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능구석 님의 서재입니다.

F급 무한재생 헌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새글

능구석
작품등록일 :
2023.11.26 04:32
최근연재일 :
2024.07.01 07:20
연재수 :
180 회
조회수 :
531,190
추천수 :
8,913
글자수 :
1,093,528

작성
24.01.15 07:20
조회
4,117
추천
69
글자
20쪽

55화

DUMMY

길고 험난한 S급 던전 레이드가 끝났다.

보스방의 끝에는 밖으로 통하는 출구가 생겼고 던전은 마치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선언이라도 하는 듯 모든 문과 비밀통로를 개방했다.


“야, 야, 좀 진정해봐, 진짜 지금 쳐들어가게?”

“굳이 미룰 이유도 없잖아?”


그런데 S급 던전 공략에 성공했다는 만족감과 기쁨을 제대로 만끽할 새도 없이 아린이는 곧장 자신이 가진 다른 문제에 들이받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여명길드였다.

이태민의 습격 이후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내심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그건 그런데, 이소은 헌터님이나 다른 사람이랑 어떻게 할지 대화를 좀 나누고 천천히 준비하는 건 어때?”

“준비할 게 뭐가 있어, 그리고 네 말대로면 이번 S급 던전 정산금도 위험한 거잖아?”

“그럼 적어도 내일 가든가⋯!”

“왜, 오늘 약속 있어?”


나는 일단 아린이를 조금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이미 작정하고 칼을 빼든 웨펀마스터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나도 피해자고 여명길드에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린이는 아직 전투의 열기가 식지 않아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는 흥분 상태였다.


만약 여기서 더 자극받고 흥분하면 김지호의 척추를 잡아 뽑는다거나⋯ 뭐, 진짜로 그런 짓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비이성적이고 극단적인 돌발행동을 벌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게 걱정되는 마음에서였다.


던전의 상황을 정리하고 뒷일은 맡긴 뒤 밖으로 나온 아린이는 곧장 여명길드를 향해 돌진했다.

S급 레이드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은 전국에, 전 세계에 빠르게 퍼졌고 도시는 그 잠깐 사이에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던전 공략을 끝낸 지 이제 1시간이나 겨우 지났는데 이미 전국에서 삶의 터전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행렬로 도로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잠깐 내려와 봐.”


물론 우리는 건물 옥상을 넘나들며 이동하고 있었기에 정체를 겪지 않았지만 나는 앞만 보고 달리는 아린이를 붙잡아 밑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저기, 죄송한데 생수 몇 병만 좀 얻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도로를 통제하던 군인 아저씨들에게 생수를 얻었고 나는 생수 뚜껑을 딴 뒤.


“어푸푸!”


그대로 아린이의 머리에 들이부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돌아다닐 거면 적어도 씻고 다녀라. 지나가던 애들이 네 모습 보면 정서 발달에 안 좋겠다.”


갑자기 물벼락을 맞은 아린이는 당황했지만 자신의 머리에 부은 깨끗한 생수가 검붉은 액체가 되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곤 고양이 세수로 얼굴과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붙은 마른 피를 씻어냈다.




***




아린이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즐거운 표정으로 축하해주는 여명길드의 헌터와 직원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길드에 입성했다.

하지만 아린이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레이드 지원 2부 사무실로 향했다.


“아린 헌터님! 축하드려요!”

“정말 고생하셨어요!”


그러자 직원들이 아린이를 반겨주었다.

그들 역시 딱히 뭐 아는 건 없는지 마냥 해맑게 아린이를 반겨주었다.


“부장님은 어디 가셨죠?”

“부장님이요? 글쎄요, 요즘 잘 안 보이시던데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김지호는 자리에 없었고 그것을 확인한 아린이는 곧장 건물 상층부로 향했다.

상층부는 대형길드의 핵심 부서와 주요 임직원이 근무하는 곳이기에 일반 엘리베이터로는 올라갈 수도 없을 만큼 보안이 삼엄했지만.


“몇 층 가십니까?”

“41층이요.”


아린이는 그 자체로 걸어 다니는 통행증이었다.

보안요원은 아린이가 오자마자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길을 열고 상층부로 통하는 보안 엘리베이터를 불러주었다.


- 땡.


41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앞에 또 한 번의 보안시설이 나타났다.


- 삐익! 삐익! 삐익!


아린이가 금속탐지기를 지나가자 시끄러운 경고음이 울렸다.

