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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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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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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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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173. 방류의 직후

DUMMY

쿠콰콰광,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굉음이 대기를 떨어 울린다. 근처에 있는 동물들은 소란을 느끼고 이미 도망갔다. 제법 덩치가 큰 놈들, 데슈칸 산맥에서 어슬렁거리며 숲길을 걷는 포식자들까지, 지금의 굉음으로 엉덩이를 띄우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굉음.


무엇을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큰 소리가 났다. 제냐도 최태현도, 저도 모르게 뒤를, 그리고 위쪽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릿샤가 있는 곳에서 사람보다도 거대한 구체가 날아간다.


허공에 길이 만들어졌다.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는 폭풍의 흐름이 투명한 구슬 안에 들어 있었다. 그 구슬의 표면에는 하얀 서리, 흰 가루 따위가 묻어 빛이난다. 한기는 마치 김이 서리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긴 꼬리를 남겼다. MP가 떨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폭풍의 구로부터 MP가 요동을 치자 그 근처에 있는 SP가 소란을 일으켰다.


MP란 SP를 정제해서 기력술사나 초상술사가 자신의 것으로 만든 에너지를 뜻한다. SP는 자연계에 그냥 흩뿌려져 있는, 콘란드 대륙 특유의 기이한 에너지이고. 자연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상이한 두 가지 명칭을 가진 초상력은 자연계의 요소들과 호응하기도 한다.

특별한 자극이 갔을 때 강렬한 반응을 일으키고, 그 반응에 자연물들과의 호응이 들어 있는 것이다.


거대한 MP를 다루는 마스터 마기아들, 최상급의 원소술사들은 늘 그렇게 하늘과 땅을 울린다. 감히 전체의 땅과 하늘에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바라보는 그 근처의 땅과 하늘에는 충분한 영향을 주었다.


아주 커다란 생물이 울부짖는 것 같은 둔하고 거대한 울림이 남는다. 빛과 함께, 폭풍의 구는 느리게 시작했다가 점차 빨라진다.


검은 선, 허공에서 이리저리 요동치며 움직이고 있는 검은 용에게 가 닿는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검은 용은 아직까지 정신이 제대로 깨어나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동굴 속에서 잠에 취했다가 이제 막 움직임을 시작한 놈이다. 단순한 생물이었으나, 여러가지 패턴들이 있었다.


여태껏 최태현과 제냐가 퍼부었던 여러 개의 공격들은 검은 용에게 있어 그다지 큰 위협이 아니었다. 암석을 갉아먹으며 여기저기 부딪히다 보면 놈의 살갗이 까지기도 한다. 검은 용이 느끼기엔 그 정도의 일일 뿐이었다. 파티원들이 뿌렸던 견제기의 데미지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기운은 조금 달랐다. 검은 용은 결국 벌레이며, 지렁이지만 민감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더러운 성질을 갖고 있기도 했고. 다양한 패턴 변화를 보이면서 사냥을 까다롭게 만드는 녀석이다. 대부분의 보스 몬스터들이 그러하듯 MP를 제 숨처럼 다루기도 한다.


그런 검은 벌레의 감각기관에, 자신을 향해 밀려 들어오는 폭풍의 기운은 심상치 않은 현상이었다. 조금 큰 충격일 수도 있다. 검은 용은 서서히 움츠러들었던 몸을 다 깨워냈고, 계속해서 동굴 쪽에서는 놈의 몸뚱아리가 나오고 있었다. 점차 속도가 빨라진다. 백 미터가 훨씬 넘는 길이였다. 어쩌면 이백 여 미터. 검은 용은 더럽게 길다. 생물체의 길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힘들지만, 그런 녀석보다도 더 큰 몬스터들이 이 세계에는 많이 있었다.


가장 흔한 판타지의 상상력인 ‘용’ 또한 그러하다. 거성과 같은 몸뚱아리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괴물같은 용들 또한 있었다. 그건 허공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고래와 같은 위압감이었다. 고래보다도 훨씬 더 큰 부피를 가지기도 하고.


검은 용은 그런 용보다는 덜하다. 길이로 보자면 비슷할 수 있겠지만. 체적 자체는 얇다. 물론, 그런 제대로 된 ‘드래곤’, ‘용종’에 비해서 얇다는 것 뿐이지.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거대한 화물 트럭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느낌이다.

정면에 선다면 그런 느낌이 들 테였다. 짐을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아주 큰 트럭의 앞에 선 것같은 느낌 말이다.


