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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988 님의 서재입니다

제스퍼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완결

로즈988
작품등록일 :
2018.06.01 22:23
최근연재일 :
2018.07.03 11:36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2,287
추천수 :
29
글자수 :
170,468

작성
18.06.03 18:27
조회
112
추천
2
글자
19쪽

진의

DUMMY

아침 일곱시, 누가 깨우지 않아도 제스퍼는 절로 눈을 떴다. 엘레멘탈은 아직 취침중이지만 제스퍼는 일찍이 아침식사 준비를 마쳤다. 오늘부터 그는 정해진 출근지로 출근해야하기 때문이다. 주전자가 끓는 동안 제스퍼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느슨하게 타이를 매고 깔끔한 군청색의 조끼를 입었다. 차가 끓자 그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지상에 깔려진 철로를 따라 돌아다니는 지상전차를 타고 사십분 거리를 달리면 고용인의 집이 나온다. 고용인 리자드의 집은 고택들로 유명한 주거단지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뾰족한 지붕들과 첨탑들은 건물이 지어졌을 당시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했다. 묵직한 분위기를 풍기는 삼층짜리 저택과 담청색 지붕이 돋보이는 자그마한 성당을 지나 구불구불한 길을 얼마 돌아가면 고용인의 집이 나타난다. 날이 흐려 못본건데 고용인의 지붕 꼭대기엔 황금빛의 수탉 풍향계가 달려있었다.


그러고보니 고용인의 집은 어쩐지 눈에 익숙한 구석이 있었다. 크기도 제각각 다르고 모양도 다른 나무들을 엮어 만든 성긴 담장하며, 자그마한 정원,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놓인 집은 어쩐지··· 옛날 엘레멘탈과 살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옛날 스승과 살던 곳은 우중충한 늪지대였고 집의 모양 또한 전혀 달랐는데 말이다.


"이상한 노릇이군."


제스퍼의 눈에 창문에 얼굴을 바짝 대고있는 여자가 들어왔다. 창문 밖으로 제스퍼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헐레벌떡 복도로 사라졌다. 이상한 집주인이고- 제스퍼는 생각을 밖으로 내지 않았다. 문이 벌컥 열렸다.


"일찍왔네요 다행이다! 사실 쪽지를 남겨두고 가야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어제 당황해서 말하는걸 깜박해서요. 나온 김에 같이 나가요. 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드릴게요."


고용주가 그러하자니 제스퍼는 일단 그녀를 다라나섰다. 그나저나, 괴상한 차림새다. 리자드는 가죽 부츠를 신고 연두색 드레스 차림에 머리엔 바늘꽂이같은 이상한 장신구를 뒤집어 쓰고있었다. 나름 균형을 맞춘답시고 한 손엔 분홍색 양산을 들었는데 그게 오히려 미적 감각을 파괴했다. 붉은 벽돌이 고르게 깔린 길을 힘차게 내려가며 리자드가 말을 걸었다.


"제가 어제 마법사라 그랬잖아요."


얼마간 내려가자 번화가가 나타났다. '시드 거리' 엘레멘탈의 사무소가 위치한 미로골목은 사람 많기로 손꼽았지만 시드거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시드 거리는 크고 세련됐으며, 쾌적했다. 사람들 또한 많았다.


"하는 일에 대해선 설명은 하고 넘어가야 할것 같아서요. 저는 내마법사에요."


"내라면 그 이주생물을 다루거나 막힌 기운을 뚫거나 하는 일 말입니까?"


"맞아요!"


리자드가 미소지었다. 마법에는 내,외 마법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외마법이 기운을 운용해 힘을 외부로 분출하는 화려한 것이라면(불을 뿜거나 물을 다루거나) 내마법은 좀더 조용한 편에 속했다. '이주생물' 세상에는 타 세계에서 넘어온, 쉽게 말하면 마기로 만들어진 생물이 존재했다.


내마법사는 눈과 기감이 트인, 심계의 존재들과 좀 더 쉽게 교감할 수 있는 교류자들로 그들이 주로 하는 일은 길을 잃은 이주생물들을 원래 집으로 돌려보내주거나, 그들이 만든 소동을 잠재우 등 조용한 해결사 역할을 자처했다. 보통 사람들은 그 정의에서 헷갈리겠지만 엘레멘탈의 아래서 지낸지 오랜 시간인 제스퍼에겐 그리 어려운 용어는 아니었다.


