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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988 님의 서재입니다

제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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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로즈988
작품등록일 :
2018.06.01 22:23
최근연재일 :
2018.07.03 11:36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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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
추천수 :
29
글자수 :
170,468

작성
18.06.18 18:39
조회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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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3쪽

일렁임

DUMMY

흉내쟁이 도마뱀은 3급에서도 특군으로 분류되는 종으로, 어른 팔뚝만한 크기에 소량의 마기만 있다면 어디서나 잘 사는 특이 생물군이다. 민간인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이주생물중 하나로 유명했는데, 주로 흉내쟁이란 이름답게 모습을 바꿔 사람들을 놀래키기 일수였다.


'사무실 안에 가고일이 있어요.'


긴급한 호출에 장비를 챙겨 출동했을 때, 현장은 난리도 아니었다. 온 직원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책상 뒤에 숨어있었고 집어던진 서류철과 종이들로 내부는 난장판이었다. 한 손에 낫을 쥐고 자기 몸보다 큰 날개를 단 가고일이 서류 더미들 위에서 겅중겅중 뛰어다니고 있었다.


시내 한복판 5층의 오래된 건물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는데, 제스퍼는 들어오면서 건물 머리에 앉아있는 가고일과 성자들의 석상을 봤었다. 가고일은 그 석상이 살아난것 같은 모습을 하고있었다. 다른게 있다면 건물에 올라앉은 가고일은 커다란데 비해, 눈 앞에 뛰어다니는 생물체는 끽해야 중형견 크기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음, 언제부터 이런 현상이 나타난건가요?"


"건물 안에서 가고일이 돌아다닌다는 목격담은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모습을 드러낸건 오늘 아침이 처음이에요."


건물은 통째로 법률, 법인 사무소였고 가고일이 나타난건 상담이 주로 이뤄지는 3층이었다. 앉아있는 사원들 사이로 유유히 나타난 가고일. 벌어졌을 소란은 익히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조심하세요 걔 날붙이를 들고 있다고요."


캐비넷에 올라간 여직원 중 하나가 리자드에게 소리쳤다.


흉내쟁이 도마뱀이 왜 모습을 바꾸는가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카멜레온이 몸 색깔을 바꾸듯 자기 보호를 위함이라는 설이 가장 그럴듯했지만 가리는것 없이 닥치는대로 변하는걸 보면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게 맞는것 같았다.


리자드는 잠자리 눈같은 커다란 고글에 한 손엔 특수한 소재로 만들어진 뜰채, 등에는 커다란 마기 분무기를 짊어진 모습이었다. 마기수집기가 고쳐질 동안 리자드는 원래 하던 일인 이주생물 퇴치가로 복귀했다.


가고일이 리자드를 보고 입을 쩍 벌리며 위협했지만 경험 많은 내마법사에겐 통할리가 만무하다. 리자드가 잽싸게 뜰채를 휘두르자 가고일이 공처럼 튀어올랐다. 직원들이 비명을 질렀고 내부는 다시 한번 아수라장이 됐다.


"제스퍼 잡아요!"


퇴로가 막히자 가고일이 멈칫했고, 리자드가 놓치지 않고 뜰채로 가고일을 붙잡았다. 우리에 갇히기 무섭게 가고일은 원래 모습인 작은 도마뱀으로 돌아갔다. 문제가 해결됐지만 사원들은 영 탐탁치않은 얼굴이었다. 그 때 복도에서 째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천칭을 든 석상이 쿵쾅거리며 사람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법률 사무소에 소환된 흉내쟁이 도마뱀은 한두마리가 아니었다.


흉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벽시계같은 무생물부터 무슨 동물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생물체까지 각양각색의 종류들이 지적이고 조용해야할 건물을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다.


"난 사오층을 맡을게요. 제스퍼는 일이층을 돌아보고 중앙 홀에서 만나요."


도저히 안되겠는지 리자드가 제스퍼에게 장비를 하나씩 쥐어주고는 위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제스퍼는 멍하니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기네비어에 대해 할 얘기가 있었지만 리자드도, 제스퍼도 딱히 그 이름을 꺼내지 않고있는 실정이었다. 리자드는 머리가 복잡한것 같았고 제스퍼는 혼란을 가중시킬 생각은 없었다. 다만, 어째선지 그녀가 기네비어와 만난 이후로 제스퍼는 조금 가슴이 답답해졌다.


기네비어가 함께 마학모에 가자고 했다는 것까지도 리자드는 덤덤히 털어놨다. 애초 리자드가 제스퍼를 고용한건, 기네비어에게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일단 사과를 받은 지금, 더 이상 제스퍼가 그녀의 곁에 있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생각은 자연스레 범위를 넓혔다. 만약 만남이 마학모까지 이어지더라도 마학모가 끝나면 둘 사이는 어떻게 되는걸까? 단순한 고용자와 고용인의 사이로 막을 내리는걸까?


