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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988 님의 서재입니다

제스퍼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완결

로즈988
작품등록일 :
2018.06.01 22:23
최근연재일 :
2018.07.03 11:36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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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9
추천수 :
29
글자수 :
170,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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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2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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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마학모

DUMMY

울타리에서부터 저택까지 곧게난 길 좌우로 알록달록한 야생화들이 만개한, 남색 지붕의 꼭대기엔 전주인이 달아놓은 수탉풍향계가 있고 아침이 되면 뜰 안팍으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그게 리자드의 보금자리였다.


쫓기듯 들어온 곳이라 처음 얼마간은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슬픔과 피로가 한몸처럼 리자드에게 달라붙어있었고 리자드는 간신히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제스퍼가 찾아오자 이내 상황이 바뀌었다.


그와 함께한지 두달이란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리자드는 차츰 마음에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제스퍼가 없었다면, 그녀는 풀숲 아래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달팽이처럼 집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었다.


감정에서 벗어나자 자연스레 생각은 스승에게로 이어졌다. 처음엔 기네비어를 미워했지만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하려하는 제가 있었다. 스승에겐 삶과 직결된 일종의 열등감같은게 있었다. 그의 반은 링곤인이었고 반은 사람이었다. 아마 본인도 원치 않는새 그렇게 되버린 것이리라. 복잡한 문제다.


근래의 스승은 어쩐지 조금 불안정해보였다. 원체도 날이 선 사람이지만 이번엔 뭔가 좀 달랐다. 게다가 그 사술가는···. 스승의 옆에 있던 그 여자는 리자드가 처음 보는 마법사였다. 스승은 설령 마음에 드는 사람이더라도 가까이 두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많았고, 나쁘게 말하면 결벽증이 있었다.


섵부른 걱정은 금물이다. 더 이상 리자드는 스승에게 얽메이지 않기로 했다. 마학모에서 그녀는 스승과의 케묵은 일들을 털어버릴 생각이었다. 이제 더 이상 뒤만 돌아보고 살 수는 없다.


곧 제스퍼가 올 시간이다. 계약상으로는 오늘까지가 일의 끝이지만, 일전 가고일 소동 때 그가 한 말은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리자드는 그부분에 대해 생각해봤지만 좀체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설마 그가 자신을 좋아하기라도 하는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칠때면 리자드는 자연스레 모든 것들을 내려놨다. 제스퍼는 일적인 면에서 완벽함을 추구했다. 섵부른 판단은 과오와 길이길이 남을 창피함만을 남길 것이다. 후.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


리자드는 짝 소리나게 볼을 두드렸다. 정신이 들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마학모가 열렸다. 잊혀진 고대의 왕국을 본따 세워진 마법사들의 장은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마법공간이었다. 완만한 평지 위로 원형경기장과 같은 건축물이 솟아있었으며 건물의 사방 각 축마다 옛 현자들의 석상이 한걸음씩 앞으로 나와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다섯명의 마법사들이 만든 이 공간은 일년 중 정해진 날짜, 정해진 시간에만 그 문이 열렸다. 공간의 출구는 대륙 여러 곳과 통해있었느데, 인종을 불문한 영예로운 마법사들의 교류장, 그게 바로 마학모였다.


카밀의 중부 칼산 지방 유서가 깊은 골목길을 서른번하고도 반번 돌기 무섭게 리자드와 제스퍼는 고대의 장소로 이동했다.


마학모로 소환되는 마법사들은 우선 왕의 홀로 전송된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그 다음으로 삼삼오오 모여있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일년에 한번 있는 대외적 행사이니만큼 모두 멋들어지게 옷을 입었다. 제스퍼와 눈이 마주치자 리자드가 긴장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학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소환시의 그이상한 느낌에, 나아가 눈 앞에 펼쳐지는 마법사들의 세계에 자연히 주눅들었다.


제스퍼는 천천히 주변을 살펴봤다. 그가 스승을 따라 마지막으로 참석했을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이든 사람들의 비율은 줄어들고 젊은층과 중년층이 대다수라는 것이었다.


예전의 마학모가 다섯 현자들의 의지를 이은 경건한 교류의 장소였다면, 지금의 마학모는 그저 치기어린 어린애들의 놀음에 지나지 않아보였다. 무엇보다 마법사들의 옷깃에 달린 가문의 상징들이 눈에 거슬렸다. 언제부터 실력이 아닌 세력이 중시됐나. 아무것도 달지 않은 마법사들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그들은 구석진 곳에 어색하게 서있을 뿐이다.