"음, 경이라는 호칭 하나와 남겨진 유산이 얼마 있긴 하지만, 현재 우리집의 재정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이 아녜요. 부흥기가 있었다지만 지금의 오펜하이머가는 완전 망한거나 다름없거든요. 아, 물론 시급은 지급할 수 있으니 걱정말아요. 어쨌든 그래서 소소한 돈이라도 벌겸 부업을 뛰고있는거랍니다."


"지금은 부업을 뛰러 가는거고요? 이주생물과 관련된 일이겠고요."


"맞아요."


리자드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일단 오라는대로 움직이고있긴 하지만 설명을 듣고나니 의문이 안생길 수가 없다. 제대로 된 내마법사는 그 희소성 때문에 마법계에서 귀히 여긴다. 마학회나 마학모에 미운털이 박히지 않은 이상 내마법사가 금전적으로 궁핍할 일은없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걸까? 순간 엘레멘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제스퍼의 생각은 깊게 이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소리쳐 리자드를 불렀기 때문이다.


"리지 자기! 여기야!"


"안녕하세요 마리 부인. 못본새 더 젊어지셨네요."


"어머 자기는 입에 발린 소리도 참 잘 해."


여자는 어이없다는듯 웃으면서도 친한듯 리자드의 팔을 붙들었다. 두 사람을 맞은건 분홍빛 얼굴의 통통한 중년 여인으로 시드 거리의 교찻길에 있는 커다란 빵집의 주인이었다. 마리 부인의 거처는 빵집의 이층으로 건물 뒤편에 집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며 마리 부인이 얘기했다.


"처음엔 쥐겠거니 생각했어. 남편도 나랑 생각이 같았고, 근데 반이 새벽에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이상한 그림자를 봤다는거야."


"그림자요?"


마리 부인은 리자드를 따라온 제스퍼를 힐끔거리면서도 입을 놀리는걸 잊지 않았다.


"그림자라고 해야하나, 유령을 봤다고 호들갑을 떠는거야 글쎄. 처음엔 헛걸 봤다고 생각했지. 반은 애가 부지런하고 좋은데 겁이 너무 많거든. 근데 이번엔 남편이 본거야. 투명한 고양이같이 생긴게 우리집 다락을 들락날락 하더래. 근데 덩치가 이-만 했다는거야."


마리 부인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마리 부인은 헉헉거리며 사층 계단으로 향했다. 좁아진 출구에 마리부인의 몸이 빛을 가리자 공간은 금세 어두컴컴해졌다.


"이상한 소리는 들리지, 아무래도 이런 쪽은 자기가 적성이잖아. 도와줄 수 있지? 쫓아낼 수만 있다면 보수는 섭섭치 않게 줄게."


"만약 그게 제 적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게 맞다면요. 그렇다면 부인 제가 성심성의껏 도와드릴게요."


며칠간 잠을 못잤는지 마리부인의 눈밑이 퀭했다. 그녀는 이주생물이 자신의 집 다락에 있을까봐, 혹여 그 불길한 것을 쫓아내지 못할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긴, 리자드가 가방에서 도구들을 꺼내는걸 보며 제스퍼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주생물. 마법사들에겐 다르지만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일반인들에게 그것들은 지극히 불경하고 기분나쁜 해충 같은 것으로 치부됐다. 오죽하면 이주생물이 있는 집은 삼년 안에 망한다는 미신이 있을 정도다.


"다락은 이 쪽이야."


부인이 바닥에 네모나게 자리한 틈을 가르켰다. 사층은 어떤 공간이라기보다 그냥 좁고 텅 빈 장소였다. 아무것도 복도나 나눠진 공간도 없이 좁고 경사진 천장에 창문만 덩그러니 나있는, 그저 텅 빈 공간이었다. 이층 집에서 다락으로 올라가는게 더 편할텐데. 아. 부인은 자신의 주거 공간에 더러운 이주생물이 떨어져나와 난동을 부리는걸 참을 수 없는건지도 몰랐다.


"잡을 수 있을까?"


"일단 확인해보고요."


"만약 이주생물이 아니라면 어떡하지?"


리자드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가끔씩 내마법사들은 그들의 가치에 비해 해충 퇴치사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콧대높은 몇 내마법사들은 큰 일이 아닌 이상 일반인 앞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의 경멸적인 시선에 자신이 혐오를 하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그런데 이 청년은 누구?"


