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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988 님의 서재입니다

제스퍼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완결

로즈988
작품등록일 :
2018.06.01 22:23
최근연재일 :
2018.07.03 11:36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2,305
추천수 :
29
글자수 :
170,468

작성
18.07.03 11:31
조회
69
추천
1
글자
20쪽

느린 밤 6

DUMMY

"이 여자는 뭐지?"


"필요할 거예요. 기네비어를 다루기 조금 더 수월해질 겁니다."


"이제 그 이름은 버리지."


대장이 나직이 말하자 호루스는 빙긋 웃었다. 기다렸다는듯 링곤인들이 철장에 달라붙었다. 호루스는 리자드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이동마법진이 거의 완성됐고 리자드는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링곤의 짙은 풀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어두퀴퀴하고 폐쇄된 오래된 유적지가 떠올랐다. 링곤에 대해 말할때면 스승은 불쾌함을 넘어 혐오스럽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키가 큰 고목들은 고대의 기운을 간직하고 있었고 풀 한포기, 흙 한줌까지도 꺼림칙하고 어두운 기운을 품은 곳이라고했다. 리자드는 기네비어의 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이야 그렇다 치지만 대체 기네비어는 무슨 운명인가?


파앙- 폭죽이 터지는것 같은 소리가 밤공기를 울린건 그 때였다. 밤하늘 위로 빛이 기척을 남겼다가 사그라들었다. 호루스와 링곤인 대장의 눈이 마주쳤다.


"방해꾼은 없을거라더니?"


"아무래도 개미가 몇마리 들어온것 같군요. 신경쓰지 말고 빨리 옮기시죠."


철장을 옮기는 링곤인들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급하게 서둘렀던 탓일까, 철장을 받치고있던 지지대 하나가 무너졌고 철장이 기우뚱 기울었다.


"어서 옮겨!"


보다 못하겠는지 링곤인 대장이 힘을 가세했다. 그르르 나직이 목을 울리던 용이 입을 연건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괴성이 숲 전체에 울려퍼졌다. 링곤인들과 호루스가 소리에 귀를 막고 괴로워하는 사이 용이 몸을 흔들어 족쇄를 끊었다. 꼼짝없이 메여있는줄만 알았는데 가벼운 몸짓 한번으로 용은 속박에서 벗어났다. 날뛰는 틈에 철장이 구부러지고 그 틈을 비집고 기네비어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링곤인 대장이 코 앞에서 용과 대면했다. 푸른 눈은 형형했고 꿀렁거리는 가슴으로 시뻘건 불길이 넘실댔다.


"기네비어 안 돼요!"


일촉즉발의 순간 리자드가 용에게 뛰어들었다. 놀란 기네비어가 방향을 틀자 불길이 호수로 쏟아졌다.


"붙잡아!"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도 모른 채 링곤인 대장이 무턱 소리를 질렀다. 용이 날뛰었고 나무가 부러지고 가지가 꺾이는 소리에 리자드는 비명을 질렀다. 리자드의 시야가 날뛰었다. 비탈이 나타나는 순간, 기네비어가 날개를 펼쳤다. 순식간에 리자드는 지면과 멀어졌다. 손짓으로 용을 가리키고있는 링곤인들과 그저 멀거니 올려다보고있는 호루스가 보였다.


*


통로가 닫히고 마법사들이 빠져나오기 무섭게 꺼림칙하고도 큰 괴성이 울려퍼졌다. 제스퍼가 고개를 들기 무섭게 희끄무레한 빛을 드리우며 무언가 튀어오르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법사들은 어슴푸레한 하늘 저편에 성 위로 선회하고있는 거대한 생물체를 목격했다. 구름 사이로 달이 나타나자 용의 모습이 한층 뚜렷해졌다. 용은 마법사들이 몰려있는 입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공격한다 피해!"


마법사중 어느 한명이 외치기 무섭게 불기둥이 쏟아졌다. 제스퍼는 용의 등에 납작 엎드려있는 인영을 봤다. 순식간에 스쳐지나간 용이 숲으로 방향을 틀었다.


"링곤인이야!"


호수쪽에서 도망나오던 링곤인들과 마법사들이 마주쳤다. 링곤인들은 태생적으로 마기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었고 아무리 못배운 이들이라도 기본적인 마법은 쓸 줄 알았다. 공격이 쏟아졌고 마법사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제스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호루스를 찾아야했다.


"제스퍼! 이 쪽이야!"


