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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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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최근연재일 :
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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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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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606

작성
19.10.01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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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76화. 성적표(1)

DUMMY

현우의 질문에 답하는 루크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침음함이 곁들여 있었다.


"그 동안 시어도어 님을 입학관리관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겠지?"

"당연하죠. 제게 마법사가 될 자질이 보인다 해서 추천서를 쓰신 분이니까요."

"어제 빌 에반스가 했던 말은 사실이다."


숨을 고른 후, 루크는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드라드 대학 총장, 바람의 마탑주, 비세습이긴 하지만 마드라드를 봉토로 가지고 있는 백작이 그 분의 정체지."

"후우..."


총장의 수족이라 불리는 루크에게서 다시 한 번 확인사살이 날아왔다. 현우는 밀려드는 감정의 동요를 얼굴에서 최대한 숨겼으나, 떨리는 손가락은 미처 감추지 못했다.


"총장이란 분이 그렇게나 막 다니셔도 되요? 제가 할아버지와 처음 만났을 때에는 혼자 계셨거든요. 혹시라도 잘못되기..."


그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음에 불구하고, 루크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잘못되신다고? 마탑주 직위는 그저 마법만 잘 쓴다고 올라가는 게 아니다. 그에 따른 공적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 일대일로 그분을 쓰러트리는 자가 있다곤 생각하지 않는단다. 더군다나 다른 이들은 모르고 있지만, 어르신께서는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한 상태, 엄밀히 말하자면 일대일이 아니라 최소 이대일이 되겠지."


마드라드 테러 사건 당시, 어디서 제피로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는지 그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일면식도 없던 자신에게 어째서 제피로스가 심상에 모습을 드러내 도움을 주었는가. 내심 마음 한 켠에 쌓아두고 바라만 보던 의문이었다.


그렇다면 여전히 시어도어는 제피로스를 소환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을 물어봤어야 했던 것은 아닌지 살짝 지난 날의 행동이 후회스러운 그였다. 안드레아의 시험을 통과할 때, 제피로스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기에 그것을 물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음에, 현우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말리지는 않으셨나 봐요."

"어르신의 취미가 암행인 것을 어떡하겠나. 세계 곳곳의 꽃을 가꾸는 것이 취미라 종자를 수집할 겸 다니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시어도어 님... 할아버지의 제자이신 건가요, 루크 선생님은?"

"맞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탁자에 모식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가장 중앙에 그려진 원에는 시어도어의 이름이, 그리고 그와 이어진 선마다 그의 손가락이 이름을 새겼다.

꽤 비싼 원목 탁자임에도 그는 하나의 거리낌 없이 마나를 집중해 나무 위로 글자를 새겨 나갔다.

보는 현우의 입술이 마를 정도였다.


"내가 제자라 불려도 될 지는 모르겠지만 설명을 하자면, 어르신에게 사사한 몇 명의 인물이 존재한다. 그 중 수제자가 니암 콜, 어르신의 첫 번째 제자지. 두 번째는 너도 만났던 적이 있는."

"메를린이란 분이시죠?"


교류제의 마지막 연회 때, 루크와 같이 있었던 여성이었다. 눈매가 똑 부러진 것이,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끔 하는 무언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던 마법사였다.


"맞다. 그 두 명이 내 위의 대열이고,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선 내가 세 번째다."

"아, 그러고 보니까 그 메를린 씨가 말했던..."

"일단은 끝까지 듣거라."


다른 한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루크는 쉬지 않고 설명을 했다.


"네 번째가 바로 에블린."

"네? 아, 맞다. 그렇지."


이미 그녀와 단독 교습을 하는 동안, 현우는 이 사실을 들은 바 있었다. 시어도어와 에블린의 대화를 들어보건대, 무언가 단단히 쌓여있던 앙금이 끝내 그녀가 목숨을 걸고 마드라드를 공격한 이유이리라.


"에블린과 나는 앞의 두 사람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우리는."

"루크.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의 말은 내가 해도 되겠는가?"

"할아버지?"


시어도어는 자연스럽게 허공에 의자 하나를 만들어 내었다. 어딘가에 놓여있던 의자 하나를 이동시킨 것이라.

의자도 생겼겠다, 그는 좁지 않은 탁자에 멀찍이 의자를 놓고선 턱 하니 걸쳐 앉았다.


"오랜만이지? 현우야."

"아, 안녕하세요. 시어도어 님."

"그렇게 말하지 말아다오. 나는 너에게 할아버지란 호칭으로 불리고 싶으니까 말이다."


