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무릇 놀 줄 알아야 잘 사는 법!(1)
책상 위 조그맣게 자리 잡은 달력을 보며 레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니. 지난번 기사단 축제 이후 무려 2년이나 지나있었다. 2년 만에 한번 있는 축제니 벌써 또 축제가 열린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축제가 끝나면 매우 귀찮게도 신입 기사를 뽑는 기간이고.
쯧. 이번 축제에는 또 뭘 해야 하는지. 축제라고 해봤자 오전에 음식 만들어 점심 때 지들끼리 알아서 팔고, 술 마시고, 오후에 장기자랑 같은 걸 하는 것이 끝이었다. 다만 그 관리를 레안이 해야 하는 지라 매우 귀찮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름 이것이 요리 대회 같은 거라고, 레안을 포함한 각 단의 단장들이 각각 음식을 먹으며 평가를 내려 줘야 했다. 즉, 그 맛없을 지도 모르는 아주 이상한 요리들을 죄다 먹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아. 귀찮게. 역시 귀찮아.
늙어서 그런지, 부쩍 귀찮음이 더 심해진 걸 느끼며 레안이 지친다는 듯 책상에 엎드렸다. 어차피 축제가 오늘도 아니고, 좀 쉬어야지.
조그만 노크소리와 함께 조용히 문을 연 유라인은 조용한 집무실의 분위기에 흐음, 하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원래부터 조용한 분위기긴 했지만 유난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아마도 레안이 조용히 엎드려 자고 있어서 그런 듯 했다.
평소라면 소파에 누워서 자든, 창가에 기대 앉아 자든 할 텐데 안쓰럽게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것이 많이 귀찮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요즘 들어 일이 많아지긴 했지. 사소한, 아주 이상한 일들이.
그렇게 레안을 바라보던 유라인은 조심스레 레안의 책상에 다가가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남 앞에서 잘 안자는 레안이라 자는 모습 보는 것이 꽤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레안의 자는 모습은 기가 막히게 귀여웠다. 포동포동하지는 않지만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은 볼 하며, 우물거리듯 굳게 닫힌 조그만 입술하며. 얼마나 앙증맞은 지. 나이로 따지면 한참 위인지라 이런 말 했다 또 몇 대 맞겠지만, 워낙 어린 모습이라 귀여웠다. 특히나 잘 때는 그 특유의 포스도 사라지니, 귀여움이 더욱 부각이 되었다. 아쉬운 건 그 또랑또랑하고 예쁜 눈망울이 눈꺼풀에 곱게 닫혀있다는 사실이랄까?
“뭐하자고?”
기어코 귀여움을 참지 못해 볼을 쿡쿡 쑤셨더니 어느새 일어나 인상을 찌푸리는 레안이었다.
“축제 스케줄표.”
그걸 왜 네가 주는데?
불만 어린 표정이 유라인을 향했다.
“왠지 너라면 저번 축제처럼 아주 재미없고 밋밋하게 갈 것 같아서.”
“그래서?”
“이번엔 나도 구경 갈 건데, 이왕이면 재밌고 즐겁고 신선해야지. 그래서 귀찮아 할 너를 위해 계획을 짜왔어.”
“일 안 해?”
“뭐, 휴가?”
퍽이나.
그냥 가서 일이나 하라는 듯 레안이 아주 조심스레, 힘을 담아 턱을 괴고 있던 유라인의 이마를 밀었다.
“어쨌든 이대로 해주길 바래.”
하아. 지는 하는 일도 없으면 바라기는 엄청 바래.
그냥 봐도 엄청 귀찮을 것이 뻔한 종이를 보며 레안이 그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노려보았다.
레안은 집무실에 찾아온 네명의 단장들을 보며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황제가 주고 간 종이를 던져 주었다.
“뭐지?”
“모르면 묻지 말고 봐.”
굳이 읽고 싶지도 않다는 듯 레안이 짜증스레 답했다. 그에 현무단의 단장, 라이너가 인상을 찌푸리며 종이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이내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지금 이걸 하라고?”
어이가 없다는 듯 라이너가 싸늘하게 물었다.
“어, 황제가.”
뭔지 몰라도 황제가 시켰어, 라는 의미를 담아 레안이 뚱하니 답했다. 그에 다른 단장들 역시도 불안한 마음으로 슬쩍 종이에 적힌 글을 확인했다. 그리고 역시나, 그들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그나마 멀쩡한 것은 주작단의 단장인 유란 뿐이었다.
