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로즈988 님의 서재입니다

제스퍼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완결

로즈988
작품등록일 :
2018.06.01 22:23
최근연재일 :
2018.07.03 11:36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2,292
추천수 :
29
글자수 :
170,468

작성
18.07.03 11:33
조회
79
추천
1
글자
24쪽

고모

DUMMY

주말, 이른 아침의 꽃시장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수국과 테레지아, 대가 부러질듯 꽃송이가 풍성한 외국장미, 이름도 모를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꽃들이 전부 모여있는 이 곳은 공원처럼 호젓하진 않더라도 색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꽃을 구경하러 온 이들중엔 리자드와 제스퍼 같은 연인들도 몇몇 보였다.


제스퍼가 입을 맞추자 그녀는 피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을 붉혔다. 리자드는 화답으로 깍지낀 손을 더욱 더 세게 붙잡았다.


처음 얼마간 제스퍼는 자신이 그녀와 연인 관계가 맞는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성에서의 뒷수습을 하고 이주생물 퇴치가로 일하는 동안 제스퍼는 자신이 다시금 리자드의 조수로 들어간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리자드는 바빴고 얼마간은 제스퍼를 피하는듯 했다. 결국 그게 부끄러움 때문이란걸 알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쑥맥이란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진짜로 누군가를 사겨본 적도 없었을줄은. 리자드는 연구를 하느라 바빴다고 둘러댔지만, 제스퍼는 그게 리자드의 괴랄한 미적 감각과 기네비어의 도가 넘은 참견이 빚어낸 결과라는걸 잘 알았다.


리자드는 보라빛의 수국과 장미 몇송이를 꽃다발로 만들어 받았다. 꽃을 들고있는 그녀의 모습에 제스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모는 꽃을 좋아하셨어요."


하루 왠종일 집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낼수도 있는걸 아침 일찍 꽃시장에 나선 이유는, 다름아닌 리자드의 가족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 제스퍼가 그간 깜깜하게 잊고있던 이름이다.


듣기로 리자드의 부모는 그녀가 아주 어릴적 세상을 떠났다.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는 그런 그녀를 거둬 키워준 세상에 하나뿐이 없는 그녀의 가족이었다. 긴장이 안된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날카로운 녹색의 눈에 폭포수같은 검은 머리칼, 제스퍼는 깐깐하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여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꽃을 사는 목적을 달성한 두 사람은 도시 외곽을 순환하는 지상 전차에 올랐다. 도착한 곳은 종착역의 라몬 공동묘지였다.


제스퍼는 조금 당황했다.


간밤 내린 비로 공기는 차가웠고 장미목의 잎사귀는 이슬로 촉촉히 젖어있었다. 주말을 맞아 추모를 하러 온 참배객들로 묘소는 붐볐지만 대체로 평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리자드는 익숙하게 묘비길 사이를 지나 안쪽으로 걸어갔다.


제비꽃이 장식돼있는 어느 묘석 앞에서 리자드가 멈춰섰다. 780-832 기엘 오펜하이머 경과 두넷사 펭 오펜하이머의 장녀이자 희대의 마법사인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 여기 묻히다. 리자드가 묘비 위에 꽃을 내려놨다. 제스퍼는 말문이 막혔다.


"고모 저 왔어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잠깐만요 리지. 고모님이··· 돌아가신 분이었습니까?"


제스퍼의 물음에 리자드가 의아한듯 그를 올려봤다.


"네, 지병이 있으셨거든요. 뭐, 본인은 그 쯤이면 오래 살았다 하셨지만요. 거의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분이셨어요. 제가 세살배기 때부터 맡아 키워주셨으니까요. 좀 까다롭고 엄격하긴 했지만,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건 거의 고모 덕분이에요. 조금만 더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텐데. 그랬다면 스승님과 엄청 싸웠을걸요."


