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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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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로즈988
작품등록일 :
2018.06.01 22:23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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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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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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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글자수 :
170,468

작성
18.06.08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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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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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7쪽

어떤 사실

DUMMY

"스승님 이주생물 치환 사건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주말은 인력 사무소 또한 쉬는 날이다. 머랭을 밀가루 반죽에 섞으며 제스퍼는 은근슬쩍 스승에게 물었다. 엘레멘탈은 요즘 날렵한 버전의 기계기사를 만드느라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제스퍼는 슬쩍 스승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에 잠겨있는 뒷모습이긴 하다만 정신이 다른 세상에 가있진 않았다.


"이주생물 치환 사건?"


한참 후 답이 돌아왔다. 제스퍼는 밀가루 반죽에 물을 묻혀 면보로 덮어놓고 미리 다듬어둔 재료를 꺼내 치대기 시작했다.


"네. 근래, 혹은 몇년 사이 내마법사들 사이에서 시끄러웠던 일이라고 하는데 혹 아시는게 있으신가 해서요."


흐음. 엘레멘탈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손으로 투구의 턱부분을 쓸었다. 가슴의 보라색 빛이 생각에 잠긴듯 느리게 환해졌다가 어두워졌다.


"근래 혹은 몇년 사이 내마법사들간 시끄러웠던 사건이라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 근래는 아니지만 예전에 난리가 난 일이 하나 있긴 했지. 용을 발견한 사건 말이다."


"용이요?"


이주 생물군 중에서 최상위계층에 속하는게 있다면 그건 바로 용이었다. 이주 생물들이 지나는 통로가 어떤 이유로, 어떤 경로로 만들어지는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심계에서 현계로 넘어올 수 있는 이주 생물의 수나 크기엔 일정한 규격이 자리했다. 이주 생물들은 마기 응집체가 생물로 변환한 모습으로, 마학회는 이주생물들을 마기의 크기, 즉 몸집에 따라 1등급, 2등급, 3등급으로 분류했다.


심계에서 현계로 넘어오는 대표적 이주생물군은 사람과 비슷하거나 작은 크기, 그보다 월등히 작은 크기를 지닌 3급에 속하는 개체들로 마법사들은 그것을 근거로 심계와 현계를잇는 통로가 특정 이상의 크기를 가지지 못한다 예측했다.


2급이나 1급의 이주생물이 넘어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일은 마법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만큼 드문 일이었다. 그 중 용은 1급의 최상위 계층의 이주생물이었다.


"그래 한때 용이 넘어왔다고 마법계가 난리가 난 적이 있었어. 특히 내마법계가말야. 제스퍼 너도 들어봤을텐데? 그땐 내가 마학회에 교류를 이어갈 때였으니까 말야."


그러고보니 뭔가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이십년 하고도 몇년 전쯤 용이 넘어왔다는 소식이 마법계를 강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소식은 왔던것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꺼져버렸다. 누군가는 진상확인을 해야한다고 소란을 피웠고, 누군가는 마학회가 진실을 은폐한다고 생각했지만 흐지부지 넘어갔던 사건이었다.


"그건 잘못된 정보였던걸로 압니다만."


"모르지. 마학회가 움직이긴 했지만 그 이후로 별다른 말은 없었어. 항간의 소문대로 누군가 혼란을 위해 흘려보낸 거짓말일수도, 은폐를 한걸수도 있겠지. 용은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생물이니까 말이다."


평범한 다른 이주생물에 비하면 용은 끓어넘치는 마기 덩어리다. 그렇게 알고있었다.


"어쨌든 스승님은 이주생물 치환 사건에 대해 모르신다는거군요."


"꼭 알아야하는거냐?"


어쩌면 리자드가 말한 이주생물 치환 사건은 그리 큰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녀 혼자만 회자하고있는 일일수도.


*


"어서와요!"


문을 두드리기도 전 갑작스런 외침에 제스퍼는 깜짝 놀랐다. 리자드가 이층 창문에서 그를 보고 손을 휘저었다.


"문 열려있어요 들어와요!"


문을 열자 엄습하는 먼지폭풍에 제스퍼는 얼른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 집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목재 상자들이 집안 여기저기 널려있는 가운데 그 상자에서 나온 물건들이 융단처럼 늘어져있었다. 리자드의 발소리가 저쪽에서 쿵쿵 울렸다가 금세 이쪽으로 달려왔다.


"이게 대체··· 어디 이사라도 가는건가요?"


