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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988 님의 서재입니다

제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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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로즈988
작품등록일 :
2018.06.01 22:23
최근연재일 :
2018.07.03 11:36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2,302
추천수 :
29
글자수 :
170,468

작성
18.07.03 11:36
조회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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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고모 1

DUMMY

"정말 그런 짓까지 할 셈이었니? 됐다. 어쨌든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마법이 성공적으로 작동한 모양이야. 그러니 내가 없는 6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줬으면 좋겠구나. 궁금한 것도 많고 말이지. 너 설마 결혼했니?"


"아니에요! 아직은요···."


어찌된 일인지 리사경은 사무소에 왔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리자드가 차분히 설명하는 동안 리사의 얼굴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순차적으로 지나갔다. 마침내 리자드가 입을 다물었을 때 그녀는 어쩐지 맥이 빠진 얼굴이었다.


"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내가 사무소에 찾아갔었다고? 그래서 널 부탁했단 말이지? 가만 난 네가 날 좀더 일찍 발견할거라 생각했는데. 그러면 집은 어떻게 된거니? 설마 내가 없는 사이 저택이 어떻게 됐다거나 하는건 아니지?"


"중간에 사건이 있어서 전 이제 다른 곳에서 살아요. 이제 이 곳은 기네비어 스승님의 소유에요."


"뭐?!"


리사는 설명을 요하는 눈치였고 리자드는 별 수 없이 얘길 시작했다. 리사는 6년전 11월달에 숨을 거뒀다. 계절이 겨울인지라, 그녀의 무덤을 파는 것은 다른 때보다 많은 힘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당시 열아홉살이던 리자드는 기네비어의 아래서 한창 연구에 매진중이었고, 리사는 탐탁친 않지만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년 후에 일이 터진 것이다. 리자드는 오펜하이머의 모든 재산을 팔아 손해를 메꿨고 그렇게 이 저택과도 작별했다.


리사는 우뚝 솟은 가시마냥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별 수 없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게 어려운것 같았다. 얼추 이야기가 끝났을 때 제스퍼는 자신을 보는 리사의 눈길이 어쩐지 조금 달라진걸 느꼈다.


"그래···넌 지금 어떻니 리자드?"


"전 지금 행복해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고모도 다시 만날 수 있었잖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리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듯 했다.


"저택이 어떻게 됐는지 보고싶어. 언젠가 그 천박한 링곤놈이 일을 칠 줄 알긴 알았지만, 그나마 아직 안 팔고 갖고있는걸 다행으로 여겨야겠군."


"여기서 나가도 괜찮으시겠어요 고모?"


"사무소까지 가서 의뢰를 했다는걸 보면, 아마 별 상관은 없을거야. 이 마법의 유효시간은 하루인듯 하고 그 시간 안에만 돌아오면 뭐, 괜찮을거다."


지하실 밖으로 나오자 환한 햇살이 세 사람을 반겼다. 짐이 다 정리된 방 안은 휑했고 먼지만이 햇살 속에 하늘하늘 춤추고 있었다.

리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 외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그녀도 잘 아는것 같았다.


리자드는 고모와 만나 잔뜩 들떴다. 그녀는 리사와 복도를 가로지르는 내내 시시콜콜한 얘기를 멈추지 않았다.


리지가 자란 방이며 육아에 경험이라곤 전무한 리사가 차츰 조카의 존재에 익숙해지기까지, 이야기를 엿듣는 내내 제스퍼는 리자드의 어린 시절이 눈에 훤했다. 그리고 제스퍼는 리자드가 쑥맥인 이유가 그녀의 괴랄한 미적감각과 기네비어의 방해공작과 더불어 리사의 철저한 방어 때문이란것을 알게됐다.


오펜하이머 가문은 저택의 내부보다 바깥의 풍경이 더 아름다웠다. 비비 꼬인 나무 아래 작은 제비꽃들이 오밀조밀했고,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무성하게 자란 수풀 위로는 홀씨가 하늘하늘 날아다녔다. 숲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개울을 따라 정원을 한바퀴 휘돌았고, 그 한가운데 흰 희아신스가 만개한 꽃밭이 자리했다. 나비와 벌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며 새삼스레 리사는 이 모든것들이 신기하고 새로운 눈치였다.