“각단의 단장, 부단장, 그리고 기사 2명이 대표로 여장이라. 꽤 난감하군요.”
그냥 기사 2명이면 무력으로 제압한다지만 본인들 포함이니 참으로 뭐 같았다.
“왜? 재밌을 것 같은데?”
역시나 여장이든 뭐든 재미만 있으면 된다는 주의인 청룡단 단장, 류는 아주 기대된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아마 그는 이렇게 반대하는 단장들의 여장 모습을 아주 기대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럼 전 어떻게 해요?”
유일하게 황실 기사단 내 레안을 제외하고 유일한 여자인 유란이 정말 어떻게 하냐는 듯 물었다.
“넌, 그냥 대리로 한명 보내. 제나는 그 모습으로 나오면 된다고 하고.”
“이거 저희 주작단이 이기겠는데요? 여장하면 제론을 따라올 사람이 없잖아요. 아예 정말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는 수준인데.”
역시나 부단장, 제나에게 쌓인 게 많은 유란이 아주 재밌다는 듯 즐거워했다. 항상 여성성을 가지고 치고 박고 하던 그들이었으니.
“어쨌든 알아서 준비해.”
“연극도 있군요.”
어찌나 철저하신지, 아예 단 별로 어떤 연극을 하라고 까지 지정해준 황제의 배려에 백호단 단장, 라힌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왜 자꾸 단장들과 부단장들을 이 모든 것에 참여하게 만드는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레안은 빠져 있다는 거? 하긴, 레안까지 시켜버리면 아마, 꽤 대박일 터였다. 축제가 바로 지옥이 될 테니까.
“안 하겠다면?”
원래부터 귀찮은 일은 사절인 라이너였지만, 아내인 유란이 있는 앞에서 여장이라니. 정작 유란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지만.
“황제한테 가서 말해.”
끼어들고 싶지도 않다는 듯 레안이 쿨하게 말하며 직접 황제에게 전화를 걸 듯 자세까지 취했다. 유일하게 황제의 집무실에 연결된 전화를 가지고 있으니 실제로 걸지도 몰랐다.
아무리 라이너라도 차마 황제와 싸울 용기는 없지만 불만어린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그럼 알아서 준비해.”
난 그냥 축제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드니까.
이 무슨 미친 망발을!
류의 말을 들은 리엔이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듯 격하게 반응했다.
“싫어요! 절대 안 해요!!!”
“응? 뭐라고? 너무 좋다고? 하고 싶어 미치겠다고? 응, 알아. 그래서 너 시켜주는 거야.”
내가 언제!
원래부터 말이 통하지 않는 류였지만, 이건 아니었다. 여장이라니! 자신이 여장이라니.
그동안 류에게 찍혀 일년 가까이를 온갖 개고생하며, 갈굼과 괴롭힘을 당하며 지냈지만, 그래도 그건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건 아니었고, 정말 힘들었지만 이번만큼 미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이 말은 역대 최고로 맛이 간 말이었다. 그러니 용납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청룡단에 배정 당해 얼마나 힘겨웠는데.
그러나 리엔은 중요한 것을 간과했다. 단 한번도 자신이 류와 싸워서 이긴 적이 없다는 것을. 류는 싫다고 반항할수록 더욱 불타오른다는 것을.
결국 리엔은 일주일 후의 여장을 위해 오늘부터 희생하게 됐다. 아주 목덜미에 목줄까지 채운 채로 류에게 질질 끌려 다니며.
한편, 초특급 폭탄이 떨어져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 청룡단 뿐만이 아니었다. 현무단의 하륜 역시도 꽤나 충격적인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리엔에 비해, 아니 그 누군가와 비해도 침착하고 무덤덤한 편인 하륜인지라 엄청난 반발을 하며 강력하게 저항하지 않았지만 그 미묘한 표정이 보이는 의미는 같았다.
꼭 해야 합니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 하필 저, 입니까?”
꼭 제가 해야만 하는 거냐, 는 말을 돌려 말하며 하륜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가 막내니까.”
물론 막내지만.
역시 달갑지는 않아 하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차마 안하겠다고 대놓고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어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다 눈에 보이는 한명의 등장에 하륜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저런 취급은 안 당하니 다행인거지.
하륜의 눈에 비친 것은 리엔이었다. 그것도 머리에는 꽃달고 목에는 레이스로 만든 리본을 달고 류에게 질질 끌려 다니고 있는.
- 작가의말
훗, 축제의 시작입니다.
과연 이들의 축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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