그렇담 인력사무소에 찾아온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묘석의 주인은 꽤 나이가 있는 중년의 여자였다. 그러나 엘레멘탈의 말 속에서 그녀는 젊은 여인으로 묘사됐었다.


"고모님이 혹시 흑발에 녹색눈을 하진 않았나요?"


"맞아요 미인이셨죠. 잠깐, 근데 제스퍼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제스퍼는 이 사실을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제스퍼의 머뭇거림을 감지한 리자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스퍼?"


"내가 리지의 집에 간건, 먼저 리사경의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에요."


"네? 내 광고를 보고 찾아온게 아니라요? 잠깐만, 말도 안돼요. 고모는 6년전에 돌아가셨다고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의뢰를 해요?"


리자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나쁜 농담을 들은것처럼 리자드의 얼굴이 파랬다. 혼란스럽긴 제스퍼 또한 마찬가지다.


"리사경이 직접 찾아와 의뢰를 남기고갔고, 스승님이 그 의뢰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리사경이 찾아왔을 때 집을 비우고 없었거든요. 내가 리지의 집에 찾아간것도 그 의뢰 때문이었어요."


"말도 안 돼요. 그럼 고모가 어딘가에 살아있단 말예요? 고모는··· 고모는 진작 돌아가셨단 말예요."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되는 장난이란 말인가. 그러고보니 급한 일이 있을 때 통 찾아오지 않은것도 그렇고 리자드가 언급하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되돌아보면 이상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


인력사무소에 왔을 때 오팔은 밖에서 빨래를 털고있던 중이었다. 그가 동생을 발견하자 높게 휘파람을 불었다.


"좋겠다 누구는 챙겨주는 사람도있고 나는 이렇게 외로워 죽을것 같은데."


오팔의 짓궂은 놀림에 뒤 따라오던 리자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오팔과 시시덕거릴 여유는 없다. 오팔 또한 뭔가 심각한점을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 경에 대해서에요."


심각한 분위기 아래 모두가 테이블에 둥글게 모여앉았다. 기계기사 티티가 차를 내왔고 찻잔이 식는 동안 엘레멘탈은 리자드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엘레멘탈이 고갤 끄덕였다.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 의뢰를 건 사람이 맞나요?"


"맞아. 의뢰를 건건 리사경이야. 검녹색 모슬린 소재의 드레스에 긴 검은 머리카락, 녹색의 눈에 손가락에 에메랄드 반지를 낀 여자였지. 나잇대는 젊어보였어. 얼핏 보기로 사오십대로 보였으니까. 인상깊었던건 비가 오지 않는데도 리사경이 우산을 들고있었다는 점이야. 가만, 생각해보니 옷차림도 계절과 맞지않게 덥게 입고있었군. 자신을 리사경이라 불러달라고 했어. 경이란 호칭에 유독 강조를 하더군. 어때 리사 경이 맞아?"


"···고모가 맞아요."


"의뢰는 간단했어. 리자드 아서 오펜하이머라는 사람을 돌봐줄것, 거기다가-"


엘레멘탈이 낡고 구겨진 종이를 리자드의 앞에 내밀었다. 성실할 것, 정직할 것, 겁이 없을것, 눈치가 빠를 것, 심미안적인 눈이 있을 것. 거기엔 리사경이 원하는 바가 유려한 글씨체로 조목조목 적혀있었다. 종이를 든 리자드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녀가 한참만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의 글씨가 맞아요. 하지만 고모는 돌아가셨어요. 6년 전 장례식을 주관한 것도 저에요. 이게 대체-"


"리사경은 어떤 사람이었지?"


엘레멘탈이 차분하게 물었다. 리자드는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그녀의 가족이 살아있다면 왜 진작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은걸까?


"고모는··· 남들이 보기엔 좀 엄격하고 괴팍하지만 그래도 잔정이 많은 분이셨어요. 오펜하이머의 대부분이 그렇듯 내마법사셨고요. 문제가 있다면 재능은 있으셨지만 이주생물을 인지하지 못하셨다는 거예요. 아마 그 탓인지 다른 마법들에 다방면으로 지식이-"


많으셨어요. 말하면서도 뭔가 걸리는 점을 찾았는지 리자드의 말소리가 서서히 작아졌다.


