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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988 님의 서재입니다

제스퍼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완결

로즈988
작품등록일 :
2018.06.01 22:23
최근연재일 :
2018.07.03 11:36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2,306
추천수 :
29
글자수 :
170,468

작성
18.06.06 21:31
조회
90
추천
2
글자
22쪽

첫걸음

DUMMY

차가 끓기 시작하며 찻주전자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뿜자 제스퍼는 급한 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제스퍼는 좀체 서두르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그 자신이 준비가 철저하여 실수를 만들지 않거니와, 차분한 성정 또한 올바르게 일을 수행하는데 한 몫했기 때문이다. 오늘 그가 이렇게 서두르는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연인 행세.'


리자드 아서 오펜하이머가 그에게 부탁한 일이다. 대체 연인 행세란 무엇인가. 막상 할 수 있다고 하긴 했지만 누군가와 깊은 교류도, 사랑을 느껴본적도 없는 제스퍼에게 그녀의 부탁은 잡을 수 없는 연기마냥 두루뭉술한 데가 있었다. 그는 일단 씻었다. 평소보다 신경 써 옷을 차려입고 정신이 들었을 때, 엘레멘탈의 식사 준비할 시간이 10분이나 지나있었다.


칼같이 다린 바지, 깨끗하게 세탁한 흰 셔츠를 입고서 그는 정신없이 요리를 하고 부엌과 식탁을 오갔다. 얼추 모든 일을 마쳤을 땐 시간은 딱 8시가 돼있었다. 차가 오는 시간은 앞으로도 이십분 뒤, 리자드 아서 오펜하이머의 집에 도착하면 얼추 9시 10분 쯤에서 20분사이일 터다. 알맞은 출근시간이었다.


"다녀올게요 스승님."


엘레멘탈은 아직 꿈나라였지만 제스퍼는 인사하는걸 잊지 않았다. 그는 집을 나섰다.


지상전차를 타고 시드 거리의 한복판에 내려 수탉 풍향계가 있는 리자드의 집까진 10분 남짓 시간이 걸린다. 제스퍼가 도착했을 때 리자드는 한창 옷을 갈아입느라 요란법석을 떨고 있었다.


"어서와요 제스퍼! 밥은 먹었어요?"


"아침은 먹고 왔습니다."


"안 먹었으면 식탁 위에 샌드위치라도 들어요."


아무래도 안들리는것 같았다. 여우를 만난 닭처럼 리자드는 일층 이층 할것없이 정신사납게 뛰어다녔다. 제스퍼는 리자드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싶습니다만."


"음, 마학모에 뜬금없이 연인이랍시고 당신을 데려가면 인과관계가 안맞잖아요. 그래서 소문을 낼 거예요. 여기저기 돌아다닐건데 괜찮죠?"


리자드가 난간 너머로 고갤 내밀었다. 문제가 있다면 리자드가 내마법사고 마법사의 사회가 무척 좁다는 것이다. 게다가 제스퍼는 엘레멘탈의 제자다. 만약 누군가가 제스퍼를 알아본다면 리자드의 계획엔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마학모를 방문한게 10년 하고도 몇년 전이었으니, 무슨 문제가 있으랴 싶었다.


"괜찮습니다."


"좋아요. 오늘의 목적지는 일단 아카데미에요. 한때 거기 보조강사였거든요. 오랜만에 가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돌아다니다보면 자연스레 소문이 나겠죠."


짜잔, 방에서 튀어나온 리자드가 양 팔을 벌린 채 제스퍼의 앞에 섰다. 심미안적인 눈이 있을것. 왜 조항에 그런 항목이 들어갔는지 제스퍼는 절절히 이해했다. 리자드 아서 오펜하이머 경은 색조와 옷에 대한 센스라곤 죽어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왜 한가지 색상으로 통일해야하는지 왜 좋아하는 색만으로 옷을 입을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 옷에는 이 가방이 핵심인거예요."


튀는 선홍색의 하트모양 가방을 들고(하트모양을 따라 가방 주위에 성게같은 붉은 술이 달려있었다. 지금 그녀는 문상객이 입을법한 검은색 옷을 입고있었다.)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제스퍼에게 말했다. 제스퍼는 한순간 그녀를 외면하고 싶어졌다. 엘레멘탈과 지지고볶고 살며 별 꼴을 다봐온 그이지만, 엘레멘탈은 리자드처럼 의복을 차려입는데 그리 잼병인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간당 2만 카스트

의 값은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고 제스퍼는 그녀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제스퍼가 옷장 앞에 섰다.


