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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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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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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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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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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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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위험한 아이들!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현실 위에 분 바르기.

<할리우드 영화의 마약>이라는 프랑스 비평가가 쓴 논문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규정한 표현이다.

할리우드 영화가 기계화된 창조성이 낳은 현실의 위조, 포장이라고 단언했다.

할리우드는 인디언 학살, 흑인 매매 같은 역사를 왜곡 해석·조장하고,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 차원으로 돌리며, 아메리칸 드림 같은 미국의 정신과 문화, 이데올로기를 전 세계에 수출하는 역할을 맡는다고 비판했다.

그 뿐만 아니라 남성숭배, 인종적 편견, 폭력의 미화 같은 역기능을 제기했다.

이렇듯 유럽에서는 할리우드를 비판하면서 한편으로 수십 년간 반복과 변형을 거치면서 발전해 온 할리우드 장르 영화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폴 베숑 같은 감독은 적극적으로 할리우드식 장르 영화를 배워서, 이를 유럽인들의 정서에 맞게 가공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즉 할리우드 영화와 영화산업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면서도, 할리우드 연구와 비판이 자국 영화의 발전을 위한 이론적, 실용적 토대가 되고 있다.

반면,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 비판 하거나 부러워하는 태도는 있어도, 할리우드 연구를 통해 한국영화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실용적인 연구나 분석은 전혀 없는 형편이다.

한국 영화의 철학은 무엇인가.

변하는 시대에서 영화인들의 자세는 어떠한가.


‘지금 이 시대, 우리 영화에 철학은 있기나 하나?’


학계와 비평 모두 부실하고, 전문가도 보이지 않는다.

WaW 픽처스가 탄생하면서 충무로 역사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길 류지호는 내심 기대했다.

딱히 그런 것 같지 않다.

메이저라고 불릴 수는 있지만, 영화산업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

한국 영화계는 대변혁을 맞이하고 있다.

할리우드 직배는 완전히 한국영화 시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 와중에 30대 중후반의 젊고 패기 넘치는 프로듀서들이 하나둘 독립해 영화제작에 뛰어들고 있다.

충무로 기득권은 할리우드 직배사의 콘텐츠로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있었고, 기획 프로듀서라고 불리는 젊은 영화인들이 대기업으로부터 돈을 조달받기 시작했다.

류지호의 WaW 픽처스는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했다.

WaW 픽처스가 기성 충무로와 새롭게 등장한 기획 프로듀서 사이에서 합리적인 절충과 대안을 제시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기득권에게는 튼튼한 자본을 갖춘 위험한 경쟁자로.

새롭게 떠오르는 기획 프로듀서들에게는 대기업과 다를 것 없는 자본가로.

WaW 픽처스는 양측 모두에게 경계의 시선을 받고 있다.


“...흠.”


WaW 픽처스 프로듀서와 투자/배급 팀장들이 회의실에 모였다.

하나같이 고심해서 선정한 한국영화 시나리오와 외국영화를 다시 한 번 검토했다.

마치 숙제 검사받는 학생들 같다.

한편으로 표정에서 자신감이 차 있기도 했다.

그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고정됐다.

3년 간 여러 편의 영화에서 대박을 친 대단한 안목과 예지를 가진 영화천재.

영화감독이자 프로듀서.

WaW 픽처스의 주인.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류지호가 자료들을 검토했다.

1993년 WaW 픽처스의 흥행성적은 UPI에 이어 2위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전 세계 10억 달러 매출을 올린 <쥬라기공원>을 12만 명(서울 기준)차이로 2위로 밀어버린 <클리프행어>(112만 명)부터 박스오피스 50위 안에 10편을 랭크 시켰다.

12위 <드라큘라>(30만 명), 23위 <사선에서>(19만 명), 30위 <써머스비>(15만 명), 42위 <야망의 함정>(10만 명), 43위 <스나이퍼>(10만 명) 등이 주요 영화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서 흥행에 실패한 <시티 오브 조이>(31만 명), <로보캅Ⅲ>(18만 명)가 각각 10위와 24위에 올랐다.

또한 파라맥스의 <크라잉 게임>(18만 명)이 26위에 올랐다.

