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무량극 님의 서재입니다.

정령의 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무량극
작품등록일 :
2018.04.19 18:40
최근연재일 :
2019.09.30 23:58
연재수 :
200 회
조회수 :
56,397
추천수 :
269
글자수 :
1,220,287

작성
18.10.04 23:46
조회
354
추천
0
글자
18쪽

침입자 (2)

DUMMY

“그러면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의 움직임을 모두 예측했다는 거야? 그것도 나무 위에서 어떻게든 화살을 피하려는 놈들을 상대로?”


“그게 왜? 신기해?”


“신기한데?”


“겨우 이런 것도 못하다니. 쯧.”


“... 하스트, 너도 할 수 있어? 너도 활 쓰잖아.”


“저렇게는 아니더라도, 원숭이쯤이야. 볼래?”


하스트도 화살을 메겼다. 그 모습을 본 원숭이들은 방금 전과도 확연히 다를 정도로 격렬하게 움직였다. 동료들이 당하는 것을 봤으니 더욱더 주의 깊게 다가온다. 긴 도약은 자제하고 바로 근처에 있는 나무들로만 이동을 하고 있다. 어둠에 가려진 작은 나뭇가지로만 이동하는 녀석도 있다. 그러니 마치 하늘을 달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저걸 맞춘다고?”


“못 맞출 것도 없지.”


하스트의 주변으로 미약한 바람이 분다. 카를이 그 바람을 느낄 때쯤, 화살은 가장 가까운 원숭이를 향해 날아갔다.


“우끼익!”


이번에는 당하지 않는다는 듯, 나무 뒤로 숨는다. 그것도 모자라 화살이 뚫고 올 것을 대비해 나무를 타고 아래로 이동한다.


슉.


“우끾!”


원숭이는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이번에는 피하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스트의 화살은 나무를 뚫기는커녕 원숭이가 있던 나무 옆을 지나치기만 했다. 이에 원숭이들은 고무되어 더욱 격렬하게 다가온다.


“뭐야? 못 맞췄는데? 괜히 자신감만 심어줬잖아.”


물론 카를이 아는 그 누구도 저렇게 격렬하게 움직이는 원숭이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바로 옆의 엘르만 제외하면. 하지만 하스트의 호언장담에, 기대하며 화살을 지켜보고 있던 카를은 하스트에게 실망 어린 눈빛을 보냈다.


“쯧쯧. 너 진짜 둔하구나. 감추려고 한 것도 아닌데 저 길도 안 보이다니.”


옆에서 엘르가 혀를 찬다. 카를이 어지간히 한심하다는 말투였다.


“뭐? 길?”


그에 다시 앞을 보았지만,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나름 밤눈에 자신이 있었건만 보이는 것은 오직,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원숭이들뿐이다.


“뭐가 있다는 거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카를은 전투를 준비했다. 원숭이들은 어떤 방해도 없이 계속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퍽!


갑자기 원숭이 중 한 마리가 균형을 잃는다. 쓰러지는 모습이 영 부자연스러운 게, 단순히 발을 헛디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에 공격당한 것이다.


“뭐야?”


카를은 근처에 다른 존재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원숭이의 근처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원숭이가 추락하며 등을 보이자 그때서야 무엇이 원숭이를 공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저건?”


확실하다. 방금 전에 하스트가 쏜 화살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카를이 혼란스러워한다. 아니, 화살을 쏜 지가 언제인데 이제 와서 명중한단 말인가? 그것도 이미 빗맞아 날아간 것이.


“이해가 안되나 보네. 그렇다면 한번 더!”


원숭이들은 겁에 질렸다. 땅으로 걷고 있는 인간 세명을 잡아먹기 위해 공격하려 했건만, 다가서기도 전에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동료들이 속속 죽임을 당하고 있으니 겁을 먹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하스트의 화살이 다시 날아드니 다들 혼비백산하며 흩어진다. 어떻게든 화살에게서 도망가고 싶다는 절박함과 함께.


그러자 하스트가 최초로 노렸던 경로에는 그 어떤 원숭이들도 없게 되었다. 만약 평범한 화살이라면 이대로 허공을 날다가 힘이 다해 떨어질 것이다. 아니면 경로상에 나무에 부딪히던지. 하지만 그 화살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를은 목격했다.


“화살이 휘고 있어?”


화살은 최초 경로에 어떤 목표도 없자, 갑자기 방향을 바꿔 원숭이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화살의 모습에 카를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대상이 된 원숭이들의 감상은 달랐다.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이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도망에만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물이 빠르다고 해도 하늘을 나는 화살을 이길 수는 없는 법.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원숭이 중 하나가 희생되었다.


“우와··· 방금 그것도 바람의 자연력이야?”


“정답. 언뜻 보면 살아서 추적하는 것 같지만, 화살 앞에다 미리 길을 만들어 놓는 거뿐이야. 엘르의 것과는 약간 방식이 다르지.”


