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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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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7.2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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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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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위험한 아이들!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바야흐로 충무로 기획 프로듀서의 시대가 열렸다.

신강 PD가 기획사 씨네-누보를 설립했을 때는 영화계 사람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영화를 기획해서 어떻게 돈을 벌겠다는 것인지 몰랐던 거지.”


전하영이 신강을 놀렸다.


“사실 자기도 몰랐으면서.”

“하하. 어떤 사람들은 씨네-누보가 투자회사인지 영화홍보 마케팅을 하겠다는 건지 만날 때마다 물어보더라고.”


신강 PD의 처음 의도는 자본과 연출을 이어 주는 기획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첫 작품인 <결혼이야기>와 두 번째 작품 <101번째 프러포즈>에서는 기획개발, 각본, 연출을 세팅한 것에서 그치고, 투자와 제작은 WaW 픽처스와 일영영화사가 담당했다.

하지만 <구미호>부터는 직접 제작에 나서고 있다.


“현실적으로 기획만 해서 제작사에 넘기는 것으로는 안정적인 수익구조가 만들어지지 않더라.”


자본력과 투자네트워크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썩 괜찮은 아이디어이긴 했다.

두 작품의 기획이 연달아 성공하자 영화제작사로서 발판이 만들어졌다.

씨네-누보와 기획의 시대 등의 시행착오를 곁에서 지켜보던 영화 기획자들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기획사에서 제작사로 변신을 하거나, 새롭게 영화 제작회사를 출범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젊은 영화사들은, 강은석 프로덕션, 영화세상(안용규), 우노(차성재), 명씨네(심세명), 한맥 픽처스(김영준) 등이다.

이들 가운데는 대단한 야심가도 있고,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며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꾸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신강, 유영택, 안용규 등 1세대 기획PD에 뒤를 잇는 2세대 기획PD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영화에 대한 접근방식, 철학 등에 있어서 각기 다른 개성을 뽐냈다.

이들은 자기 아이디어로 이런저런 배우를 쓰겠다고 정한 뒤 영화사에서 제작비를 끌어오거나, 지방 배급업자에게 줄거리와 배역을 소개한 뒤 제작비를 조달하던 충무로의 관행에서 탈피했다.

대신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작가와 작업을 통해 시나리오를 완성, 감독과 배우를 선정하고 그것이 관객에게 어필할 것인가 조사하는 기획영화의 개념적 정의를 완성했다.

90년대 말에 가면 이런 과정이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일반적인 과정이 된다.

많은 연예매체 기자들과 평론가들이 젊고 재기 넘치는 기획자들이 제작에 뛰어들고 있어 한국 영화의 전망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저는 결코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류지호가 생맥주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신사동의 호프집에 한창 떠오르고 있는 충무로 기획 프로듀서들과 류지호가 자리했다.

전하영의 주선으로 만들어진 자리다.

신강이 물었다.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줄어들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90년에 111편의 한국영화가 제작되었다.

91년 121편으로 최대 제작편수를 찍었다.

그런 후로 해마다 제작편수가 줄어들고 있다.

92년 96편, 93년 63편 올해 역시 작년 편수에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

이후 외환위기를 겪으며 제작편수가 대폭 감소해서, 99년에는 49편이 제작되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후 <쉬리>의 성공으로 대작영화가 본격적으로 탄생하고, 한국영화 산업이 개편되면서 다시 기지개를 켜게 된다.


“충무로는 르네상스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를 다시 맞게 될 겁니다. 물론 수많은 시행착오와 눈부신 영화 테크놀로지의 발전도 따라오겠죠. 하지만! 영화가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당연하게도 자본과 현장의 불균형이 벌어지게 될 겁니다.”


류지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쏟아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길 것을 우려하는 겁니까?”

“WaW 역시 직배사와 대기업 못지않은 자본력으로 무섭게 배급판을 장악하고 있지 않습니까?”

“류 회장은 트라이-스텔라 영화를 거의 헐값으로 들여와 극장에 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투자와 함께 직접 제작에도 손을 대고 있지.”

“메이저 스튜디오라도 꿈꾸는 가 봐요?”


마지막으로 맏형 격인 유영택이 물었다.


“이제 극장까지 하면 류 회장이 다른 기득권과 뭐가 달라요?”