톰 메이포더의 이름값으로 수입가가 높았던 <야망의 함정>만 본전치기했고, 나머지는 많든 적든 모두 수익을 남겼다.

재작년에 <인연>과 <인도차이나>를 수입한 것처럼, 작년에는 <피아노>(48만 명)를 수입·배급해 또 한 번 오동석의 안목을 증명했다.

한국영화 부분에서 WaW 픽처스는 <결혼이야기Ⅱ>에서 빠졌다.

일영영화사에서 영화 흥행 수익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탁.


한참을 자료를 들춰보던 류지호가 보고서를 덮었다.


“그래서 이명수 감독님의 <남자는 괴로워>는 누가 하는 겁니까?”


권영균이 자신감에 차서 자원했다.


“제가 해보고 싶습니다.”

“<게임의 법칙>은 어떻게 하고.....?”

“후반작업이 모두 끝나서 9월 개봉 때까지 제가 할 건 별로 없습니다.”

“좋아요. <누가 날 미치게 하는가>는 전 PD가 하는 겁니까?‘

“오랜만에 은실이와 일하게 됐네요.”

“<테러리스트>와 <돈을 갖고 튀어라>는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WaW가 투자와 배급만 하고, 제작은 각각 선일과 우노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영화 모두 어느 정도 흥행을 했던 영화로 기억했다.

실제 수익을 냈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류지호가 고개를 돌려 수입·배급팀장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 칸 필름마켓에 가게 되면, 웡자웨이 감독 영화를 사올 생각입니다.”

“<열혈남아> 감독 말입니까?”

“예! 이번 칸에서 <중경삼림>이 소개되는데, 올해 <동사서독>이란 무협영화도 완성될 것 같다고 합니다. 어떻게.....”


한때 홍콩영화는 한국 외화시장에서 흥행불패였다.

이제 옛말이 되고 있다.

작년 개봉해서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신용문객잔>이 한국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흥행한 홍콩영화로 남게 됐다.

물론 류지호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오 실장이 알아서 잘 판단하세요.”


<중경삼림>은 웡자웨이 감독이 <동사서독> 촬영을 하는 중간에 완성한 영화다.

따라서 올 해 두 편이 한꺼번에 공개될 예정이다.

배급권을 사올 수 있으면 좋고 아니어도 딱히 아쉬울 것도 없고.

류지호와 이낙용 배급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이낙용의 사과에 류지호가 의아해서 물었다.


“뭐가요?”

“<두 여자 이야기> 성적이 저조해서....”

“그게 왜 배급팀 잘못이죠?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나는 그 영화에서 돈을 벌겠다는 마음이 없었어요. 우리 모두가 시나리오를 좋아했잖아요. 달고 맵고 짜고 자극적인 음식만 먹을 수 있나요. 심심한 음식도 그것대로 매력이 있잖아요.”

“극장을 많이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올 하반기 영화들은 최대한 극장을 늘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열심히 하는 거 알아요. 지나 간 건, 지나 간 겁니다. 그걸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가 중요하겠죠.”


오동석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배 감독님의 <젊은 남자> 신경 좀 써주세요. 3년 만에 작업하시는데, 20만은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80년대를 대표하는 감독 배창훈은 4편 연속 연출한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했다. 절치부심 끝에 연출하는 영화가 <젊은 남자>다.

X-세대의 사랑과 욕망을 해부하는 영화인데, 80년대를 풍미한 중견감독이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았다는 것과 한창 드라마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신세대 배우 신희영이 출연하는 것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류지호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왜 영화가 성공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전반부가 지나치게 산만했다.

3년 만에 영화를 찍는 배창훈 감독의 의욕과잉도 걱정이다.

류지호가 직접 대선배에게 훈수를 두는 건 모양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베테랑 제작실장 주영호를 <젊은 남자>의 프로듀서로 붙였다.

류지호는 주영호를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흘렸다.

그 조언을 들을지 무시할지는 알 수 없다.

배창훈이란 사람 자체가 독선적인 성격이 아니라서 대화가 통하는 감독이긴 했다.

다만 마지막 기회라는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 여유가 없어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쨌든 <젊은 남자>는 모델출신의 이민재 배우의 탄생을 알리는 영화다.


