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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988 님의 서재입니다

제스퍼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완결

로즈988
작품등록일 :
2018.06.01 22:23
최근연재일 :
2018.07.03 11:36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2,288
추천수 :
29
글자수 :
170,468

작성
18.06.23 21:14
조회
81
추천
1
글자
19쪽

느린 밤

DUMMY

"미안해요 제스퍼. 여러모로 신세만 지네요."


리자드가 침대에 눕자 제스퍼는 이불을 그녀의 턱까지 끌어올려줬다. 리자드의 얼굴은 퉁퉁 부었고 눈과 코가 붉었다. 제스퍼는 리자드가 진정될 때까지 그녀의 옆에 머물렀다.


"괜찮습니다."


제스퍼가 손을 들어 조심스레 머리칼을 쓸자 그녀가 눈을 감았다. 이내 방 안에 노곤한 숨소리가 울려퍼졌다. 결국 무슨 일이 있었는진 듣지 못했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은건, 언젠가 그녀가 말해줄거라 생각해서다.


계약은 오늘로써 만료됐다. 제스퍼는 그녀가 깨어날때까지 기다릴까 하다가 작은 쪽지를 남겨두고서 집을 나왔다. 계약은 끝났다지만 아직 그가 확인해야할 게 하나 있었다.


오팔이 집에 돌아온건 자정이 훨씬 지나서였다. 집 안은 고요했고 그는 지친 몸을 얼른 뉘이고만 싶었다. 오팔의 방은 일층 엘레멘탈의 방과 거실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물건들이 정갈하게 정리된 제스퍼의 방과는 달리 오팔의 방은 마법 물건들과 잡동사니가 양대산맥을 이뤘다. 그는 침대에 쌓인 옷가지들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그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얘기 좀 하자."


"으악!"


손이 얼른 다가와 그의 입을 막았다. 어둠 속에 제스퍼가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용히 해."


입술에 손가락을 올린 채 제스퍼가 작게 말했다. 오팔이 고개를 끄덕이자 얼굴을 짓이길듯 압박했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오팔은 손가락을 퉁겨 마법전등에 불을 밝혔다. 제스퍼가 그 위로 물그러미 서있었다. 꺼림칙한 행동에 오팔은 잘게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뭐야?"


"네 손에 관해서 말야."


예고도 없이 제스퍼가 오팔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난투극에 오팔이 발버둥쳤지만 힘으로 제스퍼를 이기기란 불가능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오팔은 제스퍼에게 힘으로 하는건 뭐든 이기지 못했고,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팔은 이내 베개에 머리가 처박혔다. 제스퍼가 무릎으로 등을 찍어 누른 채 잽싸게 오팔의 왼손에 감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읍 으읍! 오팔이 경악해 난동을 부렸지만 별 소용없었다.


붕대가 반쯤 풀리자 손등 위로 불가사의한 문양이 나타났다. 반원 위로 이글거리는 뾰족한 해가 반쯤 떠있었다. 태양은 이교마법의 주요 상징이다. 이교 마법의 수행자들은 수행인의 등급에 따라 태양을 새겼는데, 반쯤 떠오른 해는 미숙함을, 완전하게 떠오른 태양은 그 마법에 통달한 자를 뜻했다. 속박의 인이나 명령의 인이 새겨져 있을것이라 예상한 제스퍼로썬 의외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제스퍼가 진짜 놀란건 그의 형제가 이교 마법에 발을 들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팔의 손 끝이 투명했다.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거기서 자그마한 마기가 쉴새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


"내려와 이 방정맞은 자식!"


오팔이 제스퍼를 퍽소리나게 떠밀었다. 뜻밖의 상황에 제스퍼는 당황을 금할길이 없었다. 그런 그의 시선에 오팔이 욕을 하며 잽싸게 붕대를 감았다.


"어떻게 된거야? 손이 왜 그모양인데?"


"알거 없고 피곤하니까 그냥 좀 나가."