"제스퍼입니다. 오늘부터 리자드 경의 보조 조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마리 부인의 시선이 제스퍼를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품평하듯 기분 나쁜 시선이지만 제스퍼는 언제나 그렇듯 무시로 일관했다. 마리 부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잡동사니들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리자드의 등을 툭 쳤다.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조금 있다가 누군지 설명해 줘야 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리자드가 만반의 준비를 끝마쳤다. 그녀의 옷차림새는 기구했다. 먼지를 막기 위해서인지 고글과 마스크를 썼고 등 뒤로는 커다란 통에 노즐이 달린, 흡사 농약 뿌리개같은 기구를 짊어졌다.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만약 무슨 일이 있을시 부인과 함께 여기서 나가주세요."


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예요. 마리부인의 얼굴을 본 리자드가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다락으로 향하는 비밀 문이 열리고 리자드가 발을 내딛기 무섭게 먼지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청소한지 얼마 안됐는데··· 마리 부인은 예상 외의 먼지천국에 제스퍼에게 변명하듯 작게 웅얼거렸다.


리자드가 농약통에 달린 레버를 위아래로 당겨 노즐을 통해 액체를 분사했다. 제스퍼는 흥미롭게 과정을 지켜봤다. 액체는 마기를 물에 희석해 만든 것으로 엘레멘탈의 방에서 비슷한 것을 본적 있었다. 작게 빛나는 푸른 입자들이 공기중으로 퍼졌다. 제스퍼의 눈엔 빛나는 마기가 똑똑히 보였지만 마리부인에겐 방역 작업을 하는 걸과 비슷하게 보일터였다.


"어때 자기, 뭐가 좀 보여?"


제스퍼가 쉬 소리를 내자 마리 부인이 놀라 눈을 깜박였다. 이주생물은 예민하다. 자그마한 소리에도 그들은 멀리 도망가 나오지 않을 수 있었다. 통에든걸 반쯤 분사했을 쯤, 반응이 나타났다. 거미줄을 헤치고 먼지로 회색 투성이로 변한 바닥에 자그마한 발자국이 점점이 찍혔다. 이주생물은 사냥개 크기에 뿔이 달린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있었다.


리자드가 농약통에 액체를 분사하자 고양이가 주춤거리더니 점점 더 리자드에게로 다가왔다.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지자 마리 부인이 작게 어깨를 떨었다. 리자드가 계속해서 분사하며 무릎을 꿇자 마침내 고양이 또한 경계를 풀었다. 이주생물은 가르랑거리며 리자드의 발치를 왔다갔다 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리자드가 안주머니에서 작은 플라스크 병을 꺼냈다.


병 안에 든건 희석하지 않은 마기 덩어리다. 리자드가 고양이 위로 마기를 붓자 고양이의 크기가 점점점 줄어들어 양 손바닥에 올라올만큼 작은 크기로 변했다. 오랜만에 포식을 해서인지 고양이는 나른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리자드는 집게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녀석의 목덜미를 들어 품 안에 끼고 밖으로 나왔다. 먼지에 겔겔거리는 숨소리를 내면서도 리자드가 위풍당당하게 위로 올라왔다.


"부인의 예상대로 이주생물이 맞았어요. 불쌍하게도 굶어죽기 일보직전이었고요."


마리 부인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가 크게 뜨길 반복하며 고양이 모습을 한 이주 생물을 확인했다. 이주생물이 포만감을 느낄 때, 즉 마기로 온 기운이 충만할 때 일반 사람들도 흐릿하게나마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신계의 생물들이 길을 잃어 이 세계로 넘어온 시점에선 이미 투명해질대로 투명해진 후지만 내마법사인 리자드에 의해 마기를 보충한 지금 마리 부인의 눈으로도 충분히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인은 곤히 잠든 고양이를 보고 놀라움에 작게 중얼거렸다.


"어머 생각 외로 귀엽네. 얘라면 우리 집에 있어도 좋았을것 같아. 쥐나 좀 잡아줬으면 좋았을텐데. 그런데 이 작은 녀석이 왜 그렇게 커졌던거야?"


귀찮은 순간이 왔군. 그러나 리자드는 곤란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설명 또한 자신의 일이라 이해한것 같았다.


"이주생물은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존재들이에요. 본래 세상에선 먹을게 많은데, 이쪽 세상에선 먹을만한 기운이 없는거죠. 그래서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 몸을 최대로 키우는 거예요. 그러니깐 쉽게 거름망을 생각하면 돼요. 거름망이 작으면 그만큼 작게 걸러지지만 거름망이 크면 그만큼 많이 거를 수 있잖아요."