이 대학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간 가까웠었던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

마드라드에 입학하기 전 현우를 아는 유일한 사람. 도서관 앞에서 나눴던 대화는 어찌나 즐거웠었는가. 그러나 그렇게 친밀했던 관계는 직위란 현실의 벽으로 멀찍이 물러난 상태였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네요. 일단은 저도 입학관 할아버지란 호칭이 더 입에 달라붙습니다. 찬찬히 고쳐나가도록 할게요."

"어르신. 여기는 어쩐 일로."

"원래는 산보나 나갈까 생각했었지. 나야 이제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나."

"그만큼 저나 니암에게 일거리가 더 많아졌지요."

"흐음. 그렇게 보기엔 자네는 그리 일이 많아 보이지 않는걸, 루크."


철두철미해 보이는 그에게도 그런 구석이 있는 걸까. 루크는 시어도어의 앞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하고 풀어지는 모양이었다. 헛기침을 해 동요를 가라앉힌 그가 시어도어에게 물었다.


"제가 맡은 일은 이미 다 처리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제 밑으로는 따로 사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요."

"아무래도 나와 같이 다니다 보니 그런 것이겠지. 그런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괜찮습니다, 어르신. 저도 자리에는 별 상관 없습니다."


시어도어는 마치 손주를 보는 것과 같은 애틋한 눈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밝혀질 것이라 생각은 했단다, 현우야. 에블린과 너를 만나게 한 이후로 계속 머리 속에서 떠나가지 않았지. 그전에도 말했듯 지금은 완전히 남남이지만, 에블린은 내 전 제자다."

"아까 루크 선생님이 말했던 그건."

"내 업보란다. 완전히 이야기를 풀자면 며칠을 설명해도 모자라지만 요컨대."


시어도어는 볼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뜸을 들였다. 얼굴에 퍼진 검버섯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준다. 지금 할 이야기는 노인의 얼굴에 검버섯이 막 필 때 쯤이었다.


"나는 이오니아를 위해 내 개인적으로 병력을 운용했었다. 백작위를 가진 귀족이 사병을 두는 것이야 흠을 잡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암살자로 키워진 마법사라면 조금 이야기가 달랐지."

"네?"

"나와 에블린은 양지에서 어르신께 사사한 마법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루크는 현우에게 한 손으로 불꽃을 피우는 것을 보여주었다. 확 타올랐다 사라지는 불꽃 너머로 현우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정보수집, 첩보, 심지어 암살까지. 일반적인 암살자와는 달리 스스로 모습을 감추거나 훨씬 다양한 방법으로 교란이 가능했다."

"그 말이 맞다. 그러던 와중, 나의 친우이자 궁중 수석 마법사인 아드리안이 경고하더구나. 왕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더군. 더 이상 선을 넘지 말라 했고, 그 증거를 제출하라 강요했다. 당시 내 검은 손은 두 사람이었고, 그 중 하나를 잘라야만 했지."

"그래서..."


시어도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나는 바로 루크를 부탑주로 올렸다. 니암과는 얼추 이야기가 되어있었지."

"잠깐만요, 할아버지."


탁자를 손으로 한 번 친 현우가 노인에게 물었다.


"그럼 에릭 형은요? 그 형도 분명히 에블린 씨가 사냥개라 했었는데?"


굳이 그에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현우는 분명히 들었다.

에릭에게 '사냥개'라며 에블린이 날렸던 그 조소를 그는 잊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피터슨 학생과는 쌍무적 계약관계에 있단다. 절대로 암살 같은 건 시키지 않아. 그가 전투학부 학생인지라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니, 정보 수집만 권하고 있단다."


지금은 절대로 전과 같은 일들은 계획하지 않는다며, 노인은 청년에게 강한 어조로 그 뜻을 전했다.


"그럼 에릭 형은 제자가 아닌가요?"

"그렇단다. 사실 그 아이도 나를 스승이라 생각하지 않을 거야. 도움을 주긴 했지만 내가 제자로 삼을 만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시어도어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모습을 드러난 그의 스태프에는 싱그러운 이슬이 맺혀있었다.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구나. 어떠냐, 현우야. 정식으로 내 제자가 되겠니?"

"네에?"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뜬 눈에, 한껏 신장된 얼굴은 턱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루크는 아주 희미한 미소만 짓고 있는 가운데, 시어도어의 대답에 현우는 겨우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메를린이 남겼던 막내 사제라는 말이 기억의 바다를 헤집고 올라온다.


"너에게 추천증을 줄 때부터 생각해 온 거란다. 내가 예전에 비해서는 탑주의 지위도 없고 단순히 이제 원로격으로 남겠지만, 아직 제자를 받을 정도의 실력은 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입학관 할아버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정령왕 제피로스와는 지금 계약이 끊긴 상태이신가요?"