검은 용은 아가리를 벌렸고,


“크아아아아아아!”


괴물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비명을 질렀다. 한기가 드는 외침이었고, MP적 공격에 대한 방어력이 부족한 생물은 그것만으로도 상태 이상에 걸리게 된다. 피어Fear 류의 스킬이었다. 검은 용의 외침만으로도 어지간한 것들은 혼절을 한다. 그래서 레벨 50이하, 중수 중에서도 수준이 낮은 이들은 이런 레이드에 참여할 자격조차 되지 못한다.


손을 보태러 왔다가 그냥 게임 오버되는 숫자만 늘리는 꼴이다. 적정 사냥 레벨이라고 한다면 지금 모여 있는 파티원들의 레벨일 것이다. 다만, 숫자가 지나치게 적었다. 100도 되지 않은 사람들 네다섯 명이서 검은 용을 토벌하려고 한다고 들으면 미쳤냐는 소리를 누군가는 할 테다.

일반적인 상식이 있는 전투 클래스의 유저이거나, 베테랑 용병이거나 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다만 검은 용을 잡으러 온 제냐 파티는 자신이 있었다. 놈을 토벌하고, 게임 오버를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귀환할만한 자신 말이다. 여기서는 삐끗하면 게임 오버이기는 했다. 여태 모든 플레이가 결국은 다 게임 오버의 위험성을 안고 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서바이벌 게임을 제대로 즐긴다는 건 또 그런 게 아니겠는가. 제냐는 차라리 즐거워했다. 하늘에 길을, 궤적을 남기면서 날아가는 폭풍의 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리 여겼다.


둥그런 구는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날아갔고, 검은 용의 대가리 즈음에 박았다. 정타正打였다. 딱히 급소라고 할만한 것을 찾기 힘든 검은 용이다. 신체를 반으로 주욱 갈라봐도 심장이 여러개였고, 그 외의 내장 기관들도 없애봤자 재생할 수 있는 것들이다. 대가리 쪽에 뇌나 주요 기관들이 있었는데, 그래도 그것이 한 번의 타격으로 가장 큰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부위였다.


검은 용은 희고, 푸르게 빛나며, 심상치 않은 굉음을 내는 공을 박치기로 받았다. 헤딩을 하는 것과 같은 꼴이었지만, 폭풍의 구가 튕겨서 날아가지는 않았다. 그대로 천천히 단면이 허물어졌고, 내부에 있던 에너지는 경계를 잃어 바깥으로 풀려나기 시작했다.


바깥 모든 방향으로 튀어나가고 싶어 애를 쓰던 MP들은 마침내 자유를 얻었고, 폭동과 비슷한 걸 일으킨다.

폭풍의 구는 날아갈 때 냈던 굉음과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커다란 소리를 냈다.


콰-


악-


-.


제냐의 귀에는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폭음. 그런 게 대기를 통해서 고막을 울린 것 같았는데. 귀로 들을 수 있는 가청 영역을 넘은 것 같았다. 빛으로 보자면 그저 새하얗게 광선이 날아와 시야로 확인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귀도 굉음을 다 듣지 못했다. 떠듬떠듬, 그 소리를 대강 인지했을 뿐이다.


바람으로 대신 느껴졌다. 데슈칸 산맥의 절벽 바로 앞 허공. 깎아 지르는 돌절벽이 멀리 있었고, 가파른 산세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제냐 파티가 각기 떠 있었다. 릿샤는 숨을 조금 몰아쉬면서, 피곤한 기색으로 폭풍의 구를 내보냈다. 팔을 앞으로 뻗은 그 자세로 굳어 있었고, 다른 이들은 브라운과 썬더스의 위에서 폭발의 장면을 지켜본다.


돌풍이 그 가운데 불었고, 허공 높은 데까지 동굴로부터 튀어나와 대가리를 흔들어대던 괴생물체는 그대로 폭발에 삼켜졌다.

폭풍의 구가 거대하다고는 하지만 검은 용의 대가리에 비해서는 아주 크진 않았다. 그러나 내부에 들어 있던 유색의, 탁한 기운이 쏟아지며 작은 폭풍이 만들어졌고, 그 여파로 강풍이 근처에서 불었다.