"고모가 뭔가 장치를 해놓은 걸까요?"


"매개는 다를 수 있어도 나와 같은 마법을 쓴 걸수도 있어. 어떤 사물에 영혼을 심는 일 말야."


"대체 뭐 때문에요?"


모두의 시선이 리자드에게로 향했다. 걸리는게 있다면 하나뿐인 조카의 일이지 않겠는가. 그 사실을 깨달은 리자드의 얼굴이 굳었다.


"고모를 찾아야겠어요. 의뢰를 하는 것 외에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요? 제게 전해달라는 말이라던가 아니면 다른 부탁은요? 대체 고모를 어디서 찾아야하죠?"


"매개마법은 특정한 물건이나 장소에 자신의 일부를 남겨두는 것과 같아. 정령처럼 말야. 평소 리사경이 애지중지 하던 물건이나 편안하게 느끼는 장소같은 곳을 생각해봐라. 리사경은 필시 거기 있을거야."


엘레멘탈에게 급하게 인사를 하고서 리자드와 제스퍼는 집을 나섰다.


"고모는 돌아가신지 오래에요. 만약 고모가 살아있었다면 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은걸까요?"


리자드는 씩씩거리며 언덕을 올라갔다. 고모의 관이 묻히는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그녀다. 고모는 죽었다. 그렇게 알고 보낸 시간이 어언 6년째다. 힘든 일이 있어도, 기쁜 일이 있어도 리자드는 대화를 나눌 이 하나 없이 속으로 삭일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모가 살아있다니? 놀라움과 당혹은 둘째치고 울컥이는 감정이 올라왔다.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는 참으로 무덤덤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병상에서 울먹이는 조카를 보고도 끝까지 살가운 말 하나 안도가 되는 말 하나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


"만약 그렇다면 난 6년간 고모를 방치한게 돼요."


리자드의 눈시울이 붉었다.


"리사경이 리지의 앞에 못나타난건 분명 어떤 사정이 있을거라 생각해요. 같이 고모를 뵈러가요."


"일단 스승님께 들러야겠어요."


"기네비어에게요?"


뜻밖의 이름에 제스퍼가 멈춰서자 리자드가 고갤 끄덕였다.


"스승님이 오펜하이머 저택의 열쇠를 갖고있거든요."


등 뒤로 통로가 아득한 울림을 뱉으며 사라지고, 눈 앞에 기네비어의 불탄 성이 나타났다. 복구되고있는 중이었지만 아직도 부러진 나무며, 가맣게 탄 석벽이며 그 날을 떠올리게 하는 흔적들이 많았다.


서고에서 업무를 보고있던 기네비어는 리자드의 등장에 동요를 금치 못했다. 이내 제스퍼를 보자 그는 언제그랬냐는 양 평정을 되찾았다. 부옇게 내리쬐는 한낮의 빛 너머 어둠 속에 그가 앉아있었다. 왜 오펜하이머의 집을 안 팔고 그대로 뒀을까? 답은 뻔하다. 기네비어는 리자드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던게 분명했다.


"리자드 무슨 일이지?"


피곤한듯 미간을 매만지며 기네비어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다소 야위고 파리한 모습이긴 했지만 업무를 볼 정도로는 회복된것 같았다.


"오펜하이머 저택의 열쇠를 가지러 왔어요."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기네비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리자드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확인해봐야 할 일이 생겼어요. 아무래도 고모가 살아있는것 같아요. 열쇠를 빌려주세요."