제스퍼가 꼼짝도 않자 오팔이 나가려했다. 제스퍼가 문을 가로막자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난 사라지고 있는 중이야. 됐냐?"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제스퍼가 반 이주생물인 것과는 달리, 오팔은 인간의 기질이 훨씬 더 강한 편이었다. 제스퍼는 마법은 못썼지만 통로는 열 수 있었고, 오팔은 마법은 써도 심계와 소통하는 일에는 서툴렀다. 사라지더라도 제스퍼가 사라져야함이 맞다. 하지만 제스퍼가 염두했던 상황은 애꿎게도 형제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제스퍼의 표정을 본 오팔이 인상을 찌푸렸다.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항상 그랬다.


"대체 언제부터? 왜 우리한테 진작 얘기 안한거야?"


"반년정도 됐어. 그리고 스승님하고 너한테 말해봤자 뭐가 달라지는데? 이 거지같은 체질이 한순간에 바뀌는게 가당키나 하냔 말야. 이건 이제 내 문제야. 그러니까 얘기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어. 방법을 찾고있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알겠지?"


"그래서 사술가를 스승으로 두고 이교마법을 배우기로 한거야?"


"그 여자는-"


오팔이 설명을 하려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스퍼가 빤히 그를 보고있었다. 오팔의 인상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너 어디까지 본거야? 아니, 이번엔 내가 좀 물어보자. 너 요즘 뭐하고 다니는건데?"


"네가 뭘 해줬는진 모르겠지만 그 여자 기네비어와 얽혀있어."


"뭐?"


기네비어라는 이름에 오팔의 얼굴이 굳어졌다. 일이 벌어질 당시 오팔은 국외로 몇년간 유학을 떠나있던 상태였다. 제스퍼만큼 기네비어와는 접점이 없었지만, 그 이름이 껄끄럽긴 오팔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심히 살폈지만 오팔은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가 한 손으로 피곤한듯 얼굴을 쓸었다.


"나는 마학모에 그 여잘 데려다준 것 뿐이야. 넌 모르겠지만 이교마법에서 선후배간의 관계는 다른 곳보다 중요하다고. 그 여자는 까마득히 높은 대선배고, 내가 마학모 초대장을 받은걸 알고 동행으로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것 뿐이야."


그래서 그 때 제스퍼에게 아는 척을 했던거였다. 더 이상하다. 기네비어는 어지간해선 옆자리에 사람을 대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드레노어 가의 축하파티 자리에서 그는 여자와 함께 움직였었다. 제스퍼는 그녀가 마학모의 고위 인사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초대장이 없어서 오팔을 이용해 마학모에 참가했다는건 결국 그녀가 이쪽 마법계와는 아예 연줄이 없다는 것이었다. 초대장이 필요하다면 기네비어에게 말하면 됐을터인데.


"그래서···."


"어쨌건, 이 일은 스승님한텐 얘기하지 마."


오팔이 단단히 으름장을 놨다. 그는 진심이었다. 제스퍼는 어처구니가 없어 무어라 쏘아붙이려다가 말았다. 멍청한 오팔은 분명 몸의 반절은 없어지고 나서야 심각함을 인지할 것이다. 그의 형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 고집때문에 일을 몇번 그르친 적도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제스퍼 또한 신경쓸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나중에 가서 후회한들 제 책임이다. 제스퍼는 포기했다.


"맘대로 해."


*


다음날부터 냉전이 시작됐다. 오팔은 제스퍼를 보고도 무시하기 일수였고, 제스퍼 또한 그가 뭘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않아야했다. 결국 제스퍼는 오팔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서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오팔은 갑작스레 길을 막은 제스퍼가 황당한 눈치였지만 피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스승님께 말 해.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잖아."


"내가 알아서 해."


"알아서는 형이랑 가장 안 어울리는 말이야."


"웃기시네 언제부터 그렇게 신경을 써줬어?"


오팔이 비아냥거리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오팔은 제스퍼가 멋대로 붕대를 푼 일로 단단히 화가 난듯 했다. 제스퍼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신경써야 할 일은 그 말고도 많았다. 가령 리자드라던가··· 리자드와 기네비어의 일이라던가··· 마차에서의 일같은.