제냐와 최태현, 릿샤와 호아킨, 라이엔 모두 얼굴로 불어닥쳐오는 바람을 맞았다. 썬더스와 브라운 역시 돌풍에 중심을 잃지 않도록 자세를 바로했다. 측면으로 하고 절벽 쪽을 바라보던 자세에서, 배가 선회를 하듯이 유연하게 돌려 부리로 검은 용 쪽을 노려보았다.

약간 회전을 한 셈이었고, 최태현은 그 틈을 보아서 자철시를 한 번 더 날렸다. 라이엔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앞쪽으로 등을 바짝 엎드린 상황이다. 괴조의 등은 상당히 넓었고, 라이엔이 정면에서 알짱거리지만 않으면 화를 쏠만한 충분한 공간이 나왔다.


같이 타고 있다고 하지만 두 명의 사이 거리는 걸음으로 반 걸음, 혹은 한 걸음 정도는 되었다.


상체를 뒤틀면서 시위를 잡아 당기고, 조준을 할만한 자리는 충분하게 나왔다.


‘으으으으으.’


라이엔은 썬더스의 등 뒤에 바짝 엎드리고서,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굉음이 그녀의 고막을 흔들었다. 신체 강화와 연관된 기술들을 못쓰는 것도 아니었고, 초보적인 수준의 기력술은 사용 가능했고. 물리 스텟역시 어지간히 올려는 놓았으므로 이 전장의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썬더스와 브라운의 기동력은 어디에 갖다두어도 빠지지 않을만한 속도였다. 사태가 위험해지면 뒤로 빠지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


검은 용의 자태는 예사롭지 않았다. 기괴한 몰골처럼도 보인다.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그렇게 보이게 하는 지도 모른다. 라이엔은 즐겁게 게임을 하고 싶었다. 어지간해서는 게임 오버를 당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보다는 훨씬 무겁게 사냥에 임하고 있는 이 파티원들이 부디 성공하기를 바랄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썬더스의 목 근처 깃에 닿는다. 앞좌석, 이라고 그녀가 부르는 위치에서 몸을 최대한 낮춰 얼굴을 갖다 대면 말이다. 그 근처의 깃털들은 썬더스의 것들 중에서도 특별히 부드러웠다. 마침 좋게 느껴지는 감각에 라이엔은 아주 약간 평온을 찾았다.


그런 라이엔의 뒤에 앉아 있는 최태현은 팔을 부지런히 당긴다. 브라운에게 타고 있는 자세에서 하반신에 힘을 꽉 준다. 거대한 괴조는 사람이 편하게 탈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둥그런 원통을 새의 몸통이라고 친다면, 다리는 그 바깥쪽으로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 윗부분, 상단 부분에 걸친 채 있고 굴곡을 다 감쌀 수는 없었다.


거기서 여러가지 마구馬具와 비슷한 장비들이 사용되었고, 특수 제작된 벨트와 버클 따위가 그를 단단하게 고정시킨 채 견뎌주는 중이다. 가능한 만큼은, 최대한 각도를 만들어서 하반신에 힘을 주었다. 최태현 역시 물리 스텟이 깨나 높은 편이었으니까, 썬더스가 다소 불편할 지도 모른다. 어쩔 수는 없다.


현재 괴조의 등은 그에게 있어서 지면과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힘을 내기 위해서는 단단함이 필요했다. 제대로 설 수 있는 환경이라면 나뭇가지 위에서도 사격을 해낼 수 있었지만. 앉은 채라고 한다면 요령이 추가된다.


오른팔을 당긴다. 자철시는 백룡각궁의 위에 걸려 있다. 새하얀 활의 몸통이다. 아니, 새하얀 색에서 조금 더 상아빛이 돈다. 어쨌든 최태현의 기운으로 인해서 활체가 강화된다. 최태현의 몸이 그렇듯 말이다. 더 거대한 충격과 에너지를 견디고, 대포를 쏘아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끼릭거리는 시위의 소음. 그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쏘기 직전까지 들리는 소리이기도 하고.

궁술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보면 그렇게 느껴지는 사소한 감각들이 정겹게 여겨진다. 사람은 한 가지 행동을 계속해서 되뇌이고 반복하면서, 정을 붙여나가는 걸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는 사랑에 빠진다고도 한다.


글을 쓰던, 가상현실 기기를 다루던, 어느 업소나 가정집에 가서 커다란 기계를 설치하던. 서류 업무를 보던. 뭐 여러가지 일들이 있다. 가끔 쉬는 날에는 요리책을 뒤져서 혼자 밥을 해먹는 취미도 생겼다. 적적한 독신 생활에 꽤나 괜찮은 취미였다.