두 사람이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제스퍼는 잠시 자리를 비워주기로 했다.


"정원은 애초 손을 안대던 곳이긴 하지만 세상에 이건 너무 심하게 변했구나. 그리고 왠지 여기서 이 말을 또 했었던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저도 낯설게 느껴지네요. 옛집에 온건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의뢰를 하게 됐을까? 참 희한한 일이야."


"저 고모··· 한가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리사가 물어보라는 듯 고갤 끄덕였다.


"제 부모님에 관해서에요."


리사의 얼굴이 굳었다. 부모님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호루스에게 얘길 들었을 때 놀라긴 했지만 충격은 들지 않았다. 그냥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된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모는 까탈스럽고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었고, 리자드가 부모님에 대해 물을 때마다 적잖이 불편한 내색을 했었다. 고모는 리자드가 내마법을 배우길 원치않았는데, 리자드는 아마 그와 관련해 부모님에게 어떤 사고가 있었음을 어렴풋 짐작할 수 있었다.


"새삼스럽게 고모에게 부담을 주려는 의미는 없어요. 사실 기억도 안나고 어떤 감정도 들지않는 분들이지만, 그래도 알아둬야 할것 같아서요. 그 분들이 어떤 분이었는지··· 이주생물을 돌려보내다가 사고를 당한게 사실인가요?"


찬찬히 조카를 뜯어보던 리사가 눈을 감았다. 조카는 어렸을 때와 달라진게 하나도 없었다. 보챌 줄 모르는 아이였고 그 점은 여전했다. 리사가 폭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와서 감춘다고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루 오펜하이머와 베사 달린, 리자드 부모의 이름이었다. 두 사람의 행보는 지금의 리자드와 꼭 닮아있었다. 실력은 있지만 마학모의 인정을 받지 못한 그들은 이주생물 퇴치가로 일하며 나름대로 가문을 꾸려갔다. 물욕을 중시 하지 않는 그들에겐 꽤나 행복한 삶이었을 것이다. 용의 소식을 접한건 리자드가 태어나고 채 몇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야기는 짧고도 간결했다.


"나머지는 네가 들었던 그대로다. 멍청하지만 착한 내 동생은 용을 그대로 두고볼 수만은 없었고, 부인인 베사 또한 마찬가지였지. 아무리 어려도 용은 용이었고, 그렇게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사고가 생겼다. 노력했지만 두 사람의 시신은 찾을 수조차 없었지. 나는 부질없다고 생각해 묘석을 치워버렸어. 당시 꽤 화가 나있었거든. 어차피 오펜하이머의 가세는 기울어가고 있었고 나는 굳이 널 내마법사로 키우고싶진 않았다. 결국 이렇게 돼버렸지만 말야. 이제 궁금증이 좀 풀렸니?"


"그렇군요···."


"내가 말 안한건, 사실 내 안에 응어리가 남아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넌 그 점이 불만이었겠지만."


"아니에요. 말해주셔서 고마워요 고모."


두 사람은 나란히 숲 속을 걸었다. 리사가 유독 아끼곤 했던 푸른 엉겅퀴 밭은 한창 꽃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제스퍼가 멀리 앉아있었다. 리사의 시선이 자연스레 제스퍼에게 가 닿았다. 리자드는 올 게 왔다는걸 눈치챘다.


"내게 커다란 고민이 하나 있다면 네 혼사 문제였다는걸 잘 알겠지. 네 아버지는 여자를 만난게 기적일 정도로 한 때 숯기가 없었단다. 너도 그 점을 닮아 평생 쓸쓸히 보내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어떻게 잘 해결된 모양이구나. 그래, 좀 어떻니?"


"만난게 행운일 정도로 제스퍼는 저한테 잘해줘요."


리자드가 얼굴을 붉혔다. 조카는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아이다. 기네비어에게 조카를 맡겨두고서 리사는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청년이 힐끗 리자드를 확인하는게 보였다. 반듯하니 잘 생긴 청년이었다. 무엇보다야 리자드가 경계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조카는 강단이 있지만 마음이 약해서 탈이다. 함께 여기까지 왔을 정도니 믿고 맡길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일이 잘 풀려 다행이야. 이제야 좀 한시름 놓겠구나."