“마치 제가 청문회 자리에 불려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선배님들.....”


류지호가 농담을 던졌지만,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만큼 우호적이지 않았다.

영화를 잘 아는 거대한 자본.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있는 공룡 사업가.

그런 류지호가 한국영화를 잡아먹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들은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그의 발아래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있었다.


“선배님들, 저도 한국영화인입니다. 한국에서 찍은 영화로 영화제에서 수상도 했고, 제가 소유하고 있는 영화사가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있고, 여러분의 영화를 해외에 배급하기도 합니다. 저희 영화사 직원들은 대유나 오성, 새한, 경일 같이 대기업 입사시험을 보고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의무적으로 영화현장에서 한 번은 굴러야 하고요. 또 모두가 직접 충무로 영화 현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함께 촬영장에서 스태프들과 날 밤 새고, 충무로에서 낮술을 마십니다. 심지어 기획홍보마케팅 여직원들도 그렇게 합니다. 충무로 현장 경험이 있는 직원을 우대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직배사 직원들은 어떻던가요? 오성, 대유, 금성, 경일은 어떻습니까? 그들을 영화인으로 인정하고 안하고를 떠나, 그들이 영화인들과 함께 창작하고 서로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진짜 한국영화를 사랑한다고 보십니까?”


꿀꺽.

일장 연설에 목이 갈라진 류지호가 생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직배사, 대기업 모두 영화보다는 회사가 우선이고, 회사보다는 자신의 편의가 더 중요할 겁니다. 하지만 WaW는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작사들의 이익 증대를 위한 시장 확대를 고민하고 있고, 제작사들에게 돌아가는 수익확대를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있습니다.”

“......!”

“선배님 중에 저희와 일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우리가 트라이-스텔라 영화와 한국영화를 묶어 직배를 함으로써 중간에 존재하던 지방업자를 끼지 않기 때문에 수수료를 절약했습니다. 각 극장마다 직접 계약을 함으로써 정확한 입장 관객수 집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합리적인 수익 분배를 할 수 있습니다.”


전하영이 WaW 픽처스를 두둔하면서 현실을 인식시켰다.


“WaW의 전국적인 직접배급은 수익을 극대화시켜주고, 결국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수익을 더 많이 가져다 줄 수 있어요.”


신강이 낮은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했다.


“하영씨, 우리는 류 감독이 서울극장 박 회장처럼 될까봐 그러는 거야.”


직배 원년인 88년에 수입된 직배영화는 6편이었다.

이후로 92년부터 해마다 50편을 유지하고 있다.

직배영화가 불러 모은 관객수도 93년 처음으로 1,000만 명을 넘어 1,200~1,500만 명 사이를 오가고 있다.

92∼93년에 이미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불과 2년 만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한국영화계가 당장의 수익에 눈이 멀어 손 놓고 있을 때.

작년에 LOG 컴퍼니까지 들어와 5대 직배사가 한국 상륙을 완료했다.

한국에 진출했던 오라이언은 트라이-스텔라에 인수합병 되면서 한국에서 철수했다.

이처럼 일본, 홍콩 등과 달리 한국에서 직배사가 빠르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서울시극장 라인과 긴밀한 제휴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서울극장 라인의 극장들은 워너-타임, 20세기 PARKs, LOG 등 직배 3사의 배급대행을 맡으면서 일방적인 독주 체제를 갖췄으며 결과적으로 직배사의 한국상륙 발판 구실을 했다.

UPI와 서울극장, WaW의 배급라인이 현재 3대 전국배급망이다.

오성과 대유 영화사업부가 올해부터 전국배급망을 깔고 있다.

직배반대를 목청 높였던 서울극장의 박종환 회장의 배신은 많은 영화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다.

참고로 충무로 민심의 이반을 의식한 서울극장 박종환 회장은 내년 강은석 감독의 무비서비스와 손을 잡게 되는데, 이는 영화인들의 좋지 않은 여론을 의식해 취하게 되는 첫 번째 행동이다.


“다들 작년 <101번째 프러포즈> 사태 벌써 잊어먹었어요?”


전하영의 도발적인 말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


작년 6월 19일에 씨네-누보의 <101번째 프러포즈>를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했다.

