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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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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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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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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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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65화. 경선 준비(4)

DUMMY

"죄송해요. 공약은 이게 다가 맞습니다. 더 이상 공약을 제안하기도, 제안할 수도 없어요."


예상했던 것보다 김이 새는 말에 애써 높여왔던 기대가 팍 식어버렸다. 현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여기서 급조해서 스탠튼 선배와 다른 분들을 설득한다 한들, 제 독단으로 이루어진 공약은 공수표가 되겠죠. 루크... 스승님은 물론 원래 계셨던 분들과도 이야기가 되어있지 않은 사항이니까."

"그러게. 그래서 확실히 너에 대한 믿음은 조금 더 공고해진 것 같아. 그래서, 그저 미안하다는 말로 우리의 대화를 마무리 지을 셈이니?"

"설마요."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리즈, 그녀가 과연 이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반대로 그녀와 그녀의 무리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이며, 현우는 마침내 숨겨왔던 포문을 열었다.


"동아리의 사람들이 증인이 되었던 스탠튼 선배의 약속, 이번 한번에 사용할게요."

"으, 으응? 그게 무슨 소리지?"

"이오니아 왕국 스탠튼 백작가의 차녀, 엘리자베스 스탠튼 양에게 부탁드립니다."


현우는 의자를 밀고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는 제 친한 지인이자 동생이기도 한 카인 하인츠, 그 녀석의 요청에 따라 저는 있는 힘껏 그와 겨뤘었죠. 그 보답으로 저를 도와주신다고 하셨던 말씀, 지금 여기서 이행해주시면 안될까요?"

"아."


구스타프와 마리가 리즈에게 대답을 바라는지 그녀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윽고, 그 부름에 답하듯 리즈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었지. 맞아, 네가 자신만만해하는 이유가 거기에서 비롯되었구나. 그래. 나로서는..."

"스탠튼 선배!"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겠어."


구스타프는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그가 황급히 리즈를 말려 보았다.


"그 때를 말씀하시는 거면, 제가 포르투나를 구한 때입니까? 카인 하인츠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 했던?"

"맞습니다, 구스타프 오만 선배님."

"너무 시간이 지난 일이 아닙니까, 그 당시 보은을 하겠다던 약속으로 저희의 지지는 너무 값어치가 맞지 않는다고 보는데 말이지요. 어떻게 장, 당신 쪽에서 재고를 할 의향은."

"없습니다, 선배님. 저와 스승님 쪽에서도 벼랑 끝에 선 처지라서요. 애초에 스승님은 파벌을 만들지 말자는 쪽이었고, 그것 때문에 1차 경선에 떨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물에 빠졌으면 뭐라도 집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대의 대답에 기가 찬다는 듯 구스타프는 뭐라 반박도 하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 그는 이번엔 대상을 바꾸어 리즈에게 첨언을 했다.


"스탠튼 선배,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와 우리의 지지를 얻는 정도가 단순한 보답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보지 않는데 말입니다."

"미안, 오만."

"네?"

"장이 그 때의 약속을 들먹인, 아니지. 약속을 꺼낸 순간,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제 동생 카인 하인츠의 부탁을 부디 들어주신다면, 제가 힘이 닿는 선에 한해 당신을 한 번 도와드릴 것을 약속 드립니다.]


잠들어있는 채 평생 깨어나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리즈는 입술 안쪽을 살포시 깨물었다. 이게 여기까지 굴러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이는 제 명예와 마나의 길을 걸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며, 이가 지켜지지 않을 시... 저는 마법을 포기할 것을 선언합니다.]


"내 마나의 길이 걸려 있으니까."

"그걸, 그걸 거셨다고요?"


리즈의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구스타프 아니면 마리겠지. 리즈는 혀를 찰 만 하다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지금 생각해도 치기 어린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랬을까. 여태까지 카인만이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다가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자신도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하지만 개인은 개인의 일이야, 장. 가지고 온 연판을 줘."

"네."


현우는 가지고 온 두루마리를 활짝 열었다. 펼쳐진 두루마리의 가에는 고급스럽게 붉은 색이 입혀진 천으로 덧대어 있었고, 펼쳐진 두루마리의 가장 윗머리에는 깃펜으로 새겨진 듯한 루크의 이름이 모습을 뽐냈다.


"루크 선생님의 서명은 아직인 거야?"

"그게, 아직도 조금 완고하시네요. 50명을 다 모아야만 서명을 하시겠다고 해서."

"어쨌든 이번 일은 네가 주도한 거라는 게 되겠네. 숨겨진 이야기는 내가 서명을 하면 들을 순 있는 건가?"

"묻지 않으셔도 대강은 설명해드릴게요."


리즈는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폈다. 그녀의 손가락에 맞추어, 허공에서 완드가 스르르 모습을 나타내었다.

고동색의 결과 새끼손가락의 절반 정도 굵기를 가진 완드. 그녀는 그 끝을 두루마리에 대고 깃펜으로 글씨를 써나가듯 마력을 잉크로 삼아 자신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


'엘리자베스 스탠튼.'


