 향이 긴 손가락으로 서책을 넘기고 있었다. 향이 단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

단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저하께서 진짜 늦으시네...”

기다렸다는 듯이 공두의 손이 단진의 뺨을 향했다. 공두가 단진의 양 뺨을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단진이 비명을 내지르며 공두를 뿌리치고는 벌떡 일어섰다. 뺨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 문지르며 버럭 소리 질렀다.

“야! 나원빈. 너 아까부터 대체 왜 그래?”

공두가 씩씩거리며 단진을 째려보았다.

“넌 뭐가 그렇게 좋아 히히덕거려? 난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이렇게 괴로운데! 물도 삼킬 수도 없을 만큼 괴로운데!”

단진이 찌푸렸다.

“그래, 괴롭지 않은 게 이상하지. 얼마나 많이 먹었으면 물 한 모금 들어갈 공간이 없을까. 소이네서도 그렇게 먹고 궁에 와서 또 먹고. 먹고 또 먹고. 너, 그렇게 먹다 진짜 큰일 나!”

공두는 갑자기 세상 다 산 얼굴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게 다 상실감 때문이야.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져...”

단진이 공두를 살폈다. 궁에 들어와 뒷간에 갔다 온 후로 저렇게 이상해져 있었다.

“왜? 잘 놀다 들어와서 왜 그러는데? 궁에 들어와서는 박 내관님 없다고 좋아 방방 뛰더니, 휴가 받으면 소이네 가서 자고 온다고 좋아하더니, 왜? 화장실 가서 무슨 일 있었어?”

.......

“또 변비야? 곶감 좀 그만 먹어!”

“잊고 있었지...”

말끝에 깊은 한숨이 배어나왔다.

“뭘?”

공두가 잠시 자신의 그곳을 내려다보고는 허공에 눈길을 두었다.

“낮에 여름이랑 준이랑 남산 갔었잖아. 오랜만에 얼짱 셋이서 같이 바지를 내리고 볼 일을 보는데. 걔들이 있더라고...나는 없는데.”

단진은 그제야 말귀를 알아듣고 잔뜩 찌푸렸다.

“그것들이 나를 안 보더라고...전에는 부러운 듯이 나를 힐끗거리던 것들이...아예 안 보더라고...그땐 몰랐는데. 궁에 들어와 화장실에 갔더니. 다 없더라고...그래서 보니까 나도 없더라고...”

“나한테 그런 말을 하고 싶니?”

........

단진이 잠시 보다가 말했다.

“뭐가 걱정이야? 집에 가면 돌아올 텐데.”

......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나와! 나가서 저하 기다리자! 박 내관님한테 점수 따면 좋잖아. 휴가 받아서 소이네 가서 실컷 먹을 수 있고!”


향은 궁으로 들어오자마자 최 무사에게 내금위 별감들이 동요하지 않게 하라고 했다. 또한 사라진 동료를 찾으러 나간 별감들에게 수상한 자가 있으면 쫓지 말라고 당부했다.

오 내관이 제등을 비추고 향이 걸었다. 박 내관은 곁을 따랐다.

궁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으나 궁을 지키는 금군들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저하...생각해보니 홍단진과 장 내관이 봤다는 게 사실이었사옵니다. 무예시합 날에도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걸 생각하니...저하...당분간 미행은 나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향은 말없이 걸었다. 무예시합에 가면 안된다고 밤을 지새우던 단진이, 초췌한 얼굴로 금세 쓰러질 것처럼 보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던 단진이 떠올랐다.

‘신하들과의 약속보다 저하의 안위가 우선이옵니다!’

‘야인들의 무예 실력은 후일에도 볼 수 있는 일이옵니다!’

‘내금위 별감들이 저하를 지키려다 다 죽게 될 것입니다! 별감들의 실망은 잠깐이지만 그들의 목숨은 돌이킬 수 없사옵니다!’

‘저하...저하는 저하의 일을 하십시오. 소인은 소인의 일을 할 것이옵니다!’

무예시합 날 향이 그대로 나갔다면 많은 내금위 별감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향이 멈춰섰다. 박 내관이 향을 보았다.

진양의 집에서 삼년이 했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단검을 꺼내들고 저것들은 뭐지? 하고 말했사옵니다. 그러더니, 저 작은 것부터 해치우자! 단검을 꺼내든 순간 창이가.’

“저하...무엇이 불편하시옵니까?”

향은 잠시 있었다.

“잃을 뻔했구나.”

“저하...”