오팔이 제스퍼에게 소리쳤다. 일렁이는 불길 너머로 도망가고있는 호루스가 보였다. 방향을 보아 호루스가 향하는 곳은 왜곡마법이 펼쳐진 숲의 중앙이었다. 숲으로 들어가려면 따로 둘러 쳐진 별관을 통과해야한다. 이 전에 왔을 때 제스퍼는 이동할 수 있는 곳이라면 죄다 한번씩 통로를 여닫아놨었다. 제스퍼는 오팔을 붙잡았다. 순식간에 통로가 열리고 두 사람은 소란과 멀리 떨어졌다.


두 사람이 빠져나온 곳은 성이 보이는 숲의 초입이었다. 발소리가 들리고 인기척이 가까워지기 무섭게 제스퍼는 호루스를 낚아챘다. 호루스가 자세를 취하기도 전 두 사람은 성 테라스 밖의 경사진 지붕 위로 이동했다. 손을 놓자 호루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기우뚱했다.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지붕의 사면에 걸터있었다.


"제스퍼 어쩔 생각이야?"


오팔이 급한 숨을 가다듬으며 뒤에서 물었다. 놓고온다고 생각했는데 제스퍼가 통로를 여는 순간 잽싸게 껴든 모양이다. 호루스의 머리위로 돌던 정령이 크게 꾸물거렸지만 호루스가 공격의지를 잃자 다시 얌전해졌다.


"기네비어를 원래대로 돌려놔."


호루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그녀는 전혀 게의치 않아했다. 그녀가 고갯짓으로 하늘을 가르켰다. 검은 연기 속 거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못 해. 저것 봐. 이미 한마리의 용이 됐잖아? 한번 그 모습과 동화된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어. 오팔 동생에게 설명좀 해 줘. 스승이 변이 마법사라며? 리자드가 걱정되는 거라면 괜찮아. 기네비어는 끔찍히 그녀를 아끼거든. 아직까지는 말야."


제스퍼는 그녀를 한대 치고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아오는 이득은 없다. 기네비어는 말 그대로 자아를 잃었고 리자드가 힘이 빠지는건 금방일터다. 다른 수를 생각해야했다.


사물 안으로 통로를 열면 어떻게 될까? 어릴 적 제스퍼는 호기심에 못이겨 한번 시험해본 적 있었다. 그 결과 손이 나무 안에 갇혔고 엘레멘탈이 그를 찾으러와 나무를 베어낼 때까지 꼼짝없이 거기 붙들려있어야했다. 제스퍼는 지붕 위 이무기돌에 호루스를 묶어놨다. 졸지에 이무기돌과 사이좋게 손잡은 모습이 된 호루스는 도망갈 의지를 잃었는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하늘은 용이 내뿜는 불길로 요란하게 번쩍였다. 돌아왔을 때 상황은 어느정도 진정이 된 후였다. 링곤인들 반은 포위됐고 반은 도망쳤다. 마학회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이 공격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안 돼요! 내 아들이에요. 저 애를 헤칠수는 없다고요. 분명 충돌하는 일은 없을거라 그랬잖아요?"


아도라의 고함이 숲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건 당신 아들이 얼마쯤 사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을 때지, 저대로 뒀다간 분명 끔찍한 일이 생길거요."


파견단의 수장인 냉정한 버밀리온이 단호히 그녀를 뿌리쳤다. 아도라가 다시 한번 애걸했다.


"내 아들을 죽일 셈이에요?"


제스퍼는 다친 마법사들을 도와 안전지대로 옮기고있는 엘레멘탈을 찾을 수 있었다. 별들이 지기 시작한 밤하늘 위로 용의 불길이 만든 연기가 어지러이 피어올랐다.


"스승님 기네비어를 끌어올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리지가 아직 저 위에 있어요."


"지금으로썬 불가능해. 이미 너무 늦었어. 차라리 용이 리자드와 함께 이 곳을 벗어나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다."


엘레멘탈이 느릿하게 고갤 저었다. 엘레멘탈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절망적이다. 쏘는듯한 괴성을 지르며 용이 돌아왔다. 성급한 마법사 하나가 주문을 날렸지만 용에게 닿기도 전 픽 꺼져버렸다. 외려 그의 행동은 용의 노기를 부추기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용이 돌풍을 일으키며 불을 쏟아냈고 마법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리자드가 용의 목에 매달린 쇠사슬을 사력을 다해 붙잡고 있었다.


"리지!"