전대 마학모의 수장 아도라가 은퇴식을 앞둘 때까지만해도 슬슬 이렇게 될 기미가 보였지만, 단기간 내에 이렇게 편파적인 사교의 장이 형성될 줄은 몰랐다. 지금도 대륙 어딘가에선 실력있는 마법사들이 조용히 그 연구에 매진하고 있을 터였다. 더 이상 마학모는, 올 장소가 못 됐다.


"슬슬 이동할까요?"


리자드의 말에 제스퍼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비딱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그가 마학모에 온건, 리자드의 목적을 위해서이지 마학모를 평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마법사들은 왕의 홀에서 중앙 회장으로 이동했다. 엘레멘탈의 방이 창문마다 다른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면, 마학모의 건물은 실제로 다른 공간들이 짜집기 된 곳이었다. 삼층의 복도를 따라 외떨어진 탑으로 가 계단을 내려가면 나타나는건 왕성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은 온실이다.


루비와 터키석이 박아진 문은 무조건 왕의 홀과 연결 돼 있었다. 시간에 따라 갈 수있는 장소들 또한 바뀌었기에, 마학모에 처음 발을 디딘 신참내기 마법사는 그냥 사람들을 따라 움직이는게 속이 편했다.


제스퍼의 통로를 여닫을 수 있는 능력은 마학모에서 십분 빛을 발했다. 그는 남들도 모르는 마학모의 장소를 몇몇 알고있었다. 입회식이 끝나면 그는 리자드를 데리고 비밀 장소들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리 정감가는 곳은 아니었지만 풍경이 멋지다는건 부정할 수 없었다.


따로 생각해둔 장소가 있었는데 운이 좋으면 반딧불이가 빛무리를 이루는 걸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제스퍼는 리자드에게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할 작정이었다.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제스퍼는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리자드와 계속 함께 있고 싶다는 것.


마법사들이 웅성거렸다. 제스퍼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마학모의 수장 기네비어가 다른 위원장들과 함께 중앙 회장으로 들어왔다. 그 거만한 얼굴을 보는 순간 제스퍼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리자드는 아무 말 없이 연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루한 시간들이 느리고도 길게 흘러갔다. 기네비어의 연설이 있었고, 위원장들의 호명 하에 몇몇의 마법사들이 연단 위로 올랐다. 가문의 힘과 입지, 복잡한 이해관계들에 얽힌 작위적인 상을 수여받는 마법사들의 얼굴엔 자부심어린 미소가 가득했다.


두시간의 틀에 박힌 입회식이 끝나자, 연회장에 교류회가 열렸다. 전이라면 같은 연구를 하는 마법사들끼리 모여 정보를 교류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치열한 논쟁의 장이 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류회는 먹고 마시며 떠드는, 말 그대로 친목을 쌓는 자리에 불과했다. 리자드는 뭔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슬슬 빠져도 괜찮지 않을까?


"리지."


부르는 소리에 그녀가 고갤 들었다. 리자드는 진주가 수놓아진 모슬린 소재의 재색 드레스에 고모에게 물려받은 달과 별이 수놓인 남색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최대한 가볍게 꾸민 오늘의 그녀에겐 수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제스퍼는 가슴이 뛰었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너무 정신이 없네요. 솔직히 이런 자리는 아직까지 어색해요. 시끌벅적한 자리랑은 안어울리거든요."


"그럼 조용한 곳으로 가죠."


네? 제스퍼의 대답에 리자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스퍼는 자연스럽게 준비한 말을 이었다.


"스승님을 따라 마학모에 왔을 때 발견해둔 장소가 몇 있어요. 마학모는 이래뵈도 넓으니까요. 아마 마음에 드는 장소가 있을겁니다."


"정말요?"


리자드는 믿기지 않는지 웃음이 터졌다. 긴장으로 역력한 그녀의 얼굴에 조금 편안한 기색이 감돌았다. 이제 곧 황혼이 내리면 탑 주위로 반딧불이 불빛이 피어오를 것이다. 제스퍼는 혼자서 보던 그 풍경을 오늘 리자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두 사람은 번잡한 회장에서 빠져나갔다. 리자드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기분좋은 미풍처럼 제스퍼를 간지럽혔다. 회랑을 빠져나가 두번째 응접실을 지나 초생달이 새겨진 작은 통로를 건너면 탑의 꼭대기가 나타난다. 정 안되면 통로를 열어 함께 이동할 수도 있었다.


