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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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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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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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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화. 융(2)

DUMMY

점멸하는 마법사의 발걸음에 맞추어 불꽃의 자락이 직선을 그려 탄생한 두 개의 삼각형.

각기 다른 방향으로 그려진 두 도형이 서로 맞물려 그려지는 별의 형상과 더불어 각각의 꼭지점을 다시 블링크와 블레이즈 스탭이라는 두 가지 마법을 연동해 이었다.

육각의 별(Hexagram)은 마법학에서 오각의 별(Pentagram)과 더불어 가장 많이 쓰이는 마법진의 구성요소.

그렇기 때문에 슈테판이 그려낸 불꽃의 진은 또 하나의 거대한 마법을 발동시켰다.


으레 화염이 치솟으면 나타나는 폭발음이 들리지 않았다.

단순한 폭발로는 결코 지옥의 불꽃이란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듯, 화려하게 현우의 눈을 어지럽히는 풍경과 달리 불꽃은 오히려 주변에 퍼져나가는 소리마저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뭐야, 이건..."


순간 그와 계약했던 정령을 불러 방호력을 더하려던 현우는 에릭의 때와는 달리 피부나 옷자락이 타지 않았음을 깨닫고 허탈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실망하셨습니까? 제 비전마법인 '업화'는 에릭 피터슨처럼 천박하게 단번에 남을 공격하는 마법이 아닙니다."


화염을 다루는 마법사답게 일렁이는 불꽃의 벽을 만지면서도 그의 손은 전혀 벌겋게 달궈지거나 불에 타는 기색이 없었다.


"이 무풍지대와 마찬가지. 일정 권역을 제 불꽃의 지배 하에 두는 마법이죠. 제가 가진 업(業)의 양에 따라 그 세기는 좌우됩니다."

"업?"

"어라라. 장현우, 당신은 그 단어를 모르는 겁니까? 좋습니다. 이번에 한 번 설명을 해드리죠."


주변에서 자꾸만 그를 달구는 화염의 향연에 현우는 뜨거워진 숨을 토해내며 주변의 바람으로 격벽을 둘러쳤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열을 차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지금 버티는 것만으로도 현우와 같은 바람 마법을 다루는 이에게 있어선 충분히 치명적이었다.

슈테판의 마력으로 타오르는 불꽃에 영향을 받은 공기는 그의 인도에 쉽사리 끌려오지 않았으니까.


"제 빌어먹을 아버지가 이건 배워야 한다면서 유학이니 뭐니 이상한 것만 가르쳤지만, 저는 그가 준 책들 중에서 불학(佛學)이라는 것에는 꽤나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버티기가 힘든가 봅니다. 하지만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현우가 쏘아낸 마력탄을 가뿐히 튕겨낸 슈테판은 스태프로 땅을 천천히 두어 번 짚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 생애에 있어서 자신이 행한 모든 일들의 원인과 결과, 더불어 그것은 과거에서도 온 것이며 미래로도 이어진다고 합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단어라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사제들이 들으면 놀랄 단어긴 하겠네요."


신을 믿는 이들이 지금의 대화를 알게 된다면 단번에 화를 낼 것이 분명하리라.

슈테판이 언급한 과거와 미래, 단순히 지금의 생뿐만 아니라 환생과 윤회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내세를 부정하는 건 여러 교단들의 중요 교리를 무시하는 것. 특히 성국의 이들이 들으면 단번에 심문관을 파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풍압탄!"


그를 감싸는 여섯 개의 불꽃 벽 중 하나를 향해 쏘아낸 바람의 일격이 터져나가며 불꽃을 어그러트렸다.

허나 그 심원은 꺼트릴 수 없었고, 그를 맞이하는 건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심홍과 주황을 오가는 색깔의 불길이었다.


"소용없어요, 장. 지옥의 불꽃은 바람으로 어지럽힌다 하여 결코 스러지지 않는답니다."

"쳇."