계단 아래로 법학책을 들고있는 석상이 나타났고 제스퍼는 통로를 열어 이주생물을 심계로 보내버렸다. 통로에 휩쓸린 사건 이후 불안정했던 것도 잠시, 힘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애초 아무것도 몰랐던, 그저 그대로 스쳐지나는 사이로 돌아갈 순 없을것 같다. 감정은 제스퍼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 너무 커져버렸다. 제스퍼는 리자드가 기네비어와 만나지 않았으면 했다.


얼마나 이주생물을 쫓아다녔을까? 중앙홀의 흑단나무 게시판 앞에 리자드가 서있는게 보였다. 제스퍼는 충분히 생각한 후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는 망설임없이 리자드에게 향했다. 붙잡는 손길에 리자드의 몸이 흔들렸다.


"리지, 난 당신이 이대로 기네비어에게 가버리는건 싫습니다. 마학모까지 나와 있어주세요. 그리고 될 수 있다면-."


제스퍼를 쳐다보는 리자드가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보니 고글 너머 얼굴이 희뿌얬다. 뜰채도 장비도, 정교한 장치들은 하나같이 어린애가 그린 것처럼 두루뭉술한 모양을 하고있었다. 리자드의 모습을 하고있는건 바로 흉내쟁이 도마뱀이었다. 제스퍼가 손을 떼기 무섭게 리자드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훅 꺼지더니 도마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놀란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멈칫했다.


뒤돌기 무섭게 한팔엔 도마뱀이 가득찬 우리를, 다른 팔엔 뜰채를 잡고있는 진짜 리자드가 거기 서있었다. 고글 아래로 그녀의 얼굴이 불그죽죽했다. 도마뱀이 후다닥 제스퍼의 발 밑으로 도망쳤다. 어차피 리자드에게 한 말이다. 어떻게 듣건 상관없는 말임에도 창피한 기분이 드는건 왤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분기점의 오후, 시드 거리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묘한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노을이 깔리며 거리가 분홍빛에 잠기고 거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번잡함이 뒤섞여 들뜬 분위기를 만들었다. 보수를 받고 돌아오는 길엔 어색한 침묵만이 가득했다.

볼을 긁적이며 리자드가 말을 꺼낸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어차피 스승님의 사과는 일방적인 거였어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는데 옳타꾸나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고요. 음, 그러니까-"


리자드가 머뭇거렸다.


"마학모까지 나와 함께 해줬으면 해요. 제스퍼."


제스퍼가 눈을 가늘게 뜨자 리자드가 얼른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그 다음에도요. 작게 중얼거렸다.


"아, 물론 제스퍼가 합의 하에 고용하는 방식으로 해서 말이죠."


리자드가 횡설수설하는 것만큼이나 제스퍼도 정신이 없었다. 어쩐지 목이 간질거렸다. 불쾌한 느낌이 아닌 사각거리는 간지러움.


수탉 풍향계가 달린 저택에 도착했을 때 편지 하나가 와있었다. 익숙한 글씨체가 봉투에 휘갈겨져 있었는데, 발신인은 트래비스로 안에 든건 소개파티의 초청장이었다. 리자드가 뭔가 생각난듯 소리를 냈다.


"맞다. 그러고보니 트래비스 교수님의 자제분이 이제 막 아홉살이 됐을거예요."


"트래비스 교수한테 자식이 있었습니까?"


제스퍼는 조금 놀랐다. 금시초문이다.


"네. 공식적으로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올리바라는 아름다운 반려자가 계세요. 그 사이에 의젓한 아들이 하나 있고요."


카밀에는 특이한 풍습이 하나 있었다. 소개파티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소개파티는 오래 전 전염병으로 영유아 사망률이 높을 시절, 무사히 아홉살을 넘긴 것을 축하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부모는 아이가 아홉살이 되기 전까지 남들에게 소개하지 않는다. 세상이 많이 좋아진 지금은 어릴때 한번 친인척과 지인들에게 소개를 하고, 아홉살에 다시 한번 성대하게 파티를 여는 것으로 끝냈다. 아이의 행복을 기원하는 자리이지만 실은 가문의 대외적 행사나 다름없었다.


"초대장이 두장이네요. 같이 가줄래요? 괜찮다면 말예요."


리자드가 수줍게 물었다.


*


기네비어는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았다. 세면대 위로 떨어진 검은 피가 물과 섞여 하수도로 흘러들었다. 거울 속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피부에는 비늘이 돋았고 손은 짐승의 날카로운 발과 닮아있었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욕조에 몸을 기댔다.


발작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근래 들어 발작의 횟수가 잦아지고 있었다. 변이 마법의 부작용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의 몸 속에 흐르는 링곤족의 피가 원인이라 할 수 있었다.


인간과 링곤인의 혼혈이 무사히 성년을 맞을 확률은 끽해야 절반도 안 됐다. 링곤인의 말에 따르면 고고한 그들의 피가 천박한 하등종족의 피가 유전되는걸 막아서 그런다지만, 실상은 그냥 링곤인들이 혼혈아들을 배척하기 때문이었다.