마리 부인은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물그러미 고양이를 쳐다봤다.


"그래서 밥을 많이 먹고 원래대로 돌아왔다는거야? 우리 집에있었다는건, 우리 집이 그나마 먹을게 많았다는걸까?"


"그만큼 부인의 집이 순환이 잘된다는 뜻 아닐까요?"


"어쨌든 굶어죽기 직전에 구조해서 다행이네."


두 사람이 씨익 웃었다. 이주생물이 슬슬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자 리자드가 준비해온 진에 고양이를 옮겼다. 정신계와 이 쪽 세상을 이어주는 복잡한 진으로 왠만한 마법사가 아니면 건드릴 수조차 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리자드는 아무렇지 않게 진을 발동해 아무렇지 않게 이주생물을 정신계로 돌려보내버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6만 카스트. 고양이를 구조하고 받은 돈이었다. 부인은 선심쓴듯 5만 카스트로 퉁칠 수 있을걸 1만 카스트를 더해 6만 카스트를 준것이라 떵떵댔다. 그야말로 턱없는 비용이 아닐 수 없다. 내마법사가 이주생물을 퇴치해준 뒤 제대로 된 금액을 받자면 기본 30만 카스트부터 시작한다. 이주생물의 위험도와 크기에 따라 금액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런데 6만 카스트라고? 제스퍼가 리자드와 움직인지 두시간이 지났다. 결국 그녀의 노동은 제스퍼의 고용값을 벌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동네는 개념이 좀 다른걸까? 제스퍼는 이내 신경을 껐다. 어차피 고용인이 지불해야할 금액 문제는 그가 신경쓸 일이 아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집으로 돌아가나요? 전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요."


"아, 그렇네요. 근데 이왕 시내까지 나왔는데 밥이나 먹고 들어갈까요?"


눈 밑에 선연하게 고글 문양을 남긴 채 리자드가 딴소릴 했다.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근처의 식당가에 들러 야외 테이블에 앉아 리자드가 음식을 시키는 동안 제스퍼는 이게 일인지 아니면 휴가인지 생각했다. 정말 이렇게해서 돈을 받아도 되는것인가.


"왜 그러세요? 음식이 입에 안맞으세요? 이상하다, 여기 꽤 유명한 집인데."


"아뇨 괜찮습니다만···."


"팍팍 드세요. 먹고 난 후엔 한바퀴 시내를 돌거니까. 짐꾼 역할이나 맡길까요?"


제스퍼가 아무 말 없자 리자드가 부리나케 말을 더했다.


"농담이에요. 혹시 기분 나빴어요?"


밥을 먹고 난 후, 두 사람은 전차를 타고 시내 끝으로 이동했다. 리자드는 고서점에서 책 몇권을 사고 반대편 잡화가에 들러 펜촉과 잉크, 띠지에 묶인 양피지 한다발을 샀다. 그리고 왔던 길을 한바퀴 돌아가 옷가게가 있는 쪽으로 빙 돌았다.


고작 몇 정거장 위로 올라왔을 뿐인데 북쪽 거리의 살롱들은 아래 거리와는 급을 달리했다. 화려하게 밑단을 장식한 드레스와 목이 아프진 않을지 염려되는 길다란 모자를 쓴 멋쟁이 신사숙녀들이 길을 오갔고 도로를 달리는 마차들 또한 저마다 번쩍번쩍한 금장으로 가문의 문양을 뽐내고 있었다.


리자드는 옷을 사지도, 악세사리 가게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구경이 목적인양 가게가 나타날 때면 멈춰섰다 움직이길 반복했지만 제스퍼는 그녀가 그게 딱히 흥미가 있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란걸 알아챘다. 옷과 보석들을 보는 리자드의 눈은 가판대에 올라간 동태마냥 어딘가 흐끄무레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제스퍼는 뒤늦게사 주위의 변화를 인지했다. 힐끔거리며 두 사람을 쳐다보는 이들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었다. 쥘부채 아래 얼굴을 숨기고 무어라 중얼거리는 여성들이 보였다. 제스퍼를 보는 그들의 눈이 호기심과 열띤 빛을 띄었다. 리자드는 목석이라도 된듯 한결같이 평온한(굳은)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일정거리 이상 그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게걸음마냥 느릿느릿걸으며 제스퍼

와 부딪힐듯 말듯한 간격을 유지하는게 아닌가.