‘이 영화가 잘 안되면, 장르영화 감독으로 변신시켜 드릴까.’


배창훈 감독은 영화를 다루는 솜씨가 있는 감독이다.

최근에 흥행에 참패한 영화들이 대체로 예술영화 냄새를 진하게 풍겨서 그렇지 본래 배창훈 감독은 잘 짜인 긴장감, 살짝 뿌린 감미료적 자극제, 힘 있는 템포감 등을 꽤나 잘 다루는 감독이다.

결혼 후 처음으로 쓴 시나리오가 <젊은 남자>인데 이 역시 현실풍자적인 면모가 두드러지긴 하지만, 상업영화와 작가영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비록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이 나오게 되지만.

암튼 배창훈의 조감독 출신인 이명수 감독이 그에게서 창의력을 배웠을 정도라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로 연출감각이 탁월한 감독이다.

류지호는 배창훈 감독에게 할리우드식지만 자신만의 색깔을 놓치지 않는 장르영화를 맡기면 기대 이상의 솜씨를 발휘할 것이라 믿었다.


“시라소니 소설은 계속 묵히실 겁니까?”


주영호 프로듀서의 물음에 류지호가 생각을 멈췄다.

WaW 픽처스는 1992년에 출판된 시라소니 소설의 영화 판권을 사두었다.


“아직 마음에 드는 감독이 없네요.”

“다찌마리 잘 찍는 감독은 더러 있습니다. 제작비만 넉넉히 지원해주면 <장군의 아들> 정도는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상을 원해요.”

“......?”

“그저 단순히 <장군의 아들> 정도로 낭만주의 시대 건달의 무용담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틱한 삶과 메시지를 함께 담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액션영화가 아니라 일대기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시라소니란 분이 영웅처럼 포장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영화 자체가 멋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장군의 아들>과 <검은 휘파람>이 파라맥스를 통해 미국에서 개봉하고 비디오로도 출시하면서 그런 류의 영화가 유행처럼 충무로에서 기획되었다.

얄팍한 기획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몇 편의 낭만시대 주먹을 소재로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관객들로부터 외면 받았다.

여담으로 시라소니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3년이다.

‘유지광의 주먹천하’라는 만화에서 처음 등장했다.

1983년 시라소니가 작고할 때 언론마다 앞 다퉈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다루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졌고, 1991년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다시 한 번 화제가 됐다.


“제작을 하게 된다면 시시하게 할 생각 없어요. 그래서 중국 로케이션도 고려하고 있고.”


류지호는 시라소니가 국내로 들어와 조선 깡패들과 자잘하게 노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사실이든 허풍이 많이 들어가 있든.

일제강점기 만주와 중국 대륙을 질타했던 천재 싸움꾼의 모습을 어떻게 그럴 듯하게 그려낼 지에 관심이 있다.


“그러셨군요.....”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었다.

그럼에도 중국과의 교류와 협력은 정부에 허가를 받아야 했다.

절차도 복잡하고, WaW 픽처스가 중국 쪽에 라인도 없다.

류지호의 구상이 실현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시라소니 프로젝트를 섣불리 실행하느니 당분간 묵혀두기로 했다.

먼저 충무로 감독 가운데 액션영화 감각도 있고, 드라마까지 다룰 수 있는 감독이 눈에 띠지 않았다.

더해 액션과 연기가 모두 되는 배우도 없다.

1930년대 중국 만주와 상하이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야외 세트장(Backlot)도 없다.

상해 영시낙원 세트장은 90년대 말에 가서야 문을 연다.

<엽문> 스타일이 되었든, <일대종사> 같은 영화가 되었든.

류지호는 액션의 쾌감과 함께 시대상황 그리고 휴머니즘까지 함께 담긴 영화가 제작되길 바랐다.

여건이 된다면 본인이 직접 연출할 의향도 있고.


“WaW가 확보한 소설이나 만화원작 가운데 당장 충무로가 기술적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들은 놔두세요. 해볼 만한 역량이 된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 가서 논의하는 걸로 합시다.”

“알겠습니다.”


박건호 대표를 배제하고 류지호가 마음대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올해 WaW 픽처스 라인업은 박건호 대표를 중심으로 작년에 이미 결정됐다.