"경의 목적이 무엇이죠? 정확히 소문을 내서 얻고자 하는 그 사람의 반응 말입니다."


"음, 일단 날 자기 아래의 사람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명의 동등한 마법사로 보이고싶은거예요. 더불어 나한테 더 이상 다가오지도 않았으면 좋겠고요. 나는 지금 그로인해 엄청, 엄청나게 곤란한 상태거든요."


"그렇다면 한가지 말씀 드려도 될까요?"


어서 해보라는 듯 리자드가 고갤 끄덕였다.


"일단 옷을 어떻게입던 그건 개인의 자유지만 그래도 사회에 통용되는 최소한의 범주란게 있는 법입니다. 경의 모습은 나쁘진 않지만 그런 범주에서 상당히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경이 나쁘다는게 아니라 사람의 겉모습이 주는 신뢰감이랄지, 어떤 느낌 같은게 있는법이니까요."


리자드가 고갤 끄덕였다. 별로 납득한 눈치는 아니다. 설명을 달리 해보면 어떨까?


"단벌신사로 유명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좋은 옷을 입고 나타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요? 그런 것과 비슷한 겁니다. 게다가 튀는 사람은 쉽게 표적이 되기 마련입니다. 관찰해본 결과 경은 극채색의 색조를 이용하길 좋아하고, 과도한 장식이 달린 물품들을 애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뭐든지 과한 것은 자칫 사람을 가볍게 보이게 만들수도 있습니다.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수월한 목표의 완수를 위해서요. 제스퍼는 이 말을 덧붙이는것도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평생 다르게 다니라는건 아닙니다. 결국 마학모에 보여주기용 아닌가요?"


"맞아요. 마학모까지만 어떻게든 버티면 될 일이죠. 제스퍼 방금 완전 전문가 같았어요."


리자드의 눈이 신뢰감으로 빛났다. 엘레멘탈이 아직 인간 마법사일 적, 세세한 보조는 제스퍼의 몫이었다. 마학모가 열릴 때면, 제스퍼는 그럴싸한 옷을 찾아 밤낮으로 옷가게를 들쑤시고 다녀야했다. 하지만 여자의 옷을 골라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일단 부딪쳐보기로 했다. 어쨌든 결국 옷 아닌가.


"옷장 좀 봐도 될까요?"


의외로 리자드에겐 정상적인 옷들 또한 많았다. 예쁘진 않더라도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을 법한 옷 또한 있었다. 옷장을 훑는 제스퍼의 꼼꼼한 시선에 리자드가 수줍은듯 작게 소근거렸다.


"그건 물려받은 것들이에요. 헤지는게 아까워 안 입고있던 것이고요. 소중한 거니까요."


"정말요?"


제스퍼의 되물음에 리자드가 멀찍이 시선을 돌렸다. 그냥 솔직히 마음에 안든다고 하면 될걸. 사람에겐 저마다 어울리는 색들이 있다. 옷이 날개라는 얘기 또한 자신과 잘 맞는 색상의 옷을 입었을 때의 얘기다. 처음 알게된건데 리자드의 눈은 옅은 보랏빛을 띄는 미묘한 청색이었고, 머리칼은 갈대의 깃처럼 부드러운 갈색을 하고있었다. 피부는 어두운 편도, 그렇다고 너무 흰 편도 아니다.


"흠."


이어지는 관찰에 리자드가 불편한듯 목을 가다듬었으나 제스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리자드에겐 너무 튀고 밝은 극채색보다, 따뜻하고 옅은 난색 계열의 색들이 잘 어울릴것 같았다. 크림색 드레스가 꺼내졌다가 다시 농에 처박혔다. 수수한 드레스는 격식있는 자리에 참석할 때 입는게 좋을것 같았다. 외출복으론 아니다. 구석에 걸려있는 연보라색 드레스가 제스퍼의 눈에 들어왔다. 흰색 줄무늬가 가미돼있는 연보라색 드레스는 리자드의 피부와 잘 어우러졌다. 게다가 모자와 한쌍이라 리자드의 일탈도 막을 수 있었다.