망치나 도끼 같은 큼직한 무기는 던전에 놓고 왔지만 아직 몸 여기저기에 단검이나 수리검 같은 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보안요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표정과 분위기로 지금은 그녀를 붙잡아서는 안 될 타이밍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 같았다.


“아, 아린 헌터님 축하드려요, 그런데 지금 이사님은 자리를 비우셨는데⋯.”


아린이는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은 비서실이 먼저 나오고 그 안에 진짜 사무실이 있는 이중문 구조였는데 먼저 우리를 맞이한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지만 아린이는 비서를 무시하고 사무실 문고리를 잡았다.


- 덜컥, 덜컥.


사무실의 문은 잠겨있었다.


- 콰직, 땡그랑.


하지만 아린이가 가볍게 힘을 주자 문고리는 과자 부서지듯 툭 뽑혔고 문고리를 바닥에 툭 던진 그녀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

“⋯⋯⋯⋯.”


자리를 비웠다더니, 사무실 안에는 우리가 찾던 김지호와 처음 보는 중년의 남성이 함께 있었다.

책상엔 전무이사 이승호라는 명패가 놓여있었는데 둘은 소파에 앉은 채 놀라 얼어붙어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까 제가 왜 왔는지 다 아시는 눈치네요.”


아린이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뒤따라 사무실에 들어오자 김지호는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떨었고 이승호 전무이사도 단념하듯 눈을 감았다.


“자네는 나가 있게.”


이승호는 일단 김지호를 사무실에서 내보내려 했다.


“아니요, 앉으세요.”


하지만 아린이의 한마디에 일어났던 김지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소파에 앉기는 좀 뭐해서 아린이의 뒤에 섰다.


“⋯⋯⋯⋯.”


사무실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두 남자는 자신의 발끝만 바라볼 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일단 이걸 봐주렴.”


하지만 입 다물고 조용히 있는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이승호는 자신의 책상에서 장부 하나를 가지고 와 아린이에게 건넸다.


“이건⋯.”


아린이는 장부를 받아 몇 장을 살폈지만 솔직히 뭔 내용인지 모르겠는지 나를 올려보며 장부를 슬쩍 내밀었다.

어려운 전문용어와 숫자가 잔뜩 쓰여있는 장부를 내가 본다고 아린이와 다를 게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장부를 받아 내용을 들여다보니 이게 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이건⋯ 윤아린 헌터의 정산금을 기록해놓은 장부네요?”


대략 10여 년 전부터 기록이 시작된 장부의 초반부에 적힌 금액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웨펀마스터 특성의 특성상 아린이도 처음부터 A급 헌터는 아니었을 테니 이땐 뭐 D급 정도나 될 때였나 보다.

하지만 장부의 뒤쪽으로 향할수록 그 액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궁금증이 생긴 나는 장부를 훑는척하며 맨 뒷장의 합계금액을 살펴보았다.


‘일, 십, 백, 천, 만⋯.’


장부의 끝에 적인 합계금액은 한 번에 액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높은 금액이 적혀있었다.

그래서 대체 얼만가 자릿수를 세어보니.


‘와⋯.’


529억.

아린이가 약 10여 년간 헌터로 생활하며 던전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세금과 수수료 등등 온갖 것을 제하고 실수령한 금액은 약 529억 원이었다.

아니, 529억 중 500억을 근 4년 안에 벌어들였으니 사실상 4년 동안 벌어들인 돈이라고 해야겠지.

4년 동안 500억이면 연봉이⋯ 125억⋯.

현실감이 들지 않는 엄청난 금액에 감탄이 나왔다.


물론 수천억부터 시작해 수조, 수십조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사업가나 유명투자가 혹은 재벌에 비하면 그렇게 큰 액수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린이는 사업을 한 것도, 투자를 한 것도, 재산을 대대로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순수 노동력만으로 이만한 가치를 발생시킨 것이다.

그것도 100% 현금으로.


“갑자기 저한테 이걸 보여주시는 이유가 뭐예요?”

“이미 나를 믿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

“최소한의 신뢰 관계요?”

“아린아, 네가 알고 온 대로다. 나는 네 돈을 내 마음대로 썼어, 속여서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그저 내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네 돈을 쓴 건 아니야, 또 쓰고 모른 척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단다. 전부 갚을 생각이었어, 이 장부를 그 증거로 생각해주면 좋겠구나.”