제스퍼의 외침이 닿기도 전, 땅에 배를 끌듯이 날던 용이 날개를 저어 튕기듯 하늘로 솟구쳤다. 어떻게 할 순 없는걸까? 이성을 잃은 용에게서 무사히 리자드를 떼낼 수 있는 방법이 대체 뭐가 있지? 용이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가 통로를 연다. 빠르게 움직이는 상대를 대상으로 통로를 열어본 적은 없다. 게다가 상대는 성체의 용. 만약 빚맞았다가 리자드가 함께 휩쓸릴 수도 있었다. 너무 위험하다. 용과 함께 떨어진 곳에서 리자드가 안전할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문득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번 마기수집기의 오작동으로 제스퍼의 통로가 심계에 중첩된 적이 있었다. 반 이주생물인 제스퍼는 빨려들어갈뻔 했으나 리자드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용은 이주생물이다. 다시 한번 심계에 통로를 중첩시킬 수 있다면?


"마기수집기가 필요해."


오팔! 부르는 소리에 그의 형제가 나타났다. 제스퍼는 무턱 통로를 열어 오팔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아카데미로 빠져나왔다. 한밤의 아카데미는 개미 한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제스퍼는 트래비스의 장비실을 기억하고 있다.


"대체 뭘 어쩌려고?"


오팔이 제스퍼를 붙잡았다.


"한때 여기 교수를 도와 이주생물을 심계로 보내던 일을 했었어. 심계의 마기를 끌어올 수 있느냐가 실험의 목적이었지. 도중에 기네비어의 방해 공작으로 마기수집기가 고장났는데, 그 때 내가 통로를 열었다가 심계의 문이 생성되는 일이 있었어. 당연히 나는 빨려들어갔고, 리지가 붙들어줘서 무사할 수 있었어."


오팔은 어렴풋 제스퍼가 하려는 일을 눈치챈것 같았다. 마기수집기는 아직 천에 싸인 채 그대로다. 마기수집기는 까다로운 장치였고 그것을 만질 수 있는 정비사들 또한 몇 없다. 마기수집기가 포장된 상태 그대로 있는것도 그 때문인듯 싶었다. 마기수집기를 안은채로 과연 통로가 작동할까 걱정됐지만, 그래서 데려온게 오팔이었다. 마석은 가동시키지 않더라도 끝없이 마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이 있었다. 오팔이 옆에서 일정량의 마기만 부여해주기만 한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통로가 열리고, 오팔이 마기수집기를 붙들었다. 제스퍼는 온 신경을 다해 통로를 유지하는데 집중했다. 너머의 문까진 짧은 거리였지만 마기수집기를 가지고 통로를 건너는건 그의 생에 있어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 빠져나왔을 때 용과의 싸움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제스퍼는 엘레멘탈과 마법사들을 모았다. 그는 심호흡을 한 뒤, 제가 하려는 일을 설명했다. 아도라가 모았던 다섯명의 마법사들 중엔 거대한 그럼벨이 내마법사였고, 그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제스퍼의 작전에 귀를 기울였다. 마학회의 마법사들이 공격마법을 퍼붓느라 대열을 형성했다 흩어지는 사이 그럼벨과 다른 마법사들이 그 주위로 귀환 마법진을 준비했다. 마기수집기는 귀환 마법진의 뒤에 놓여졌다. 무엇보다 아도라가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아들을 잡아 죽이려는 마학회의 사람들보다 아들을 구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용이 오는 순간, 마기수집기와 귀환 마법진이 동시에 발동되는 그 찰나 제스퍼는 통로를 열 것이다.


*


간신히 매달려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외쳐도 한번 흥분한 기네비어는 도통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리자드는 용의 갈기에 얼굴을 묻었다.


"제발요. 스승님···."


저 아래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기네비어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는 마법사들 사이, 주위로 익숙한 문양이 빛을 반짝였다 사그라들길 반복했다. 터오르는 동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눈에 익은 장치가 하나 보였다. 사람들이 소리없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공터에 누군가가 위를 올려보고 있다. 제스퍼?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와중 리자드는 그의 목소릴 들었더랬다. 마기수집기와 귀환 마법진. 문득 드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리자드는 제스퍼의 의도를 눈치챘다. 하지만 그의 작전이 성공하려면 일단 용이 땅으로 내려가야했다. 리자드는 심호흡을 한 후 용의 머리 옆으로 손을 뻗었다. 번쩍 빛이 터졌고 갑작스런 공격에 용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리자드는 이를 악물고 주문을 외웠다.