"제가 어디까지 말했을까요. 아,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에게 새로운 사실을 가르치는 교사처럼, 슈테판은 드디어 알았다는 듯 박수까지 치며 현우의 속을 벅벅 긁어댔다.


"제 비전은 제가 쌓아 올린 악업을 양분으로 삼아 타오르는 불꽃. 그리고 상대는, 지금까지 축적된 죄의 경중에 따라 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딱! 슈테판이 손가락을 튕기자 현우의 옷 끝자락에서 불이 붙었다.

당황한 그가 간단한 주문으로 물을 불러내보지만, 푸시식 소리와 함께 물은 금새 말라버렸다.

발로 급히 끝을 밟아보아도 좀처럼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호오... 대단하네요, 장. 여기까지 온 이상 온몸이 불에 타버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분명 슈타인 상단의 상행 당시 당신은 수십 명의 사람을 일거에 도륙한 것으로 보고를 받았었는데 말입니다."

"나도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걸, 소름 돋게 기억하고 있다니요!"


파아앗!


삽시간에 현우의 뒤를 점한 순백의 날개가 사방으로 돌풍을 퍼트렸다.

아직 불이 붙은 옷자락의 위에서 적절히 가늠을 한 현우는 윈드 커터로 넉넉한 품까지 잘라버렸다. 아직 촛불 정도로 불이 옮겨 붙었을 때에 미리 처리해야 했다.

만약 그것이 아궁이의 불 정도로 커지기라도 하면 사태는 지금보다 더욱 악화될 터이니.


악마의 혀처럼 살랑거리며 타오르는 화염의 벽을 피해 현우가 선택한 곳은 위였다.

아무리 불꽃이 넘실거린다 한들 그 근본은 땅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두 사람의 위마저 슈테판의 마법이 완전히 덮어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슈테판 역시 그것을 예상했다는 듯 스태프를 거칠게 휘둘렀다.

이미 현우가 레이야마에서 벌인 일까지 보고를 받은 이상, 그가 자신의 이명에 맞게 다시 날개를 사용하리란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리라.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는 자들이여! 붙잡아라, 너희와 같은 고통을 겪게 하라! 죽음불꽃(Deathfire)!"

"흐아아!"


비상하는 마법사를 향해 수백 개의 시뻘건 손이 솟구쳤다.

위로 올라선 뒤에야 자신을 감싸던 불길이 육각의 별을 형상화한 일종의 진법임을 파악한 현우는, 자신을 붙잡기 위해 달려오는 수십이 넘는 손길에 순간 머리가 굳어버렸다.


이미 달궈질 대로 달궈진 무풍지대 내의 환경에서 그는 날개를 접고 펴가면서 이리저리 허공을 유영했다. 겹쳐지고 포개지는 불꽃의 손은 때로는 합쳐지며 갈라짐과 동시에 계속해서 현우의 날개와 발끝을 노렸다.


상상해보라.

기백에 달하는 검붉은 손이 자신만을 잡기 위해 결계의 끝까지 솟구치며 죽일 듯이 밀려오는 광경을.

이미 붉은색으로 가득 찬 현우의 시야엔 어느 것이 불길이고 어느 것이 바깥인지 구별이 어려울 정도였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직감과 그의 날개에 깃들어있는 미약한 의지의 힘에 기대어, 그는 마치 나비가 방향을 꺾듯 그렇게 수십 번의 부닥침을 자신의 승리로 이끌었다.


짝!

뺨을 한 차례 때린 후에야 정신이 돌아온다.

그대로 마법사는 불로 점철된 바닥과 밀려오는 죽음의 손길을 향해 마력을 집중했다.


"어디를!"


바람이 몰아친다.

그와 동시에 그를 잡아먹을 듯이 불꽃이 손아귀를 벌렸다.


"바람아, 이리 오너라. 나의 바람이여!"