오늘은 WaW 픽처스 측에서 새롭게 회장에게 추천하는 영화들에 대한 사안을 결정한 것이다.

투자 좀 더 해달라.

그런 자리였던 것.


❉ ❉ ❉


류지호는 강남에서 나래안전시스템과 가온 웨딩 스튜디오까지 돌고 여의도로 넘어왔다.

의장실로 노란색 소포봉투를 든 비서실 직원이 따라 들어왔다.


“그건 뭡니까?”

“미국에서 보내 온 겁니다.”


류지호가 건네받아 보낸 사람을 확인했다.

Don Simpson/Leon Bruckheimer Films이라고 적혀 있다.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표지에 아무것도 표기가 되지 않은 두툼한 종이뭉치.


“메모나 메시지는 없어요?”

“소포만 배달되었습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류지호가 종이뭉치를 들고 의자에 앉아 페이지를 넘겼다.

할리우드 표준 포맷으로 쓰인 영화 스크립트다.

류지호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스크립를 읽기 시작했다.

영화의 배경은 흑인과 히스패닉이 주로 살고 있는 빈민가의 한 고등학교다.

폭력과 욕설, 갱스터 랩이 난무하는 이 고등학교에 금발의 백인 여자가 임시 교사로 일을 시작한다.

백인 여교사는 정교사가 아닌 한국으로 치면 교생과 같은 임시직이다.

그녀의 이력은 특이하다.

미해병대에서 9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새로운 직업을 찾아 이 고등학교에 온 것이다.

교사인 그녀의 남자친구 추천도 있었고.

암튼 해병 출신 루엔 존슨은 아이들을 가르칠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런데 심각한 위기와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녀가 맡게 된 학급은 소위 골칫덩어리, 문제아들만 모아놓은 반이었던 것.

첫 수업부터 학생들의 모욕과 욕설을 듣게 된 루엔 존슨은 크게 실망해 교실을 박차고 나와 버린다.

그런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질책을 한다.

루엔 존슨은 오기가 발동해 다시 교실로 돌아간다.

그리고 폭력적인 아이들에게 해병대에서 수련한 마샬 아츠를 가르쳐 관심을 끌고, 밥 딜런의 노래 가사를 가르치는 등 그녀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변화시켜 나간다.

마음을 열지 않던 문제아들을 루엔 존슨의 열정에 서서히 마음을 열어간다.

그런 내용의 영화다.

류지호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영화 마리 파이퍼 주연의 <위험한 아이들>이다.

이전 삶에서 영화를 모르는 사람들도 ‘Dangerous minds'라는 OST는 한 번쯤 들어볼 만큼 꽤 유명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내게 이걸 왜 보냈지?”


투자를 바랐다면 트라이-스텔라 픽처스로 보냈을 것이다.

류지호는 모리스 메타보이에게 네온 부룩하이머가 투자제안서나 스크립트를 가져오면 자신에게도 알려달라고 당부를 한 바 있다.

자신에게 직접 소포를 보냈다는 것은 모리스 메타보이를 거치지 않았다는 의미.


“리뷰를 부탁할리도 없고. 투자 밖에 없는데?”


충무로에서는 흔히 모니터링이라고 해서 지인들이 시나리오를 읽고 감상을 들려주는 경우가 많다.

할리우드는 리뷰를 전문가에 의뢰한다.

그에 따른 비용도 반드시 지불한다.

비밀유지각서도 쓴다.

영화사에 접수되어 검토 중인 스크립트는 철저하게 관리된다.

그럼에도 아무런 관련도 없는 류지호에게 스크립트를 보냈다는 것은 Garam Invset의 투자를 받고 싶다는 의도로 읽히긴 하는데....


“이 양반이 투자를 못 받을 리가 없는데.....”


네온 부룩하이머는 <폭풍의 질주>로 패러마운틴과 갈등을 빚고 있다.

그들과 계약이 끝날 때까지 영화를 제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패러마운틴과 계약이 종료되자마자 LOG 컴퍼니 계열의 할리우드 픽처스와 계약하고, <나쁜 녀석들>, <크림슨 타이드>를 95년에 개봉하게 된다.