그녀의 이름이 루크의 이름 아래에 첫 번째로 새겨졌다. 황금으로 빛나던 그녀의 서명이 빛을 죽여 일반적인 검은 글씨가 될 때쯤, 리즈가 현우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지금 생각난 거라서 묻는 건데. 너는 왜 서명을 하지 않았어?"

"어, 어? 그러게요."


머리를 긁적이며 현우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완드는 또 어디다 두고 왔는지 품 속을 뒤져보았지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검지손가락 끝에 머무는 마력이 금빛으로 물들 때쯤, 그는 두루마리의 표면을 살포시 누르고는 이내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두 번째로 새겨진 현우의 이름. 앞으로 마흔 하고도 여덟 명을 더 채우면 비로소 제대로 된 후보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나한테도 넘겨."

"마리."


여태껏 잠자코 있던 소녀가 검은색 완드를 꺼낸 채 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리즈의 눈치를 보았다. 리즈는 아무런 대답도 표하지 않은 상황. 현우는 슬쩍 마리에게 연판장 두루마리를 주었다.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만, 이내 리즈와 마찬가지로 완드를 깃펜을 집는 것처럼 바꿔 쥐었다.

멈칫거리는 것은 그 전의 잠깐 뿐이었다. 마리는 단번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뒤 두루마리를 다시 현우에게 돌려주었다.


"마리, 괜찮아?"

"구스타프, 이건 내 결정이야. 내가 책임질 거야."

"너무 무리만 하지 말아줘, 마리. 이미 서명을 한 이상에야 다시 되돌릴 수도 없으니."


리즈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무리가 아니에요. 그 사건이 있은 후에 한 번인가, 아니면 두 번인가. 루고에서 편지가 날아왔었죠. 그 때 저는 선배의 표정을 잊지 않았거든요."

"..."

"제게 형언할 수 없는 도움을 주셨기에, 그걸 언제쯤 갚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비로소 1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었네요."

"마리..."


현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아무래도 상황이 좋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기쁨을 한껏 만끽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당사자들 앞에서 그건 추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그의 손에서 구스타프가 두루마리를 뺏었다.


"하아."

"그건 왜 가져가시죠?"

"기다려주세요. 나중에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머리를 긁적인 구스타프의 시선은 현우와 마찬가지로 두 여학생을 향해있었다.


"전에도 말씀 드린 거지만, 저는 스탠튼 선배님이나 마리처럼 감정에 이끌려 허투루 일을 처리하지는 않습니다."

"네..."

"그러니까, 서둘러 루크 님과 이야기를 맞춰오세요. 그 때까지 저는 다른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꺼내보도록 하죠."

"그렇단 말씀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공약들이라면, 저 또한 지지를 표하겠습니다. 선배가 마법의 길을 포기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현우는


* * *


마법학부 1층의 사무국. 대학 안내와 여러 사무 등을 처리하는 탓에, 갖은 고충을 토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각 학부의 일이야 해당 건물에 있는 부서에서 따로 업무를 처리한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마법학부는 대학과 마탑의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탓.

더군다나 이번 학기가 채 가시기 전에, 가장 중요한 총장 선거가 있었다. 며칠 만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만큼 지속적으로 관심과 역량을 집중해야 했다. 육체적 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고달플 수 밖에 없으리라.


사과를 오도독 씹어먹으며, 에반젤린은 그녀에게 몇 가지 서류를 가지고 온 사내에게 물었다.


"이런 아침부터 벌써 일 거리를 가지고 오시는 건가요?"

"그러게요.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들었거든요. 신입생, 아니 1학년의 경우에는 아직 학부를 선택하지 않아서, 일괄적으로 행정적인 처리는 마법학부에서 주관한다고 답변을 받았거든요."


그의 말이 옳긴 했다. 하지만 사람이 지치면 괜히 다른 이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어지는 법이라.

누가 사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는지는 몰라도, 에반젤린은 계기를 제공한 그 또는 그녀를 원망하며 사내의 서류를 받았다.


"크게 2건이네요? 하나는... 휴학서?"

"아직 학기의 취소선 까지는 멀었다고 들었는데요."

"어... 장? 실례인 건 알지만, 제가 이곳에서 몇 년간 근무하면서 귀띔을 받은 것들을 종합해 보자면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자세를 바로잡은 그녀가 현우에게 말했다.


"스승이 되시는 루크 님을 돕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배움을 포기하면서까지 몰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물론 주제넘은 참견이 될 수도 있지만, 한 학기를 휴학하다가 끝내 손을 놓아버리는 안타까운 마법사들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요."

"에반젤린 씨의 말은 잘 들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하나에 몰두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현우는 곧이어 수강 취소 서류를 꺼냈다. 약학부의 '민간 요법과 의약', 인간마법학부의 '정령마법개론', 친구인 벤이 머무는 연구실의 교수인 마틸다 호른이 강의하는 '현대마법동향'까지.

그가 이번에 수강한 5개 강의 전부에 대한 수강 취소 서류였다.