WaW 픽처스는 서울에서만 다섯 개 극장을 잡아 상영에 들어갔는데, 메인 극장이 중앙극장이었다.

그런데 한창 흥행을 타고 승승장구 하던 때 WaW 픽처스에 천청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7월 17일에 <쥬라기공원>을 개봉해야 하니 영화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씨네-누보는 난리가 났다.

최대 2달까지 극장에 걸려있을 페이스였는데, 할리우드 대작 영화를 걸어야 하니 한국영화를 내려야 한다는 일방적인 통보가 온 것이다.

내려라, 못 내린다로 팽팽하게 맞섰다.

한국영화 VS 직배영화 대결로 비화됐다.

결국 씨네-누보가 백기를 들려고 할 때. WaW 픽처스가 신촌의 극장 하나에서 트라이-스텔라 영화를 내리고, 대신 <101번째 프러포즈>를 상영했다.

WaW 픽처스가 아닌 씨네-누보나 한국 배급사였다면 한창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할리우드 대작영화에 밀려 극장에서 사라질 뻔했던 사건이었다.


“다른 힘없는 배급사나 대기업 계열 영화사였으면 어땠을까요? 과연 류 감독님처럼 한국영화를 위해 상영관 하나를 포기했을까요?”


전하영의 계속된 말에 프로듀서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한 말이 없었다.


“별 거 아니었어요. 어차피 계획했던 상영기간을 채워봐야 수익도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배급팀이 비즈니스적으로 잘 판단한 것이라고 봅니다. 딱히 한국영화를 위해 그런 건 아니었을 겁니다.”

“겸손은.... 감독님이 대표님께 전화했다면서요? 다른 극장 하나 잡아서 관객 반 토막 날 때까지 상영하라고.”

“WaW가 투자했으니까....요.”


류지호가 쑥스러워 생맥주잔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어느새 잔은 비워져 있었다.


“여기 500 한 잔 더요!”


새로운 맥주잔이 류지호 앞에 놓일 때 명씨네의 심희명이 입을 열었다.


“회계시스템은 이대로 유지하는 거죠?”


WaW 픽처스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처럼 주마다 제작진행비를 결재했다.

충무로는 투자 계약이 체결되면, 제작시점에서 전체 제작비를 일괄 지급해준다.


“예.”

“일일이 WaW에 예산서 올리는 게 번거로운데.... 차라리 월별로 지급해주면 안 될까요?”

“우리 스태프들과 한국영화를 믿어요. 하지만 충무로의 관행은 싫습니다. 주머닛돈이 쌈짓돈이 되는 관행은 WaW에서는 더 이상 없을 겁니다. 영화가 남의 돈으로 찍고 있다는 걸 모든 스태프가 항상 인지하고 있길 기대합니다.”


류지호는 단호했다.

제작부분에서 제일 잘못된 관행이 회계의 불투명성이다.

오죽하면 영화를 제작하면 길거리에 버리는 돈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또한 현찰이 눈앞에서 오락가락하니 제작부가 돈을 들고 잠적하는 사건도 종종 벌어진다.

소위 ‘삥땅’을 다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쉬쉬하는 풍토다.

투자자나 제작자는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유영택 대표가 생맥주를 잔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류감독은 위험분자로 찍힐 만 해.”

“위험분자요?”

“충무로 어른들이나 협회 높으신 양반들이 자넬 벼르고 있어. 위험한 아이래. 류 감독한테 물 들면 젊은 애들이 이상해진다고 실력행사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들이 나와.”

“제작가협회도 그래요?”


영화세상의 안용규가 툭 말을 내뱉었다.


“새싹이 자라기 전에 길을 들여놓자는 거지.”


전하영이 말을 받았다.


“꼰대들은 큰 그림을 못 봐.”

“무슨 큰 그림?”

“그림이 되잖아. 직배영화사의 대항마.”

“에이. 그건 아니다.”

“왜 아닌데?”

“류 감독님은 트라이-스텔라를 가지고 있잖아. 반은 할리우드 편이지.”

“그것도 말 되네.”


전하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수긍했다.

유영택이 류지호에게 충고했다.


“너무 급진적으로 환경을 바꾸려고 들면 온갖 곳에서 공격을 받을 거야.”