애초에 갚을 생각이 없는 돈을 장부까지 만들어 자신이 얼마를 가져다 썼는지 세세히 기록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그와 생판 남인 내 입장에선 겨우 이런 장부 하나 보여주며 저런 말을 해봤자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지만 아린이는 일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어디에 어떻게 쓰셨죠.”

“⋯길드를 바꾸고 싶었단다.”

“듣고 있어요.”


아린이는 한 번 끝까지 이야기해보라는 듯 그가 떠들게 두었다.


“길드는 단순히 이익을 창출하면 그만인 영리단체가 아니야. 사람들의 안전은 물론 헌터의 안전까지도 책임질 의무가 있어. 하지만 지금의 여명길드는 오직 이익에만 집착할 뿐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단순히 비용으로만 계산하고 있어, 마치 소모품처럼 말이야. 난 그런 길드를 바꾸고 싶었어.”

“길드를 바꾸고 싶어서 정확히 뭘 어떻게 하셨다는 거죠? 거기에 제 돈은 왜 쓰셨고요?”

“일종의 반란을 일으켰어. 길드의 경영권을 가져오기 위한 반란을. 반란에 성공하기 위해선 길드의 주식을 매수하고 주주와 길드 내 임직원과 헌터들을 포섭해야 했고⋯ 거기에 많은 돈이 필요했어. 하지만 너도 알잖니, 나도 아무것도 없이 사원에서부터 시작해 올라온 돈도 인맥도 없는 일개 회사원이라는걸. 네 돈이 꼭 필요했어.”


사원에서 시작해 이런 대형길드의 전무이사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다른 건 모르겠지만 능력 하나는 끝내주나 보다.


“그게 당당한 일이라면 저를 설득하셨어야죠, 당당한 일이 아니라면 절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죠.”

“그땐⋯ 널 설득할 자신이 없었어. 네가 알아차리기 전에 성공시키면 된다고 생각했어.”

“실제로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갑자기 방해꾼이 나타난 거고요.”


아린이가 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이승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린이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있다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전 돈 때문에 아저씨한테 화난 건 하나도 없어요. 큰돈이 있어봤자 어차피 쓸 시간도 없고 딱히 쓰고 싶은데도 없거든요. 아저씨가 좋은 곳에 잘 쓰겠다고 설득했다면 전 그냥 드렸을 수도 있을 거예요. 지금도 딱히 아깝다거나 하는 마음은 없어요.”


아린이의 말에 이승호와 김지호 두 사람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면 아저씨께는 감사하고 있거든요, 아저씨가 절 이 길드에 데려오지 않았다면 전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시골의 여자애로 살았겠죠. 그런 삶도 나쁘진 않았겠지만 전 지금이 더 좋아요, 그리고 부장님께도 감사하고 있어요. 제가 훈련과 레이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뒤에서 귀찮은 일 전부 대신해 주신 거 알고 있어요.”


뭔가 그러니 용서해주겠다, 같은 느낌의 대사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 김지호와 이승호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런데 사람은 건드리지 마셨어야죠.”


하지만 그 한마디로 살살 떠오르던 분위기는 쿵 하고 가라앉았다.

아린이는 분노에 눈가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전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평생 훈련과 레이드에만 매진하며 살았어요, 그 외에는 무엇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아저씨는 아셨겠죠, 그런 삶이 즐겁고 행복할 리는 없다는 걸. 하지만 괜찮아요, 그걸로 아저씨를 탓할 생각은 없어요, 전부 제가 찬성하고 선택한 일이고 그랬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저를 조금이라도 존중하셨다면, 조금이라도 배려하셨다면 제게 처음으로 생긴 친구를 아저씨의 목적을 위해서 떼어놓고 헤치려고까지 하면 안 됐죠.”

“아린아, 그건⋯!”

“준호에게 제 앞에서 사라지라고 돈으로 회유하고 매혹 스킬이 있는 여자를 이용해 떼어놓으려고 하고 그것도 안 되니 준호의 부모님을 납치해 협박하고 결국엔 이태민 선배를 시켜 죽이려고까지 한 것도 전부 두 분이 꾸미고 지시한 일이죠?”

“서, 설마 이태민이 죽은 이유가⋯!”

“네. 저랑 싸웠어요, 죽는 건 도망치다 혼자 죽었지만.”


던전 안에서의 일은 던전 안의 사람들밖에 알지 못한다.

우리가 이태민의 죽음을 단순 전사로 처리했으니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겠지만 그에게 일을 맡긴 둘은 아주 미쳐버릴 지경이었을 것이다.