꺅! 아래층에서 작은 비명이 올라왔다. 꺅이라고? 서둘러 일층으로 내려갔을 때 놀란 눈으로 오팔을 보고있는 리자드가 문앞에 서 있었다. 오팔은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의아한 눈치였지만 리자드는 혼란에 잠긴 기색이 역력했다. 제스퍼가 눈 앞에 있는데 아는 체도 안하고 생긴것도 어딘가 미묘하게 다르다. 오팔의 뒤로 나타난 제스퍼를 보고 리자드는 그제사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자드? 여긴 왜 왔어요?"


"그 리자드라고?"


오팔이 동시에 외쳤다. 일이 복잡해지기 전 제스퍼는 얼른 그녀를 데리고 뒷뜰로 나갔다. 리자드는 엘레멘탈이 심어놓은 순이 무성한 교목이며 앉은뱅이 해바라기, 백합, 방울꽃들을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미로골목은 정말 복잡한 곳이네요. 몇번 물어본 끝에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니까요."


"여긴 왜 온거예요?"


말투가 너무 날카로웠나? 리자드가 움찔하자 제스퍼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가 성게 모양의 가방 안에서 주섬주섬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쪽지를 봤어요."


맞다. 제스퍼는 떠나기 전 혹시 몰라 사무소의 주소가 담긴 쪽지를 남기고 왔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제스퍼가 올 생각을 안하자 리자드가 직접 미로골목으로 사무소를 찾아나선 것이다. 오팔과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벌써 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리자드가 머뭇거렸다.


"그··· 도움도 많이 받았고, 무턱 기다리는 것도 예의가 아닌것 같아서 왔는데 아무래도 곤란한 상황이었나봐요?"


"형이 와 있어서요. 금방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어쩐지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다. 제스퍼는 조금 피곤했다. 리자드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저 안에 오팔이 있다고 한들 리자드를 바깥에 이렇게 세워두는건 예의가 아닌것 같았다. 제스퍼는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키가 이미터에 달하는 엘레멘탈과 상대적으로 아담한 몸집에 앞치마를 두른 기계기사2에 오팔까지, 자신에게 쏘아지는 수많은 눈길에 리자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스퍼는 당장이라도 통로를 열어 그녀를 데리고 빠져나가고 싶은걸 간신히 참았다.


"그래, 자네가 오펜하이머 가문의 리자드군."


갑옷 안에서 걸그렁거리며 울리는 목소리에 리자드가 고갤 들었다. 리자드는 낯선 공간에 긴장했지만 침착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엘레멘탈 선생님이시죠? 제스퍼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스승님에 대한 얘기까지 했을 정도면 제스퍼와는 꽤나 깊은 사이이신가봐요?"


제스퍼가 테이블 아래 발을 차자 오팔이 입을 다물었다. 이래서 오팔과 마주하게 하고싶지 않았던거다. 아직까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리자드가 허둥거리며 답했다.


"아, 그건 아니고 제가 제스퍼에게 꽤 많은 도움을 받았거든요. 깜박하고 자기소개를 아직 안했네요. 전 리자드 아서 오펜하이머고, 내마법사입니다. 이주생물을 돌려보내는 일과 아카데미의 실험 보조 일을 병행하고 있어요. 제스퍼에겐 꽤 많은 도움을 받아서요. 제가 오늘 여기 온건···."


리자드가 뭔가에 놀라 말을 멈췄다. 그러고보니 그녀가 왜 여기 왔는지 이유를 듣지 못했다. 아마 여러 할 말이 있으리라.


"그러니까 제스퍼와 재계약을 하고싶어서에요. 저, 가능···할까요?"


어쩐지 자신없는 투였다. 당연히 어느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심층 면접을 하듯 자신을 한가운데 두고 미지의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어느 누가 조심스러워지지 않겠는가. 제스퍼가 신경 쓰여 죽을것 같았다.


"리지,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도록 하죠."


"전 오팔입니다. 제스퍼의 쌍둥이 형이죠."


오팔이 뜬금없이 손을 내밀었다. 냉랭할땐 언제고 제스퍼는 오팔의 태세전환에 어이가 없어졌다. 제스퍼가 뚫어져라 그를 노려봤지만 오팔은 신경도 안쓰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오팔은 리자드를 붙잡아두기로 단단히 마음먹은것 같았다. 리자드가 오팔과 악수를 하며 제스퍼와 오팔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건 그렇고 신기하네요. 제스퍼에게 형제분이 있을거라곤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것도 쌍둥이 형이 말예요."