“남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 안 합니다. WaW를 끌고 가는 것도 벅찹니다.”


전하영이 톡 쏘아붙였다.


“WaW는 다른 사업에 비해 신경도 안 쓰잖아요!”

“하하하. 제가 왜 신경을 안 써요? 군인신분임에도 이렇게 나와서 일을 보고 있잖아요.”

“충무로에서 날로 먹는 건 류 감독님이 최고일 거예요.”

“제가 회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저 인천 출신입니다.”

“아휴! 말이나 못하면....”


류지호가 웃으며 생맥주잔을 내밀었다.


챙.


일행이 일제히 생맥주잔을 부딪쳤다.


“크으!”


일행 모두가 생맥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저는 직배사 직원 출신도 아니고, 대형극장 사장 아들도 아닙니다. 제가 찍은 단편영화가 3개의 해외영화제에서 수상을 했습니다. UCLA TV·영화 전공을 할 예정이고. 그리고 돌아와서 한국에서 영화를 할 겁니다. 저는 선배님들하고 똑같은 영화인입니다. 사업가가 아니라.”

“감독님 벌써 술 취했어요?”


류지호는 전하영의 농담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선배님들은 9회말 투아웃에 대타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외화직배라는 큰 파도 앞에서 기존 제작자들은 도망가버린 상황에서 선배님들이 맨 몸으로 타석에 선거죠. 공에 몸을 맞아서라도 1루에 나가야 하는 처집니다. 훗날 후배들에게 욕먹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 홈런은 못치고 겨우 2루타에 만족했느냐고. 할리우드 장르 영화를 배워 한국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가장 창조적인 것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도 함께 고민해주세요. 대기업 자본에 무조건 의지하지 마시고, 다른 매체가 생길 때 그곳에서도 부가가치가 쌓일 것도 대비하세요. 그 곳에 참여하려면 자본이 있어야하고, 10년 이상을 내다볼 수 있는 콘텐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때까지도 홀로 설 수 없다면 부가시장에서 완전 배제 돼 극장만 움켜쥐고, 딱 밥 굶지 않고 재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신세가 될지도 모릅니다.”


신강이 물었다.


“할리우드에서 보고 느낀 것들입니까?”

“문화적 측면에서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길을 찾는 건 좋아요. 다만 자본의 측면에서 이익도 추구해야 합니다. 선배님들은 대기업을 파트너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이 되어야 해요. 앞으로 다양해질 매체 환경 아래서 영화 유통과 수익 배분 그리고 관객의 취향과 기호 역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대기업이 뭘 모르고 영화판에 들어왔다고 무시하고 경원시하지 말고, 그들의 자본을 이용해서 여러분이 독립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으시길 바랍니다.”


류지호가 진심을 담아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대기업의 영화계 진출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해묵은 생리와 영화의 산업적 메커니즘과 사회·문화적 특성이 겉돌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오성, 대유 등이 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VCR 판매 확대 전략에 의해 영화 쪽을 넘보기 시작했고, 소프트웨어를 확보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가지고 있었지 영화산업에 대한 예습과 이해가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자발적으로 유입된 대기업 자본을 합리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대립구도로 내몬 충무로의 어설픈 관행도 대기업이 영화판에서 발을 빼는데 한 원인이 된다.

대기업들이 비싼 수업료만 물고 도중하차한 것은 이미 예정된 귀결이다.


“대기업 자본으로 제작 환경을 개선하세요. 극장 등 하드웨어와 시스템을 현대화하는데 대기업을 써먹으세요. 그들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그들을 욕받이 내세워 충무로의 잘못된 관행들을 변화시켜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류지호는 안타까웠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선배들은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풍미하게 될 패기와 열정으로 똘똘 뭉친 한국영화를 진정으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 시대를 좌충우돌하며 변화시킨 후 한국영화가 맺은 열매를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따먹게 된다.

한국영화라는 용암 속에서 손 끝 하나 데어본 적 없는 몇 개의 대기업이.

그리고 대기업에 기꺼이 노예로 종속되어 부스러기를 떼어먹은 자존감 없는 영화인들 일부도.

한국영화 시장은 계속해서 규모를 키울 것이다.

그 만큼 관객의 눈높이는 높아져 갈 것이다.