링곤인들은 원래 이 땅의 생명들이 아니다. 그들의 선조들이 차원문을 열어 신세계인 이 땅으로 건너온 것으로, 본래라면 이방인에 속했다. 링곤인들의 정체성을 따지자면 정령 혹은 나무라 할 수 있었다. 한명의 수장은 뿌리고, 일족들은 그 위로 무수히 뻗어나간 가지와 같았다. 막강한 힘을 가진 뿌리인 수장이 없으면 개인의 링곤인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아브네얀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기네비어가 살 수 있었던건 그의 어머니가 링곤가의 공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백년을 버티고 버텼는데, 아무래도 인간은 링곤인의 피를 이길 수 없는 모양이다. 기침을 터뜨리기 무섭게 왈칵 핏덩이가 쏟아졌다.


본래라면 성인이 되는 즉시 아브네얀이 주관하는 성인식에 참가해 그의 권속 아래 들어야 할 터이지만, 기네비어는 끝끝내 고집을 꺾지않았다. 혼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아오며 모진 수모와 무수한 목숨의 위협을 받은 그다. 그런데 어떻게해서 그런 살인자들 아래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어머니인 아도라는 애가 타 몇번이고 그를 찾아 왔지만, 기네비어는 끝끝내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정진해온 마도의 길이다. 하지만 마도는 링곤의 속박을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는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늪도마뱀과 빙색조, 바다용의 모습을 거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눈처럼 흩날리며 반짝이는 비늘이 서로 부딪치고 깨져 스러지는 모습이 그와 같았다. 다른 생물의 모습을 입으면 그나마 상태가 좀 나아졌다.


밖에는 집사와 시종들이 열을 지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의 궁전처럼 드넓은 저택과 으리으리한 장식품들, 모두 그가 일궈낸 결과였다. 그러나 요즘 그는 그 어떤 것에도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애초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던가? 하나같이 모두 부질없는 것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호루스 경께서 오셨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조아려 전했다. 마학모의 일원들. 마도의 끝에 올라섰다 생각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건 허울좋은 껍데기들 뿐이었다.


"기네비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루스가 기네비어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노처럼 창백한 얼굴에 날카로운 검은 눈, 삐죽삐죽 뻗은 머리칼은 이국적인 녹색이었고, 자잘한 보석으로 장식된 딱 달라붙는 벨벳 소재의 드레스는 그녀의 사술가적인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가 붙잡으라는 듯 한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길게 길어 칠을 한 손톱이 샹들리에의 불빛에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기네비어가 예의상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자 호루스가 깔깔거리며 거슬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학모의 중요 인물이라는 점은 둘째치고, 기네비어가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것 같은 이 여자와 어울리는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반대편 대륙에서 건너온 여자는 잊혀진 고대의 주술이나 술법에 도가 튼 위인이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궂은 날씨의 바다처럼 어둡게 반짝이는 빛덩어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부리는 심연 저편의 정령이었다.


아브네얀은 언제까지고 기네비어가 무릎을 꿇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목숨 따위는 신경쓸 바가 아니겠지. 호루스라면, 어쩌면 판도를 뒤엎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얌전히 죽을거라면 오산이다. 기네비어는 죽더라도 링곤족을 끌고 갈 것이다. 도저히 상상은 안가지만 아브네얀이 공포에 질릴 것을 생각하니 속이 시원해졌다. 그러나 가슴 저편에 찝찝하고도 희미한 미련같은게 남아있었다.


정말 이대로 끝내고 싶은가? 그의 일생은 결국 혈족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을까?


'스승님.'


변덕인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어쩐지 리자드의 웃는 얼굴이 생각났다. 그녀가 보고싶어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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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느린 밤 5 18.06.30 64 1 15쪽
19 느린 밤 4 18.06.29 86 1 10쪽
18 느린 밤 3 18.06.27 66 1 10쪽
17 느린 밤 2 18.06.26 92 1 10쪽
16 느린 밤 1 18.06.24 123 1 23쪽
15 느린 밤 18.06.23 82 1 19쪽
14 마학모 18.06.20 96 1 25쪽
13 전야 18.06.19 102 1 17쪽
» 일렁임 18.06.18 68 1 13쪽
11 불쾌한 만남 18.06.17 103 1 15쪽
10 정체성 18.06.16 80 1 14쪽
9 역류 18.06.16 210 1 13쪽
8 움틈 18.06.13 93 1 16쪽
7 교수의 제안 18.06.12 119 1 11쪽
6 움직임 18.06.09 130 2 17쪽
5 어떤 사실 18.06.08 96 2 17쪽
4 첫걸음 18.06.06 91 2 22쪽
3 진의 18.06.03 114 2 19쪽
2 만남 18.06.02 84 2 9쪽
1 방문 18.06.01 160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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