"이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제스퍼가 옷걸이채로 옷을 들이대자 리자드가 무어라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나름 생각하는게 있는 모양이었다.


"이 김에 호칭을 정하죠."


정류장으로 이동하며 리자드가 건넨 제안이었다. 그러고보니 연인행세를 하는 사람치고 두 사람의 호칭은 너무 딱딱한 구석이 없지않아 있었다. 제스퍼는 부를 일이 있으면 여전히 그녀를 경으로 호칭했고, 리자드는 저기요나, 여기요나, 마지못해 제스퍼 하고 작게 이름을 불렀다. 정류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마침 전차가 도착했고 두 사람은 끄트머리에 있는 이인용 좌석에 팔을 맞대고 나란히 앉았다.


"평소 선호하거나 불리는 애칭이 있으신가요?"


"아뇨. 아카데미에 있을 때는 교수님으로 불렸었고··· 동료 마법사들이라고 할 이들도 별로 없지만 대외적으로는 아서경이라고 불려요. 아무래도 리자드보단 중간 이름인 아서가 부르기 더 좋으니까요. 오펜하이머 경이라고도 부르는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이 예의없게 성씨로 사람을 불러요? 내가 그렇게 부르면 화낼거면서."


리자드의 표정이 한순간 험악해졌다. 아무래도 떠오르는 누군가 있는 모양이군. 제스퍼는 잠자코 있었다. 뭔가 떠오른게 있는지 그녀가 한손에 주먹을 탁하고 내리쳤다.


"그러고보니 애칭이 있긴 했어요. 리지요."


"리지?"


"네. 리지요. 고모가 날 그렇게 불렀어요. 주로 칭찬하거나 애정섞인 조언을 할 땐 말예요. 아무래도 리지가 낫겠어요. 좋아, 내 호칭은 정해졌고. 그럼 나는 그 쪽을 어떻게 부를까요?"


흠. 리자드가 고민에 휩싸였다.


"자기?"


"아뇨. 그냥 제스퍼라 부르는게 가장 자연스러울 겁니다. 자기라는 표현은 지금 상황에 너무 작위적인것 같으니까요. 게다가 자기라는 호칭을 할 때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겠습니까?"


제스퍼는 제스퍼 그대로 낙찰됐다.


*


왕실소속 서북부 아카데미 게나는 마법을 비롯, 종교와 일반 학문들도 가르치는 종합 학교였다. 중부 칼산 지방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학자 테아논이 기반을 닦고 왕가가 그 가치를 인정해 지원을 해주는 곳으로도 아주 유명했다. 교수진들은 거진 일류로 기본적으로 지식이 풍부하고 탐구심 및 이해와 포용력이 넓은 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법학부와 일반학부가 한 곳에 위치한 최초의 아카데미였고 때문에 마법사는 아니더라도 마법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일반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아카데미는 오가는 학생들로 빈틈이 없었다. 부지가 넓었지만 그만큼 수강 하는 학생들도 많았고 저마다의 시간표로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카데미 초입, 성자 테아논의 생각하는 청동상 앞에서 리자드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힐끔거리며 제스퍼를 쳐다봤지만 리자드에겐 그런건 보이지도 않는듯 했다.


마법학관은 일반 학부와 걸어서 이십분거리 떨어진 숲 속 제 2동관에 둥지를 틀고있었다. 위험한 일은 없지만 만에 하나, 혹시 모를 모종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인것 같았다. 점심시간이라지만 마법사들, 혹은 그를 꿈꾸는 학생들로 건물의 내부는 붐볐다. 그러나 리자드가 들어서기 무섭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제스퍼마저 따끔따끔한 공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앞서가는 리자드는 둔한건지, 혹은 그런 척을 하는건지 아랑곳않고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대단한 건물이었다. 뻥 뚫린 중앙 홀의 천장은 온통 검은색의 오닉스로 도배돼 있었고, 허공엔 행성들이, 그 주위로 위대한 마법사들의 별자리가 각기 황금빛과 푸른빛을 발산하며 시간에 따라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제스퍼는 리자드에 대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추론을 시작했다. 리자드는 실력있는 내마법사다. 그러나 실력과는 달리 어째선지 일반인들을 상대로 부업을 뛰고있다. 한때 아카데미의 보조강사였지만 모종의 이유로 잘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떤 잘못을 저질렀거나, 혹은 누군가 높은 사람의 심기를 건드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리자드가 제스퍼를 부른 원인일 가능성도 컸다.