그것이 류지호가 기억하는 네온 부룩하이머의 행보다.


“혹시 낚신가?”


<크림슨 타이드>는 5,000만 달러 고예산 영화다.

중저예산인 <위험한 아이들>과 패키지로 거래를 제안하는 것일까.


“나한테 왜? 네온이 뭐가 아쉬워서.....”


사실 류지호도 네온 부룩하이머가 제작하는 영화가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의 라인업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단지 <나쁜 녀석들>만은 조금 아쉬웠다.

흥행이 확실한 시리즈물은 귀한 법이고, 시리즈를 통해 게임, 코믹스, TV시리즈까지 원 소스 멀티 유즈까지 가능한 프로젝트는 많지 않다.


며칠 후.

류지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네온 부룩하이머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뜻밖의 제안을 듣게 됐다.


“나보고 <위험한 아이들> 연출을 하라고요?”

- 돈의 생각이야.

“심슨씨가 왜요?”

- 네가 찍은 단편영화들을 모두 봤지. 네가 고향에서 찍은 것까지. 꽤 열심히 영화를 찍었더군. 2시간 넘게 네 영화를 봤어.

“<Portrait of the Deceased>과 <Help Me, Please>도 봤다구요? 어떻게....?”

- 파라맥스에 프린트가 있던데?


류지호가 제작한 단편영화들을 묶어서 옴니버스 형식의 비디오를 출시해보려는 기획이 파라맥스에서 진행 중이다.

북미, 유럽, 일본에까지 팔아볼까 궁리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에서는 아껴두었다가 류지호가 할리우드에서 데뷔하게 되면 국제영화제에서 프로모션 형식으로 단편영화 특별전을 열어보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내 영화를 봐 준 건 고마운데, 그것만 가지고 2,000만 달러짜리 영화의 연출을 맡긴다는 걸 믿을 수 없네요.”

- 2,000만 달러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내가 트라이-스텔라를 인수하고, 지금까지 몇 편에 관여했는지 알아요? 마음만 먹으면 1,000만 달러 안쪽으로 예산을 줄일 수도 있겠던데요, 뭘.... 주인공이 누가 될지 모르지만.”

- 하하하.


수화기 너머에서 네온 부룩하이머가 ‘지금 이 녀석이 하는 얘기 들었지 돈?’ 하는 소리와 돈 심슨의 웃음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 메타보이씨가 프로듀서로서도 재능이 있다고 하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어.

“내정 된 감독은 누구에요?”

- 미스터 류까지 포함해서 5명을 놓고, 숙고 중이야.

“두 사람 다 아직 안 죽었네요?”


두 사람은 <폭풍의 질주> 이후로 전혀 영화를 내놓고 있지 않았다.

패러마운틴과의 불편한 관계까지 널리 알려져 있고.

할리우드 호사가들은 두 사람이 끝났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 죽긴 뭘 죽어? 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사람이야.

“<크림슨 타이드>는 촬영 끝났어요?”

- 포스트 프로덕션을 진행 중이지.

“<나쁜 녀석들>도 촬영 시작했겠네요?”

- 6월 말에 마이애미에서 시작할 예정이야.

“내년에 세 편 다 개봉할 생각은 아니겠죠?”

- 글쎄. <위험한 아이들>을 네가 연출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두 편은 배급도 정해졌을 거고, <위험한 아이들>은 트라이-스텔라와 해볼래요?”

- 영화선택 권리는 다 썼다며?

“그렇긴 하죠.”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작가나 감독들에게 ‘빅6와 할래 미니 메이저와 할래’라고 묻는다면 열에 여섯은 빅6에서 만들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머지 네 명은 좀 더 많은 재량권을 가지고 싶어 하고, 의사결정 구조가 비교적 가벼운 배급사를 선호하는 이들이다.

스티븐 아들러 감독급이 아니라면 메이저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막말로 신인 감독은 스튜디오 임원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경우도 생긴다.

그런 가운데 네온 부룩하이머는 아무리 대단한 감독과 작업하더라도, 자신이 영화 전반에 일일이 간섭하고 컨트롤하는 프로듀서로 악명이 높았다.


- 이 주 안에 답을 줘.

