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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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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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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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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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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이합집산(2)

DUMMY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렇게까지 증오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말이었나.

일반적인 이해관계에서라면 저런 짓을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루아 메트리, 그녀의 머리 속을 온통 가득 채우고 있는 가운데,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열어 한마디를 뱉었다.


"저, 정말로 진심이었군요."

"교수님께서 진심으로 총장 자리를 노리시는 것처럼, 저도 진심으로 그의 실각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제 비전 마법을 다른 마법사들에게 공개할 수 있겠어요? 아시잖아요. 마법사의 비전은."

"절대로 남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예의이자 서로를 위한 규칙이지."


메를린이 현우의 말을 받았다. 이제야 어렴풋이나마 전반적인 사정이 이해가 간다는 듯, 그녀의 얼굴엔 흥미와 함께 애잔함이 서려있었다.


"그러니 그걸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건, 그에 상응하는 걸 받아내겠다는 네 의지의 발로겠구나, 현우야."

"애초에 슈테판 리와 장현우 학생이 만났던 기간은 짧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요! 그대가 두각을 나타낸 건 이곳에 입학한지 꽤 시간이 흐른 봄 교류제 때의 대련. 이후 지금까지 잘해야 반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 슈테판 리를 원수로 여길 수 있는 때라곤..."


루크를 조사했다는 것은 그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 현우의 행적 또한 조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연스럽게 날개의 마법사로 불리기 전의 행적 또한 모종의 방법을 통하여 습득했으리라.

'이카루스'를 통해서나, 같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에게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강의 일을 알 수 있는 자리에 그녀는 앉아있었으니까.


"슈테판 리는 대학이나 마탑에서 잘 알려진 인사 중 한 명, 그는 행적을 숨기지도 않을 뿐더러 조금만 물어보면 다 알려져 있습니다."

"네, 그래서요?"

"장현우 학생과 겹치는 리의 동선은 루고와의 가을 교류제에 인솔 대표로서 간 것. 겨우 그 때 있었던 일로 이렇게 결단을 내리는 거면."

"그 때도 일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제가 겨우 그 정도 일로 이렇게 사단을 낸 것이라 평가하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현우야."


루크의 중저음이 막 출렁이기 시작한 현우의 감정을 삽시간에 잠재웠다. 그에게로 고개를 돌린 현우는 의외로 루크의 말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메를린과 메트리는 정확히 몰랐으나 둘의 사정을 그녀들보다 훨씬 더 잘 아는 이라면, 이를테면 에블린 디어와 같은 공모자라면 깜짝 놀라진 않더라도 눈 정도는 크게 뜰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현우의 머리에서부터 비롯된 것, 루크는 그와 그녀의 설득에 넘어가 이름을 빌려주고 뒤에서 지켜보는 형세였었다.

허나 그가 직접 현우를 제지하고 나섰고, 어린 사제 또한 사형의 말에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였으니. 메트리 교수가 있어 애초에 심하게 반발을 할만한 상황이 아님은 짐작할 수 있으나 일단 분위기는 루크의 손에 넘어간 셈이었다.


"이제부터 두 분께서는 맹세를 해주셔야겠습니다."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라는 거지? 도대체 뭐가 있는 건지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겠어."

"...뭔가 숨겨진 사항이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이란 이야긴가요?"

"싫으시면 이대로 물러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설마 니암에게 가서 고대로 일러바치지는 않겠지요?"

"사람 마음을 그렇게 건드려놓고 제가 물러날 것 같아 보이던가요? 좋습니다."


당찬 기색으로 메트리 교수는 완드를 내밀었다. 루크가 팔을 휘둘러 그 끝에 빛나는 완드의 흐름으로 백지 하나를 끌어오고, 메를린 또한 적갈색의 매끈한 완드를 어느새 꺼내 마력을 응축시켰다.


"마나의 길을 걷는 구도자로서."

"세계의 진리를 찾아 헤매는 탐구자로서."

"그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노라."

"지금 이 자리에서의 모든 것들은, 셋의 합의가 없으면 결코 밝힐 수 없으며."


완드 끝에서 뿜어지는 세 명의 마력이 서서히 어우러진다. 각기 다른 색의 마나가 하나로 뭉칠 듯 뭉치지 않으나, 완드가 교차하는 곳 위아래로 생겨난 황금색의 마법진에는 이 모두를 강제하는 범접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맹세를 어긴 자는 그대로."

"쌓아놓은 모든 것을 잃고, 황야를 떠돌다 생을 마감하리라."


셋의 마력이 응축된 황금의 단검이 루크가 가지고 온 백지에 내리꽂혔다. 정확히 세 갈래로 나누어진 종이를 세 명의 마법사가 각기 건드는 순간, 그 조각은 삽시간에 사라지며 각자의 손목에 짙은 표식을 남겼다.


"전에는 이렇게 까지는 하지 않았잖아요.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신 건지..."


