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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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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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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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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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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귀인이 되어(3)

DUMMY

현우가 마침내 단서를 찾아서 나오는 순간, 집 앞에는 명연이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우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여긴 왜 왔어? 아까 네 집에서 보니까 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많이 나던데. 바쁜 것 아니었어?"

"당연히 전해줄 게 있어서 왔지. 내가 그냥 오빠를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걸어 온 줄 알아?"


명연은 현우를 향해 팔을 쫙 뻗었다. 그녀의 손에는 보자기로 싼 무언가가 딸려있었다.

불과 물과 장으로 인해 거칠어진 그녀의 손과는 어울리지 않는 곱디고운 명주천이다.

견직물의 가격이 비싼 만큼, 그녀가 그것을 꺼냈다는 것은 필시 중요한 것이라는 증거일 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현우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은 거야? 고마워, 명연아."


하지만 현우의 손에 받아진 것은 책이라고 하기엔 제법 무게가 나가는 것이었다. 천으로 싸여진 무언가의 크기도, 책자라고 보기엔 너무나 크고 양감이 풍성했다.

이게 무엇인지를 밝혀달라는 현우의 시선에, 명연은 차마 눈을 맞출 수는 없었는지 땅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곧 떠난다면서. 집밥도 먹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는 건 있을 수 없잖아. 전에 츠루 할머니한테 배운 거야."

"저쪽 마을에 계신? 그 분도 손재주가 좋기로 유명하신 분이잖아."


현우의 물음에 명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보자기를 풀어볼 것을 권했다.

보에 싸여져 있던 건 넓은 잎으로 감싸져 있는 뭉친 밥. 나란히 놓여있는 주먹 크기의 그것은 도합 세 개나 되었다.


"원래는 나무 상자에다가 담으려고 했지만, 갈 길이 바쁜데 걸리적거릴 까봐 그냥 잎에다가 싸봤어. 나중에 가면서 먹어. 안에는 쉽게 상하지 않는 것들로만 속을 채웠으니까 그래도 반나절은 괜찮을 거야."

"...고마워, 명연아."

"고마우면 나중에 한 번 더 오던지 해. 여름 때는 워낙 일이 복잡해서, 난생 처음 가본 수도에서도 얼만 심하게 타고 결국 오빠랑은 제대로 된 이야기 하나 꺼내보지 못했으니까."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충분히 전해졌다. 차가운 가을 바람을 헤치고 와서, 아직도 볼이 발개져 있는 현우의 찬 얼굴을 데워줄 만큼의 훈훈함이었다.


명연의 정성이 깃들어있는 보자기를 싼 현우는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로 했다.

명연은 그녀의 앞에서 벌어지는 날개의 솟구침에 깜짝 놀란 기색이다.

미네바에서 전설로 남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음에도, 정신을 잃은 탓에 순백의 날개를 보는 것은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내 현우를 보려면 아마 몇 달은 지난 후라는 생각이 밀려오는지,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질려는 찰나.


턱.


현우가 명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난 강아지가 아니야, 오빠."

"고마워서 그래. 엄마 뿐만 아니라, 너도 고향에서 나를 기다려주니까. 언제든지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정말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거든."

"혹여 대학 생활이 힘들거든 언제든지 와. 내가 오빠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어."

"당찬 소리네, 하하. 그래도 내가 알거지는 아니라고."


당장에 그의 가죽주머니에 든 금화만 하여도, 마을 사람들 전체가 며칠을 놀고 먹어도 충분히 남는 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든든한 것이 있어, 현우는 다른 손에 명연이 싸준 요기거리를 보물이라도 된 마냥 품에 꼭 안았다. 앞으로 날아갈 거리에 대비하여, 그게 최대한 식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다시 한 번 명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마법사는 저 높은 공활한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쳤다.

명연은 점점 작아져 가는 현우의 모양새를 눈에 꼭 담았다. 다음 번에는 더 맛있는 것을 해주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결심과 함께.


마법사가 레이야마를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 * *


피에르, 이 저택의 고용인이자 그의 주인이 가장 신뢰하는 집사들 중 한 명.

그가 섬기는 가문의 일원이 수도에 거주 하지 않을 경우에 한하나, 어찌되었든 이온에 있는 이 대저택의 관리와 그에 따르는 권리는 이 시종장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제는 경쟁에서 사라지고 없어진 몰락한 귀족가문이라는 뒷배경이 있긴 하지만, 귀족가의 삼남이었다는 사실은 본인도 가끔 까먹는 사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이십여 년이나 지난 일이지 않은가.

수많은 해가 지고 뜸을 겪다 보면 어느새 과거의 기억은 아스라히 사라지고, 꼭 기억할 몇몇 것들만 마음 속 상자에 고이 간직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거기에 수도는 왕국의 정치와 모략이 집결된 곳, 단지 저택을 관리하는 것만이 그의 일이 아니었다.