그렇게 늘상 반복되는 여러가지 행동들. 별 것 아닌 일들에도 마음이 깃들고, 조금 더 깊은 실력으로 다져지는지 모른다. 어떤 분야이든 그렇다.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해서 활을 쏘아내는 이 작업 역시 그러하다.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머슬 메모리는 미약하게 남는다. 비련의 시나리오 자체가 사용자의 뇌와 링크해서 신경 반응을 이끌어내고 조작하게끔 하는 방식이라 그러하다.

머릿속으로 강렬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실제로 몸을 굴려서 연습을 하고, 쉬는 시간에 하기에 딱 좋은 방식의 연습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최태현은 아마 궁술만을 고집스럽게 거의 다뤄왔으므로, 어느 궁도 교습소 따위에 간다면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적응할 지도 모른다.


아무튼.


백룡각궁은 어느새 한계에 달했고, 최태현은 그 시위를 당겨 자신의 얼굴 근처, 볼 바로 앞까지 끌어왔다. 자철시는 고요하게 머물러있다. 최태현이 꽉 쥐고 있으니 말이다. 기력이 돌면서 완벽하게 자세를 제어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생물체인 이상 흔들림은 있을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것을 스킬의 유도가 마치 달인적인 궁도가의 움직임처럼 제어해주었다. 거기에 기력술이 작용해서, 관성과 자세 제어가 들어간다. 정밀한 기계가 쏘아내는 동작처럼, 흔들리고 있는 썬더스의 등 위에서도 다시 한 번 화살을 날렸다.


피슈우우우,


하고 폭풍의 구가 난 것보다는 훨씬 작은 소리였고, 멀리서 울려 퍼지고 있는 폭발의 여파와 굉음 때문에 묻혀버린다. 광풍 속을 꿰뚫고 자철시가 날아들었다. 여전히, 폭풍의 구는 그 흉포한 에너지를 검은 용에게 풀어내고 있었고, 검은 용의 몸체는 멈춰 있다. 움직임이 멎은 정물보다 사격에 쉬운 것이 달리 없었다.

최태현은 마음 놓고, 자철시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 가로누워진 특수 전통으로부터 계속해서 화살을 빼낸다. 거진, 1, 2초에 한 발씩을 쏘아낸다.


폭풍은 바람의 기운을 쏟아내다가 거대한 빛과 함께 다시금 이차적인 폭음을 만들어냈다.


콰-




앙.


차마 다 들리지 못하는 소리가 최태현의 귓전을 울렸다. 귀가 먼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었다. 최태현은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


검은 용은 대가리로 폭풍의 구체를 박았다. 구체는 그대로 경계가 풀리면서 내용물이 쏟아져나왔다. 관성의 힘에 의해서, 그리고 릿샤가 고집스럽게 주입했던 명령에 의해서 그 파괴력은 전방으로 투사된다.

곧 폭풍의 구체가 진행하던 방향에 있던 검은 용의 몸 위로 전부 그 파괴력이 집중되는 것이다.


폭발음이 들렸고, 검은 용의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한기가 쏟아지면서 속성 데미지를 입혔다. 미세하게 세포들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재생력을 방해했다. 새로운 살이 돋아나야 하는 자리에 한기가 스며들어 얼려버렸다. 그것들을 밀어내고 새 살들이 자리잡는 시간을 지연시킨다. 어쨌든 자신의 체조직이 전부 사라져버리면 검은 용 역시 게임 오버였고, 죽음이다.

말도 안되는 재생능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당연한 말이었다. 체조직의 손실률은 곧 HP의 손실과도 같은 말이었고.


재생 능력을 봉인하는 식의 공격 방법은 검은 용 토벌에 있어서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지난 토벌에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게임 오버를 당했다. 백이 넘는 거대한 토벌대의 인력들이었다. 하나하나가 중수는 확실하게 넘었고, 그 말은 완숙한 초인이라는 뜻이고.

그런 이들이 쓸려나가서 결국 릿샤와 호아킨만 살아남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 이 게임은 지독하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그저 농담처럼 ‘비련’이라는 말을 붙여놓기는 했지만, 깊이 플레이를 해보려는 입장에서 다시 제목을 바라볼 때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힐링 게임을 원한다면 안전한 제도권 속, 도시에서 잔잔한 플레잉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도시를 벗어나고, 다양한 곳에서 모험을 하며 부딪히기 시작하는 하드 플레이어들의 경우에는, 제작자가 붙여놓은 이름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게끔 되어 있었다.