"리사경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인듯 쉼없이 펜을 놀리던 손이 뚝 멈췄다. 기네비어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아래의 수납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쪽의 서랍이 여닫히고 그가 가져온건 낡은 티가 나는 녹색의 벨벳 상자였다. 상자가 열리고 그 안의 은색의 열쇠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열쇠를 받아든 리자드가 안도의 숨을 터뜨렸다.


"감사해요 스승님. 일이 끝나면 다시 가져다드릴게요."


"아니, 그럴 필욘 없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기네비어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의자에 깊숙히 몸을 묻었다.


"어차피 돌려주려 생각하고 있었어. 그 때의 일은 내가 심한게 사실이었으니까. 보금자리까지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리자드는 놀란 얼굴이었다. 기네비어의 의중이 무엇인지 헷갈리는 눈치였지만 이내 의심은 사라졌다.


"아녜요 다시 가져올거예요."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 나는 보관해두고 있을 뿐이니까. 그 곳은 언제든 네가 돌아갈 수 있는 너의 집이야."


인사를 한 뒤 리자드는 급히 서가를 나섰다. 기네비어가 절룩이며 제스퍼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제스퍼는 그가 할 말이 있다는걸 알았다.


"뭐야?"


"용케 제자의 마음을 손에 넣은것 같지만 과연 그게 언제까지 갈까?"


"뭐?"


기네비어가 난간에 삐딱하게 기대섰다. 내리쬐는 햇살이 부신듯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법이지. 그리고 난 시간이 많아."


제스퍼가 멈칫하자 기네비어가 씨익 웃었다. 제스퍼는 기네비어를 잘 안다. 그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헛소리."


제스퍼! 리자드가 아래층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그를 부르자 기네비어가 난간에서 몸을 뗐다. 그는 뱀처럼 느릿하게 서고로 돌아갔다. 기분나쁜 자식.


*


오펜하이머 가문의 저택은 미로 골목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근교의 숲에 위치해 있었다. 앞으로 폭이 좁은 강이 흐르고 뒤로는 삼나무 숲을 두른 저택은 해가 꼭대기가 떠있음에도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키가 큰 담장 위로 넝쿨들이 봉쇄하듯 진을 치고 있었다. 어디선가 까마귀가 울자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음산한 분위기는 리자드가 담장 문을 여는 순간 순식간에 뒤바꼈다.


햇살이 군청색의 지붕을 내리쬤고, 바람이 불때마다 둔덕의 민들레밭에서 나온 솜털같은 씨앗들이 공중에 떠다녔다. 작은 개울 위로 돌다리가 놓여있었고, 붉고 노란 야생화들이 집까지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 가의 저택은 동화속에서나 나올법한 모습을 하고있었다.


"고모는 집을 무척 아끼셨어요. 고모가 어딘가 숨을 곳이 있다면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집이에요. 반대로 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집 밖으로 나설 분은 아니셨죠."


리자드는 어쩐지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녀가 현관문을 열자 문턱에서 부스스 먼지가 떨어졌다. 문과 지붕의 틈새로 거미줄이 크게 쳐져있었고, 엉덩이에 노란색과 검은색 줄무늬를 두른 커다란 거미가 감시를 서고있었다.


저택은 평범했다. 남색과 흰색의 타일이 집안 전체에 깔려있었으며 부드러운 물결 무늬가 새겨진 아치형의 나무 통로가 집안 곳곳을 잇고있었다. 트로피와 증명서가 가득찬, 과시적이다 못해 공격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다른 마법사들의 집과는 달리, 오펜하이머 가는 마법사의 집이라기엔 극히 평범했다. 눈에 띄는게 있다면 책들이 많다는 것뿐. 그 다음으로 많은건 과일과 각종 약용 식물들로 만든 병조림들이었다. 오랫동안 우려내 붉그스름하게 변색된 액체 안의 식물들은 저마다 기괴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리자드가 먼지를 참지 못하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숲 너머로 꾀꼬리가 우는 소리만 들릴뿐 별다른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기억에 의하면 오펜하이머 가에는 숨겨진 공간이 한군데 있어요. 고모는 그 곳을 기록의 방이라 불렀어요. 난 기록의 방이 어디있는지 한번도 본 적없어요. 고모는 내가 오펜하이머 가의 역사를 아는걸 원치 않아하셨거든요."