"제스퍼!"


리자드가 손짓했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경직돼 있었다. 힐끔거리는 시선이 재차 따라붙었다.


"시선들은 무시해요."


리자드가 그에게 소근거렸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앞만 보고 걸었다. 그녀는 일부러 빙 돌아 마학관들을 가로질렀다.


"이제 돌아가는 겁니까?"


"정말 그러고 싶지만, 들러서 가져가야 할 게 있어요. 물건들이 아직 캐비넷에 있거든요. 게다가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옷매무새를 바르게 정돈하며 리자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펜하이머!"


그러기 무섭게 누군가 우렁찬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홀의 청동상 너머 붉은 머리를 한 남자가 그녀를 보고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남색 망토에 어깨에 매단 은장식, 방금 전 교수와 비슷한 복식으로 보아하니 학생이 아닌 교수진 쪽인듯 싶었다. 남자는 달리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리자드와 제스퍼에게 다가왔다. 제스퍼는 느린 걸음으로 테라스 아래의 구석진 곳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오펜하이머 거기 서!"


"제스퍼 만약 내가 도망가려거들랑 나 좀 붙잡아줘요. 알겠죠?"


작고 빠르게 속삭인 뒤 리자드가 남자를 향해 뒤 돌았다. 리자드의 어깨가 긴장하는게 똑똑히 보였다. 그녀는 한 팔로 다른 팔을 움켜잡았다. 남자가 리자드의 앞에 섰다. 달려오느라 남자의 숨은 거칠었고, 비뚜름하게 걸린 안경은 남자의 사나운 인상을 배가시켰다.


"안녕 네드.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잘 지내고 자시고, 여기가 어디라고 뻔뻔하게 낯짝을 들이대? 네가 한 짓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수습해야할 일 천지야. 책임을 지러 온거야? 아니면 염장지르러 온거야?"


"내 물건들을 가져가려고 왔어. 너무 갑작스레 짤리는 바람에 물품을 챙길 겨를이 없었거든."


"어쨌든 그럴 줄은 알았지만, 사과하러 온 건 아니네. 그렇지?"


남자는 리자드를 무슨 철천지 원수처럼 쳐다봤다. 어떤 전후사정이 있었던 간에 그리 좋은 일은 아님이라, 제스퍼는 유추해볼 수 있었다. 리자드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냥 무시하고 가는게 좋을것 같은데, 제스퍼는 리자드가 당황하거나 긴장하면 미소를 짓는 습관이 있다는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점은 네드라 불린 주근깨 투성이 남자를 더 화나게 하는데 일조했다.


"어쨌든 좀 비켜 줘. 물건만 가지고 갈게. 제스퍼 가요."


리자드가 움직이자 남자가 고집스레 앞을 가로막았다.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남자의 눈엔 리자드 밖에 안보이는 듯 했다. 그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여긴 네가 가져갈 물건같은건 없어.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시지 그래? 나 지금 많이 참고있거든."


"대체 네가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잘려서 너한테 이득인거 아냐? 그렇게 염원하던 강사 자리에 앉게 됐잖아. 네가 왜 참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럴 이유도 없는데."


"야- 너!"


감정을 실은 손이 리자드의 멱살을 잡아채기 전, 허공에서 가로막혔다. 제스퍼가 나선것은 아니다. 그가 나서려 했지만, 공교롭게도 누군가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끼어든 탓이다. 제 삼자는 눈썹이 짙고 키가 큰, 거친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망토와 벨벳으로 이뤄진 옷을 입은 마법사들과는 달리, 남자는 청색의 단벌로 된 지저분한 작업복을 입고있었다. 남자에게선 기름 냄새와 담배 냄새가 동시에 풍겼다. 활화산 같은 기세는 어디로가고 네드는 남자의 등장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애들 싸움도 아니고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트래비스 교수님."


"아서 경!"


리자드의 목례에 중년 교수의 눈썹이 의외인듯 올라갔다. 그러나 네드와는 달리 남자는 리자드를 보고도 어떤 감정도 표출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정말 의외라는 듯 리자드에게 인사했을 뿐이다.


"음, 그 후로 소식을 못 들은지 꽤 됐습니다만 그간 잘 지냈는지?"


"네 걱정하실것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놓고간 물건들을 가지러 왔어요."