삶을 닮은 게임. 그게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이었다. 이 세상만사, 쉬운 것 하나도 없다. 제대로 되는 것도 별로 없다. 넘어지고 깨지고, 그러다가 죽지 않고 간신히 살아남았을 때 볼 수 있는 게 내일이다,


라는 철학적인, 사색적인 화두를 현대인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깨닫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릿샤의 경우라면. 너무 잘 던져서 문제라고 대답을 할 테였다.


빈말로, 릿샤는 그녀 스스로가 굉장한 재능이 있다고 말을 하고 다닌다. 재능이란 게 여러 분야로 나누어지기도 하고, 제 입으로 하는 건 실제 그렇다 하더라도 농담조로 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 농담 사이에는 은연중에 진실이 들어가있는데, 실제로 릿샤의 머리는 굉장히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여태껏 경험해 본 여러 종류의 게임들이 있었다. 연구원으로 일을 하고, 아카데미에 들어가 학계에서의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와중에도 종종 즐겼었다.

새로운 기술 발전의 형태는 언제나 흥미로운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리학 연구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가상 현실로 이루어지는 온갖 종류의 과학적 법칙들에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흥미가 늘 있었다.


게임 내에 다양한 세계관, 물리 법칙 따위가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지 따져보는 재미도 있었고.

그런 면에서 몇 번의 게임들을 거쳤고, 그녀는 자신의 좋은 머리가 게임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도 아주 쓸모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이도가 높다고 하는 게임들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머리와 게임을 플레이하는 재능은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굳이 첨언을 하자면 릿샤는 두 종류에 재능이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게 더 올바르리라.


아무튼, 그런 그녀인데도 비련의 시나리오는 유달리 어려운 면이 많다. 지금까지 레벨 업을 해오고 플레이를 한 것 역시 많은 운이 따랐다. 까딱했으면 게임 오버가 되었을 법한 일이 아주 많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역시 다 계산을 짠 뒤에 온 사냥이었지만 그렇게 될 확률이 여전히 있었고 말이다. 한 치 앞을 방심할 수 없는 곧. 그게 콘란드 대륙이었다. 물론, 그것 역시 현실을 ‘닮았다’는 점에서, 진짜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비하자면 그다지 하드 코어는 아니었다.


도저히 되돌릴 길 없는 매일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게임이란 건 아무리 강렬하게 만들어놓아도 그다지 자극적이지는 못하다. 실제의 죽음에 비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비련의 시나리오 역시 비유적인 의미로, 실재하는 현실적 요소들에 대응시켜 여러가지 것들을 둔 것뿐이고. 거기가 아마 창작물이 닿을 수 있는 최종적 지점이 아닐까 싶다.


한 번의 게임 오버가 곧바로 계정 삭제로 이어지고, 다시 게임에 접속할 수 없게끔 되어 있는 시스템도 최대한 ‘현실성’이라는 걸 만들어보기 위해서 투입한 요소다.


릿샤는 눈을 부릅뜬다.


현실과 닮은 가상현실 속에서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늘은 사냥을 끝내고, 일정을 마무리해야 한다. 저녁도 먹어야 한다. 시간은 이미 새벽이었지만, 밥을 먹지 않고 들어왔다. 먹을 생각도 없었는데, 머리를 많이 쓴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플레이하다 보니 배가 고픈 감이 들었다.


현실에서의 불편함은 게임 내의 플레이에 당연하게도 영향을 미친다. 게임 내의 요소가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말이다.

현실과 가상현실이다보니, 당연하게 수직적인 상하 관계가 나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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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5 1 21쪽
211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24.03.07 15 1 21쪽
210 209. 이동移動 24.03.06 14 1 20쪽
209 208. 지루한 옮김, 라이엔의 상념 24.03.05 17 1 21쪽
208 207. 지루한 옮김 24.03.05 16 1 14쪽
207 206. 퍼레이드parade 24.03.04 15 1 19쪽
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18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3 1 12쪽
204 203. 화살막이 24.03.01 14 1 19쪽
203 202. 방패, Shield 24.01.07 19 1 14쪽
202 201. 짜증 24.01.07 13 1 24쪽
201 200. 공습 24.01.06 15 1 22쪽
200 199. 필멸창 24.01.06 11 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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