"아뇨. 이사를 여기로 온거죠. 뒤늦은 이삿짐 정리에요. 원랜 진작 다 끝냈어야 할 일인데 혼자 하려니 엄두가 안나서요. 원랜 아래 거리의 좀 더 넓은 집에 살았었어요. 그런데 갚을 돈도 있고, 혼자 살려니 넓은 평수가 감당이 안되기도 하고 해서 이리로 이사온거죠. 집이 좀 심심해서 장식좀 해봤는데 어때요?"


그러고보니 못본 새 복도에 그림이 걸려있는등, 벽난로 위에 촛대가 올라있는 등 바뀐 점이 제법 보였다. 하지만 말하지 않고는 눈치채기 어려운 점이라 제스퍼는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옷 입는데서부터 알아봤지만, 리자드는 장식을 하는덴 영 소질이 없는것 같았다.


리자드가 종종걸음으로 상자 하나를 거실로 가져왔다. 뭐가 들었나 했더니 각양각색의 절임병들이었다. 탁한 주황빛의 액체 안에 얽혀있는 뿌리식물들이 음침한 분위기를 풍겼다. 리자드는 그 병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찬장 안에 집어넣었다.


"다 몇년 지난 것들이에요. 고모가 만들어주셨죠. 개박하, 독양파, 자스민, 계피랑 각종 약재들··· 먹어볼 엄두는 못냈지만요."


시선을 느낀 리자드가 뿌듯하게 설명했다.


'보통 장식 그릇들을 놓지 않나.'


"뭣 좀 도와줄까요?"


리자드가 듣던 중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제스퍼는 아침 나절부터 오후까지 상자를 개봉하고, 물건을 정리하고 집안을 쓸고닦으며 보냈다.


얼추 발을 딛을 수 있을 정도로 정리가 끝나자 저택은 제스퍼가 처음 왔을 때보다 한층 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것 같았다. 특히 벽에 걸린 그림들은 하나같이 우울하고 파괴적인 내용을 담고있었다. 침몰하는 배와 선원의 몸을 붙잡은 크라켄, 바다뱀과 싸우는 신들···. 하나같이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풍겼던 것이다.


리자드가 제스퍼의 옆에 섰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부친 채 탐탁지 않은 얼굴로 전망을 살폈다.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된것 같네요. 고모님이 계셨으면 이것보다 좀 더 나았을테지만요."


"이것보다 좀 더 나았을 거라고요?"


"네, 고모님은 심미안이 있으셨거든요. 뭔가 이상한데."


"일단 그림은 다 떼는게 좋겠습니다."


리자드도 동의하는 듯 고갤 끄덕였다. 아무래도 리자드의 괴랄한 센스는 유전인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트래비스 교수의 제안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뭐, 생각만 해봤지 아직 이렇다할 답은 내리지 못했어요. 집도 손봐야 되고,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요."


리자드는 아카데미에 다녀온 이후로 어쩐지 풀이 꺾여있었다. 제스퍼가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막 할 일이 생각난듯 부리나케 움직였다. 제스퍼는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진전이 있을거란걸 알았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원치않게 아카데미에서 퇴출당했다고 했죠? 그리고 그 주범은 아마 당신을 물먹인 그 남자일 거고요, 한번 눈도장 찍은 걸로는 현 상황에 별 진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마학모가 열리고나서 그 후는요? 그 남자에게 당신이 연인이 생겼다는걸 보여주고 그 다음은요?"


"그러는 제스퍼는 왜 그렇게 적극적인데요? 사실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그냥 연인 행세의 대역일 뿐이고."


허를 찌르는 그 말에 제스퍼는 잠시 할 말이 없어졌다. 제스퍼는 될 수 있으면 방관자 역할을 자처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냐고? 아마, 리자드의 행동이 예전 그의 스승과 몹시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했다.


"어쨌든 말예요, 나는 네드를 만난것 만으로도 기가 다 빨린 기분이라고요. 네드는 그 남자의 최측근이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그 사람한테도 소식이 전해졌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은 없는겁니까?"


"그 생각은 하고 있긴 했지만요-"


"트래비스 교수는 지금으로써 리지 당신이 유일하게 본래 자리로 돌아갈 동앗줄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든 트래비스 교수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을겁니다. 그는 차원 연구계의 유일한 대가니까요."


리자드의 눈이 커졌다. 집으로 돌아가 주말 동안, 제스퍼는 트래비스 교수에 대해 조사를 해봤다. 엘레멘탈이 마학회에서 활동하던 시절 제스퍼가 만든 인명사전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이름을 잘 외지 못하는 스승을 위해 제스퍼가 손수 만든 것으로, 트래비스의 이름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가 차원연구계의 하나뿐인 수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스퍼는 그 사실은 생략하기로 했다.