왕국의 군사와 각 영지에 속해있는 사병들의 수, 그리고 이에 관련된 각종 이권들이 그의 주인과 연관되어 있었다. 당연히 대신을 뵙고자 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저택의 문을 두드렸으며, 고위 귀족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소수들은 일단 피에르의 선택을 거쳐야 했다.


저택의 관리 업무와 더불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에게 들어오는 은밀한 제의와 회유를 상대하다 보니, 그 스스로도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생각한 그였다.

어제 저녁만 하여도, 피에르는 가주의 식사를 나르다 그만 발을 삐끗해버린 젊은 시종의 팔을 붙잡아 음식이 망가지는 것을 막았다.

물론 그 다음에는 호된 질책과 훈육이 이루어졌지만, 어찌되었든 표면상으로 피에르의 얼굴에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따름이니.


허나, 오늘의 아침과 점심 식사 사이의 기간 동안, 그는 오랜만에 당황한 얼굴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외부인의 면전에서 말이다.


"어떻게, 콜록! 어떻게 경비를 뚫고 들어오신, 콜록! 겁니까?"

"급한 일이라 그만... 죄송합니다."


연신 사과를 해대는 사내를 보며 피에르는 양껏 그에게 이죽거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저 사내는 그의 선에서 마무리를 지을 수 없는 자였다.

단순히 내부자의 호의로는 피에르의 혹독한 설검(舌劍)을 막을 순 없었다. 허나 그가 모시는 가주가 저 마법사의 능력을 검증했고, 이에 감탄을 한 나머지 그의 방문을 막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 바가 있었다.


저택 바깥의 공간을 어지럽힌 것은 있으나 저것은 다른 아이들을 시켜서 복구하면 될 일. 힘이 모자라면 저택에 상주하는 마법사에게 부탁하면 될 일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눈 앞의 사내를 가주에게 데려가는 일.


"정말 급한 것이어야 할 겁니다."

"당연하죠.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살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그러면서도 전혀 생채기 하나 없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대신에 누래진 잔디가 깔린 정원이 완전히 파헤쳐졌지만, 이라고 현우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찌되었든 도움을 받을 건덕지라도, 어디 비벼볼 구석이라도 있는 사람은 이 저택의 가주 뿐이었다. 귀족은 자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데다가 돈도, 시간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미네바에서 이온으로 금화 2개에 달하는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공간 이동을 이용했음에도 다시 하늘을 날아 저택의 중간으로 곤두박질 치지 않았는가.


귀족의 마음에 들 것이 분명한 선물은 이미 가지고 왔다.

품 속에 든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현우는 집사의 안내에 따라 저택의 본채로 발걸음을 더했다.


* * *


마법사가 레이야마로 돌아오겠다고 공언을 한지 열흘 하고도 세 밤이 흘렀다.

다행히 저택 안에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길어 쓰는 우물이나 강물 말고도, 자체적으로 솟아오르는 샘이 있어 식수 걱정은 덜었다.

이런 때에 선조에게 감사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키노시타 사쿠라는 헛웃음과 함께 평을 남겼다.

정원에 딸린 연못이 숨어버린 강줄기의 일부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저 용천수 덕분에 목이 타들어 가는 걱정은 깨끗이 접었다.


하지만 식량은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저택에 거하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은 까닭에, 평소에 보관하고 있던 말린 야채 등의 재료가 충분치 않았다.

그나마 그녀가 곧 고향에 들르겠다는 서신을 보낸 덕분에 서너 사람이 먹을 분량의 식량을 따로 구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현우가 잠깐 저택에서 지낼 수 있었을 때, 그녀가 쉽게 허락을 한 이유도 그에 따른 것이 없진 않았으니까.


다만 황 노인이 문제였다. 왈패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데다가, 곳곳에 멍이 들어 한동안은 요양 신세를 져야 했다.

엘프의 피가 반절 섞인 덕분에 육체 자체는 청년의 것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강건한 젊은이라 해도 매질에는 금방 골로 드는 게 상식이어라. 병자를 어서 병석에서 일으키기 위해서는 편안한 휴식과 더불어 밥을 충분히 먹이는 것이 필수였다.


하지만 보양에 도움을 주는 고기 등을 구할 수가 없었다. 마드라드나 미네바 같이 냉기 마법을 다루는 자들이 없으면 금방 고기는 상해버린다.

더군다나 마법사나 정령사와 같이,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한 술법을 쓰는 자들은 레이야마 내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이미 멀리 추방한지가 오래다. 오직 키노시타 가문만이 근근이 맥을 이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고기를 구하기 위해선 말리거나 염장한 고기를 찾거나 도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싱싱한 고기를 얻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소금은 고기보다도 더 비싼 것이며 농사에 도움이 되는 가축을 함부로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고로 열흘이 넘게 지난 지금, 사쿠라는 오늘도 물로 배를 채웠다. 남아있는 식량은 전부 황 노인과 타다요시 쪽으로 몰아넣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냐는 종 선생의 물음에, 그녀는 극구 사양을 하며 종 선생에게도 자신의 몫을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키노시타 사쿠라는 샘물을 떠다가 마시기만 세 번을 반복했다.