진짜 일을 실행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몬스터에 당한 건지, 뭔가 일이 잘못된 건지, 만약 잘못됐다면 어디까지 잘못된 건지 알 길이 없으니 그저 불안함에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아린아, 미안하다!”


그 이야기까지 나오자 이승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김지호도 함께 무릎을 꿇었다.


“내가 욕심에 눈이 멀어 널 생각하지 못했어, 이런다고 진심이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미안하다.”

“아린 헌터님. 정말, 정말 잘못했습니다.”


두 중년의 남자가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 앞에 무릎을 꿇고 비는 모습은 보기 불쾌할 정도로 꼴불견이었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내 인간성이 훼손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정말로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계시는 건가요?”

“물론이다, 계속 죄책감에 시달려왔어.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 나를 믿고 따라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멈춰선 안 됐어!”

“저도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둘은 필사적으로 사과하며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기를 원했지만 아린이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반성하신다면 사과는 제가 아니라 준호에게 하셨어야죠, 두 분께서는 아직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가 필요할 뿐이네요.”


그 한마디에 둘의 표적이 나로 바뀌었다.

이승호와 김지호는 무릎을 꿇은 채로 내 앞으로 기어와 사과했다.


“이보시게! 정말, 정말 미안하게 됐네! 지금까지 자네가 당한 모든 일은 나 때문이야! 내가 죽을 죄를 지었어!”

“준호 씨,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까불고 건방지게 군 거 전부 사과드리겠습니다, 돈도 전부 돌려드릴 테니 제발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그 모습에 나는 기겁을 하며 둘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아이고, 이러지 마세요. 가서 앉으세요.”


내가 일으켜 세워주자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났다.

물론 용서할 마음이 들어 일으켜 세운 건 아니고 그냥 꼴 보기 싫어서 일으켰을 뿐이었다.

세상에 무릎 꿇고 빈다고 다 용서가 될 거면 판검사들 진작에 실직하고 법원은 관광지 됐겠지.


“뭐, 그렇게 사과하신다고 해도 무릎 꿇는 게 딱히 힘든 일은 아니잖아요? 보세요. 이게 어려워요?”


나는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내 행동에 두 사람은 물론 아린이까지 조금 놀랐다.


“전 두 분의 진심은 잘 모르겠네요. 솔직히 진심이야 어쨌든 저만 건드렸으면 그냥 돈 몇 푼 받고 넘어갔을 텐데⋯ 특히 김지호 부장 당신은 우리 가족 건드린 게 벌써 두 번째잖아요. 나중에 수틀리면 세 번째 건드리지 말란 법 어디 있어요? 불안해서 못 살죠.”

“죄,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하고 다시는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보상이라⋯ 뭐 또 얼마 줄 테니까 그냥 넘어가자 이런 건가요? 그런 전개 지겨운데.”

“그,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용서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자수하세요.”


내 말에 이승호와 김지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진짜 반성하신다면 당신들이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해 스스로 증거를 제출하고 자수하세요. 그럼 저도 충분히 회개하셨다고 생각하고 용서할게요. 저는 제가 사적으로 보복하는 위험성을 떠안고 싶지 않아요, 아직 앞날 창창한 20대니까요. 복수는 공권력의 힘에 맡길래요.”

“아, 아니⋯ 어떻게 그런⋯.”


하지만 알겠다고 할 리가 있나.

내 말을 들은 김지호와 이승호는 무슨 개 같은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자네가 우리 때문에 화가 나고 또 우리를 전혀 믿지 못하는 것도 다 이해하네. 그런 일을 겪었으니 당연하지. 하지만 잘 생각해보게. 일이 그렇게 끝나버리면 누구도 이기지 못하고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결말만이 있을 뿐이야.”

“그럼 그렇게 끝나지 않으면 가장 크게 이기고 행복해지는 건 누구죠? 아저씨랑 부장님이잖아요. 그걸 원할 뿐인 거 아닌가요?”

“아린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이번 일이 끝나면 길드엔 큰 변화가 찾아올 거야. 난 이 길드를 사람들을 위한, 헌터들을 위한 길드로 바꿀 거야, 그렇게 되면 수많은 사람의 삶이 바뀔 거야. 제발 그걸 지켜봐 줘.”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전 길드를 탈퇴할 거거든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른 채로 아저씨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쓰일 생각은 없어요.”