제스퍼와 사람들은 하늘에서 깜박이며 터졌다 사그라드는 빛의 궤적을 발견했다. 하늘로 솟구치던 용이 방향을 틀었다. 등에 매달린 귀찮은 방해꾼을 떨쳐내기 위해 날개를 접고 빠르게 쏘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이에요!"


용이 숲의 길목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오팔이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엘레멘탈과 아도라가 재빠르게 귀환 마법진에 손을 올렸다.


제스퍼는 통로를 열었다.


어그러진 공간이 생기며 날카로운 파공음이 숲을 갈랐다. 마법사들이 이를 악물며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바닥에 납작 달라붙었다. 용이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린양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괴성을 지르며 아무렇게나 불을 내뿜었지만 불꽃은 표적을 맞추기는 커녕 역풍에 산산이 흩어졌다.


금방이라도 넘어질것처럼 몸이 후들거렸지만 제스퍼는 버텼다. 머잖아 끈질기게 제스퍼를 쫓아다녔던 검은 팔이 통로 너머로 나타났다. 사위를 더듬이던 팔이 용을 발견하고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용이 비명을 지르고 몸을 뒤틀었지만 통로는 쉬이 용을 놔주지 않았다. 나무가 휘청거리며 몸을 굽히고 일대의 모든 것들이 엄청난 풍압에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용을 이루고있던 단단한 비늘들이 눈처럼 흩날려 통로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머잖아 빛과 함께 그 중심부에서 기네비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팔이 기네비어를 끌어당겼다. 그가 통로에 가까워지는 순간, 리자드가 뛰어들어 그를 붙잡았다. 쨍하는 소리와 함께 마법진을 붙들고있던 엘레멘탈과 아도라가 동시에 튕겨나갔다. 제스퍼는 얼른 통로를 닫았다.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엉망이었다. 쓰러진 마법사들이 잔해와 함께 나뒹굴었고 거대한 바퀴가 훑고 지나간듯 땅은 깊이 패여 처참한 상흔을 드러냈다. 불에탄 덤불 한가운데 기네비어가 리자드와 함께 쓰러져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리자드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마법사들 틈바구니에 빠르게 오고있는 제스퍼를 발견했다. 리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제스퍼가 그녀를 껴안았다. 마법사들이 몰려들고 아도라가 아들에게 달려갔다. 뒤이어 기네비어가 깨어났다. 아도라가 아들의 손을 붙잡고 쉼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네비어의 눈길이 제스퍼와 리자드 두 사람에게 멎었다. 전해지는 가슴의 통증에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


공기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고 불탄 나무들로 숲 전체가 거뭇거뭇했다. 기네비어의 성은 삼분의 일이 무너지고 불탔다. 링곤인들은 꼼짝없이 마학회의 마법사들에게 호송됐다. 호루스는 어느새 결박을 풀고 사라졌다. 오팔이 의심스러웠지만 제스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리자드가 무사하니 그걸로 됐다.


숲 위로 하늘을 분홍색으로 물들이며 동이 터왔다. 시종이 달려온것도 그때였다.


"기네비어 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두 사람이 방으로 갔을 때 기네비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도라는 리자드와 제스퍼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는 깊은 감사가 자리했다. 아도라가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자 이제 넓은 방 안엔 세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다 내 실수였어."


기네비어가 말하는 것도 힘이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좀 더 경계했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었다. 원하는게 있다면-"


"그냥 솔직히 말하시면 돼요. 고맙다 미안하다는 그 말이 그렇게 어려워요? 원하는건 없어요. 그저 스승님이 쾌차하셨으면 좋겠네요. 단지 그 뿐이에요."


리자드가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기네비어는 입을 다물었다. 제스퍼와 기네비어의 눈이 마주쳤다. 한참이 지나 그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미안했다."


두 사람은 그가 휴식을 취할수 있도록 밖으로 나왔다. 집사와 대화하고있던 아도라가 두 사람을 보자 말을 끊고 달려왔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도라는 옷을 갈아입었다. 은자수가 덧대진 우아한 보라색의 실크 드레스에 은발의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올린 그녀는 영락없는 귀부인이었다. 슬픔과 피곤으로 혼탁했던 그녀의 눈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아들은 무사히 돌아왔다. 이제 남은건 마학회에서의 소환과 조사였다. 앞으로 아도라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했다.


"고마워.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기네비어는 무사치 못했을거야.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하마."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 스승님은 완전히 나은건가요? 전에 만났을 때 스승님은 자신이 죽어간다고 얘기했어요."


오. 아도라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어렸다.