“이야··· 굉장히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구나. 부럽다야.”


확실히 이 방법만 익힌다면 자신의 엉터리 같은 투척과 활 솜씨도 나아질 수 있다. 우선 던지고 그 앞에다 길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하하하하. 자연력만이 아니라 사람마다 잘할 수 있는 것과 가지고 있는 감각이 다르니,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모두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어. 게다가 이건 특히 더 어렵지. 참고로 이걸 할 수 있는 건 적어도 이 근처에서는 나랑 촌장님밖에 없을걸?”


“얘는 못해?”


“손가락 저리 치우지 못해?”


엘르가 자신에게 뻗어진 손가락을 물어버리겠다는 듯 노려본다. 이에 카를은 슬그머니 손가락을 치웠다.


“이건 궁술이나 다른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순수하게 자연력을 얼마나 빠르게 펼칠 수 있느냐의 문제니까. 화살보다 빠르게 자연력을 화살 바로 앞에다 펼칠 수 있어야 가능한 기술이야. 물론 미리 길을 펼쳐두어도 되지만, 예민한 놈들은 길을 감지해버리고 길을 피해버려. 아쉽게도 엘르는 아직 그 정도까지 자연력을 잘 다루지 못할걸?”


“맞아. 난 아직 그 정도까지는 못 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마을에서 이게 가능한 사람은 하스트 말대로 아빠밖에 없을 거야.”


카를은 겉보기와 다르게 굉장히 힘든 기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구나.”


“흥. 하스트는 명중률이 달리니까, 저런 기술을 쓰는 거지. 그런 거 없어도 저런 원숭이들쯤이야-”


크아아!


엘르는 자신 있게 이야기하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울부짖음에 깜짝 놀라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인영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인영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자 엘르가 그 정체를 알아본다.


“트롤!”


지금까지의 느슨한 분위기를 쇄신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숲 최고의 포식자 중 하나인 트롤이라면 방심할 수 없다.


“저번보다 크잖아?”


카를은 저번의 트롤과 확연히 비교되는 트롤의 크기에 놀랐다. 그 트롤도 자신보다 컸었는데, 그보다 더 크다. 마치 청소년과 성인의 차이랄까?


하스트는 나타난 트롤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카를에게 말했다.


“저번에 고요의 평원에 있었던 그놈 말이야? 아마 그놈은 숲에서 영역싸움에 패배한 놈일 거야. 성체도 아니었고. 그렇지 않다면 숲을 놔두고 평원으로 갈 리가 없지.”


“그놈이 성체가 아니라니··· 그나저나 왜 숲을 놔두고 평원으로 갈 일이 없어? 숲의 동물들이 더 강하니, 약한 녀석들 사냥하러 갈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쪽이 사냥하기도 편하고.”


“이곳처럼 자연력이 풍부한 곳에서 살던 놈들은 자연력이 희박한 곳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자연력의 차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피하는 경우가 많거든. 북부와 남부의 동물들의 차이가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적응한 녀석들은 원래 모습에서 변화하기도 하고, 적응 유무가 개체가 아니라 종족 전체인 경우도 있고.”


“그런 거였나···”


이제야 이해가 간다. 산맥과 북부 그리고 남부와 고요의 평원에서 발견했던 경계의 의미를.


‘자연력의 차이였나. 분포도? 밀집도? 농도?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어쨌든, 자연력에 적응한 생물들과 그렇지 못한 생물들 자체가 경계가 되는 거였어.’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야? 저놈, 우리랑 한판 붙을 생각인가 본데?”


엘르가 트롤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하스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다.


“딱히 문제없잖아? 물론 저 회복력은 골치 아프지만, 우리 중에 저놈 정도한테 목숨을 잃을 녀석도 없는데.”


“얼마 전에 만났을 때 트롤을 죽어라 피하던 사람이 누구더라?”


“그거야, 거긴 속성 자연력이 희박한 곳이었으니까. 자연력 쓰는 게 아까웠거든. 여기라면 바람으로 아주 쉽게 상대할 수 있지.”


하스트의 말을 듣던 엘르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도 난 저 놈 싫어. 상대하다 보면 왠지 손해 보는 것 같단 말이야.”


“하긴··· 그렇다고 잡아도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힘만 소모될 뿐이지. 그러면 우선은 후퇴할까?”


“그러고 싶지만, 너네가 나불거리는 바람에 늦었잖아!”


“크아~!”


엘르의 말대로 트롤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 커다란 덩치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니 원근감이 희미해질 정도다.


하지만 아직도 하스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늦기는. 엘르.”


“더 말 안 해도 돼.”


이미 활을 겨누고 있는 엘르였다.


카를은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나는 뭐하냐? 저놈 막아?”