“기, 길드를 탈퇴한다고? 안 돼, 아린아, 이건 내 평생을 바친 일이고 넌 이 일의 핵심이야, 네가 없으면 안 돼. 그리고 그렇게 하면 너도 큰 피해를 입게 될 거야! 500억이나 되는 네 돈이 공중분해 되는 거라고! 내가 말 했잖니, 난 네 돈을 갚을 생각이 있어, 그것도 몇 배로! 그 돈이 얼마나 벌기 힘든 큰돈이고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건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 이보시게, 자, 자네가 설명을 좀 해주게!”


아린이의 길드 탈퇴 선언에 이승호는 다급하게 나를 붙잡고 말했다.

500억이라⋯ 액수가 액수인만큼 이 와중에도 날리기엔 너무 아까운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 돈으로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까짓 돈은 다시 벌면 돼요, 전 그 정도 돈은 금방 다시 벌 능력도 있고 그럴 자신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 아린이는 단호하게 선수쳤다.


“아린아, 오해야. 난 길드를 올바르게 고쳐 세우고 싶었을 뿐이야.”

“올바르게 고쳐 세우고 싶다고요?”


아린이가 되묻자 이승호는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확실한 비전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몇 명한테 이런 짓을 하셨죠?”

“뭐?”


하지만 이어지는 아린이의 물음에 자신감 넘치던 이승호의 입이 바로 턱 막혔다.


“아저씨의 목적에 거슬리는 사람을 몇 명이나 위협하고 협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면서 여기까지 오셨냐고요.”

“그, 그건⋯.”


깡패에 세희에⋯ 아니, 세희가 아니라 이름이 뭐더라?

아, 맞다 이채원.

뭐, 아무튼 그런 음지에서 활동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고 이태민도 자기 입으로 위험하고 더러운 일을 많이 했다고 했으니 길드의 헌터들까지 동원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뒷세계를 통해 조용히 처리한 인물이 한둘이 아닌 것 같기는 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셨지만 아저씨도 결국 똑같잖아요. 아저씨가 길드를 이끌어도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 바뀔 뿐이죠. 그런 목적에 제가 꼭 필요하다면 전 그 목적을 막기 위해서라도 길드를 탈퇴할 거예요. 그리고 준호 말대로 자수하세요, 그렇게 하면 저도 아저씨의 진심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린아, 아린아!!!”


이승호는 애타게 아린이를 불렀지만 그녀는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사무실을 떠났다.


“뭐⋯ 현명한 판단 바랍니다.”


사무실에 혼자 남은 나는 특별히 할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괜히 뻘쭘해 도망치듯 아린이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F급 무한재생 헌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4 63화 +2 24.01.23 3,540 55 14쪽
63 62화 +1 24.01.22 3,676 59 12쪽
62 61화 +3 24.01.21 3,785 65 14쪽
61 60화 +4 24.01.20 3,871 61 15쪽
60 59화 +2 24.01.19 3,849 62 13쪽
59 58화 +6 24.01.18 3,879 66 15쪽
58 57화 +4 24.01.17 3,965 67 14쪽
57 56화 +2 24.01.16 4,022 69 12쪽
» 55화 +1 24.01.15 4,118 69 20쪽
55 54화 +3 24.01.12 4,121 70 12쪽
54 53화 +2 24.01.11 4,106 67 14쪽
53 52화 24.01.10 4,143 63 14쪽
52 51화 +3 24.01.09 4,250 68 12쪽
51 50화 24.01.08 4,316 70 13쪽
50 49화 +2 24.01.07 4,283 67 13쪽
49 48화 +1 24.01.06 4,340 68 14쪽
48 47화 +2 24.01.05 4,325 66 14쪽
47 46화 +1 24.01.04 4,350 67 15쪽
46 45화 +2 24.01.03 4,371 66 13쪽
45 44화 +2 24.01.02 4,388 67 14쪽
44 43화 24.01.01 4,424 67 14쪽
43 42화 +1 23.12.31 4,374 65 15쪽
42 41화 +2 23.12.30 4,426 64 13쪽
41 40화 +7 23.12.29 4,505 62 13쪽
40 39화 +4 23.12.28 4,455 62 14쪽
39 38화 +7 23.12.27 4,500 73 13쪽
38 37화 +3 23.12.26 4,502 74 12쪽
37 36화 +1 23.12.26 4,573 74 13쪽
36 35화 23.12.25 4,694 73 13쪽
35 34화 +1 23.12.24 4,892 73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