오펜하이머 가문은 실상 멸문한 것과 다름없다. 리사는 한때나마 빛났던 가문의 역사를 보며 조카가 박탈감을 느끼는걸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수색이 시작됐지만 리사경의 흔적이랄법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리자드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굳이 그걸 입 밖으로 내어 표출하진 않았다.


"이렇게 한번 해보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즈음 제스퍼는 한가지 대안을 생각해냈다. 제스퍼는 옆 방에서 다른 방으로, 안에서 밖으로 통로를 열고 닫았다. 그 과정에서 뭔가 걸리는게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역시나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고 그렇게 포기할 즈음이었다. 거실로 빠져나왔을 때 리자드가 뭔가를 발견했다.


"잠깐만요 제스퍼 그대로 있어봐요!"


벽에 희미한 빛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리자드가 마기를 주입하자 글씨가 더욱 선명한 빛을 띄며 벽 위로 드러났다.


'저택 반경 2킨(km)까진 무사. 그 이상은 안가봤음. 시도해볼것. 4월 16일.'


마기로 글을 써놨단 것은··· 리자드와 제스퍼의 눈이 마주쳤다. 리사의 흔적이다.


"가봐요!"


쪽지들은 보기 쉽게 복도를 따라 늘어져 있었다. 그게 리사의 흔적이라는건 리자드가 더 잘 알았다. 도착한 곳은 계단 아래의 막힌 벽 앞이었다. 안에서 밖으로 튀어나오듯 벽을 따라 마기로 새긴 글귀들이 진을 쳤다.


'리자드가 오지 않았음. 리자드를 찾을것. 어떻게 된걸까?'


'아무래도 하루가 지나면 기억이 소멸하는듯. 주의할것. 오늘은 5월 9일. 미로골목까지 가봤음. 무사함.'


'리자드를 찾아야함.'


그 방대하고도 빽빽한 글귀들에 리자드와 제스퍼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열쇠는 오펜하이머가의 모든 문을 열 수 있댔어요."


리자드가 열쇠를 갖다대자 벽이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작고 낡은 놋쇠손잡이가 벽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리자드가 문을 열자 그 너머로 어두침침한 통로가 나타났다.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 다 알 수 있었다. 기록의 방이다.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금색과 청록색이 도드라진 그 작은 방안엔 격자무늬의 작은 책장에 낡고 두꺼운 오래된 서책들이 진열돼 있었다. 책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새 것이었는데 각각의 표지를 장식하는 제목들은 전부 오펜하이머 가문 사람들의 이름을 따고있었다.


리자드가 머뭇거리다 책장을 열었다. 아무래도 함정같은 것은 없는듯 했다.


"할아버지의 이름이에요."


리자드가 책을 꺼냈다. 안에는 간단한 일대기와 그가 남긴 소소하고도 작은 업적들, 일화들이 쓰여있었다. 리자드는 다시 책을 집어넣었다.


"가문 사람들의 기록을 대대로 책으로 남기는건 우리 가문 전통이라 들었어요. 직접 보는건 이번이 처음이지만요. 고모는 책들을 진작에 처분했다 하셨는데···."


책장의 반대편 벽에는 커다란 거울이 하나 놓여있었다. 전신거울로 리자드가 다가서자 거울 위에 놓인 횃대에 화르륵 소리를 내며 불이 들어왔다. 거울이 반짝이더니 리자드의 발치 아래 천천히 글자가 생성됐다. '리자드 아서 오펜하이머' 제스퍼가 그 옆에 서자 거울 속 그의 모습 위로 의문스런 물음표가 떠올랐다. 리자드가 신기하다는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기한 물건이 많다고 했거든요. 이런게 있을줄은-"


리자드가 거울에 손을 데자 거울이 크게 일렁였다. 놀란 리자드가 손을 뻗자 팔이 거울 너머를 통과했다. 아무래도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의 비밀의 장소 입구는 이 거울인듯 싶었다. 리자드가 반대편으로 발을 뻗었다.