"리자드! 누구야?"


한 정거장 아래로 내려왔을 때 누군가 말을 걸었고 리자드는 얼른 집게 손가락으로 제스퍼의 팔꿈치를 슬쩍 붙잡았다. 그러니까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친구야."


그제사 제스퍼는 '보조'란게 단순히 조수나 도움의 의미로서가 아닌, 어떤 역할의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바퀴 순례를 마치자 시간은 벌써 해질녘때의 오후가 돼있었다. 두 사람은 시드 거리 초입의, 사람이 거의 없는 카페에 자릴 잡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어쩐지 제스퍼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제스퍼는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정확히 제가 할 일의 설명을 듣고싶습니다만."


"네?"


제스퍼가 아무 말 않고 쳐다보기만 하자 쩔쩔매는건 리자드였다. 그녀는 어딘가 쑥맥인 기질이 있었고, 제스퍼는 자신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제 시선이 천차만별로 보일 수 있다는걸 잘 알았다. 마침내 리자드가 입을 연건 주문한 커피가 나왔을 때였다.


"그러니까 좀 이상한 부탁이지만, 마학모가 열릴 때까지의 두달간 제 옆에 붙어있어주셨으면 해요."


그러니까 마학모가 뭐냐면- 리자드는 설명하려다가 제스퍼의 제지를 받고 입을 다물었다. 엘레멘탈을 스승으로 둔 제스퍼는 마학모가 어떤 줄임말인지 어떤 모임인지 잘 알았다. 며칠 전 우체국에 간것도 스승의 마학모 불참을 알리기 위한것이었으니까.


"오늘 하루 행동한 바에 따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혹은 과시하기 위한 연인 행세라고 봐도 될까요?"


리자드가 커피를 마시다말고 기침을 터뜨렸다. 제스퍼가 재빨리 냅킨을 건넨 덕에 다행히 드레스엔 자국이 남지 않았다.


"요구는 명확할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제가 그에 맞게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이해해 주시는거예요? 어, 그게 기분 나빠하거나 거절할 줄 알았어요."


"엘레멘탈 인력 사무소는 불법적이거나 비인륜적인 일을 제외하면 어떤 의뢰든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인력사무소에서 나오신 거예요?"


뭐 도와줄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지만. 그녀가 중얼거렸다. 리자드의 눈이 진지해졌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듯 침묵하고 있다가 결심한듯 자세를 바로했다.


"마학모에 날 물먹인 남자가 하나 있어요. 거만하고, 위압적이고, 재수없고, 근데 솔직히 난 아직 그 사람이 좀, 아니 꽤 무서워요. 그래서 연인 행세를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좀 덜 만만해보이지 않을까 해서요. 한 이미터쯤의 우락부락하고 덩치 큰 사람이 왔으면 했지만 지금도 나쁘진 않아요."


엘레멘탈? 제스퍼는 기계기사를 떠올렸다. 지는 노을에 리자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말인데. 가능할까요? 연인행세요."


"가능합니다."


오랜만의 고객을 놓칠수야 없다. 더욱이 귀찮은 마법 보조도 아니고 그저 옆에 붙어있는걸로 된다면 그야말로 환영이다. 리자드가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제스퍼는 다시 한번 말했다.


"가능,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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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느린 밤 5 18.06.30 64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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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느린 밤 3 18.06.27 66 1 10쪽
17 느린 밤 2 18.06.26 92 1 10쪽
16 느린 밤 1 18.06.24 123 1 23쪽
15 느린 밤 18.06.23 81 1 19쪽
14 마학모 18.06.20 95 1 25쪽
13 전야 18.06.19 101 1 17쪽
12 일렁임 18.06.18 67 1 13쪽
11 불쾌한 만남 18.06.17 102 1 15쪽
10 정체성 18.06.16 79 1 14쪽
9 역류 18.06.16 209 1 13쪽
8 움틈 18.06.13 92 1 16쪽
7 교수의 제안 18.06.12 118 1 11쪽
6 움직임 18.06.09 129 2 17쪽
5 어떤 사실 18.06.08 95 2 17쪽
4 첫걸음 18.06.06 90 2 22쪽
» 진의 18.06.03 113 2 19쪽
2 만남 18.06.02 83 2 9쪽
1 방문 18.06.01 15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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