부르지 못한 나머지 정령을 이곳에 끌어오니, 현우의 곁에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나 그것은 자신의 편. 더 이상 짐승의 울부짖음에 몸을 사리지 않아도 되었다.


"풍호세(風護勢)!"


죽음불꽃이 그를 끌고 내려칠 것처럼 손을 뻗치듯 현우 역시 자신의 손가락을 힘껏 뻗치며 압축시켰던 바람을 아래로 밀어 쳤다.

상대의 공격이 강할수록 그것을 역이용해 자신의 공세에 더하는 반공(反攻)의 묘리.

'티우'란 이름을 받은 짐승의 형상을 띤 폭풍이 그대로 심홍색의 손길들을 찢어발기며 내리꽂혔다.


콰과과광!


무풍지대를 이루던 결계가 흔들렸다.

루크와 시어도어가 어금니가 깨질 것처럼 입을 앙다물며 마력을 순환하는 것도 모른 채, 관중들은 그저 반투명하게 보이는 두 마법사의 결투가 불꽃과 먼지로 보이지 않음에 탄식을 날렸다.


"슈테판 리,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게 뭐죠, 장?"


여전히 거친 숨을 토해내면서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짐짓 센 체를 하는 현우와, 자신의 비전마법이 순간 파훼되었을지라도 아직까지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는 슈테판이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전에, 언제까지 그렇게 고고한 척 할거지?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 아니던가."

"글쎄요. 그래, 다담 때처럼 내 가면이 깨지는 것을 보고 싶은가 본데, 어림도 없습니다. 아직 당신은 그 정도까지 나를 몰아세우지 못했으니까."

"그런가..."


퉤. 현우는 목구멍에 차오른 가래를 뱉으며 남은 침을 슥 손으로 훔쳤다.

계속해서 불길을 접한 이상 목이 칼칼해지며 재가 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 이상 화염과 가까이 했다가는 고꾸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의 날카로운 감각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현우는 이를 확신했다. 아무리 포션의 힘이 있다 한들 죽은 이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조금 전 당신은 그렇게 말했지. 수십 명을 죽인 당신이 어째서 그 정도 불꽃밖에 피어나지 않았냐고."

"그렇습니다."

"그래, 슈테판. 네 말대로 나는 슈타인 상행 당시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사실 그 때의 기억이 완전히 생생하진 않았어도..."


용 안드레아의 시험 아래 자신은 안네와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현우는 그것만큼은 슈테판에게 밝히지 않았다.

서로가 홀가분했기 때문일까. 혹은 용병인 그녀가 그것을 부당하게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일까.

아무튼 그것은 집어치우고서라도, 현우는 자신이 그에게 던지고픈 본질적인 질문을 입에 담았다.


"그렇다면 슈테판, 당신에게 도리어 묻는 바입니다. 이 거대한 불꽃을 일으킨 그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헤쳤는지."


따악.

다시 한 번 슈테판의 손가락이 튕겨짐과 동시에 무풍지대의 결계 안쪽에 다시 새로운 결계가 하나 생겨나기 시작했다.


벽과 벽 사이의 마력을 강하게 진동시키니,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소리는 일체 차단되었다.

현우는 그것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나눴던 이야기. 그의 천막은 일시적으로 아무 소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이렇게나 아직 마력이 많이 남아있다고?"

"하, 부탑주의 제자 정도라면 심상세계를 여는 것은 기본 소양이 아닐까요, 장현우? 좋습니다,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였던가..."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일부러 바깥의 증인들에게도 말을 빠져나가지 않으려 했는가.


"글쎄요, 정확한 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겠죠."

"뭐라고?"

"장현우, 당신은 미네바 역병의 피해자가 아닙니까. 말해보세요."


그는 싱긋 웃으며 현우에게 물었다.


"미네바에서 도대체 몇 명의 사람이나 죽어나갔습니까? 정확한 사망자의 수를 저는 몰라서 말입니다."


현우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 소리는 즉.