"너머에 바닥이 있어요."


"리지."


제스퍼가 안달이 나 부르자 그녀가 걱정말라는듯 씨익 웃어보였다. 리자드가 몸을 반 통과하기 무섭게 거울이 꿀럭이더니 늪처럼 리자드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제스퍼가 그녀를 붙잡기 무섭게 훅 찬바람이 불더니 방 안의 모든 불이 꺼졌다. 방금 전까지 따듯하고 안락한 분위기의 서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돌풍이 일더니 그의 발 밑으로 깊은 낭떠러지가 생겨났다. 리자드가 손에 힘을 줘 그를 거울 안으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거울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제스퍼 괜찮아요?"


제스퍼의 위에서 리자드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습니다."


다른 쪽은 괜찮진 않지만. 제스퍼가 얼굴을 붉히자 리자드가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사람이 떨어진 곳은 사방이 온통 껌껌한 어느 넓은 공간이었다. 희미한 빛이 들어와 서로의 모습은 어렴풋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 너머로는 어디가 천장이고 어디가 바닥인지 모를만큼 새카만 공간만이 길게 이어졌다.


"여긴 어딜까요?"


리자드가 겁도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제스퍼는 그녀를 붙들고 싶은걸 간신히 참았다. 오펜하이머의 공간이니 자신은 해를 입지 않을것이란게 그녀의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걱정되는건 사실이다. 얼마쯤 움직였을까, 제스퍼는 심연같은 발 밑으로 황금색의 빛 알갱이가 리자드와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걸 발견했다.


"리지 잠깐 멈춰요."


두 사람이 자리에 멈추자 빛 알갱이 또한 발 밑에서 빙글빙글 휘돌았다.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린건 어느 순간이었다. 저 멀리 반짝이는 무언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더니 한떼의 무리가 두 사람을 덮쳤다. 퍼덕대는 소리에 박쥐라고 생각했던건 날아다니는 종이들이었다.


종이 새떼들이 사라지고 새들이 사라진 자리에 뒤뚱거리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창백한 피부에 사방으로 뻗친 수초같은 검은 머리칼, 날카로운 녹색 눈을 한 왠 괴생명체였다. 놀란 리자드가 빽 비명을 질렀고 제스퍼는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괴생명체는 알고보니 액자 안의 그림이었다.


"리지, 리지!"


제스퍼의 부름에 리자드는 그제사 비명을 그쳤다. 그림 아래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체로 리사 고모라 쓰여있었다.


"내가 그린 그림이에요! 고모?"


리자드가 부르기 무섭 액자가 놀란듯 제자리에서 껑충 뛰더니 틀을 달그락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고모! 저 리자드에요!"


액자를 쫓아간 곳에 수많은 그림들이 놓여져있었다. 선이 비뚤하고 칠이 엉망인 어린아이의 그림부터, 어딘가 어색하지만 솜씨가 나아진 그림들까지··· 죄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 한사람의 모습을 담고있었다.


"다 내가 그린 것들이에요."


그러고보니 집 안에 리사의 초상화는 없었다.


"고모는 조금 유별난 분이셨어요. 자신의 모습이 남는게 싫다고 하셨어요. 왜 그런가 싶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가문의 기록에 누가 된다고 생각하셨던것 같아요. 고모는 자신의 모습이 싫으셨던거예요. 나는 그게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고모 몰래 고모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어요."


리자드의 눈에 슬픔이 떠올랐다.


"어느 날 고모가 내 그림책을 발견한 거예요. 그대로 압수되고 말았죠. 어딘가 처분하셨다 생각했는데 이런 곳에 보관하고 있었을 줄은···."


