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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988 님의 서재입니다

제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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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로즈988
작품등록일 :
2018.06.01 22:23
최근연재일 :
2018.07.03 11:36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2,291
추천수 :
29
글자수 :
170,468

작성
18.06.01 22:27
조회
158
추천
2
글자
12쪽

방문

DUMMY

주전자가 끓는 소릴 내자 제스퍼는 느릿하게 부엌으로 향했다. 아침의 투명한 햇살에 부엌의 너저분한 모습이 적나라했다. 본래 뒷정리는 깔끔히 하는게 그의 습관이었지만 어제는 그냥 내버려뒀다. 어차피 아침에 치우나 밤에 치우나 별반 다를게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들어드려요 인력 사무소.' 에서 일하는 제스퍼의 하루는 단순했다. 인력사무소라지만 직원이라곤 자신과 또 다른 직원 하나, 사장이자 스승인 엘레멘탈까지 해서 세명이 전부였고 실질적으로 가게의 평수 또한 작았다. 미로처럼 꺾인 골목시장의 한구석에 위치한 인력 사무소까지 오는 사람이란 적었으며, 때문에 제스퍼는 골목 상인들의 자잘한 부탁을 제외하곤 거의 가게에 붙어서 요리를 하거나, 청소나 빨래, 그 외 엘레멘탈의 잡다한 심부름거리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찻물이 우러나는 동안 제스퍼는 잠깐 개수대에 기대 서있었다. 설거지 통의 받아놓은 물에 그의 모습이 비췄다. 스물 여섯, 혹은 스물일곱의 청년은 젊었지만 그는 수십년간을 그 모습 그대로 살아오고 있었다. 어느 순간이 되자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은 제스퍼의 특성으로, 그는 언젠가에 이르러서 나이 세는 것을 멈췄다. 어디까지나 조용히 자라는 나무, 그게 자신에 대한 제스퍼의 소회였다.


팬이 가열되다 못해 연기가 솟아오르자 그는 정신을 차렸다. 요 근래들어 그는 멍하니 있는 시간이 좀 길어졌다. 물론 일이 지루하거나 하단건 아니지만, 어떠한 자극이 없는것 또한 사실인지라 익숙한 반복에 조금은 지쳐버린 것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부엌의 풍경은 단순하다. 작은 창문, 개수대와 조리대, 아궁이, 그 너머 작은 사인용 식탁이 벽에 붙어있었다.


따듯한 찻물 위로 찻잎이 흔들거리는 것을 보며 제스퍼는 창문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봤다. 인력 사무소의 공간은 좀 이상한 축에 걸터있다. 엘레멘탈이 마법사라서 건축물 또한 그의 성향에 영향을 받았는지, 이층짜리 사무소의 창문마다 펼쳐지는 풍경들은 일치감 없이 사뭇 다른 것이었다. 욕실에는 낮은 관목이 무성하게 펼쳐진 축축한 열대 우림이, 부엌에는 일출과 일몰이 반복되는 지대높은 고원의 풍경이 있었으며 스승인 엘레멘탈의 방에는 빛나는 보석들이 박힌 어두컴컴한 동굴의 풍경이 보이곤 했다. 물론 사무소에 방문한 손님들이 놀라면 안되므로 거실과 응접실의 풍경은 손대지 않고 그대로다.


제스퍼는 차를 가지고 스승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주먹을 그러쥐고 문을 두번 두드렸지만 반응은 없다. 제스퍼는 그냥 들어갔다. 수정과 고서들, 지팡이와 마법 잉크, 펜이 가득찬 책상에 엘레멘탈이 코를 골면서 자고있었다. 물론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만이 스승이 이 곳에 있다는 걸 알려줬다. 제스퍼는 찻잔을 말간 보랏빛이 깜박이는 수정 앞에 내려놨다.


"스승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이미 일어나 있었어! 바보같긴. 또 속았구나?"


수정이 깜짝 놀란듯 빛을 깜박였다. 기침같은 웃음이 터질 때마다 수정 안의 보라색 빛이 정신사납게 요동쳤다. 제스퍼는 그러려니 수정을 들어 방 한구석에 잠자고있던 기계기사의 가슴 갑주에 조심스레 집어 넣었다.


기계기사가 고갤 까딱 하더니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의 키는 이미터에 달했고 머리에 양각된 험상궂은 문양으로 심히 위압스러웠으나 제스퍼에겐 그저 스승일 뿐이다.


엘레멘탈이 한번 발을 내딪자 들보에 기사의 투구가 날아갔다. 엘레멘탈이 우왕좌왕하자 제스퍼는 차분하게 투구를 주워 스승의 갑주 위에 고정시켰다.


"스승님 기계기사의 키를 줄이는 것이 좋지 않을런지요."