에반젤린은 혹시나 싶어 서류의 끝에 찍혀진 인장을 확인했다. 일부의 경우 인장을 대신에 '마법사의 서명'이 새겨져 있었다. 허나 모습은 달라도 전부 진짜라는 것은 동일했다.

그녀도 모르게 목 깊은 곳에서 침음이 올라왔다.


"원래 이렇게 급발진을 하는 사람이었나요? 들리던 소문과는 딴판이네요, 장."

"저도 원래는 이러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저를 기다려주지 않네요."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학교 권력에 미친 사람이라 생각할지도 몰라요. '권력이란 달콤한 과실에 미친 개가 한 마리 또 늘었다'고 할지도."


현우는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그러는 에반젤린 씨도 저를 잘 아시는 분은 아니지 않나요?"

"글쎄요. 적어도 저는 장을 여기서 직접 본 사이니까, 사무국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가깝다고 할 수도."


그녀의 말이 끝나고,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반젤린에게 호의를 표했다. 나중에 혹시라도 그가 없을 시에 외딴 말이 흘러나오더라도, 적어도 이 한 사람은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 다음 서류는... 역시나 그렇군요."

"채우지 못했다면, 제가 무엇을 위해 휴학을 신청하겠어요. 여기, 마드라드의 학생들을 위한 공약집 견본과."


그의 입에서 들려오는 운율에 맞추어, 에반젤린은 두루마리의 끈을 풀고 활짝 펼쳤다.


"루크 스승님을 지지하는 마드라드의 학생 50명의 서명입니다."


하나같이 유려한 필체로 새겨진 글씨들. 개중에는 다른 것들에 비하면 튀는 서명들이 더러 있었으나, 어쨌든 협박에 이기지 못하고 일부러 쓴 글씨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허나 다른 술수를 썼을 수도 있는 법. 에반젤린은 두루마리의 외곽을 수놓은 붉은 천에 손을 언고, 순수한 마력을 흘려 보냈다.

그리고 그 순간,


번쩍!


두루마리 전체로 퍼져나간 마력이 모든 서명들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마치 정말로 순금을 녹여, 그 액체로 본을 뜬 것처럼.

에반젤린의 마력은 이 모든 서명이 진실됨을 또렷이 그녀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조건은 성립했다.


"좋아요. 정말이군요."


그녀는 서랍에 두루마리와 관련된 서류를 집어 넣은 다음, 다른 서류를 하나 꺼내며 옆에 있던 초에 불을 켰다.

손잡이가 달린 종지 같은 놋쇠의 안에 밀랍을 넣은 후, 촛불에 그을려 밀랍을 녹인 그녀는 서류의 가장 마지막에 그것을 부은 뒤 마법학부의 직인을 쾅! 하고 찍었다.


"좋아요, 장. 루크 씨는 3번째 마드라드 총장 후보로 등록되었습니다."

"3번째라 함은, 니암 콜 교수님 말고도 다른 분이 또 나오셨다는 거로군요."

"그렇게 되겠죠. 누군지는 나중에 들을 수 있으실 겁니다. 다음 주 정도면 1차 경선이자, 본선의 후보 등록이 모두 끝나가니까요."

"시간이 맞아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현우가 빙그레 웃으며 에반젤린의 말에 화답했다.


"앞으로 바깥을 쏘다닐 예정이라, 대학에 들르기가 애매해지거든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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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177화. 은인께 드릴 것은(3) 20.02.27 36 0 13쪽
176 176화. 은인께 드릴 것은(2) 20.02.26 33 0 14쪽
175 175화. 은인께 드릴 것은(1) 20.02.25 36 0 14쪽
174 174화. 귀인이 되어(3) 20.02.24 32 0 13쪽
173 173화. 귀인이 되어(2) 20.02.21 32 0 13쪽
172 172화. 귀인이 되어(1) 20.02.20 35 0 13쪽
171 171화. 언제까지 그늘만 바랄 것인가(3) 20.02.19 38 0 13쪽
170 170화. 언제까지 그늘만 바랄 것인가(2) 20.02.18 31 0 13쪽
169 169화. 언제까지 그늘만 바랄 것인가(1) 20.02.17 37 0 14쪽
168 168화. 레이야마, 벚꽃과 장인이 있는 마을(3) 20.02.14 36 0 14쪽
167 167화. 레이야마, 벚꽃과 장인이 있는 마을(2) 20.02.13 35 0 14쪽
166 166화. 레이야마, 벚꽃과 장인이 있는 마을(1) 20.02.12 39 0 14쪽
» 165화. 경선 준비(4) 20.02.10 33 0 13쪽
164 164화. 경선 준비(3) 20.02.07 38 0 13쪽
163 163화. 경선 준비(2) 20.02.06 49 0 13쪽
162 162화. 경선 준비(1) 20.02.05 41 1 13쪽
161 161화. 해를 품은 바람(6) 20.02.04 37 1 13쪽
160 160화. 해를 품은 바람(5) 20.02.03 39 1 14쪽
159 159화. 해를 품은 바람(4) 20.01.31 46 1 14쪽
158 158화. 해를 품은 바람(3) 20.01.30 48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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