"하지만 고모 저는 제대로 못한거 같아요. 만약 좀 더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이렇게 늦게 고모와 만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아니, 이미 사라질 가문은 중요치 않아. 중요한건 네가 무사하고 순간순간에 행복함을 느끼냐는거야."


리사의 눈이 진지했다.


"전 행복해요."


리자드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눈이 포근한 빛을 띄었다.


*


"어쨌든 그 혼혈놈이 저택을 돌려준다고하니 다행이구나. 저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지."


지하실로 내려가며 리사가 말했다. 그녀가 손가락을 퉁기자 등잔이 환하게 빛을 밝혔다. 도착한 곳은 창고로 안에는 길다란 진열대를 따라 무수히 많은 상자가 놓여있었다. 리사가 한가운데를 가로질러가며 리자드에게 잘 들으라는듯 또박또박 설명했다.


"여긴 가문 대대로 이주생물에 대해 연구한 것들을 모아놓은 곳이야. 알아볼 수 없는것들도 많고, 세간에 알려진 사실도 많고, 어쨌든 쓸데없는 것들이라 생각해서 이 쪽으로 옮겨놓긴 했지만,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들도 분명 있으니 심심할 때 찾아보거라. 그렇다고해서 버리진 말고."


그 후로도 그녀는 저택의 보수공수를 해야할 곳, 주의해야할 곳 등등을 짚으며 돌아다녔다. 리자드는 전례없던 집안의 비밀과 역사에 흥미로운 눈치였지만 한편으론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왜 이런걸 말씀해주시는 거예요?"


"생각난 김에 일을 다 처리해야겠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리사 생전에 머물던 그녀의 방이었다. 하늘색과 금색의 타일이 깔려있고 아치형의 작은 창문이 난 방은 딱 필요한 것만을 갖추고 있었다. 수납장마다 빽빽히 찬 수첩과 손으로 적은 서책, 종이와 펜들은 방의 주인이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리사의 손짓에 책 두권이 리자드에게 날아들었다. 루 오펜하이머와 베사 달린 오펜하이머. 표지에 각각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고모는 그림 솜씨가 좋았다. 그림 또한 고모가 집안에 머물 수 밖에 없기에 흥미를 붙였던 취미였다. 루 오펜하이머의 반짝이는 눈과 베사 달린의 둥그런 미소에 리자드의 모습이 숨어있었다. 리자드가 놀라 눈을 깜박였다.


"고모 이건···."


"그게 내가 작성한 네 부모의 기록들이란다. 좀 더 일찍 줬으면 좋았을것을··· 고집만 센 고모라 미안하구나."


"아뇨 고모 전 고모와 다시 만나서 기뻐요."


"리지, 부탁이 있다."


리자드는 고모의 진지한 얼굴에 무언가 말하기 힘든 어려움이 깃들어 있다는걸 알아챘다.


"내 마법은 아마 불안정한 모양이야. 사실 성공할 줄도 몰랐고, 그래서 눈을 떴을 땐 무척 당황했다. 기억은 안나지만 그게 처음만은 아니었을거야. 서서히 집안의 풍경을 보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음을 가늠할 수 있었으니까. 내 기억은 내가 죽던 그 날에 멈춰있다. 밤이 되면 마법은 사라질거고, 나는 다시 잠들게될거야. 그리고 깨어나면 모든 기억들을 잊은 상태겠지."


리자드가 무어라 말하기 전 리사가 획을 그었다.


"저택의 마법을 거둬줬으면 좋겠구나."


"못해요."


"네게 루와 베사의 기록도 건네줬고 네가 잘 사는 걸 봤으니 더 이상 미련은 없다. 리지 이건 너만 들어줄 수 있는 내 마지막 부탁이야."


"하지만 아직 오펜하이머 가엔 고모의 책이 없어요."


"네 기억이 있잖니."


리사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리자드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것 같았다. 조카를 만나고싶다는 강한 일념은 결국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힘이 됐지만 한편으론 미약하고 허점 투성이였다.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는 누군가 해방시켜주지 않는 이상 꼼짝없이 저택에 얽메인 신세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공간이었지만, 리사를 그대로 방치하는건 그녀에게 있어 큰 고통이나 다름없다. 리자드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눈물이 책 위로 뚝뚝 떨어졌다.


