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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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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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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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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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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2)

DUMMY

"저기, 후작 어르신."

"후작님이든, 혹은 어르신이든 둘 중 하나만 하게. 원래 내게 어르신이란 가까운 존칭을 붙일 만큼 나와 자네가 사이가 깊은 편은 아니지만, 뭐 이 높이에서 손이라도 푼다면 나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으니 이번만큼은 받아주겠네."


그의 집무실 금고에 있는 금화 무더기와 같은 색의 날개를 핀 마법사에게 후작이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동부 산맥을 넘어 수도로 향하는 중, 저 멀리 보이는 하오란이 어린 아이의 발자국 만큼 보일 정도의 하늘에서였다.


마법사의 주변을 두르고 있는 금색의 바람은 거칠게 몰아칠 충격들을 전부 완화시키고 있었다.

그 덕분에 후작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마법사와 이어놓은 허리끈과, 마법사의 팔이 후작의 겨드랑이 사이로 끼어들어 그를 안고 있는 것만 참으면 꽤나 안락하게 하늘을 여행하고 있었다.


저번에 급하게 레이야마로 향한 때에는 조금 더 긴박한 상황이었기에 그는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채로 하늘을 나는, 조금은 불쾌한 경험을 했었다.

다행히 수도로 돌아가는 지금은 그래도 여유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것은 모두 이 마법사의 실력이 그 사이에 늘었기 때문이라고 후작이 머리 속 생각을 정리할 무렵, 다시 현우의 말이 콘라드 하인츠의 귀에 들어왔다.


"제가 정말로 다시 전하를 뵈어야만 하는 겁니까?"

"자네 또한 왕실 직속 영지에 사는 자이지?"

"그렇습니다만."

"어째서 협회란 것이 만들어졌는가는 더 조사를 해봐야 하는 문제고, 이는 내가 아니라 재무대신 같은 이에게 맡겨야 할 문제지만 대충 신하 된 도리로 한 마디를 해보겠네."


왕국의 군부대신이 하는 소리다. 국왕을 제일로 두고 권력의 순을 매겼을 때, 결코 다섯 손가락을 넘지 않는 권력자.

당연히 새겨들어야 하는 말이었다. 현우는 귀를 쫑긋거리며 앞에 혹여 날아다니는 새 같은 것이 없는지를 파악했다.


"자네는 그 사태를 해결한 증인으로서도 겪은 사실 그대로를 전하께 말씀드려야할 의무가 있고, 왕실 영지의 특성상 특산품을 거래하기 위해선 국왕 전하의 인가가 필수적이네. 아마 마탑정쟁 때문에 자네가 저곳까지 발걸음을 한 거겠지."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마탑이 어수선하다는 것 정도야 수도에 사는 이라면 다들 피부로 느끼고 있을 걸세. 이오니아의 마법사들이라면 당연히 마드라드의 주인이 누가 되느냐에 대해 민감할 수 밖에 없지. 윌트너 님의 일 이후로 마탑은 왕국의 아래이지만 결코 왕국의 아래가 아니게 되었으니."

"윌트너 님이요?"

"구국의 영웅이자 홀로 도리아의 마지막 술수를 파훼한 마법사. 이백여 년 전 있었던 바람의 현자의 이름 말이네."


현우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콘라드 하인츠는 보통 이름 보다는 바람의 현자란 이명으로 불리는 일이 잦으니 당연한 반응이라 말했다.


"한번쯤 찾아보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정쟁에 말이야."

"나중에 꼭 찾아보겠습니다."

"남이 모르는 지식은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된다네. 대화의 흐름을 주도할 수도 있고, 정보의 차이는 곧 힘의 차이와 직결되니 말일세."


윤화와 에릭이 했던 말과 비슷한 이야기였다. 다수의 사람들이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은 즉, 그것이 결코 현우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마법사는 마력으로 짜여진 날개를 펄럭이며 조용히 그 사실을 마음 속에 담았다.


* * *


"장.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 건가.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사이인데 인사라도 하고 가지 않고."

"아드리안 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안녕치 못하네. 자네 덕분에 고생길이 훤히 열렸네만. 이제는 수도 경비단과 왕실 마법병단에서 하늘까지 감시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일세."


소식을 주고받는 새 정도만 파악하면 될 줄 알았던 허공이 한 명의 마법사로 구멍 투성이로 전락해버렸다..

단순한 비행 마법이라면 모르되, 마력을 이미 자신의 뜻대로 유형화시킨 마법사였기에 단순한 마나 얽힘만 가지고서는 추락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로하던 아드리안은 잠시 자신의 집무실에서 차나 한 잔 하자며 현우를 멈춰 세웠다.

자신의 스승과 연배가 비슷한 노인이자 시어도어의 친우. 그와 얽혀진 관계로 볼 때 현우는 결코 왕궁에 거하는 노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있었다.


"아직도 잼과 크림의 순서에 대해서는 의견을 바꾸지 않은 겐가?"

"네. 역시 잼 다음에 크림이 맞다고 봅니다. 아드리안 님도 한 번 그렇게 드셔보세요."