"트래비스의 아래서 입지를 다지세요. 마학모까지 남은 기간이 얼마 안됩니다. 세력을 만드세요."


"잠깐만요-"


강압적인 투에 리자드가 어깨를 모았다. 잠깐만이고 자시고, 제스퍼가 막 공격을 퍼부으려는 찰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웬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끄아아아아악! 만드라고라가 비명을 지르자 사람들이 고통에 몸을 뒤틀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은 당연히 만드라고라를 붙들고있던 리자드였다. 그녀가 귀를 붙잡으며 나뒹굴자 반쯤은 끌려나왔던 만드라고라가 얼른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법 생물은 제 전문이 아니에요!"


리자드가 통한의 외침을 질렀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가래를 든 장정들은 리자드가 다시 만드라고라를 뽑아주길 기다리는 눈치였고 리자드는 이를 갈았다. 다시금 이어질 싸움에 제스퍼는 얼른 귀를 막았다. 이파리가 어른 종아리만큼 자란 만드라고라는 끈질기기가 무소 심줄같았다.


리자드가 고갤 끄덕이기 무섭게 장정들이 가래를 들고 모여들었다. 하나, 둘, 셋! 두 손으로 야무지게 붙

잡은 만드라고라가 끌려나오기 무섭게 남자가 들고있던 가래로 만드라고라의 뿌리를 잘랐다. 땅과의 토대가 끊긴 만드라고라가 울음을 뚝 그치고 언제 그랬냐는 평범한 채소로 돌아갔다. 심술궂은 표정을 하고있다는게 다른 뿌리 식물과의 차이라면 차이였지만.


리자드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앞으로 남은 만드라고라는 40여개. 아찔한 숫자였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생님! 도와주세요!"


울상으로 들이닥친 사람은 도시 외곽의 농사꾼 한스였다. 그의 가족은 돌담길을 낀 밭을 사이에 두고 한집 건너 한집이 살았다. 한스의 윗집엔 형이, 아랫집엔 동생이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어머니인 루스 부인은 밭 꼭대기의 작은 집에서 홀로 기거했는데 파종시기를 맞아 모든 형제들이 어머니를 뵙지 못한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농사 일에 완전히 손을 뗐다. 집 앞의 작은 텃밭에 먹을만치의 채소를 심어 가꾸는게 소일거리였다.


'당근 좀 가져가렴.'


어느 날 어머니의 집에 갔을 때, 그는 경악할만한 사실을 발견한다. 루스 부인이 심은건 당근이 아닌 만드라고라였다. 몇십년간을 농부의 아내로 살아온 어머니이다. 그러고보니 요즘 새로운 농법이 유행한다는게 떠올랐다. 까마귀를 쫓기 위해 개량된 만드라고라를 심는 게 농업인들 사이에 화제였다. 만드라고라의 씨앗은 당근의 것과 비슷하다. 한스는 농협회에 참가했다가 한줌의 만드라고라 씨앗을 얻어온 사실 또한 기억해냈다. 만드라고라의 씨앗이 든 병에 별도의 표기를 안해놓은것도 말이다.


한스는 만드라고라를 수확할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개량된 종이라 해도 엄연히 마법식물. 그는 어디선가 만드라고라의 비명을 계속해서 들으면 눈이 멀고 귀가 막힌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대량의 만드라고라다. 방치하면 그만이려니 생각도 해봤지만 만드라고라는 어지간해선 죽지않는다. 겨울이 오면 그것들은 땅의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가 봄에 새로운 싹을 틔울 것이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만드라고라들은 하나같이 그 크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큰 일이라고 생각한 한스는 다짜고짜 리자드의 집에찾아온 것이다.


"죄송하지만 마법 생물은 제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게 아녜요."


리자드는 엄연히 내마법사 그녀가 다루는건 타세계에서 건너오는 이주 생물과 그 마기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한스는 다급했다. 만드라고라를 사용하려면 시청에서 허가를 받아야한다. 특정 목적 외에 일반인이 마법생물을 취급하는건 엄격히 제한돼 있었다. 만약 시청에 신고를 않고 몰래 심은것이 적발된다면, 꽤 큰 벌금이 물려질 터였다. 그 중 만드라고라는 한뿌리 당 10만 카스트로 액수가 꽤 높은 편이었다. 밭에 심겨져 있는건 못해도 70여뿌리. 한스의 얼굴이 창백한 것도 이해가 됐다. 리자드는 어쩔 수 없이 도와주기로 했다.


얼추 일을 끝냈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리자드는 완전히 녹초가 됐다.


"불쌍한 것들···."