어느덧 해가 지고, 마법진의 검은 공간이 사위를 잠식했다. 발 밑에 무수히 많은 그림들이 모여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발 밑으로 빛 알갱이가 공간의 주인을 데리러오고, 노을 아래의 그림자처럼 리사의 모습이 차츰 옅어졌다.


"그럼 안녕 리지."


리사가 제스퍼를 쳐다봤고 그녀가 무얼 당부하는지 알기에 제스퍼는 고갤 끄덕였다.


"언제까지나 행복하길 바라마."


"고모!"


리사의 몸이 허공으로 둥 떠올랐다. 어느 기점에 이르러, 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리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밤의 장막이 내리깔리고 넓은 방 안에 제스퍼와 리자드만이 남았다. 리사의 공간과 이어지는 그림은 벽에서 떼어졌다.


리자드는 검과 함께 그림 앞에 섰다. 이제 고모를 보내줄 시간이다. 그림 속 리사가 활짝 웃고있었다. 리자드는 힘껏 팔을 처들었다. 떨어지려던 그녀의 팔을 제스퍼가 막

았다.


"힘들다면 그러지 말아요 리지."


리자드의 얼굴이 눈물 범벅이었다.


"고모를 저렇게 보낼 순 없어요."


그녀가 제스퍼를 꽉 움켜잡았다. 흐어엉 참고있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경. 오펜하이머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자 기록자인 그녀는 가문의 일원으로서 집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집은 높다란 화단과 숲에 둘러싸여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한건 그녀가 날때부터 유약한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권유로 참가한 행사에서 그녀는 발작을 일으켰고, 사람과의 만남은 두려움만 남긴 채 씁쓸하게 끝나버렸다. 그녀는 동생 부부와 친했지만, 어느 순간 부터 그 둘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게됐다.


리사가 자신의 내면에 틀어박혀있을 무렵, 사고가 터졌다. 동생 부부가 용의 분노를 받은 것이다. 리사는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용의 화염이 휩쓸고 간 자리는 그을음과 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동생 부부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세살배기 어린 아이만이 그들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리사는 사람이 달갑지 않았다. 미약한 공포심을 갖고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피붙이는 그 아이밖에 남지 않았다. 리사는 제가 아이를 키우기로 했다.


치직 거리는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눈 앞에 푸른 빛이 번쩍였다. 리사는 아직 의식이 실재하고 있음을, 제가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된걸까? 리사는 그간의 기억을 천천히 되돌려봤다. 그녀는 52세의 적지않은 나이로 숨을 거뒀다. 서른을 넘기지 못할것이란 주치의의 말과는 달리 꽤나 질긴 목숨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묵직한 함박눈이 내리는 11월의 어느 밤이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조카가 하늘에서 내리는 눈 못지않게 펑펑 눈물을 쏟아냈고 그 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아니, 리사는 방금 전까지 리자드와 만나지 않았나. 리사는 집을 물려받게 될 하나뿐인 오펜하이머와 그 오펜하이머의 미래의 남편에게 집에 대한 주의사항들을 읊어줬더랬다.


이게 주마등이라는걸까?


그렇다면 리사는 좀 더 과거의 기억을 뒤져보기로 했다. 마법진은 완벽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리사는 하루 외에는 기억할 수 없는 치명적 결점을 떠안게 됐다.


처음 깨어났을 땐 어리둥절했다. 기다리면 리자드가 오겠거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조카는 오지 않았고 자정이 되기 무섭게 그녀의 의식은 소멸됐다.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가 지나고 리사는 서서히 마법진의 결점을 알아냈다. 그녀는 경험한 바를 그림으로 남겼다. 다음의 제가 깨어났을 때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펜하이머 저택에 조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걸 깨달은건 이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기 것이리라. 리사는 조카를 찾아나서기로 결심했다. 하루의 시간 제한만이 있을 뿐, 다행히 이동에 제한이 있진 않았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아니 생전에도 집밖으로 나오지 않던 그녀에게 바깥 세상은 생소한것 투성이였다. 다행인건 실체가 없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발작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건 꽤나 유쾌한 일이었다.