"잠깐만요. 제스퍼 잠깐만요!"


회랑의 중간쯤 다다랐을 때 갑자기 리자드가 제스퍼를 붙잡았다. 머리 위로 쏟아져내리는 샹들리에의 불빛에 리자드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쉬지않고 뛴 터라 그녀의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리자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열기가 식으며 들떴던 분위기가 놀랍도록 빠르게 가라앉았다. 리자드는 머뭇거렸지만, 제스퍼는 뭔가 때가 왔음을 알았다.


"미안하지만-"


단호하게 숨을 내쉬며 그녀가 운을 뗐다.


"이대로 갈 순 없어요. 아직 스승님께 확실한 뜻을 전하지 못했어요. 오늘 그냥 넘어가버린다면 앞으로 말할 일 조차 없겠죠. 아마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거예요. 그래서 기다려 줬으면 좋겠어요."


리자드는 겁에 질린것 같기도, 들뜬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제스퍼는 그냥 그녀의 손을 잡고 마학모를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리자드와 기네비어의 만남은 어차피 한번쯤은 거쳐야 할 일이다. 그게 오늘인 것이고. 음 그녀가 작게 소릴 냈다.


"그리고··· 다녀와서 우리의 고용관계에 대해 다시 얘기하도록 해요."


제스퍼는 깜짝 놀랐다. 그런 생각은 자신만 하고 있을줄 알았는데 리자드 또한 염두해두고 있던 모양이다. 그럼- 그녀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옷 자락을 붙잡고 왔던 길을 내달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제스퍼는 꿈속에 있는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었다. 얼굴에 화끈 열이 올랐다. 자그마한 일들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자신이 이상했지만 그 이상함이 결코 기분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그에게있어 마학모는 항상 기분 나쁜 곳중 하나였지만 리자드가 있는 오늘은 단순한 배경일 뿐이다. 제스퍼는 정신을 차렸다. 리자드가 올때까지 그는 얌전히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


연회가 한창이건만 기네비어는 굳이 어두운 발코니에 나와있었다. 돌 석상이 즐비한 가운데, 살아있는 이라곤 그만인 풍경은 퍽 쓸쓸해보이는 것이었다. 어느 자리에 올라있건, 그 자리가 얼마나 높은 자리건 스승은 자연스레 따라붙는 시선과 관심들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모든걸 얻었지만 지금 기네비어는 그 어느때보다도 외로워보였다. 리자드는 어두운 공간 위로 한 발을 내딛었다.


"내가 어디 있건 찾아내는 재주는 여전하구나."


리자드는 깜짝 놀랐다. 기네비어는 여전히 등 돌린채였다.


"그냥 왠지 모르게 여기 와 계실것 같았어요."


"그래?"


해가 지기 시작했고 연회장의 불빛이 밝은 덕에 발코니는 더 어두워보였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까. 고민은 부질없는 것이다. 연회장의 불 빛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스승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스승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천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기네비어가 리자드 쪽으로 몸을 틀었다.


"왜?"


왜라. 많은 의미가 내포된 그의 질문은 뜻밖의 것이었다. 평소의 기네비어라면 리자드에게 화를 내고도 남았을 터다. 그런데 그가 왜라고 묻다니.


왜? 왤까. 처음 기네비어의 괴롭힘에 그녀 답을 구하려 자기 자신에게 쉴새 없이 물었었다. 왜?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있다.


"전 스승님이 궁지에 몰렸다는걸 훤히 알고있으면서도 외면했어요. 스승님이 제게 무언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걸 알았는데, 무서워서 모른척 해버렸어요. 이주생물이 소중하다는 핑계를 삼아 도망친거예요. 어떤 일이 벌어질줄 알고있었는데도 훤히 보이는 결과로 도피했어요. 그 점을 사과드리고 싶었어요."


기네비어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순간일 뿐, 그는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리자드는 허둥지둥거렸다. 하지만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스스로 도망치는 일이 없게 두 발을 땅에 꼭 붙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언제든 스승님을 도와드릴게요. 스승님이 제게 해주셨던 것처럼요."


"그럼 다시 돌아와."


"네?"


리자드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기네비어는 리자드가 도망갈 틈을 주지 않았다.