"안 돼. 난 큰게 좋단 말야."


스승은 그렇게 말하며 기계 기사의 투구 안으로 뜨거운 차를 들이부었다. 갑주 밖으로 차가 새는 일은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구조길래 저 몸으로 먹고 마시는지 도통 알 수 없을 노릇이지만, 마법사의 일은 마법사의 일이려니 제스퍼는 생각하는걸 관둔지 오래다.


"정말 알 수 없는 꿈을 꿨는데 말야. 방금 전까지 그 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금방 사이 까먹었지뭐냐. 어쨌든 오늘은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 제스퍼.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봐라 여기 남은 찻가루도 좋은 징조를 알려주고 있잖니!"


엘레멘탈이 제스퍼의 얼굴에 빈 찻잔을 들이댔다. 찌꺼기가 더럽게 군데군데 묻은게 대체 어떻게 좋은 징조를 내포하는지 몰랐으나 제스퍼는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로써 손님이 안온지 근 두달하고도 삼일이 더 지난 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스승의 기대를 부숴버리겠는가. 또 다른 직원이라면 모르겠으나 제스퍼로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음식은 단출하다 꿀 섞은 버터를 바른 곡물 빵과 과일,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 남은 차가 전부다.


"제스퍼, 너는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마학회에서 편지가 왔는데 오늘이 답장 기일이야. 나는 물론 참석 안할거지만 그래도 아도라에게 예의상 불참하는건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마법 학자 모임, 통칭 마학모는 삼년에 한번 열리는 행사로 겉으론 지식 교류회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마법사들의 사교회나 다름없다. 아도라는 녹진한 금발에 우아하게 늙은 여인으로 한때 마학모의 의장 자릴 꿰차고 있었다. 물론 의장 자리는 오래전 그녀의 거만한 아들에게 돌아간지 오래지만 스승은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일전에 몇번 귀띔한적 있었지만 스승은 듣고싶은것만 골라듣는 속편한 부류로 여전히 의장이 아도라라 믿고있었다.


제스퍼는 굳이 오류를 집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스승에게있어 마법사들의 모임 따위는 별로 중요한게 아니었다. 일찍이 인간을 초탈한 엘레멘탈에게 부대끼며 경쟁하는 마법사의 삶 따윈 진작에 의미없어진지 오래였다. 스승의 의사가 이러한데도 꾸준히 협회에서 편지가 날아오는건, 한 때 엘레멘탈이 그만큼 대단한 마법사였기 때문일터다.


"또 까먹었다느니 멋대로 답장 보내는걸 잊어먹으면 안 된다 제스퍼."


제스퍼의 속내를 읽은 엘레멘탈이 포크를 흔들며 주의를 줬다. 제스퍼는 일전에도 그의 부탁을 무시하고 편지를 버린적이 몇번 있었다. 식사를 마친 엘레멘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명상을 하며 손님 맞을 준비를 좀 해야겠다."


제스퍼는 오늘은 불참의사를 보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덧붙여 더 이상 초대장을 보내지 말라는 얘기도 덧붙여야 겠다고 생각했다.


오전의 햇살은 밝았다. 좁고 가파른 길 위로 꾸역꾸역 올려진 건물들과 미로같이 얽힌 골목 사이에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제스퍼는 미로에도 균등하게 해가 비추는 이 시간대, 오전의 시간대를 사랑했다. 자전거를 탈까 하다가 산책나가는 기분으로 시내까지 걸어서 다녀오기로 했다. 어차피 일찍 사무소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음식점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가게마다 바깥 진열대에 물건들을 쌓기 바쁘다. 파이 장수, 모슬린과 실크 소재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거리는 아침나절부터 북적거렸다.


제스퍼가 들어가자 우체국 직원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로 향했다. 노골적으로 속살거리는 소리에 제스퍼는 못들은 양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우체국에서 제스퍼는 잘생기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훤칠한 키에 곱슬거리는 옅은 모래색 머리칼, 가무잡잡한 피부에 피스타치오 색의 눈동자는 이국적이다 못해 강렬할 정도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오늘 창구에 앉은건 손톱을 붉게 물들인 젊은 여직원이었다. 제스퍼가 편지를 내밀자 그녀는 실수인 척 그와 손을 스쳤다.


"오늘 중으로 보내려고 하는데요."


"요금은 2000카스트에 저녁식사면 되겠습니다."


"네?"


직원의 뒤로 여자들이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노골적으로 입술을 모았다. 그녀의 얼굴이 붉디 붉었다.


"저녁식사요. 나랑 같이. 안되나요?"