“진심이었어요?”

- 그럼 내가 쓸데없이 네게 스크립트를 보내고, 이렇게 구애를 하겠나?

“파이낸싱은 끝났어요?”

- 소닉-콜롬비아스와 논의 중이야.


류지호는 소닉에 악감정이 없다.

그런데 묘하게 벌써 여러 편의 소닉-콜롬비아스 영화를 빼앗는 셈이 됐다.


“트라이-스텔라와 안 하고요?

- 95년 라인업은 모두 완성되었다던데?

“뉴욕에서 할 수 있어요.”

- 자네 투자회사에서 직접?

“예.”

- 그 말은 연출을 수락하겠다는 말?

“아니요. Garam Invest와 G&P 영화펀드가 제작비를 대고, 트라이-스텔라가 배급하는 걸로 하죠.”

- 진심이야?

“뭘요?”

- 감독 제의를 걷어차 버리는 거.

“지금 군인신분입니다. 제대하고 나면 학교로 돌아가야 하고.”

- 그게 무슨 상관이지? 넌 재능이 있어. 내가 도와준다잖아. 할리우드에서 곧장 데뷔하는 거라고.


‘댁이 도와주는 게 부담스럽단 말이야 이 양반아....’


류지호는 내심과 달리 네온 부룩하이머에게 현실을 상기시켜줬다.


“내가 트라이-스텔라 오너인 거 잊었어요?”


당신이 아니어도 데뷔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 할 말이 없군.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많고, 프로 세계로 나가기 전에 테스트해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 인생은 짧아. 이번 기회를 걷어 찬 걸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짧은 인생이니까.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은 겁니다. 길게 멀리 가려면 체력을 키워야죠.

- 특이한 종족과 대화하는 기분이군.

“가진 자의 여유에요.”

- 넌 좋은 프로듀서와 일할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거야.

“트라이-스텔라와 파라맥스에도 좋은 프로듀서 많습니다만.”

- 나만큼의 커리어를 쌓은 프로듀서는 메타보이씨 외에는 없지.


대단한 자신감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허세로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 그의 경력이 말해주니까.


“내게 감독 제의를 해 준 건 고마워요. 호의 잊지 않을게요.”

- 제작비 투자하는 걸로 갚아.

“자선사업 아닙니다. 네온.”

- <크림슨 타이드>를 자네에게 가져 갈 걸 그랬어.

“LOG는 빅6의 리더입니다만.”

- 그곳에는 지호 류라는 부적이 없지.

“부적?”

- <늑대와 춤을>이 흥행에 성공했잖아. 그 외에도 예상하지 못한 영화들이 펑펑 터졌고.

“초심자의 행운입니다. 몰라서 그렇지 손해 본 영화도 더러 있어요.

- 아무튼 <위험한 아이들>에 부적이 되어주면 좋겠군.

“투자·배급 약속은 지킬 겁니다. 구체적인 것은 메타보이씨와 협상해 보세요.”

- 미국엔 언제 올 예정이지?

“가을에요.”

- 그럼, 가을까지 건강하게 지내.

“심슨씨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네온 부룩하이머 같은 대단한 프로듀서가 연출 제의를 하는 것은 자주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다.

그럼에도 류지호의 표정에는 후회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감독이 되는 건 무모한 짓이다.

류지호가 소유한 영화사들에 좋은 시나리오가 많다.

영화사들도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굳이 영화 데뷔 문제에 안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위험한 아이들>.

재미있는 영화다.

참 스승, 소외된 청소년들의 비참한 현실, 서로 다른 인종의 소통.

메시지도 좋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동부 사립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귀족적이며 고루한 교육을 비판했다면 <위험한 아이들>은 빈민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예비 시민이, 미국사회의 건전한 시민이 될 수 있는 청소년들을 죽여 버리는 처참한 교육환경을 비판한다.

주제는 괜찮고, 감동도 있다.

다만 그런 것들은 양념일 뿐.

본질은 소영웅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상업영화니까.’


류지호는 네온 부룩하이머의 감독 제의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의 머릿속은 그것 말고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와 숙제들로 가득했으니까.

그것들이 좋은 아이디어나 기획이 아닐지라도.

그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이 중요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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