"그 일은 네 단독 행동일 뿐 나는 아직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았어. 너와의 사제지간도, 그 외 다른것들도 전부. 내게 사과하고 싶다고했지. 네게 못되게 굴었던건 나도 사과하마. 하지만 얘기를 현재 시점에서 시작하는건 옳지 않아. 얘기를 하려면 네가 모든걸 놓아버리고 간 그 시점부터 시작해야지. 네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기네비어의 푸른 두 눈이 리자드를 응시했다.


*


제스퍼는 연거푸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리자드와 헤어진지 채 삼십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이 공간에 수백년 묶여있었던 듯한 지독한 기분이 들었다.


어두워지자 교류회의 분위기는 한층 깊어졌다.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가시고 늘어지고 편안한 분위기가 주를 이뤘다. 무슨 맛인지 모를 음료를 들이키며 그는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사십분. 그 안에 리자드가 오지 않는다면 제스퍼는 그녀를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금과 옥, 은으로 만들어진 굵직한 반지들로 손가락들을 장식한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실없는 대화나 나누고 있을 뿐이다. 이 자리를 위해 몇날 며칠이고 만들었을 옷들은 화려한 장신구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하나같이 자신이 돋보이기 위함이었지만, 전부가 그런 옷을 입고있는 지금 그들은 우스꽝스런 광대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엘레멘탈이 한창 어린 형제들을 데리고 마학모에 참여할 땐 이 넓은 장의 모두가 남루한 무채색의 옷차림을 하고있었다. 그들은 외견보다 내면, 안에 담긴 지식이 중요한 이들이었고 같은 주제로 수십번씩 논쟁이 펼쳐지던 그 때의 마학모는 살벌하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형제가 마법사에 대해 동경심을 품게 된 것도 아마 그 때일 것이다. 통로를 여닫는 것 외에 마기를 운용할 수 없는 특성 때문에 제스퍼는 일찍이 꿈을 접어야했지만 오팔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여기 어딘가 그의 형제 또한 있을 것이다. 문득 어떤 모습을 하고있을지 궁금해졌다.


마주치지 않으리라 거듭 다짐했건만 리자드가 없는 지금이라면 딱히 상관없을것 같았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제스퍼는 찬찬히 주위를 살폈다. 웅성이는 사람들의 물결이 시시각각으로 요동치고 제스퍼는 생각보다 쉽게 오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팔은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보라색 코트의 차림새로 출구쪽에 서있었다.


타고난 붙임성과 말주변으로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냈던 형제다. 어느 모임을 가던 오팔은 나이 불문하고 죽이 잘 맞는 친구 몇을 대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혼자였다. 오팔은 전시관에 놓여진 박제 동물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한 손에 은잔을 들고 있었지만 자신이 뭔가를 들고있는것도 잊어버릴 만큼 뭔가에 골몰한 얼굴이었다.


마법사 하나가 오팔과 부딪치자 아슬하게 걸려있던 잔이 떨어져 귀에 거슬리는 소릴 냈다. 그 소리에 오팔은 화들짝 튀어올랐다. 그는 이내 결심한 듯 마법사 무리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제스퍼는 저도 모르게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저러지? 뭔가 이상했다. 오팔은 어지간해선 겁먹는 일이 없다. 그런데 지금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제스퍼는 홀린듯 오팔을 따라 반대편의 출구로 움직였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말해. 도와줄테니까.' 무슨 문제가 생긴건 그 쪽이지 않은가?


오팔은 침침한 어둠에 잠긴 회랑을 거슬러 일층 공터로 통하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제스퍼가 기억하기로 파릇파릇한 잔디가 자란 야외 공터를 가로질러 가면 거인같은 기둥이 무수하게 들어선 고대의 성터가 나타난다. 빛이 비추는 한낮에도 어두침침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터라 성터는 호기심 많은 마법사들 또한 오기 꺼려하는 곳이었다. 오팔이 빠른걸음으로 성터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제스퍼가 뒤따라 갔을 땐 그 넓은 장소 어디에도 오팔은 보이지 않았다. 낯선 발소리가 지면을 두드리자 제스퍼는 얼른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거리도 거리지만 어둠 때문에 나타난 사람이 누군지 통 분간할 수 없었다.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제스퍼는 곧 새로 나타난 제 삼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이 억센 머리칼을 엉덩이까지 늘어트리고 허리와 가슴이 훤히 트인 검녹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기네비어와 함께 있던 '그' 사술가였다.