"그렇군. 편지를 보냈다면 내가 소포로 보내줄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 참, 그건 그렇고 이번 마학모에 참석하나?"


"아, 네 초대장이 왔거든요. 교수님은요?"


"그래? 만약 안 왔다면 내 초대장을 양도하려 했는데 말이지. 밀린 일이 많아서 나는 이번에 불참할지도 모르겠어. 그 전까진 끝나면 좋으련만 기약이 안보이는군."


갑작스레 이어지는 안부인사에 네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트래비스가 툽툽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마학모에 부름 받는 마법사들의 명단이 매해 똑같은건 아니었다. 그 해의 평판과 실적, 업적에 따라 종합적으로 순위가 매겨진 후 윗선의 선별을 거쳐 초대장이 돌려졌다. 그렇다고해서 초대를 못받은 이들이 마학모에 참석할 방법이 아예 없는건 아니었는데, 초대장을 받은 사람의 대리인으로서, 그러니까 합의하에 초대장을 양도받으면 마학모에 참석 가능했다.


"어쨌든 오고싶으면 부담갖지 말고 오도록 해 아서. 내 일손 부족한 실험실은 늘 열려있으니까."


"네, 그럴게요."


리자드가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화제 밖으로 튕겨나간 네드가 불만스레 툴툴거렸지만 감히 무리를 멋대로 이탈할 수 없었다. 제스퍼는 세 사람간 서열 관계도를 그려볼 수 있었다. 신장 190센치는 될법한 이 키 큰 중년 사내는 아무래도 한참 선배인것 같았고 네드와 리자드는 같거나 혹은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대화의 소재가 고갈되자 트래비스의 시선이 자연스레 리자드의 뒤에 선 제스퍼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이 분은?"


"아참!"


리자드는 뒤늦게사 제스퍼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제스퍼는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는걸 알았다. 리자드가 얼른 외쳤다.


"제 남자친구에요!"


흠? 잘 못들은 것처럼 고개를 앞으로 뺀 트래비스의 반응은 둘째 치고 네드의 눈이 튀어나올듯 커졌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리자드와 제스퍼를 번갈아 빠르게 쳐다봤다.


"남자친구라고?"


"경은 이성한텐 흥미가 없을줄 알았는데?"


네드와 트래비스가 동시에 한 말이었다. 그러나 네드는 이번만큼은 트래비스의 앞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잽싸게 앞으로 나섰다.


"리지의 남자친구 제스퍼라고 합니다."


제스퍼가 건조하게 말했다. 네드의 얼굴이 흰색에서 파란색, 끝내는 붉은색으로 변했다. 네드가 바들바들 떨기 시작하는 바람에 트래비스 또한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분노로 형형한 눈동자가 각인이라도 하려는 듯 제스퍼를 훑었다. 노기는 끝내 리자드에게로 향했다.


"정말 기가 막힌다. 다른 사람들이 다 네 문제로 고생할 동안 너는 뻔뻔하게 여가나 즐기고 있었단 말이지? 팔자 한번 늘어졌네. 죄송합니다만 트래비스 교수님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저 여자의 치가 떨리는 뻔뻔함 때문에 더 이상 여기 있을수가 없군요. 그럼."


홱 소리가 나게 뒤 돌아선 네드가 빠른 걸음으로 홀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 나도 슬슬 강의 준비를 하러 가야해서 말야."


천장 너머 자리를 바꾼 별자리를 보고 트래비스 교수가 말했다.


가져올 물건이란건 그리 거창한것들이 아니었다. 붉은색 바구니 안에 담긴건 마법 도안이 그려진 양피지 묶음과 불러낸 이주 생물을 가둬둘 수 있는 아교 가루, 손목 보호대, 잉크와 펜, 마기를 모으는 자수정이 그것이었다. 직접 그린 도안만 빼면 다 마법 물품점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것들이 전부였다. 애당초 리자드의 목적이라함은 이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스퍼를 알리기 위해 고된 강행군을 택한 것이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반응들이 저런 겁니까?"


마학관에서 나오기 무섭게 제스퍼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리자드는 맥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김빠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잘못이라도 저질렀으면 몰라요. 나는 내마법사로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수행한 것 뿐예요. 제스퍼의 스승님이 마법사라고 했죠? 그럼 들어본 적 있을지도 몰라요. 이주생물 치환 사건요. 거기 얽힌게 나거든요. 제스퍼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해야 할 일이었어요."