막내 사제의 말에 루크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저 둘은 충분히 너의 행위를 방해할 수 있는 실력과 그럴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누구의 말마따나, 나는 잠재적인 위협은 애초에 두고 보지 않는 사람이라서. 최소한의 방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 대상을 저로 해도 되지 않았었나요? 제가 그 맹세인지 뭔지를 걸었으면."


굳이 루크가 위험을 질 필요가 있냐며 인상을 찌푸리는 현우에게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메를린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막을 순 없었다.


"네가 맹세를 하자고 했으면 과연 나나 메트리 교수가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을까? 학생과 교수급에는 상당히 많은 차이가 존재해."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라."

"자, 이렇게 되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밝히면 될까?"


메트리 교수는 오히려 밝아진 메를린의 모습에 의구심을 느꼈다. 혹시나 자신이 되려 이들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데리고 온 그녀가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 떠올리는 순간 이내 그 생각은 접었다.

일부러 자청하여 선거 위원회의 장을 맡고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언한 그녀였다.

굳이 루크의 편을 들 것이었다면 차라리 지지선언을 하는 것이 훨씬 그를 이롭게 하겠지.


한결 홀가분해진 메트리 교수와 맹세를 한 이들의 앞에, 날개의 마법사는 한숨을 쉬면서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진행하면 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남에게 풀어낼 수 있는, 혹은 풀어내고픈 이야기를 하나씩은 가슴 속에 간직하는 법.

더군다나 그것은 각자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하면서도 흥미를 돋구는 이야기였다.


마드라드에 들어오기 전의 삶은 늘어질지 모르나, 적어도 대학을 접한 이후 지금까지의 삶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순탄치 않았노라 단언할 수 있는 그였다.

세 명의 마법사를 관객으로 두고, 장현우라는 음유시인은 자신만이 풀어갈 수 있는 시가(詩歌)를 시작했다.


* * *


"좋습니다. 어째서 장현우 학생이 그토록 그를 몰아내고자 하는지 이해는 할 수 있었습니다."


짤막하다고도 할 수 있는 감상평이었다.

심리적으로 동한 것은 인정했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최근에서야 그 스스로가 밝혀 소수만이 공유했던 배경지식을 깨달은 이후였다.


"마드라드 테러에 슈테판 리가 공모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확실히 마탑에 해를 끼친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면 당연히 그를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확한 증거는요?"

"그가 흑막집단과 확실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있다면 어떻습니까?"


현우는 슈테판이 자신에게 직접 넘겨준 팔찌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현우의 말을 들은 메트리 교수의 표정은 물에 집어넣어져 차갑게 식어버린 철처럼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직접 그가 공모했다는 증거는 없습니까?"

"...하지만 확실한 연관성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단지 정황만을 놓고 그를 몰아가는 것인 셈입니다. 물론 당신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것도 루크 부탑주님이 믿어주기 때문에 저로서는 의심의 눈길을 덜 보내는 것입니다만, 확실히 당신은 슈테판 리에 대해 증오심을 느낄 수 있어요. 인정합니다."

"허나..."

"그건 제가 쓰고 싶은 단어로군요. 마탑에 들어온 이는 결코 자신의 배경을 밝힐 필요도, 밝힐 의무도 없다. 자유를 숭상하는 바람의 마탑, 더불어 그것을 기반으로 설립된 마드라드가 왕국의 바깥에서 온 사람들마저도 포용하는 이유입니다."


요컨대, 슈테판의 출신이 어떻던 간에 이미 장로급으로 올라간 어엿한 마탑의 마법사인 이상 그를 단순히 흑막 집단과 공모하였다는 추정만으로는 그를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장현우 학생, 학생은 빈민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더럽다고 하여 그것을 피합니까? 모든 바람이 고정되어 끝까지 흘러간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가 설사 흑막 집단 출신이라고 해도, 그 과거를 공연히 끌어오는 건...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할 겁니다."


뚜렷하게 슈테판의 부덕한 행동을 입증하는 물증이 필요하다는 소리요, 현우에게는 갑작스레 촘촘하게 짜여진 논리에 구멍이 뚫린 게 되었다.


다행히도, 행운의 신은 현우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뇨. 아직,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게 뭐죠?"

"발표는 내일 아침에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아직 최소한 오늘 저녁까지는 교수님의 마음을 돌릴 시간이 있고요. 만약 제가 증거를 찾아온다면, 교수님께서 저와 루크 님에게 협력하신다 약속하실 수 있으신가요?"


현우의 물음에 메트리 교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대화와 설득의 주제를 모호하게 설정하지 마세요. 어디까지나 학생의 이야기에 동한 건 당신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입니다. 그래도, 뭐."


정말로 그런 증거를 자신의 눈 앞에 보일 수만 있다면, 그를 돕는 것 정도는 고려를 해보겠다고 교수는 현우에게 살짝 여지를 남겨주었다.