여자의 머리 위로 검은 빛무리가 일렁이며 물결쳤다. 정령의 표식이었다. 제스퍼는 정령사들을 몇 본적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정령과 계약을 맺었음을 뜻하는 빛의 인장을 드리우고 있었다. 색에 따라 정령의 종류가 판별지어졌는데, 검은색에 가까운 종류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오팔이 사라진 지금, 여자가 왜 이 곳에 나타났냐는 것이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엔 말이 안되는 상황이다. 뭔가를 꾸미고 있다던지? 지금 리자드는 기네비어와 함께 있다. 오팔은 둘째치더라도 일단 리자드부터 찾아야했다.


*


리자드는 처음엔 제 귀를 의심했다. 한참 후 기네비어가 발치로 시선을 내렸다. 지금 뭘 들은거지? 이야기가 원점으로 회귀하려하고있었다. 리자드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차오르는 어떤 답답함을 느꼈다. 많은걸 바란건 아니다. 그저 감정을 내려놓고 서로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누길 바랐을 뿐인데 왜 이렇게 비비 꼬이는걸까? 몇년간 있었던 그 많은 일들을, 그는 그저 돌아오라는 이기적인 요구로 무마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기네비어 그대로였다. 리자드를 볼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어떤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것 같았다.


"원하신다면 언제까지고 제자로 남을 수 있어요.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어요. 아시잖아요. 너무 갑작스러워요."


"결국 입에 발린 소리였단 말이군. 세살 어린애도 할 수 있는 그런 사과는 받을 생각 없다."


"스승님!"


이상적으로 그렸던 화해의 장은 산산조각났다. 참으려 했지만 눈물이 새나오기 시작했다. 리자드는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왜 그렇게 못되게 구는거예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알기나 하세요? 스승님 입장에서야 그런건 아무것도 아니었겠죠. 하지만 저는 하루하루가 괴로웠어요. 참회하는 마음으로 버티자, 버티자 생각했어요. 나중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게됐고요. 스승님은 정말 한번도 제 마음을 헤아려볼 생각은 없으셨던 거예요? 다짜고짜 돌아오라 하시면 제가 뭐가 돼요?"


뭔가 해명하길 바랐지만 남은건 침묵뿐이다. 북받쳤던 감정이 싸늘하게 식는건 순식간이었다. 눈물은 흐르지 못하고 싸늘하게 식었다. 결국 스승은 끝까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알겠어요. 제가 나빴어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평생 저를 미워하세요. 아마 다음에 만난다면 우린 모르는 사이가 돼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리자드는 인사 하려했다. 기네비어가 입을 달싹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죽어가고있어. 그러니 마지막 부탁이야. 네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불어오는 미풍에 리자드는 넘어질것처럼 위태로웠다. 기네비어는 결코 누군가에게 뭔가를 갈구하거나 부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의 스승은 예전 그녀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것 같았다. 뒤늦게서야 귀에 걸리적거리는 이질감에 리자드는 정신을 차렸다.


"거짓말이죠."


"거짓말이 아냐. 링곤의 피가 나를 좀먹고 있어. 자기밖에 몰랐던 이기주의자에게 알맞는 결말이지."


어떤 말을해야할까? 목에 돌덩이가 걸린것마냥 답답했다. 기네비어가 그녀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아래 있으면서 한번도 본적 없는 미소다. 간혹 짓는 미소라도 여름볕에 말라가는 물자욱마냥, 고양이의 발소리마냥 아주 희미한 것이라 리자드는 스승의 웃는 모습을 통 기억하지 못했다. 스승이 미소를 짓는다는것은··· 그의 말이 영락없는 사실이라는것을 뜻했다.


왜 하필? 왜 지금? 자신이 죽어가는것을 빌미로 면죄부를 강요하다니 비겁한 사람이다. 기네비어는 리자드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세상을 뜰 때가지만이라도 돌아와줬으면 좋겠다."


왜냐면 바람결에 그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리는했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언젠가 리자드는 이미터가 조금 안되는 나무에서 떨어진적 있었다. 가슴부터 떨어진 탓에 충격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고 그 반동에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충격이 가라앉고 눈물로 좁아졌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소모됐다.


놀랍게도 기네비어는 말 만으로 리자드를 그 때의 그 상태로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 때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공기가 액체로 된 마냥 리자드는 숨 쉬기가 힘들었다.


"그랬다면 스승님은 내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겠죠."


"네가 떠나고 난 후부터 나는 네가 돌아오길 수도없이 바랐어.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수도없이 비참해지는 기분이라 난 내 감정을 인정하기 싫었어. 지금 뭐라 말해도 네가 날 용서할 순 없겠지. 그러길 바라지도 않아."