생각한 것과는 달리 리자드를 찾는 일은 꽤 시간이 걸렸다. 어렵사리 조카가 사는 곳을 알아냈을 땐,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리사는 기쁜 마음으로 리자드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건지 왜 집엔 한번도 찾아오지 않는건지 궁금한것 투성이였다.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찰나, 뜻밖의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제한이 없다고 생각했던건 오산이었다. 마법진은 완벽한 자유를 보장해주진 않았다. 넓긴 하지만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면 리사는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것 마냥 옴싹달싹 할 수 없었다.


그런 때 그 마법사와 마주친건,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 어딘가 익숙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머잖아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적 발작을 일으켰을 때 본 사람 아니던가. 마법사 하나가 그녀를 도와줬었고, 리사는 무사히 부모님의 손에 인계될 수 있었다. 리사의 기억의 장은 그리 두터운 편이 아니다. 그녀의 인생 대부분을 집에서 보냈다. 때문에 리사는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도 바깥에서 있었던 일은 어제 일처럼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하는 편이었다. 형태는 많이 바뀌긴 했지만 분명 그 마법사가 맞았다.


'무엇이든 도와드려요 엘레멘탈 인력 사무소.'


마침 도움 받을 구실도 적당하겠다 리사는 냅다 의뢰를 걸었다. 치지직 아까부터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붙잡고 흔들고 있었다. 정확히는 두드리고 있는게 맞으리라.


리사는 눈을 떴다.


"고모 제 말 들려요?"


눈 앞에 리자드의 얼굴이 돋보기에 비친 것처럼 흐늘거렸다. 생소한 감각이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리지?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라니-"


리자드가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다. 리사가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모가 깨어났어요!"


리자드가 옆에 선 제스퍼의 어깨를 잡고 방방 뛰었다.


오팔이 불빛을 비추자 리사경이 몸을 움찔했다. 의체와의 결합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듯 했다.


이야기는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풀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면 늘상 그랬듯 제스퍼는 스승을 호출했다. 느적느적 오펜하이머 가를 둘러보던 엘레멘탈은 손쉽게 문제점을 간파했다. 엘레멘탈은 또다른 갑옷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거기에 리사의 영혼을 옮겼다. 초조하게 기다리길 몇시간, 리사가 깨어난 것이다.


서서히 시야가 잡히고 리사는 자신을 쳐다보고있는 사무소의 일원들을 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몸이 둥 뜨는 느낌이지? 머리가 어지러워 손을 든 그녀는 깜짝 놀랐다. 손이 딱딱한 철로 이뤄져 있는게 아닌가.


"이게 뭐야!"


저도 모르게 소릴 질렀지만 그게 목을 통해 나오는게 아닌 울리는 느낌이다.


"리지? 대체 어떻게 된거야? 난 분명 그 공간에서 잠들은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잠깐, 기억? 리사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제가 죽던 순간은 물론이고 그 후의 일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리자드가 리사의 손을 붙잡았다. 리사는 조카의 따듯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엘레멘탈 선생님께 부탁했어요. 죄송해요 고모, 하지만 그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었어요."


거대한 철갑옷이 덜그럭거리는 소릴 내며 거실로 건너왔다. 엘레멘탈? 리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철갑옷이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투구의 턱 부분을 긁적였다.


"혼자서 독학해 만든것 치곤 훌륭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매개에 문제가 있었어. 사물에 자신을 심는 매개 마법은 매개가 적을수록 좋아. 하지만 당신은 사방팔방에 자신의 조각들을 심었으니 기억이 온전할 리가 있겠어? 그래서 조금 손을 봤지. 어때? 그 전보다는 훨씬 나을거야."


확실히, 감각이라곤 느껴지지 않고 불안정했던 과거에 비해 지금 몸은 놀라울정도로 섬세했다. 엘레멘탈이 리사의 생각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서 또다른 기계기사가 빼꼼 고갤 내밀었다.


리사는 투구에 푸른 깃을 매단 여성형의 갑옷 차림을 하게됐다. 불새가 양각돼있는 가슴 덧받이 부분을 열면 그녀가 담긴 수정구가 나타났다. 리사는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투구 속에 그녀가 익히 알던 얼굴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을 볼 수 있고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뭐 정말 튼튼한 몸이긴 하구나."


"정말 죄송해요."


"네가 대체 미안할게 뭐가 있니."


리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카는 동생을 닮아 마음이 여렸다. 쉽게 놔주지 않을거란 염려는 했지만 정말로 방법을 찾을 줄이야.