"허, 고집 하나는 여전히 그 녀석과 닮았구만."


궁중마법사는 테이블에 놓여진 배녹(Bannock)을 현우에게 건네주었다. 차갑게 식어버려 딱딱해진 빵을 받아 든 현우는 이내 손 안에 있는 것을 뜨겁게 데워 그 위에 잼을 치덕치덕 발랐다.


"실력이 전에 비해서 늘었구나."

"이온을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간 일이 좀 많아서 말입니다. 몸이 고달픈 만큼 얻는 것도 있어야 보람된 삶이라 할 수 있겠죠."

"자네가 이온을 마지막으로 온 건 지금으로부터 3주도 되지 않았을 텐데?"


이온에 깔려있는 마법사들과 경비병들을 무엇으로 보는 거냐며 노인은 현우에게 타박 아닌 타박을 날렸다.

수백이 넘는 사람들의 눈을 전부 속이는 것은 불가하니, 현우가 후작의 저택 안쪽의 정원에 바로 내려 앉을 때도 그것을 확인했던 이들이 소수나마 있었던 탓이었다.

물론 그들은 당시 하늘에서 사람이 내려찍듯 떨어진다는 것에 대해선 상상도 하지 못했었기에, 그저 후작이 키우는 거대한 새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쉬쉬거리는 선에서 그쳤다만.


"아마 무언가 거래가 있었지 않았을까 싶네만, 어차피 후작은 전하를 지지하는 쪽이니 내 뭐라 상관은 하지 않겠네."

"아드리안 님이시라면 뭔가 더 캐물으실 줄 알았는데요."

"그렇게 물어보면 자네가 진실을 말해줄 텐가? 그런 보장도 없지 않나. 더구나 한창 마드라드는 시끌벅적거리고 있네. 자네 같은 인물이 바깥을 쏘다니는 것을 보면 필시 뭔가 큰 건이 연관되어 있겠지. 그걸 나 같은 외인에게 말해줄 리는 없을 테고 말이야."

"전하의 의중을 묻는 것이 실례인 건 알지만..."

"실례라면 그만 두는 게 좋지 않겠나. 나 또한 전하를 모시는 몸. 주군의 의중을 감히 엿보려는 신하는 없다네."


두 마법사는 그저 서로 잼과 크림을 바른 빵을 입에 넣을 뿐이었다. 우물우물거리며 진득하게 퍼지는 단맛이 조금 내려앉은 현우의 기분을 북돋아주었다.


"이제는 시어도어 할아버지의 친우 분께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면 되었죠?"

"자네는 어찌 점점 갈수록 말꼬리를 잡는 건지 원. 이걸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해야 할지, 혹은 그저 권모에 익숙해진다고 해야 할지."


그러면서도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아드리안은 의자를 고쳐 앉았다.


"오늘 아침에 자네가 하인츠 후작과 함께 나타났을 때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네. 최근에 후작이 외유를 나갔다는 이야기만 들었었지 동부로 시찰을 나가리라곤, 그것도 자기 가문의 기사단을 이끌지 않고 외부의 마법사만 대동하고 갈 줄은 누가 알았겠나. 암행이라니."

"그래도 좋은 결과를 가지고 왔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바다 건너 온 이들이 왕국에 정착한 지도 백오십 년을 훌쩍 넘겼네. 그들에 대해서는 왕실에서 소유한 땅을 그들이 경작하며 살 수 있도록 빌려준 것밖에 되지 않아. 왕국이 다른 일들을 처리하느라 왕실 소유 영지에 대해선 소홀했네."

"그렇다고 한들, 미네바처럼 직접..."

"관리청을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지. 사실 하오란이야 이미 동부의 물류를 담당하는 도시로 성장했으니 그곳은 이미 관리청이 있지만, 나머지 두 땅은 소위 마을 수준 밖에 불과하지 않나."


자세한 이야기나 혹여 청탁을 할 셈이라면 자신처럼 궁중에만 머무르는 뒷방 노인네보다는 재무대신을 찾아가라며 아드리안은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아쉽네요. 왕국의 환상마법에 대한 연구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일 지도 모르는 기회였는데 말입니다."


단, 젊은 마법사가 뿌린 미끼의 냄새를 맡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미 자네에게 보고받기론 레이야마의 마을 내부에는 마법사들이 없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네만."

"마법사는 없어도 저쪽 대륙에서 건너온 주술은 있다 하더라고요."


주술이라. 아드리안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현우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겠다는 의미였다.

그 역시 학구파 계열의 마법사들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치 여러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는 마법사, 왕의 스승 정도 되는 자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일이긴 했다.


"흑막 집단의 그 점술가가 펼쳤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더라고요. 전혀 겪어보지 못한 이국의 풍경을 불러내는 것을 보면, 상대방의 기억을 이용하는 정신계 마법이랑은 달랐거든요."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천지를 본 적이 있던가. 돌이고 나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순백의 옷을 입은 곳.

핏빛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그 혈투의 잔향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 했다.


"그런 수준의 주술이 있었단 말이지."