제스퍼는 밖으로 나왔다. 여자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아마 다음에 갔을 땐 그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추파를 던지는 것이란건 잘 알았으나 제스퍼는 딱히 앞으로 응대할 마음도, 응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무미건조한 일상은 지금이면 충분하다. 공들여 생각치 않아도 여자들과 보낼 시간은 이미 눈에 선한 것이었다. 밥을 먹고 그 다음엔···. 제스퍼는 그런 시간은 딱 질색이었다. 어차피 사무소의 일만으로도 이미 빠듯한데 지루한 시간을 더 늘릴 여유도, 이유도 없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가 생각하면서 사무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제스퍼!"


여기저기 물건이 엎어지고 스러지는 소리를 내며 기계기사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제스퍼 내 말을 들어봐라!"


엘레멘탈은 흥분해 있었다. 스승이 미친듯이 어깨를 흔드는 통에 제스퍼의 시야가 상하좌우로 정신없이 요동쳤다. 제스퍼는 일단 스승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그는 어깨에 올라간 기계기사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찻잔 두개가 탁자에 놓여있고, 바닥엔 과자 부스러기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접대한답시고 접시에 올릴 다과를 찾다가 한바탕 뒤엎어버린 모양이었다. 치운다고 치운게 뭉툭한 손으로 아예 부숴버린걸테고.


"스승님 진정하고 말씀해보세요. 손님이 왔다갔나요?"


"엄청난 미인이었어."


머리에 주전자를 얹어놓으면 순식간에 끓을듯한 기세로 스승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물결치는 흑발에 에메랄드와 꼭 같은 녹색 눈동자에 맵시있는 검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어. 엄청 세련됐지만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풀풀 풍겼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생전 처음봤어··· 가슴이 뛴건 정말 오랜만이더군. 만약 내가 살과 뼈가 있는 인간이었다면 바로 그녀에게 고백했을거야!"


"의뢰는요?"


아. 엘레멘탈이 뒤늦게사 정신을 차렸다. 리사 경. 그러니까 의뢰인의 요구는 간단했다. -리자드 아서 오펜하이머(경)이라는 사람에게 고용인하나를 보내줄 것. 제스퍼는 힐끗 탁자를 내려봤다. 종이 위에 우아하고 힘있는 글씨체로 주소가 짧게 적혀있었다. 제스퍼는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엔 다섯개의 항목으로 조목 조목 요구하는 바가 적혀있었다.


첫째- 성실할 것


둘째- 정직할 것


셋째- 겁이 없을 것(남들만큼의 담력은 필요. 그 이상이면 환영)


넷째- 눈치가 빠를 것


다섯 째- 심미안적인 눈이 있을 것(별표)


"그러니까 주기적으로 들러서 수발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더구나."


엘레멘탈이 말을 이었다. 이상하고도 조목조목한 요구에 제스퍼는 눈살을 찌푸렸다. 혹여나 놓일 퇴짜에 엘레멘탈이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의뢰를 받는건 엘레멘탈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움직이는건 직원들이기 때문이다.


"요양사처럼요?"


"나이든 사람을 말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 급여는 시간당 2만 카스트로 높은 편이고, 주말은 휴무야. 어쨌든 간단한 일이랬어! 기한은 리사 경이 다시 찾아오거나, 혹은 그 쪽에서 됐다 그럴 때까지라고 했어. 딱 네 일이지 않니 제스퍼? 아마 괜찮을거야."


그래야만 해. 기계기사의 투구 너머로 엄청난 집념이 느껴졌다. 어지간히 여자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엘레멘탈에게 한때 부인이 있었던 적이 있으나 아주 오래된 과거라 들었다. 엘레멘탈의 하루 일과는 제스퍼보다도 더 단순한 구석이 있었다. 스승의 이런 모습은 기계기사가 만들어진 이후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이다. 세번째 조건과 다섯번째 조건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크게 걸릴 구석은 없었다. 제스퍼는 고갤 끄덕였다. 어쨌든 일이 들어오는건 그로써도 환영할 일이니까.


"좋아요."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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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느린 밤 1 18.06.24 123 1 23쪽
15 느린 밤 18.06.23 82 1 19쪽
14 마학모 18.06.20 95 1 25쪽
13 전야 18.06.19 101 1 17쪽
12 일렁임 18.06.18 67 1 13쪽
11 불쾌한 만남 18.06.17 102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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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역류 18.06.16 209 1 13쪽
8 움틈 18.06.13 92 1 16쪽
7 교수의 제안 18.06.12 118 1 11쪽
6 움직임 18.06.09 129 2 17쪽
5 어떤 사실 18.06.08 95 2 17쪽
4 첫걸음 18.06.06 90 2 22쪽
3 진의 18.06.03 114 2 19쪽
2 만남 18.06.02 83 2 9쪽
» 방문 18.06.01 159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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