"역시 너, 네가 범인이었어!"


그가 역병을 만들어낸 이라는 것을 실토하는 것이니까.


칼날 돌풍이 현우의 손에서 빠져 나와 그대로 슈테판의 팔을 갈랐다.

허나 피를 뿜으며 절규하는 슈테판 역시 환영에 불과했다. 점멸하며 스러지는 슈테판의 형상은 다시 제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이 공간은 제 권역마법이 지배하고 있답니다, 장."

"불꽃은 수그러든 상태일 텐데?"

"글쎄요. 뭐 어찌 되었든 불꽃의 마력으로 대기 또한 영향을 받은 이상, 당신의 바람 마법은 어느 정도 그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헛된 생각은 저버리고 얌전히 대화에 참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한쪽으로 씨익 올라간 입술을 손등으로 가리며 현우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대충 미네바에서 죽은 사람의 수를 한 오백이라 치면 될까요?"

"..."

"제 동료인 엘라인 역시 거기에서 죽은 게 확실한 데다가, 흐음... 뭐, 일천이라 보면 되겠군요. 그러면 어디 봅시다. 셈을 해보면..."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하느라 찌푸려진 미간이 일시에 쫙 펴졌다.


"열두 살 때부터 셈을 해보면 물경 이천. 그 정도는 되겠습니다. 후우-, 저도 꽤나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버렸군요."

"이천?"


그보다 믿기지 않는 것은 열두 살이라 당당히 밝힌 나이의 숫자였다.

왜 슈테판이 열두 살이라고 똑똑히 말했겠는가.


"네, 열두 살. 제가 처음으로 제게 드리운 과거를 모두 정리하고, 기존의 연을 모두 끊어버린 때이지요."

"...부모님까지 모두 죽여버렸다는 건가."


경악에 찬 현우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슈테판은 저 눈동자가 조금 더 절망에 물들여 더 맛있어지기를 원했다.

그렇기에 그는 흔쾌히 현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더 사실을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네 맞습니다. 열두 살, 지금으로부터 십 년 하고도 몇 년의 세월을 더 빼야 할 오래 전."

"미쳤군."

"글쎄요. 과연 이야기를 듣고도 제가 미쳤다고 할 수 있을까요?"


크흐흐. 자조적인 웃음을 섞어가며 슈테판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열두 살. 그 때부터 나는 이융(李㦕)이란 이름을 영영 버리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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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197화. 폭풍은 두 번 몰아치나니(3) 20.03.27 31 0 13쪽
196 196화. 폭풍은 두 번 몰아치나니(2) +2 20.03.26 32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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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194화. 밝혀지는 정체들(2) 20.03.24 28 0 13쪽
193 193화. 밝혀지는 정체들(1) 20.03.23 31 0 14쪽
192 192화. 네거티브, 네거티브(2) 20.03.20 42 0 13쪽
191 191화. 네거티브, 네거티브(1) 20.03.18 38 0 13쪽
190 190화. 드러나는 결과(2) 20.03.17 34 0 14쪽
189 189화. 드러나는 결과(1) 20.03.16 40 0 14쪽
188 188화. 이합집산(3) 20.03.13 36 0 14쪽
187 187화. 이합집산(2) 20.03.12 33 0 13쪽
186 186화. 이합집산(1) 20.03.11 34 0 14쪽
185 185화. 당신을 떨어뜨리려고(2) 20.03.10 37 0 13쪽
184 184화. 당신을 떨어뜨리려고(1) 20.03.09 35 0 14쪽
183 183화. 마탑정쟁의 시작(2) 20.03.06 37 0 14쪽
182 182화. 마탑정쟁의 시작(1) 20.03.05 41 0 13쪽
181 181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3) 20.03.04 31 0 13쪽
180 180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2) 20.03.03 46 0 13쪽
179 179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1) 20.03.02 37 0 14쪽
178 178화. 은인께 드릴 것은(4) 20.02.28 37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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