"그래요? 나에 대한 얘기는 안했단 말이죠? 이상하네 스승님에 대한 얘기까지 했으면서 왜 나에 대해선 말 한마디 안해줬을까?"


왜 그럴까? 왜? 오팔이 동생을 보며 고갤 갸웃거렸다. 제스퍼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계약서를 썼지만 엘레멘탈과 오팔은 쉬이 리자드를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갖은 방정을 다 떨면서 두 사람은 리자드에게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우겼고 착한 리자드는 거절할 수 없었다. 멍청하게 통로를 한번 여닫으면 끝날 일을 왜 이렇게 벌려놓은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와줬다는것은 그 자체로 상당히 기쁜 일이라, 마냥 자신을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리자드 또한 제스퍼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사실 오팔의 문제도 문제였지만 제스퍼는 어떻게 다시 리자드를 찾아야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여기 있으면 하루하루가 되게 재밌을 것같네요."


응접실에 앉아 리자드가 작게 감상을 남겼다.


"억지로 칭찬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아뇨 정말이에요. 왜 억지로 지어내서 말하겠어요? 오랫동안 혼자 살아서 그런지 이런 시끄러움이 종종 부러워질때가 있거든요."


리자드는 진심으로 부럽다는 눈치였다.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와 리자드는 아무래도 별 교류가 없는듯 했다. 그러고보니 리자드에게 리사에 관한 얘기를 통 듣지 못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해서 물어보는건데 오늘 내가 찾아온게 곤란했다면···."


"그렇지는 않아요."


제스퍼가 말 끝나기도 전에 대꾸하자 리자드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후 기계기사2가 두 사람을 데리러왔고 제스퍼는 리자드와 함께 부엌으로 이동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음식이 준비됐다. 오팔이 의자를 빼줬고 리자드가 감사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식사시간은 즐거웠다. 엘레멘탈이 리사에 관해 두서없이 얘기를 늘어놓진 않을지 걱정됐지만, 다행히 스승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식사를 마치고 오팔이 그릇을 정리하자 리자드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은 가서 편하게 쉬고있어요. 어차피 물어볼게 많으니까 말예요."


"어두워지기 전 집에 가는게 좋겠어요 리지. 바래다줄게요."


오팔이 수작을 부렸으나 제스퍼가 차단했다. 제스퍼는 시드거리까지 리자드를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리자드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했고 가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입구까지 갔을 때, 우당탕거리는 큰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부엌으로 가자 오팔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개수대에 간신히 기대있었다. 정리하다 만 접시가 사방에 널려있었다. 뒤따라온 리자드가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괜찮아?"


제스퍼는 얼른 형을 일으켰다.


"괜찮아. 조금 현기증이 일어서."


오팔의 얼굴이 파리했다. 문턱을 나서기도 전 그는 픽하고 의식을 잃었다. 무슨일인가하여 뒤늦게 달려온 엘레멘탈이 상황을 보고 말없이 오팔을 들어 거실 소파에 눕혔다. 기계기사2가 오팔의 손에 감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엘레멘탈이 제스퍼를 쳐다봤다.


"그래, 대체 언제부터 이런거냐?"


스승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으리라. 순순히 오팔의 말을 따라준게 멍청한 일이었다.


"이틀 전에 처음 알았어요."


침침한 실내등 아래 드러난 오팔의 손이 물가에 난 수초처럼 희뿌얬다. 엊그제 봤을 땐 손가락 한마디까지 진행됐던 투명화가 이제는 손등까지 타고 내려와있었다. 새고있는 마기는 한층 더 짙어졌다.


"내 서책을 가져와라."


기계기사2가 그 말에 후다닥 엘레멘탈의 방으로 뛰어갔다. 가죽이 닳고닳아 맨들맨들해지고 안의 종이가 붕 떠 한층 무거워보이는 고서는 엘레멘탈의 스승에게서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마도서로 명맥이 끊겨 쓸 방도가 사라진 고대의 마법진들을 총망라한 술식의 기록서였다.