기네비어가 리자드에게로 다가왔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리자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스승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 사실이 못처럼 그녀의 두 발을 붙들고 있었다.


"사과하마."


그가 리자드에게 닿기 전, 팔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제스퍼가 얼른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리자드는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뻔 했다. 제스퍼의 등장에 기네비어가 성큼 뒤로 물러났다. 제스퍼를 쳐다보는 그의 눈이 날카로웠다. 제스퍼는 거리를 벌리면서 리자드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리자드?"


리자드가 고갤 끄덕였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벌벌 떨었다. 제스퍼는 얼른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옷깃 아래 느껴지는 리자드의 몸이 서늘했다. 필시 많은 충격을 받은 걸테지.


"정도껏 해 기네비어. 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언제까지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을거란 생각은 마."


제스퍼는 얼른 리자드를 데리고 발코니를 벗어났다. 기네비어는 두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 마학모의 밤은 그렇게 끝났다. 두 사람은 도망치듯 마법공간에서 빠져나왔다.


돌아왔을 때 세상은 어둠에 잠겨 적적한 분위기를 뿜고 있었다. 서늘해진 밤공기에 길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고 가스등의 불빛만이 눅눅한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전차를 기다릴 수는 없는지라 제스퍼는 얼른 지나가는 마차 한대를 붙잡았다.


마차가 다각다각 거리는 말발굽소릴 울리며 경쾌하게 거리를 가로지르는 동안 실내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리자드는 피곤한 얼굴이었다.


마구 뒤엉킨 실타래처럼 모든게 엉망이다. 그토록 기다린 날이건만 결국 이런 식으로 끝맺어질 줄은 몰랐다. 만약 제스퍼가 가로막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체없이 기네비어에게 휘말릴 뻔 했다. 사년전의 그 날,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감정은 이미 너무 멀어지고 망가진 뒤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린 없다. 마차가 덜컹거렸고 리자드는 무력하게 앉아있었다.


"괜찮습니까?"


제스퍼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모르겠어요 가슴이 좀··· 아무래도 체한것 같네요."


"손 줘봐요."


리자드는 그가 하라는대로 따랐다. 그가 장갑을 벗기더니 꾹꾹 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제스퍼의 손은 따듯하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는 줄곧 리자드를 걱정하고 있었다. 리자드는 내심 그의 상냥함이 좋았다. 결국 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흑.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흐느낌과 함께 터져나왔다.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이기적일 수가 있담? 기네비어는 죽어가고 있었다. 모질게 굴땐 언제고 이제와서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리자드가 눈물을 흘리자 제스퍼는 어쩔 줄 몰랐다. 다만 지금 확실한건, 그녀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제스퍼의 손이 리자드의 볼을 쓸었다. 리자드가 고갤 들자 재보라빛의 눈이 그와 마주쳤다. 그녀가 제스퍼의 손에 머릴 기댔다. 제스퍼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지탱하고 그 창백한 볼에 입을 맞췄다. 리자드는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제스퍼의 등을 감쌌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제스퍼는 그녀의 울음까지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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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고모 1 18.07.03 96 1 23쪽
22 고모 18.07.03 80 1 24쪽
21 느린 밤 6 18.07.03 69 1 20쪽
20 느린 밤 5 18.06.30 64 1 15쪽
19 느린 밤 4 18.06.29 85 1 10쪽
18 느린 밤 3 18.06.27 66 1 10쪽
17 느린 밤 2 18.06.26 92 1 10쪽
16 느린 밤 1 18.06.24 123 1 23쪽
15 느린 밤 18.06.23 82 1 19쪽
» 마학모 18.06.20 96 1 25쪽
13 전야 18.06.19 101 1 17쪽
12 일렁임 18.06.18 67 1 13쪽
11 불쾌한 만남 18.06.17 103 1 15쪽
10 정체성 18.06.16 80 1 14쪽
9 역류 18.06.16 210 1 13쪽
8 움틈 18.06.13 93 1 16쪽
7 교수의 제안 18.06.12 119 1 11쪽
6 움직임 18.06.09 130 2 17쪽
5 어떤 사실 18.06.08 95 2 17쪽
4 첫걸음 18.06.06 90 2 22쪽
3 진의 18.06.03 114 2 19쪽
2 만남 18.06.02 84 2 9쪽
1 방문 18.06.01 159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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