티티라는 이름을 가진 기계기사가 차를 내왔고 리사는 한모금 마시곤 깜짝 놀랐다. 먹는게 어디로 가는진 몰라도 맛을 느낄 수도 있거니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움 까지도 생생했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리사가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하자, 리자드는 고모에게 제스퍼를 오팔과 티티, 사무소의 일원들을 소개해줬다. 리사는 제스퍼가 쌍둥이라는데 조금 놀랐을뿐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아무렴 자신이 되살아난것에 비하겠는가.


"엘레멘탈 선생님께서 특별히 고모를 신경써주셨어요."


"그 사람이?"


"두 분이 친분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친분이랄것도 없다. 한번 도움받고 만게 끝이었으니까. 다시 이런 식으로 만날줄은 몰랐긴 하지만 말이다. 엘레멘탈이 주의사항을 전달해주러 나타났고, 리자드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자리를 비켜줬다.


*


엘레멘탈이 기다렸다는듯 갑옷을 들고 나타났을 때 제스퍼는 조금 놀랐다. 때마침 준비된것은 여성 갑옷으로, 제스퍼는 그런게 있을 줄은, 상상도 짐작도 못했었다. 엘레멘탈은 마치 이런 일이 있을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또다른 기계기사는 티티가 아니었나? 밤의 소란에 못이겨 오팔 또한 제스퍼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대체 스승님은 언제 저런걸 준비해놓으신거야?"


"한참 됐어. 지금 리사경이 타고있는게 스승님이 진작에 완성한 거야. 티티는 그 과정에서 파생된 애고. 여자 갑옷을 어디다 쓰려나 물어봐도 대답을 안해주더라고. 저렇게 될 줄은 몰랐지."


"스승님은 이런 일이 있을걸 진작 알고있었단 말이네."


"능구렁이 같으니."


두 사람이 동시에 뱉은 말이다. 오팔이 들어가고 나서도 제스퍼는 한참을 밖에 있었다. 밤은 깊었지만 사무소의 불은 꺼질줄 몰랐고 이내 그 불빛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리자드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달은 밝았고 바람은 달콤했다. 리자드가 제스퍼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녀의 얼굴이 붉그스름했다.


"정신없는 날이에요."


리자드가 진이 빠져 말했다. 펑펑 울어서 눈 밑이 붉었지만 얼굴은 그 어느때보다도 밝았다.


"고마워요 제스퍼."


"고모님껜 잘 보일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리자드가 키득이더니 그의 뺨에 키스했다. 뜨거우면서도 결코 답답하지는 않은 만족감이 온 몸을 가득 메웠다. 그녀도 같은 마음이길 바라며 제스퍼는 리자드를 꽉 끌어안았다. 달은 밝고 거리는 술에 취한 것처럼 울렁거렸다.




<끝>


작가의말

이 편을 마지막으로 제스퍼의 이야기는 완결이 났습니다. 다음에 다른 글로 뵈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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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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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모 1 18.07.03 97 1 23쪽
22 고모 18.07.03 80 1 24쪽
21 느린 밤 6 18.07.03 69 1 20쪽
20 느린 밤 5 18.06.30 64 1 15쪽
19 느린 밤 4 18.06.29 85 1 10쪽
18 느린 밤 3 18.06.27 66 1 10쪽
17 느린 밤 2 18.06.26 92 1 10쪽
16 느린 밤 1 18.06.24 123 1 23쪽
15 느린 밤 18.06.23 82 1 19쪽
14 마학모 18.06.20 96 1 25쪽
13 전야 18.06.19 102 1 17쪽
12 일렁임 18.06.18 67 1 13쪽
11 불쾌한 만남 18.06.17 103 1 15쪽
10 정체성 18.06.16 80 1 14쪽
9 역류 18.06.16 210 1 13쪽
8 움틈 18.06.13 93 1 16쪽
7 교수의 제안 18.06.12 119 1 11쪽
6 움직임 18.06.09 130 2 17쪽
5 어떤 사실 18.06.08 95 2 17쪽
4 첫걸음 18.06.06 90 2 22쪽
3 진의 18.06.03 114 2 19쪽
2 만남 18.06.02 84 2 9쪽
1 방문 18.06.01 160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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