리자드의 표정이 진지했다. 이주생물 치환 사건? 엘레멘탈이 마법사회와 교류를 끊은지 10년하고도 몇년이 지났다. 리자드는 그 점을 모르고 있었다. 그 사건이 뭡니까? 물어보려던 차였다.


"아서!"


트래비스가 거구를 움직여 달려오고 있었다. 언제 긴장을 풀었나싶게 리자드가 표정을 추슬렀다.


"교수님?"


"아무래도 빈말로 들은것 같아서 말이야. 딱히 하고있는 일이 없으면, 내 실험실에 와서 일 좀 도와줬으면 해."


"네?"


갑자기 왜- 리자드가 더듬거리자 트래비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번 실험에 실력있는 내마법사가 필요한데, 생각해보니 그 조건에 적합한게 경밖에 없더라고. 어차피 경이 무슨 일에 휘말렸던 나는 별로 신경 안쓰고 귀찮은 일에 얽매일 위치도 아니니까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어. 마음 내키면 오라고. 밖에서 일하는 것보단 아무래도 여기서 일하는게 돈도 그렇고 환경도 그렇고 훨씬 나을테니까."


교수님! 학생 하나가 소리쳐 부르자 트래비스가 휘휘 손을 흔들었다. 그는 어느 때고 상관없으니 오고싶을때 오라는 대인배같은 말을 남긴 뒤 왔던길을 따라 돌아갔다. 방금 같은 수모를 당해놓고도 마학관을 쳐다보는 리자드의 시선이 어딘가 모르게 흔들렸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그녀가 가방끈을 꽉 붙들었다.


"솔직히 나는 가고싶은 마음은 없어요. 어떻게 해야할까요? 제스퍼같으면 어쩔거 같아요?"


"나라면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할겁니다."


일단 대충 대답해주긴 했지만 리자드는 제대로 듣는 얼굴이 아니었다. 하긴, 한번 찍혔다가 다시 있던 환경으로 돌아가는건 어려운 일일터다. 조언이 필요하다면 상황에 맞게 해주겠지만, 결정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그는 수탉풍향계 집까지 리자드를 데려다줬다. 리자드는 힘없이 손을 흔들고선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아무래도 기운이 없는듯 싶었다. 제스퍼는 정류장까지 걸어갈까하다 생각을 바꿨다. 정류장까진 한참을 걸어야한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리자드의 집은 언덕 아래 있었고 동네는 집과 집마다의 간격이 무척 넓었다.


그가 손을 뻗자 허공에 빛나는 선들이 도열했다. 이내 하나의 문을 이뤘고 제스퍼가 힘껏 밀자 너머로 아득한 통로가 나타났다.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휘몰아치는 통로 저편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제스퍼 왔냐?"


통로를 건너 반대편에 도달했을 때, 엘레멘탈이 소리쳤다. 몸을 버리고 기계기사에 의지하는 신세이긴 하지만 그의 감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네 스승님. 방금 도착했습니다."


실로 오래간만의 이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옷에 달라붙은 마기를 털며 방 안에 사뿐히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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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느린 밤 6 18.07.03 70 1 20쪽
20 느린 밤 5 18.06.30 64 1 15쪽
19 느린 밤 4 18.06.29 86 1 10쪽
18 느린 밤 3 18.06.27 66 1 10쪽
17 느린 밤 2 18.06.26 92 1 10쪽
16 느린 밤 1 18.06.24 123 1 23쪽
15 느린 밤 18.06.23 82 1 19쪽
14 마학모 18.06.20 96 1 25쪽
13 전야 18.06.19 102 1 17쪽
12 일렁임 18.06.18 67 1 13쪽
11 불쾌한 만남 18.06.17 103 1 15쪽
10 정체성 18.06.16 80 1 14쪽
9 역류 18.06.16 210 1 13쪽
8 움틈 18.06.13 93 1 16쪽
7 교수의 제안 18.06.12 119 1 11쪽
6 움직임 18.06.09 130 2 17쪽
5 어떤 사실 18.06.08 96 2 17쪽
» 첫걸음 18.06.06 91 2 22쪽
3 진의 18.06.03 114 2 19쪽
2 만남 18.06.02 84 2 9쪽
1 방문 18.06.01 160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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