20년이 지나면 일본만 챙기던 할리우드가 한국영화 팬을 엄청 챙긴다.

스타배우와 계약할 때 계약서에 홍보 시 한국방문 몇 회 이상을 반드시 삽입하기도 한다.

한국 관객에게 통하면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에 다 통한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까지도.

미래의 한국영화 관객들은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아주 훌륭한 모니터 요원들이 된다.

극장에 발품 팔아 열심히 영화를 봐주기도 하지만, 합법·불법을 넘나들면 영화를 무척 많이 보는 것이 한국인들이다,

그리고 굉장히 까다로우면서 어떤 면에서는 너그럽다.

전 세계에서 가장 분석하기 어려운 관객이 한국 관객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종잡을 수 없다.

한편으로 꽂히면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관객이 한국인이다.

심지어 한국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할리우드 영화 편집을 바꾸는 경우도 벌어지게 된다.

SNS나 포털 등에서 한국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는 할리우드 직배사 직원이 따로 존재할 정도가 된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는 그렇게 똑똑하고 까칠한 한국관객을 잘 써먹는다.

정작 한국의 메이저 영화사들은 자국 관객들을 가지고 놀려고 든다.

비단 영화 분야뿐이겠는가.

한국 대기업이 가지고 있는 한계다.

자국민을 봉으로 아는....


“류 감독, 트라이-스텔라 이야기 좀 들려줘 봐.”

“트라이-스텔라요?”

“류 감독은 할리우드 스크립트도 많이 읽고, 직접 투자·제작·배급을 다 경험했을 거 아냐.”

“여기 전PD가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했습니다만?”

“간만 살짝 보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다른 스튜디오는 몰라요. 트라이-스텔라가 어떻게 영화를 만드는지 제가 알고 있는 대로 설명해 볼게요.”


할리우드는 여러 업무 분야를 특화하는 세분화 작업을 거쳐, 그것이 영화의 장르 구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세분화된 장르마다 영화 공식을 적용하는 표준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대중의 기호와 반응을 분석해 새로운 영화 제작에 반영했다.

장르 영화는 규격화된 영화 형식이다.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는 이런 틀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반복형 제작 방식은 매너리즘과 거리가 멀다.

반복하되, 새로운 표현을 담는다.

새로운 시도는 끊임없이 더 나은 영상기법을 창출해 왔다.

그럼에도 시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는 대중의 기호를 지나치게 앞질러가지 않았다.

그것이 핵심이다.

대중의 기호를 선도하지만 너무 앞서가지 않는 것.

할리우드는 소비자, 즉 관객의 기호를 파악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저예산 독립영화, 실험영화, 예술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져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스튜디오가 대작상업영화를 제작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예술영화극장이나 B급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영화관에는 스튜디오 영화를 걸지 않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스타와 영화가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풍토의 할리우드도 한계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류지호의 대략적인 설명을 가장한 강의를 들은 신강이 무심코 입을 열었다.


“부럽네.”

“부럽죠.”


류지호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일행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를 소유한 류지호가 부럽다고 말한 것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데요. 할리우드 메이저들이 계약하는 방식을 도입해 보실래요?”

“무슨 계약인데요?”

“트라이-스텔라가 파트너십을 맺은 영화사가 일 곱 개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작은 영화사들까지 포함하면 스물이 넘고.”

“3개 아니었어요? 캐롤코, 파라맥스, 디멘션.”

“그 곳들은 계열사들이고, 락캐슬락이나 라이트닝스톰 같은 영화사들과 트라이-스텔라가 맺은 제휴를 해보자는 거죠.”

“지금도 WaW와 씨네-누보는 제휴영화사 아닙니까?”

“할리우드는 스튜디오와 독립영화사가 제휴계약을 체결하면 기획한 영화 스크립트를 계약회사에 우선권을 줘요. 일종의 독점계약인거죠. 물론 제휴 스튜디오가 우선권을 가진다는 것이지 포기하면 다른 스튜디오로 가져가도 되고요.”

“WaW의 자회사로 편입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지?”

“선배님들 영화사와 WaW가 제휴계약을 맺으면, WaW는 선배님들이 제작하려는 영화에서 다른 경쟁 투자·배급사보다 앞 서 투자와 배급에서 우선권을 가지는 것뿐이에요.”