“넌 주변 경계만 서줘.”


“음··· 주변을 경계할 필요가 있나?”


트롤이 나타난 후로는 근처에 동물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트롤을 피해 모두 도망간 것이다.


카를이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하스트는 본격적으로 힘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쿠오오오!


‘바람이?’


주변의 바람들이 모두 그에게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빨려든 바람들이 그를 맴돌며 하나의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다.


“간다!”


하스트가 손을 앞으로 뻗으니 그를 맴돌고 있던 바람도 형태를 잃고 앞으로 뻗어나간다.


쿠콰콰콰!


‘땅이···’


땅이 민낯을 드러낸다. 바람이 땅에 있는 온갖 것들을 끌어올리고 있다. 원래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바람이지만, 지금만큼은 뚜렷이 보인다.


‘바람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나뭇잎 뭉치가 날아가는 것 같지만.’


정확히는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강물을 보는 느낌이다. 허공에 새롭게 나타난 흐름은 그것만으로도 장관이었다.


뒤에서 보고 있는데도 장관인데 마주 보고 있는 트롤의 심경은 어떨까?


“크아! 크아!”


트롤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에 당황한 듯 소리를 질러댔다. 당황하며 허둥지둥 대는 꼴이 가관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둘은 만났다.


쿵!


거대한 망치에 얻어맞은 듯 잠시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지만, 트롤은 버텨내었다. 드러난 상처는 오직 하나, 코피뿐. 다른 곳은 아주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바람은 단발성이 아니었다. 하스트의 주변으로 계속해서 바람이 모이고 그것들이 트롤에게 나아가고 있다. 트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람에 밀리더니, 결국은 바닥에 엎드려서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트롤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힘을 주어 천천히 앞으로 전진한다. 바람이 어찌나 강한지 트롤의 손과 발이 있던 땅은, 바람이 트롤을 밀어내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움푹 들어간 상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롤은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역시 트롤이네. 이 강풍을 밀고 들어오다니.”


“그래 봤자지. 해방. 팽창.”


누군가는 바람을 이기려고 하는 트롤의 모습에 박수를 치며 응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여기에는 그런 사람은 없었다. 특히 엘르는 더욱 그랬다. 트롤에게 사정없이 화살이 쏴버린다. 화살은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등에 업었으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트롤이 일행을 직시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되었다.


콱.


“화살을 잡았어?”


한 손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잡은 트롤은 기고만장하여 다시 괴성을 질렀다. 이제 바람에도 익숙해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방심이 트롤의 실수였다.


펑!


화살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바람을 내보낸다. 그 갑작스러운 힘에 트롤의 팔이 튕겨져 나간다. 그리고 벌어진 공간을 어느새 쏘아진 다른 화살 하나가 차지한다.


트롤은 자신의 눈 앞으로 날아들어온 화살을 보고, 다른 팔로 그 화살마저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화살이 터지더니 트롤의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크아아아아!”


힘들게 나아가던 트롤은, 엘르의 공격을 받고 자세가 흐트러진다. 상처 따윈 개의치 않고 다시 자세를 잡으려 했지만, 하스트의 바람은 그것을 용서치 않았다. 순간적으로 강력해진 바람이 트롤을 뒤로 날려버린 것이다.


상처에는 익숙한 트롤이었기에 고통에 개의치 않고 금세 다시 일어났지만, 자신의 적과 마주 보는 것에는 실패했다. 안구가 손상되어 시력을 잃은 것이다.


트롤은 괴성을 지르며 주변에다 마구잡이로 팔과 다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좋았어!”


엘르는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어지간히 트롤이 싫은 모양이다.


“자! 이제 후퇴하자!”


엘르는 얼른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력을 잃었다고 해도 재수 없게 이쪽으로 올 수도 있으니까. 그녀를 따라 카를도 움직인다.


“하스트?”


하지만 하스트는 아직도 그 자리에 멈춰서 있다.


“하스트! 뭐 하는 거야! 빨리 안 와!?”


엘르가 윽박지르며 독촉한다. 하지만 소리가 너무 컸는지 트롤이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일행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함이 분명하다.


“윽! 야··· 빨리 오라고···!”


엘르도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말한다. 그제야 하스트가 움직인다.


자신의 옆으로 온 하스트를 보며 카를이 조용히 묻는다.


“왜 그래? 뭐가 있어?”


그에 하스트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한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흠··· 그래?”


카를도 그 말에 주변을 둘러봤지만, 트롤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착각인가 봐. 신경 쓰지 마.”


하스트의 말에 카를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침묵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저 정도로 강한 녀석이라면 죽여야 주변 안전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닌가?”


카를의 물음에 하스트가 대답한다.