볼은 말라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형형했다. 루고에서 배운 것이 있기에 가능한 인내력이었다.

전시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당연히 식량이 부족한 것은 일상적인 것. 지휘관 역할을 맡을 기사들이 그런 인내력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무리를 통솔하여 전장을 주유하겠는가.


"하아. 하아..."


그런 기사에게도 배고픔이란 고통은 무턱대고 참기 곤란한 것이었다. 간단한 건량도 없이 순 물로만 배를 채우는 것은 화장실을 한번 다녀오면 쑥 배가 꺼지고 말아버린다.


"아직도 그렇게 버티고만 있소? 참을성 하나만은 정말 인정하리다. 기사님이라 부르기 충분한 것이오."


바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빨을 아드득거리며 키노시타의 딸은 문 바깥으로 나왔다.


"자네, 정식으로 기사 자격을 얻으면 우리 영지로 올 생각은 없는가? 내가 남작님께 잘 말씀을 드려보겠네."


하델베르크가 사쿠라를 보면서 슬쩍 제안을 내밀었다. 그녀가 어떤 고난을 겪고 있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비스훈트 영지의 기사로서 어차피 레이야마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차라리 이곳의 관계자인 그녀를 포섭하여 치안을 맡기는 것이 그로서도, 그리고 그의 주인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샤오빙 씨에게 휘둘리는 기사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주군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이면 왕국의 기사가 되고 싶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당신 같은 기사가 되지 않도록 더 노력을 기울여야겠군요."

"...계집이 기사를 꿈꾼다 하여 특별히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는데 말이지, 그 손이 어떤 손인지도 모르고 거절을 하고 있군."

"기사님. 본때를 보여주실 때가 아닐는지."


옆에 선 사내의 부추김에 비스훈트 영지의 기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윽고 꺼내지는 기사의 검. 겉으로 보기에는 사쿠라, 아카데미에서는 컬쉬 언더우드라 불리는 생도의 검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곁으로 가본 사람은 분명 알 수 있으리라.

기사의 검에는 은은한 철 비린내가 감돌고 있었으니.


그것이 과연 괴물일지, 혹은 영지를 어지럽히는 다른 무언가 일지는 기사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

과연 기사란 말은 허명이 아니었다. 투박한 철검에 감도는 묵색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미 수많은 경험을 쌓아 올린 기사, 더군다나 완전한 상태의 몸도 아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그녀의 등을 툭 쳤다. 하델베르크의 앞으로 밀려나 버렸다.


"키노시타 사쿠라, 루고 아카데미의 4학년 생도입니다."

"비스훈트 남작님을 모시는 기사 하델베르크. 그렇게만 알고 있도록."


한쪽은 가죽 등으로 이루어진 경장, 다른 한쪽은 덜그럭거리는 금속 갑옷을 입은 이.

두 검에서 빛나는 오라가 한층 더 밝아질 때쯤.


"멈-추-세-요!"


그 긴장을 끊어버린 것은 난데없이 들려온 마법사의 외침이었다.


쉬이익!


이윽고 하늘에서 내려친 은빛의 참격이, 두 검사의 칼부림을 갈라버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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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176화. 은인께 드릴 것은(2) 20.02.26 33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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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화. 귀인이 되어(3) 20.02.24 32 0 13쪽
173 173화. 귀인이 되어(2) 20.02.21 32 0 13쪽
172 172화. 귀인이 되어(1) 20.02.20 34 0 13쪽
171 171화. 언제까지 그늘만 바랄 것인가(3) 20.02.19 37 0 13쪽
170 170화. 언제까지 그늘만 바랄 것인가(2) 20.02.18 31 0 13쪽
169 169화. 언제까지 그늘만 바랄 것인가(1) 20.02.17 37 0 14쪽
168 168화. 레이야마, 벚꽃과 장인이 있는 마을(3) 20.02.14 36 0 14쪽
167 167화. 레이야마, 벚꽃과 장인이 있는 마을(2) 20.02.13 35 0 14쪽
166 166화. 레이야마, 벚꽃과 장인이 있는 마을(1) 20.02.12 38 0 14쪽
165 165화. 경선 준비(4) 20.02.10 32 0 13쪽
164 164화. 경선 준비(3) 20.02.07 37 0 13쪽
163 163화. 경선 준비(2) 20.02.06 49 0 13쪽
162 162화. 경선 준비(1) 20.02.05 40 1 13쪽
161 161화. 해를 품은 바람(6) 20.02.04 37 1 13쪽
160 160화. 해를 품은 바람(5) 20.02.03 39 1 14쪽
159 159화. 해를 품은 바람(4) 20.01.31 46 1 14쪽
158 158화. 해를 품은 바람(3) 20.01.30 47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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