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혀진 성역 - Old story - 6
"······."
저녁무렵 한적한 도시 구석진 곳에 있는 바의 긴 테이블에 카이 미츠가 앉아 있었고 그녀의 앞엔 여성용 구두를 신은 바텐더의 하반신만 벽에 기댄 채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다른 테이블들엔 술잔과 핏자국만 있을 뿐 시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카이 미츠가 가만히 앉아 술잔을 이리저리 들여다 보며 지루하다는 듯이 숨을 한번 내쉬었을때 잿빛에 아주 긴 생머리를 양옆으로 둥글게 한번 머리를 묶은 마르가 기운 없이 들어왔다.
"늦었어."
카이 미츠는 술을 한모금 마시며 말했고 마르가 발끈하며 대답했다.
"지금 상황이 어떤데 넌 여기서 술이나 처 마시고 있는건데!"
"상황이 어찌됐든 먹고는 살아야지."
"빌어먹을!"
마르는 손에든 서류뭉치와 책 몇권을 거칠게 미츠 옆의 테이블에 던져 놓으며 외쳤고 미츠는 그런 그녀에게 잔을 권했다. 마르는 술잔을 낚아채 아주 조금 마시고나서 한숨 쉬며 말했다.
"케리츠는 좀 어때?"
"어떻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지."
"그 붉은 퇴마사년한테 걸린 저주를 풀 방법은 없는 거야?"
"방법이야 있겠지만 그걸 모르니까 그렇지. 무엇보다 술식이라던가 마법쪽으로 박식한 너도 모르는걸 굳이 나에게 묻는 이유는 뭔데."
"그거야······."
마르는 표정을 찌푸리곤 말을 이었다.
"그 빌어먹을 가문에 대해서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으니깐."
"응, 물론 그건 사실이지."
"······넌 도대체 뭔데 그렇게 잘아는거지? 너가 말한 자료들도 그렇고!"
마르가 자신이 내려놓은 서류뭉치와 책들을 가리키며 말했고 미츠는 술의 남은 잔을 비우곤 옆의 양주를 다시 잔에 따르며 말했다.
"어쩌다가···한때 몸 담았던 곳이라고 하면 될까······자세한건 네가 알거 없어."
"······."
아주 기분 나쁘게 째려보고 있는 마르의 시선을 본 미츠는 술잔을 부드럽게 흔들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보지마. 그땐 나도 멀쩡한 여자였을 때라고. 최소한 지금 처럼 사람을 씹어먹고 다니진 않을 때였어."
"그래서 지금은 아예 관계가 없다는거지?"
"음······그렇지?"
카이 미츠는 츠이시 요이나 나마루 켄지와 엮인 일에 대해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고 알려줄 필요도 없었기에 대충 대답하곤 마르가 가져온 서류 뭉치와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마르는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근데 너 읽을 순 있는거야? 그것들 이상한 언어로 적혀 있다고."
"츠이시 가문의 문자니까. 나는 읽을 수 있어."
찬찬히 책들을 살펴보는 미츠에게 마르가 아니꼽다는 듯이 말했다.
"그 자료들을 가져온다고 우리 부하들이 얼마나 희생 됐는지 알아? 그나마 그정도라도 챙겨온걸 넌 정말 감사하게 여겨야 할거 같은데?"
"···그거야 난 너가 원하는 기회를 줬을 뿐이고 그 대신 챙겨달라고 한거니까."
"그래 정말 넌 대단한 년이야. 케리츠가 죽는 날만 보고 있다면서 여기서 여유롭게 술이나 마시고 있고 말이지. 우리는 뒷수습이랑 추적자들 떨친다고 얼마나 개같이 고생을 했는데 말이지."
"애초에 붉은 장미에게 아무 생각없이 접근한게 화근이었지. 난 나름 조심하라고 얘기했던걸로 기억하는 데 말이야."
"······."
마르는 입술을 깨문채 가만히 미츠를 응시할 뿐이었고 미츠는 술을 한모금 마시곤 말했다.
"괜찮아. 케리츠의 희생은 뭔가 다른 움직임을 불러올 수 있으니까. 녀석의 친지들 중에 누군가 라던가······."
"무슨 말이야?"
"케리츠쪽 영역의 누군가들이 움직일 수도 있다~ 이거지. 그 동네 한동안 잠잠 했잖아."
"너 설마···그걸 노리고······."
"섭섭한 말씀! 내가 케리츠보고 붉은 장미를 가지라고 시킨적 없어. 순전히 자기가 선택한 것일 뿐."
마르 입장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그저 한숨을 쉴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미츠가 말을 이었다.
"그외에 이 일로 인해서 아마 다양한 움직임들이 있을거야. 정부는 물론이고 츠이시 가문쪽에서도 당연히 자기들의 안좋은 쪽을 건드린 우릴 가만두진 않을거야."
"그정도는 당연한거잖아. 처음부터 노린 부분이기도 하고. 다만 결과는 어느정도 의도대로 되는거 같은데 과정이 계획대로 되지 않은게 문제지."
"응, 그리고 아마도 한국에서도 움직임이 있을거야."