향이 걸음을 옮겼다. 향은 창이와 백겸이 아니었더라면 단진이 위험에 처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위험이 아니라 단진을 잃을 뻔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단진을 향해 자객이 검을 뽑았다는 걸 생각하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향의 걸음이 빨라졌다.

눈치 빠른 박 내관은 향의 걸음이 단진을 향한 것임을 알아챘다. 또한 향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간파했다.

“저하...자객들이 따라왔던 일로 그러시옵니까?”

....

“저하...오늘은 홍단진과 장 내관이 일찍 입궁했사오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박 내관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을 다물었다.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오 내관에게 들으니 단진과 공두는 입궁하자마자 비현각과 침전을 정리하고 저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궁 밖에서 역당 때문에, 창이와 백겸 때문에, 아무리 봐도 찜찜한 거흘합족 족장 때문에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 헌데 오늘은 웬일로 사고뭉치들이 조용하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그때 향이 또다시 멈춰섰다.

“이것이 무엇이냐?”

박 내관이 향의 시선을 따라가니 낙엽으로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노란 은행잎으로 만든 화살표를 따라가니 은행나무가 있고. 붉은 화살표를 따라가니 단풍나무가 서 있었다. 나무 사이마다 화살표가 표시돼 있었다.

박 내관은 이런 요상한 일을 할 사람은 궁에, 아니 조선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박 내관은 스멀스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가마솥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저하...”

박 내관에겐 먹구름이고 향에겐 햇살이었다.

향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걸 따라가면 단진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향의 마음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향이 낙엽 하나를 들어 보았다. 이걸 하나하나 가져다 만들었을 단진의 마음이 전해져 뭉클했다. 향이 주위를 보니 단풍진 나무들이 봐달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이걸 보여주려 이리 한 것이냐.

향이 화살표를 따라 걸어가는데 동궁전 내관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저하...큰일 났사옵니다. 홍단진이.”


단진이 부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고 공두는 나무 뒤에 쏙 숨어 있었다.

조금 전 단진은 공두와 함께 동궁전에서 나와 경회루를 서성이며 향을 기다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니 농익어가는 가을이 느껴졌다. 밤하늘의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색색의 단풍이 등불에 반짝이는 궁의 가을밤은 아름다웠다.

단진은 향이 화살표를 보며 걸어오는 동안이라도 모든 근심을 잊기를 바랐다. 마지막에는 동그라미에 웃는 얼굴을 그려 넣으려다 생각을 바꾸고 다른 문양을 그렸다. 내친김에 안에 글자도 써넣었다.

글자를 쓰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향에게 전하는 마음이었다.

그때 저만치 용포가 보였다. 향이었다. 향이 입궐하자마자 환복하고 단진의 화살표를 보고 찾아왔다고 여겨지니 어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용포가 다가오자 방끗 웃으며 일어섰다.

헌데 가까워질수록 향이 점점 뚱뚱해졌다. 단진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볐다.

여전히 뚱뚱했다....더 가까워졌다. 향이 아닌 부왕이었다.

단진은 그제야 부왕이 산책을 나왔구나 하며 끄덕였다. 그러다 정신이 들어 다소곳이 양손을 모으고 섰다.

부왕의 표정이 굳었다. 김 내관이 서둘러 내관 나인들을 모두 물리게 했다.

부왕은 아무 말 없이 보고만 있었고 단진은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부왕의 질문에 단진은 사실대로 답했다.

향이 달려왔다. 버드나무 아래에 작은 단진이 머리를 조아리고 부왕의 앞에 있었다.

향이 가까이 다가섰다.

“아바마마...”

부왕은 한곳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향이 부왕의 시선을 따라갔다.

낙엽으로 그린 문양 안에 낙엽으로 적은 문자가 있었다.

조선의 문자가 있었다.

향이 놀라 단진을 보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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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6 k1******..
    작성일
    21.03.08 11:27
    No. 1

    오랜만이예용 작가님!! 넘넘 재밌어용
    다음편 기대할게요!!~~^^

    찬성: 7 | 반대: 0

  • 작성자
    Lv.7 cr*****
    작성일
    21.03.08 12:01
    No. 2

    너무 반갑네요!!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에게 마음가는 작품은 처음이예요^^ 이번편 엔딩은 진짜 생각치도 못했던 장면이라 다음편이 너무 궁금합니다!!

    찬성: 6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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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2 20.12.10 1,733 10 25쪽
69 숙원 홍씨 69. 향의 고백 +4 20.12.07 1,752 10 16쪽
68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3 20.12.03 1,781 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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