“확실히 트롤 성체는 위협적인 존재가 맞긴 하지만, 저 놈도 너처럼 나무를 못 타. 방금 봤다시피 덩치에 비해서 굉장히 민첩하지만, 나무 위를 다니는 엘프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 상관없는 놈이지. 게다가 저놈과 정면에서 싸우다가는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라서... 강한 놈이라고 무분별하게 살해했다가 오히려 약한 놈들의 개체수가 늘면 곤란하기도 하고.”


“그렇구나.”


두 사람의 질답을 듣던 엘르가 인상을 쓰며 말한다.


“아직 트롤에게는 충분히 들릴만한 위치야. 만약 저놈이 따라온다면 난 저놈보다 네 입에다 먼저 화살을 꽂아 버릴 테니, 입 좀 다물어.”


“... 그래. 알았어. 나도 귀찮은 건 질색이니.”


일행은 입 대신 발을 놀리는 것에 집중했다.




“...”


일행이 떠나고 얼마 후. 결국 일행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트롤이 눈을 뜬다. 시력이 회복된 것이다.


자신이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에 화가 났는지 시력이 회복되자마자, 주변에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부수고 땅을 파헤친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끊임없이 씩씩대고 있다.


바스락.


들려오는 소리에 반색하고 뒤돌아본다. 화풀이를 할만한 대상이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 트롤의 생각대로 그쪽에는 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최상위 포식자. 하지만 문제 될 것은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상대와 같은 종족과도 충분히 싸워왔다. 확실히 자신의 종족과 맞먹을 육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회복능력이 없다는 것을 안다. 상처를 도외시하고 싸운다면 고통이 있을지언정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는 상대다. 무엇보다 상대방은 아직 성체가 되지 못했는지 크기도 작다.


“크아아!”


쉽게 부서지지 않는, 그러면서도 쉽게 이길 수 있는 화풀이 대상이 찾아온 것에 분노와 기쁨이 섞인 포효를 지르며 상대방에게 짓쳐들어간다.


“크르르.”


자신보다 거대하고 월등히 강한 전투능력을 가졌을 것이 분명한 트롤이 짓쳐들어오는데도, 그림자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트롤이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왔을 때, 조용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해방...”


쿠오오오!




들리는 것은 오직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뿐인 이곳에 변화가 찾아온다.


휘이잉.


깔끔쟁이 바람이 땅을 청소한다. 꽤나 강풍인 탓에 나뭇잎과 가벼운 가지들이 모조리 쓸려나간다. 땅은 하스트때문에 드러난 자신의 부끄러운 민낯을 또다시 드러낼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땅에게는 다행히도 그 위에는 아직 무언가가 남아있다. 조각조각 흩어진 그것들이 조금이나마 땅을 지켜주었다. 하지만 바람에 그것들마저 흩어질 찰나, 바람은 청소할 곳이 많이 남았다는 듯이 서둘러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땅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나뭇잎들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겨줄 것이다. 조각이 잠시간 시간을 벌어준 덕분이다.


비록 조각이 방금 전까지 자신을 파헤치며 화풀이를 했었지만, 자신을 지켜준 것에 대해 땅은 조각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아직 조각들에게 받을 것이 남았으니까.


조각들은 방금 전까지 트롤이라 불렸었다. 그리고 갈기갈기 찢어진, 조각난 트롤의 육체는 이제 땅에게 영양분을 제공할 것이다. 땅은 그것이 기뻤다.


방금 떠나간 존재들이 다시 이곳에 찾아와 자신을 비옥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트롤을 조각낸 존재와 트롤을 이곳에 묶어놓은 일행이 같은 방향으로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땅은 다시금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이불 삼아 비옥해질 자신을 즐겁게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정령의 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2 최강의 오거 (4) 18.11.08 279 1 20쪽
61 최강의 오거 (3) 18.11.07 263 0 13쪽
60 최강의 오거 (2) 18.11.06 268 0 21쪽
59 최강의 오거 (1) 18.11.05 291 0 13쪽
58 침입자 (9) 18.11.04 275 0 15쪽
57 침입자 (8) 18.11.03 274 0 17쪽
56 침입자 (7) 18.11.02 276 1 12쪽
55 침입자 (6) 18.11.01 278 0 17쪽
54 침입자 (5) 18.10.25 297 0 28쪽
53 침입자 (4) 18.10.18 295 0 14쪽
52 침입자 (3) 18.10.11 344 0 21쪽
» 침입자 (2) 18.10.04 355 0 18쪽
50 침입자 (1) 18.09.20 357 0 20쪽
49 동료 18.09.13 376 1 22쪽
48 동료? (9) 18.09.06 382 1 14쪽
47 동료? (8) 18.08.30 384 1 13쪽
46 동료? (7) 18.08.23 395 0 14쪽
45 동료? (6) 18.08.16 406 0 14쪽
44 동료? (5) 18.08.09 425 0 14쪽
43 동료? (4) 18.08.02 435 1 2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