"한국? 대한민국?"
마르가 조금 놀란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미츠는 술잔을 가볍게 던져서 의자 밑으로 떨어뜨렸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의 피가 묽어졌다.
"응.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난거 말이지. 일본 내에서만으로 끝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덮어진다구. 대한민국 정도는 개입해줘야지 상황이 흥미로워 질거니까."
"···그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일거라 생각은 안하는데. 오히려 적들만 더 생기는거 아니야?"
"응 맞아."
"······."
마르가 표정을 찡그린채 말했다.
"너무 당당하게 인정하는거 같은데."
"뭐, 적이 더 생기는거 사실이니깐. 단지 정부나 츠이시 가문에서 그리 맘편하게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는게 중요하지. 둘이 완전한 협조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결국 그들은 모두 같은 나라야. 하지만 한국은? 그들이 조사에 들어가면 지금 당장 우리를 뒤쫓거나 파헤치기 전에 한국쪽에서 알면 영 찝찝할 것들을 먼저 처리하려고 하겠지. 가능한 한국에서 개입을 안하길 원할거고 말이야."
"그러니까 적들의 아군이지만 그렇게 맘편한 존재는 아닌 무언가를 추가 한다는 건가?"
"뭐 나름 그렇다는 거지. 물론 추측이야. 재수 없으면 그냥 자충수겠다만~ 어차피 가만히 있어봤자 해결될것도 없잖아. 시간이 지날수록 소탕 밖에 더 당하겠어? 인간들한테."
"그건 그런가. 하긴 움직일 수 있는 말들이 있을때 뭐라도 해야지. 제길, 인간놈들 문명이 발전하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졌어 그래."
"그러니까~"
카이 미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자, 대한민국 여러분! 이제 움직여 주세요."
같은 시각 대한민국 부산시의 한 사무실. 잘정돈된 사무실의 책상 앞에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정돈 안된 검은 생머리에 앞머리는 양쪽 5:5로 적당히 갈라놓았으며 검은색 뿔테안경을 쓴채 양눈에는 천근만근의 다크서클이 달려있는 그녀가 깔끔한 흰색 와이셔츠에 정장바지를 입은채 서류에 마지막 부분에 밑줄을 긋고는 펜을 자신의 와이셔츠 상의 가슴주머니에 꽂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옆으로 메는 가방을 두르고 사무실을 나가려고 하기 직전이었다.
삑- 삑- 삑-
사무실 전화기에 붉은 빛이 들어오며 소리가 났고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가 뒤로 돌아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던 그녀는 한참을 서 있더니 천천히 가방을 벗어서 옆에 놔두곤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한번 다 연락해볼게요."
그리곤 자리에 앉아 리스트를 쭉 훓어보다가 몇명을 선별하고는 메시지를 보냈다.
『게임오버~! 당신은 이쁘게 뜯겨버렸어요! 계속 이어서 하시려면 요금을 넣어주세요!』
"아~ 뭐야 이거. 진짜보다 게임이 더 빡쎄면 어쩌자는 거야."
그 메세지들은 시끄러운 소리가 잔뜩 나오는 오락실에서 모형 총으로 좀비들을 잡는 게임을 하다가 라이프가 다 되서 동전을 넣으라는 창을 보며 좌절하는 누군가에게, 시내버스의 손잡이를 잡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에게, 지하철의 좌석 끝에 머리를 대고 졸고 있는 누군가에게, 얼마 남지않은 큰시험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회식자리에서 술에 취해 얼굴이 빨개진 누군가에게, 헬스장에서 땀 흘리며 아령을 들고있는 누군가에게, 편의점에서 물품을 정리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컴퓨터 앞에서 음성채팅을 하며 레이드 사냥을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정체된 도로의 한복판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통화를 하는 누군가에게, 공원 계단에 앉아 말없이 담배를 피고 있는 누군가에게, 해변가에서 애완동물을 데리고 산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카페에서 친구와 수다를 떨고있는 누군가에게, 군부대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 누군가에게,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찢어져라 외치고 있는 누군가에게,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헤드셋으로 음악을 들으며 대학로를 걷고있는 누군가에게, 건물의 옥상 난간에 위험하게 걸터앉아 부산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단검을 위로 던졌다 받는 누군가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수많은 누군가들에게 보내졌다.
그중 기숙사 건물의 어두운 방안에 검은색 교복에 검은 스타킹을 신고 맨바닥에 누운 채 강의용 레이저 포인터를 벽에 쐈다가 끊었다가 천장에 쐈다가 끊었다를 반복하고 있는 여학생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고 그 여학생은 메시지의 내용을 쭉 읽어보곤 「신청하겠습니다.」라고 답장했다.
[혼 - 더럽혀진 성역 - Old story - End]
- 작가의말
더럽혀진 성역 에피소드가 이것으로 완전히 종료되었습니다! 그간 참 오랫동안 연재되었던 더럽혀진 성역을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신 독자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 에피소드는 아마 이때동안 있었던 3개의 에피소드와는 사뭇 다른 장르가 되지 않을까도 싶습니다만 재밌게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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