"기네비어는 죽지 않을거야. 기네비어가 괴로워했던건 그 애의 핏줄 때문이었으니까. 기네비어의 반은 사람이고 반은 링곤인이니까 말이지. 기네비어가 겪은건 일종의 성장통이었을거야. 본인은 싫어하겠지만 링곤인으로서의 성향에 한발짝 더 다가간거지. 사술가는 그 혼란을 이용한거야."


아도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스퍼, 난 도저히 너와 엘레멘탈을 볼 면목이 없구나. 정말 미안하고, 또 고맙다. 진 빚이 너무도 많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일이 마무리되기 무섭게 엘레멘탈은 뒷수습을 위해 오팔과 함께 돌아갔다. 죽진 않았지만 부상을 입은 마법사들이 많았고 그들을 호송할 인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스퍼는 간단하게 답했다.


"스승님께 안부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주면 정말 고맙겠구나."


아도라가 못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그녀에게 뭔가를 요구하는건 엘레멘탈이 바라지 않을터다. 오늘 하루 너무 큰 일을 겪었기에 제스퍼도 피곤함 외에 딱히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콧대높은 기네비어에게서 미안하다는 말까지 듣지 않았는가. 그것이면 충분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방해도 없는 성의 정원으로 빠져나왔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그을음과 재의 냄새가 뒤섞여있었다.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불씨로 숲의 전체가 뿌얬다. 정원수 옆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리자드가 멍하니 말했다.


"너무, 너무 정신이 없네요."


리자드의 모습은 엉망이다. 하늘로 뻗은 머리칼은 금방이라도 날아갈것 같았고 옷과 얼굴은 검댕 투성이였다. 제스퍼는 옷소매로 리자드의 얼굴을 닦았다. 리자드는 가만히 그의 손길을 받을 뿐이다. 문득 궁금함이 들었는지 그녀가 질문했다.


"그런데 난 어떻게 찾은거예요?"


"거기 관해서라면 일단 사과해야할게 있어요."


뜬금없는 고백에 리자드가 눈을 크게 떴다. 오팔과 호루스의 접점, 더 일찍 사실을 말하지 않은 점, 나아가 사과와는 별개로 기네비어와 있던 일까지 제스퍼는 구구절절 늘어놨다.


기네비어는 일전에도 용으로 변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닌 학자로서의 호기심이 빚어낸 참상에 불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다. 엘레멘탈 또한 묵과했었고, 결국 그는 제자를 돌려놓기 위해 제 몸을 희생해야했다. 스승이 상처입게 됐단 이유만으로 제스퍼는 기네비어에게 악의적인 틀을 뒤집어씌우고 있었던 것이다. 리자드는 놀란듯 했지만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까지 털어놓게 된걸까? 그건 제스퍼가 오늘 기네비어에게 얼마간의 측은함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엔 리자드의 존재가 컸다. 기네비어는 리자드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리자드는 결국 제스퍼를 택했다. 그 도취감이 기네비어가 저질렀던 모든 죄들을 사해줄 수 있는 동력이 됐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추하고 못난 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제스퍼는 리자드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참을 수 없이 기뻤다.


리자드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마기수집기를 생각한건 대단한 일이었어요. 결국 제스퍼가 아니었다면 스승님도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었을거고 나도 무사하지 않았겠죠."


"리지."


진지한 제스퍼의 목소리에 리자드가 긴장했다. 눈과 눈이 마주쳤고 뭔가를 짐작한듯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과 계속 있고싶어요.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항상 옆에 있고싶어요. 계약상의 가짜 연인이 아닌, 진짜가 되고싶어요."


"너무해요. 이렇게 진이 빠진 순간에, 이제 더 이상 뭐가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안심한 순간에 그렇게 사람을 놀래키면···."


리자드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제스퍼는 긴장했다. 리자드가 쥐똥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제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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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느린 밤 3 18.06.27 66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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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느린 밤 18.06.23 82 1 19쪽
14 마학모 18.06.20 96 1 25쪽
13 전야 18.06.19 102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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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불쾌한 만남 18.06.17 103 1 15쪽
10 정체성 18.06.16 80 1 14쪽
9 역류 18.06.16 210 1 13쪽
8 움틈 18.06.13 93 1 16쪽
7 교수의 제안 18.06.12 119 1 11쪽
6 움직임 18.06.09 130 2 17쪽
5 어떤 사실 18.06.08 96 2 17쪽
4 첫걸음 18.06.06 90 2 22쪽
3 진의 18.06.03 114 2 19쪽
2 만남 18.06.02 84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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