수확물을 본 루스 부인의 작은 눈망울에 물기가 고였다. 소리치고 몸부림 친다는 점에서 부인은 만드라고라를 동물과 비슷하게 본듯싶었다. 감상과는 별개로, 부엌으로 들어간 만드라고라들은 깨끗이 손질 돼 유리병에 설탕과 함께 차곡차곡 재워졌다. 까마귀를 쫓는 것 외에도 민간 약용 식물로도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작지만 사례비입니다."


50만 카스트의 수고비가 리자드의 손에 쥐여졌다. 여전히 전문 마법사를 고용하기엔 턱도 없는 비용이었지만, 리자드는 오래간만의 거금에 그런것 따윈 신경쓰이지 않는 듯 했다. 한스와 그 형제들이 가는 길을 배웅했고, 돌아오는 길에 루스 부인이 쥐여준 음식들로 리자드와 제스퍼의 양 손은 무거웠다. 리자드는 지쳐보였지만 내심 기분은 좋은 모양이었다. 제스퍼는 산통을 깨고싶진 않지만 그녀와 못다한 말들이 있었다.


"트래비스 교수의 제안은 생각 좀 해봤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아카데미엔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리자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굶어죽을 일 없는 요즘시대엔 고립돼서 사는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 그녀가 정말 원해서 마법인들의 사회에서 나왔다면 제스퍼는 아무말 하지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다가가고자 하는데도 배척받는거라면 그건 확실히 문제가있었다.


"리지, 어떤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지금 하는 일이 나쁘다거나 급의 저하를 따지자는게 아닙니다.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조금이라도 없는겁니까?"


리자드는 답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라 제스퍼는 더 이상 압박하지 않기로 했다.


시드 거리의 저택에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꽤 지친 상태였다. 수탉 풍향계가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빛났고 한나절 동안 기척 없던 집안에 늦게사 불이 들어왔다.


"세시간 더 일한건 얼마쯤 더 쳐서 계산해줄게요. 음, 이왕 늦은거 뭣 좀 먹고갈래요? 아, 그럼 이것도 고용한걸로 쳐야할까요?"


제스퍼는 고갤 저었다.


"아뇨. 일은 끝난걸로 해두겠습니다. 지금은 개인 시간이라고 해두죠."


"그럼 앉아서 좀 쉬고있어요. 오늘은 얻은게 이것저것 많으니까 금방 끝날거예요."


루스 부인이 챙겨준 바구니 안엔 수제 소세지와 치즈, 갓 구운 빵과 잼, 수확한 채소들이 넉넉히 들어있었다.


"뭣 좀 도와줄까요?"


"아뇨 괜찮아요. 부엌에 누가 있으면 더 번잡해서요. 정 도와주고 싶으면 거기 탁자에 짐들좀 바닥으로 치워줄래요? 먹을 자리는 만들어야 하니까요."


한스의 부름을 받은건 짐정리를 하던 도중이었고, 많이 깨끗해졌다지만 거실 쪽은 아직 자잘한 물건들이 쌓여있는 상태였다. 제스퍼는 소매를 걷어 쌓여있는 상자를 하나씩 하나씩 정리했다. 자잘한 문서들과 오래된 편지들, 낡은 책들이 상자 안에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리지 아서 오펜하이머 양에게. 제스퍼는 비죽 튀어나온 편지 사이에 우아하게 휘갈겨쓴 글씨를 발견했다.


'고모가 날 리지라 불렀어요.'


그러고보니 의뢰인인 리사 율머 오펜하이머는 그 후로 통 연락이 없는 상태였다. 기다리면 어련히 말을 해주겠거니 생각했지만, 언급이 없기는 리자드 쪽도 마찬가지였다. 리자드는 붙어있으면 말이 많은 수다쟁이였지만, 그녀의 이야기 속 가족은 한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다. 제스퍼는 먼지 쌓인 편지를 꺼내 들었다. 편지라 생각했던건 알고보니 사진으로, 제스퍼는 뒷면의 글자를 본 것이었다.


사진 속엔 세 사람이 있었다. 좀 더 앳된 얼굴의 리자드와 붉은 머리의 청년, 제스퍼는 그 붉은 머리의 청년이 안경을 안 쓴 네드라는걸 금방 알아봤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가운데 선 금발의 남자··· 제스퍼의 눈이 커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머리가 짧긴 했지만 그는 분명 마학모의 수장 기네비어 링어였다.


"거기 잔 좀 꺼내줄래요?"


제스퍼가 부엌으로 가자 소세지를 굽던 리자드가 한 말이다.


"기네비어 링어. 당신을 물먹인 남자라는게 설마 이 자입니까?"


굳이 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제스퍼는 리자드의 표정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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