그림들 사이에 빛의 알갱이들이 자잘하게 모여 또렷한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도망친 액자가 빛의 한가운데 서있었다. 리자드가 다가와도 액자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리자드가 손을 대는 순간, 종이 위로 푸른 빛이 터져나왔다.


눈을 떴을 때 달라진건 아무것도 없다. 공간은 어두컴컴했고 그림들은 나뒹굴고 있을 뿐이다. 리자드의 눈에 실망이 감돌았다.


야멸차다고 할만큼 경쾌한 구두소리가 들린건 그 때였다.


은은한 빛을 드리우며 허공에 사람이 나타났다. 보이지 않는 계단을 딛고 녹색 드레스를 입은 리사경이 조카가 있는 아래로 서서히 내려왔다.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리사경의 눈길이 싸늘했다.


"리사 고모?"


"리지."


그녀의 음성이 그렁그렁 울려퍼졌다. 목소리로 전해진다기보다 방 자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였다. 마침내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가 두 사람이 있는 지상으로 내려섰다. 심호흡과 함께 긴 속눈썹이 올라가고 날카로운 녹색 눈이 드러났다. 다다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리사가 조카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세상에 어쩜 넌 바뀐것 하나 없이 그대로구나 리자드 아서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 가의 사람이라면 차림새부터 발라야한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었지. 그런데 이 꼴이 대체 뭐니? 세상물정 모르는 세살배기 애한테 옷을 고르라해도 너보단 잘 입을거다. 게다가 그 얼빠진 표정이라니! 그래, 내 말을 무시하는건 좋아. 하지만 내가 왜 힘 들여서 이런 잔소리를 하는지 조금만 생각을 좀 해보면 알 수 있을거다. 세상 누가 너한테 이렇게 신경을 써줄까."


순식간에 엄청난 말들이 그녀에게서 쏟아져나왔다. 재회는 둘째치고 리자드는 그 잔소리에 넋이 나간 눈치였다.


"가만, 이 남자는 누구지?"


뒤늦게사 제스퍼를 발견한 리사가 수상쩍다는 눈길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확실히 리사는 미인이었지만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인 구석이 있었다. 리사경의 발이 허공에 둥 떠있었다. 엘레멘탈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육신이 존재하지 않았다.


리자드가 딸국질을 시작하자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든것 같았다. 골치아프단 얼굴로 그녀가 한 손을 이마에 얹었다.


"그래, 어떻게든 날 찾긴 찾았구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 공간은 대체 뭐고요? 전 하마터면 고모의 무덤을 파헤칠뻔 했다고요. 고모는 분명 6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제스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3 고모 1 18.07.03 96 1 23쪽
» 고모 18.07.03 80 1 24쪽
21 느린 밤 6 18.07.03 69 1 20쪽
20 느린 밤 5 18.06.30 64 1 15쪽
19 느린 밤 4 18.06.29 85 1 10쪽
18 느린 밤 3 18.06.27 66 1 10쪽
17 느린 밤 2 18.06.26 92 1 10쪽
16 느린 밤 1 18.06.24 123 1 23쪽
15 느린 밤 18.06.23 82 1 19쪽
14 마학모 18.06.20 95 1 25쪽
13 전야 18.06.19 101 1 17쪽
12 일렁임 18.06.18 67 1 13쪽
11 불쾌한 만남 18.06.17 102 1 15쪽
10 정체성 18.06.16 80 1 14쪽
9 역류 18.06.16 209 1 13쪽
8 움틈 18.06.13 92 1 16쪽
7 교수의 제안 18.06.12 118 1 11쪽
6 움직임 18.06.09 129 2 17쪽
5 어떤 사실 18.06.08 95 2 17쪽
4 첫걸음 18.06.06 90 2 22쪽
3 진의 18.06.03 114 2 19쪽
2 만남 18.06.02 83 2 9쪽
1 방문 18.06.01 159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