"아, 그 정도 까지는 아닐 거에요. 그건 제가 부숴버려서..."

"그 가치 있는 것을 말이냐?"

"그렇지만 깨부수지 않으면 제가 빠져나올 수 없었을 거에요."

"흐음..."


아드리안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장고에 잠겼다. 도중에 젊은 마법사의 말이 짧아진 것 정도야 그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자기 제자처럼 느껴지는 친우의 제자였으니.


"전하를 알현하기 전에 따로 맡겨달라며 빼놨었던 그 주머니, 그게 거기서 온 건가?"

"역시 대단하시네요."


현우는 쉽게 긍정했다. 조금은 뺄 줄 알았는데, 보기 좋게 아드리안의 예측이 빗나갔다.


"레이야마의 키노시타란 성을 쓰는 가문에서 가지고 있던 보물이에요. 단 한 번 밖에 쓸 수 없는 마도구."

"일회용이라 하면 당연히 그 한번에 모든 효용을 발휘해서 만든 것. 더군다나 구슬과 같은 구체는 어떤 힘을 봉인하기에 가장 최적화된 형태지."

"구슬인 것은 또 어떻게 아시고."

"내가 주머니를 열어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 훔칠 생각도 없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 아니겠나.


아드리안은 현우의 목에 걸려있는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뭘 하시려고요."

"어차피 자네도 이 구슬의 능력을 모르지 않나. 연구를 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겠지. 그것을 두고도 탐을 내지 않을 자, 밝혀진 정보를 남에게 퍼트리지 않을 자, 그러면서도 마법에 뛰어나다 못해 주인(Master)이란 칭호를 떳떳이 붙일 수 있는 자."


현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에게 되물었다.


"그게 아드리안 님이시라고요?"

"여기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 자에게 가게. 내 상관하지 않을 테니."

"...여기 있습니다."


흡족하다 못해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저 웃음을 보라. 수염마저 잔잔히 떨릴 정도로 입꼬리를 높게 올린 마법사는 현우의 손에서 주머니를 받아 그대로 공중에 띄웠다.


"오너라, 히아신스(Hyacinthus)."


아드리안의 스태프가 공간을 가르며 그의 손에 쥐어진다. 일렁이는 바람에 현우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방에 아드리안의 마력이 넘실거리며 빈 공간을 채워갔다.

마력에 반응한 구슬이 서서히 빛을 발하려 했다.


"아드리안 님, 그거 단 한번밖에 쓰지 못하는..."

"껍질을 깨지 않고서는 내용물을 볼 수 없는 법. 그것이 닭인지 오리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껍질을 보면 이미 겉에서부터 구분이 되지 않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이내 솟구치는 돌풍에 현우는 입을 닫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아드리안의 이름 아래 매어져 있는 규약 중 하나를 부르나니. 바람이여,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낼 지어라."


허공으로 떠오른 뽀얀 구슬을 둘러싸며, 스태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은 점차 투명한 막을 만들어내었다.


빠각. 현우는 똑똑히 그 소리를 들었다.

단절되어버린 틈 사이로 스며드는 아드리안의 마력이 마침내 일시적으로나마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공간을 구축해냈다.


"이런 게 가능합니까?"

"자네가 새나 가지고 있을 날개를 띄워, 하늘을 자유로이 나는 것 역시 다른 이들은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지. 자네는 이오니아의 공간 이동 장치를 다 누구 손에 맡긴다고 생각하나."


이오니아의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공간 이동 시설.

과거로부터 전해지던 것을 끊임없이 보수하여 지금에도 계속 운영되어 오는 시설이었다.

현우 역시 마드라드를 다니면서 그 은혜를 입은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이런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에 대해서 말이다.

공간 마법을 유지할 막대한 양의 돈과 마석, 그리고.


"이 몸은 아드리안, 그 이름을 충분히 짊어질 수 있는 공간의 마법사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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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192화. 네거티브, 네거티브(2) 20.03.20 40 0 13쪽
191 191화. 네거티브, 네거티브(1) 20.03.18 36 0 13쪽
190 190화. 드러나는 결과(2) 20.03.17 32 0 14쪽
189 189화. 드러나는 결과(1) 20.03.16 38 0 14쪽
188 188화. 이합집산(3) 20.03.13 34 0 14쪽
187 187화. 이합집산(2) 20.03.12 31 0 13쪽
186 186화. 이합집산(1) 20.03.11 32 0 14쪽
185 185화. 당신을 떨어뜨리려고(2) 20.03.10 35 0 13쪽
184 184화. 당신을 떨어뜨리려고(1) 20.03.09 33 0 14쪽
183 183화. 마탑정쟁의 시작(2) 20.03.06 35 0 14쪽
182 182화. 마탑정쟁의 시작(1) 20.03.05 39 0 13쪽
181 181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3) 20.03.04 29 0 13쪽
» 180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2) 20.03.03 45 0 13쪽
179 179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1) 20.03.02 35 0 14쪽
178 178화. 은인께 드릴 것은(4) 20.02.28 35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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