"학생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드라드의 교수를 맡고 있는 이로서 좌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러긴 하네. 리가 조금 표독스러운 구석이 있긴 했어도, 그 정도까지는... 물론 네 말만 듣고 판단해서는 될 일이 아니긴 하지."

"그래서 장현우, 너는 어쩔 계획이지?"


루크의 물음에 현우는 어느새 탁자에 붙여 앉았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답했다.


"다른 사람에게 맡겨뒀던 의뢰가 있습니다. 아마 지금 쯤이면 완료했을 거에요. 그 결과물을 찾아서 여러분들께 보여드리면 되겠죠."


그 때였다. 누군가가 루크의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현우의 귀에 왠지 모르게 절망적으로 들렸던 순간은.


"루크 부탑주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입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남성, 그리고 탁기가 많이 쌓이지 않은 젊은 음성.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미 수정구에 걸려있던 마법을 통해 이 소리를 들은 바 있었다.


"들어오게, 슈테판 리."

"감사합니... 어라, 이미 먼저 온 손님 분들이 많이 계셨군요. 이거 참, 저희가 앉을 자리가 없어서."

"그건 걱정 말게."


루크의 손짓 하나에 곧바로 나타나는 탁자와 의자들.

다른 곳이었다면 크게 놀랄 일이었으나, 여기에 있는 이들은 거의 모두 마탑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특수한 힘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이어서, 모두들 거리낌없이 평소처럼 탁자를 붙이고 의자를 밀어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리, 자네의 용건은 무엇인가?"

"슈테판이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합니다, 루크 님. 원래는 따로 자리를 빌어 말씀드리고자 했는데 여기에 마침 용건을 가지신 분들이 전부 오셨네요. 덕분에 저도 메를린 님이나 메트리 후보님을 찾아갈 수고를 덜어서 다행입니다."

"용건부터 말씀하세요, 슈테판 씨. 니암 총장 대리는 어차피 결선에 진출할 것이 거의 확실하니, 저나 부탑주님을 감시하기 위해 찾아온 겁니까?"


메트리 교수의 날카로운 반응을 듣고도 슈테판은 결코 입가에 띤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검지손가락을 찬찬히 흔들며 화사하게 핀 입꼬리를 더욱 깊게 올렸다.

보는 사람의 기분을 짜증나게 할 정도로 농밀해, 심지어 알량하게까지 보이는 표정은 평소의 슈테판 리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드러내지 않을 부류의 것이었다.


"어차피 니암 선생님을 지지하는 분들이 워낙 많아서요, 제가 루크 씨에게 조금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바쁘셔서 제가 대신 왔는데, 혹시 격에 떨어진다거나 하는 생각이 드신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슈테판! 그게 무슨 소리죠?"


대충 어떻게 상황이 돌아갈지를 깨달은 메트리 교수가 탁자를 치며 항의를 해보지만, 슈테판은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니암 선생님께서는 결선에 루크 님이 올라갔으면 하시더군요. 제자 된 도리로서 스승님의 원을 이뤄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 루크 님께서 생각이 있으셨기 때문에 여기, 장현우 씨가 이렇게 열심히 뛰었지 않았습니까. 레이야마까지 가셨다면서요?"

"그래서, 우리에게 표라도 몰아주시겠다?"


현우는 고개까지 이리저리 까딱거리며 빈정거렸다.


"네. 몰아드릴 겁니다. 저희의 표를 나눠드리려고요."


슈테판의 마지막 말을 듣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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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197화. 폭풍은 두 번 몰아치나니(3) 20.03.27 31 0 13쪽
196 196화. 폭풍은 두 번 몰아치나니(2) +2 20.03.26 32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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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194화. 밝혀지는 정체들(2) 20.03.24 26 0 13쪽
193 193화. 밝혀지는 정체들(1) 20.03.23 30 0 14쪽
192 192화. 네거티브, 네거티브(2) 20.03.20 41 0 13쪽
191 191화. 네거티브, 네거티브(1) 20.03.18 36 0 13쪽
190 190화. 드러나는 결과(2) 20.03.17 33 0 14쪽
189 189화. 드러나는 결과(1) 20.03.16 38 0 14쪽
188 188화. 이합집산(3) 20.03.13 35 0 14쪽
» 187화. 이합집산(2) 20.03.12 32 0 13쪽
186 186화. 이합집산(1) 20.03.11 33 0 14쪽
185 185화. 당신을 떨어뜨리려고(2) 20.03.10 36 0 13쪽
184 184화. 당신을 떨어뜨리려고(1) 20.03.09 33 0 14쪽
183 183화. 마탑정쟁의 시작(2) 20.03.06 36 0 14쪽
182 182화. 마탑정쟁의 시작(1) 20.03.05 40 0 13쪽
181 181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3) 20.03.04 30 0 13쪽
180 180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2) 20.03.03 45 0 13쪽
179 179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1) 20.03.02 36 0 14쪽
178 178화. 은인께 드릴 것은(4) 20.02.28 36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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