“그럼 뭐가 좋은 거지?”

“WaW는 스크립트를 다른 스튜디오에 빼앗기지 않고 선점할 수 있고, 제휴영화사는 안정적으로 메이저 투자·배급사와 우선 협상할 수 있는 이점이 있죠. 그리고 계약에 장기배급계약을 넣어요.”

“장기계약?”

“트라이-스텔라는 제휴영화사들과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짜리 배급계약을 맺고 있어요.”

“그 말은 제휴영화사가 제작한 영화를 그 기간 동안 무조건 배급해준다는 말인가?”

“네.”

“.....”


모두가 입을 다물고 바쁘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고민해보세요.”


청문회로 시작해서 영화산업 강의가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류지호는 기획 프로듀서들에게 미끼를 던졌다.

이들과 장기 제휴계약을 맺을 수만 있다면, 할리우드의 트라이-스텔라처럼 WaW 역시 10년 간 영화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왠지 위험한 냄새가 나는데요?”


심희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류지호를 힐끗거렸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류지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제휴계약서 샘플 보내드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제휴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선배들을 지켜봤다.

머릿속으로는 얼마 전 읽은 <위험한 아이들> 시나리오의 하나가 떠올랐다.


[이제부터 여러분 각자는 모두 기록이 깨끗한 신병이다. 진급하고 싶다면 노력만 하면 된다.]


이들 중 일부는 아직 그들의 진정한 영화 인생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류지호가 이들을 선도해 리더로써 이끌고 나갈 수는 없겠지만.

그들을 뒷받침해 줄 능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앞으로 한국영화계에서 쟁쟁한 제작자로 부상할 프로듀서들을 보며 류지호가 생각했다.


‘그냥 흥행하는 한국영화를 다 선점해 버릴까?’


잠시 위험한 마음을 품어보는 류지호다.


작가의말

편안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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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The Killing Road. (11) +4 22.08.23 4,950 155 26쪽
256 The Killing Road. (10) +9 22.08.22 4,958 149 23쪽
255 The Killing Road. (9) +6 22.08.20 5,072 153 26쪽
254 The Killing Road. (8) +5 22.08.19 5,119 145 25쪽
253 The Killing Road. (7) +12 22.08.18 5,079 157 23쪽
252 The Killing Road. (6) +7 22.08.17 5,182 163 25쪽
251 The Killing Road. (5) +4 22.08.16 5,239 152 22쪽
250 The Killing Road. (4) +5 22.08.15 5,225 164 21쪽
249 The Killing Road. (3) +4 22.08.13 5,364 168 22쪽
248 The Killing Road. (2) +12 22.08.12 5,396 162 22쪽
247 The Killing Road. (1) +16 22.08.11 5,889 173 26쪽
246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영웅놀이....! +17 22.08.10 5,652 201 27쪽
245 Collapse. (7) +8 22.08.09 5,355 169 21쪽
244 Collapse. (6) +6 22.08.08 5,291 162 24쪽
243 Collapse. (5) +4 22.08.06 5,353 159 25쪽
242 Collapse. (4) +6 22.08.05 5,310 168 22쪽
241 Collapse. (3) +10 22.08.04 5,339 164 27쪽
240 Collapse. (2) +9 22.08.04 5,125 145 23쪽
239 Collapse. (1) +7 22.08.03 5,472 166 23쪽
238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5) +8 22.08.02 5,318 170 22쪽
237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4) +6 22.08.01 5,378 164 22쪽
236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3) +7 22.07.30 5,485 157 24쪽
235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2) +2 22.07.29 5,394 160 24쪽
234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1) +5 22.07.28 5,593 149 26쪽
233 대박 축하한다! (2) +5 22.07.27 5,758 153 24쪽
232 대박 축하한다! (1) +10 22.07.26 5,673 156 21쪽
231 OK할 때까지..... +7 22.07.25 5,478 152 25쪽
230 배고픈 놈이 이긴다. (4) +14 22.07.23 5,544 169 26쪽
229 배고픈 놈이 이긴다. (3) +9 22.07.23 5,228 136 21쪽
228 배고픈 놈이 이긴다. (2) +7 22.07.22 5,449 159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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