오팔의 손이 페이지 중간의 진 위로 올려졌다. 엘레멘탈이 마기를 불어넣었고 진을 통해 마기가 오팔에게 주입됐지만 손은 원래대로 돌아올 생각을 안했다. 보다못한 리자드가 페이지 한편에 제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이 마기를 불어넣고 나서야 오팔의 손이 조금씩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아예 사라진 한마디의 손가락은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생체마기가 계속해서 새고있어. 일단 급한대로 손은 써뒀지만 한번 터진 이상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런 일이 생길거야."


"···그럼 어떻게 되나요?"


리자드가 엘레멘탈에게 물었다. 투구 안의 엘레멘탈은 답이 없었다. 대신 입을 연건 제스퍼였다.


"종래엔 사라지겠죠. 오팔 또한 나와 비슷한 체질을 갖고있으니까요."


집으로 돌아갈 때는 놓쳤고 리자드는 다가오는 밤을 고스란히 오팔의 상태를 지켜보며 보내게됐다. 엘레멘탈은 뭔가 생각하는지 내내 투구를 다물고 있었다. 심각해진 분위기에 기계기사2가 조심히 필요한 물품들만 날라줬다.


제스퍼는 마실거릴 내오겠단 핑계로 거실을 벗어났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오팔에게 저런 일이 일어난데엔 아마 그가 마법사라는 요인이 큰 작용을 하는것 같았다. 통로를 여는 것과는 다르게 제스퍼는 아무리 노력해도 통 마기를 다룰 수 없었다.


이주생물은 마기로 이뤄진 응집체. 제스퍼와는 달리 오팔은 인간의 기질이 더 강하다지만 이주생물의 기질 또한 없지않아 있었다. 만약 오팔이 사라지면 그는 어떻게 해야할까. 원수같은 형이고 있어서 좋을거 없다고 생각했던 형이지만 막상 일이 닥치니 끔찍한 기분이었다.


"아가씨는 제스퍼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있는 모양이지."


등잔불이 미미하게 타오르는 거실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젓는 소리만이 부엌에 나직히 울려퍼졌다. 계속해서 말소리가 들렸다.


"아주 우연한 사고였어. 제스퍼의 부모가 산 밑에 터를 지은 탓도 있지만, 하필 그 자리가 이주생물들의 통로였다는게 문제가 됐지. 부부는 처음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문제는, 부인이 임신을 했을 때 생겨났지."


리자드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꼭 쏟아질것만 같을 것이다. 제스퍼는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엘레멘탈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이유없이 부인이 아픈 날이 지속됐어. 그래, 부부도 의사도 원인을 몰랐지만 이주생물이 태아와 감화된거야. 내마법사라면 이런 동화현상에 대해선 들어본 적 있을거야. 목숨에 위협을 느낀 이주생물이 인간이나 동물을 숙주로 삼는 일 말이야. 부부가 마법사에게 찾아갔을땐 이미 너무 늦은 뒤였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쌍둥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그러나 아이를 품는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던걸까. 여자는 죽고말았다. 쌍둥이의 아버지는 아내를 죽이고 태어난,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이주생물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의 진짜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며 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애초 애들이 존재하긴 했던건가? 하지만 죽일 수도 없었음이라.


"두 아이가 내게 왔을 땐, 꼴이 말이 아니었어. 건강하게 키웠지. 둘 다 성격이 극과 극이라서 좀 애먹었지만 말야."


엘레멘탈을 만나기까지 그 오랜시간을 제스퍼는 오팔 덕에 버텼다. 오팔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 푸른 숲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터였다. 아버지란 사람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린 오팔이 그의 손을 잡고 씩씩하게 풀숲을 헤쳐가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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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린 밤 18.06.23 82 1 19쪽
14 마학모 18.06.20 95 1 25쪽
13 전야 18.06.19 101 1 17쪽
12 일렁임 18.06.18 67 1 13쪽
11 불쾌한 만남 18.06.17 102 1 15쪽
10 정체성 18.06.16 79 1 14쪽
9 역류 18.06.16 209 1 13쪽
8 움틈 18.06.13 92 1 16쪽
7 교수의 제안 18.06.12 118 1 11쪽
6 움직임 18.06.09 129 2 17쪽
5 어떤 사실 18.06.08 95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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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의 18.06.03 113 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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