"응?"


노인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이번에 외부 의뢰를 나가면서, 어떻게 연이 닿은 건지는 모르지만 제피로스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었어요."

"...그 악기 때문이니?"

"네. 그리고, 저를 보았음에도 그는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죠. 물론 이제와서야 할아버지가 계약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 드는 생각이에요. 에블린 씨와 상대하면서 무언가 큰 타격을 입으셨다 했잖아요."

"어르신, 사실입니까?"

"끄응..."


두 쌍의 눈이 노인을 바라본다. 시어도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이란다."

"어르신! 그 사실을 저에게까지 숨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루크. 바로 이런 것 때문일세. 자네가 너무 걱정할까 봐 그런 거라네."

"그래도 말입니다."

"내가 정령왕과의 계약이 끊겼다고 해서, 혹시 만만하게 보는 건 아니겠지?"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헐헐' 웃음소리와 함께 시어도어는 들고 있던 제피란테스를 의자 옆에 세워놓으며 말했다.


"야수가 이빨이 나갔다 해서 발톱마저 뭉툭해지는 건 아니지. 마침 직위를 내려놓았으니, 이제는 후진 양성에 조금 더 힘을 쏟고 싶구나. 그래서 지금 제안하는 거란다, 현우야. 지금 수락해도 일상엔 크게 영향은 없을 거다. 다만, 에블린이 지도하던 시간에 이제 나도 본격적으로 개입을 하는 수준이 될 거야."

"확실히 지금보다도 더 숨겨야 하는 사실이네요. 더 꽁꽁요."

"그렇게 되겠지? 아무래도 네가 내 제자라는 사실이 들어난다면 견제가 더 심하게 들어올 거다. 너에게도, 그리고 루크에게도."


현우가 제안을 수락한다 하여도 한동안은 루크의 제자로 등록되어 있는 것이 그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 시어도어는 말했다. 지금도 혹시 몰라 니암 쪽의 세력에서 외부 의뢰 활동을 감시하란 지시가 내려온 것을 보면, 만약 이 사실이 밝혀졌을 경우에는 더 큰 파장이 당연히 생겨나리라.


물론 현우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할아버지의 제자가 되었을 때, 다시는 에블린 씨와 같은 일이 나지 않겠노라..."

"내 마나를 걸고, 내가 여태까지 걸어왔던 모든 발자취와 마법의 길을 걸고 맹세하마. 세계의 법을 쫓는 이로서, 내 본질에 새겨질 영원한 낙인으로."


의자의 옆에 놓여있던 그의 스태프가 영롱한 빛을 한 차례 뿜었다.


"...좋아요."


결심을 내린 듯, 현우의 눈에는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어떻게, 따로 정해진 의식이라도 있나요?"

"아니야. 그냥 평소와 같이 생활하면 된단다. 변한 것은 없어. 단지, 너와의 연이 더 깊어졌을 뿐이란다."


시어도어는 고개를 살짝 까딱여 현우에게 인사를 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단다."

"저야말로요, 할아버지."


그 둘을 바라보던 루크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제 분에 차던 스승 노릇은 그만해도 되는 거겠죠?"

"글쎄. 아무래도 루크, 자네에게 계속 부탁해야 할지도 모른다네. 이곳을 감시하는 눈은 나라 안에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야."

"어르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저는 언제라도 따를 뿐입니다."


현우는 그들에게 외부 의뢰를 수행하던 도중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풀어내었다. 물론 그들에게도 숨겨야 할 것은 있었기에, 안드레아와의 일은 선을 그어 이야기했다.


골렘의 출현은 이미 보고서에도 적힌 이야기이기에 숨길 수 없지만, 던전을 짓고 살던 무명의 마법사가 소환한 것이라 둘러대었다. 기록과 대조를 해봐도 정보 제공자인 현우가 왜곡을 한 이상, 그들이 진실을 알아낼 수단은 전무했다. 하물며 제피로스마저 노인과 연결이 끊긴 마당이었으니.


"제자가 되었어도 큰 부담을 내리지는 않으마. 그래도 성적은 잘 받을 수 있겠지?"


자리를 파하고 하숙집으로 돌아가려는 현우에게 시어도어가 묻자, 그는 입꼬리를 양쪽으로 쭉 당기며 답했다.


"예. 이번에 외부 의뢰도 성적 잘 나올 거에요. 의뢰의 등급은 C지만, 보고서의 내용은 충분히 높다구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꼭 좋은 성적을 받길 나도 기도하마. 내가 성적에 관여할 수는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하하. 제가 그런 것까지 바랄 정도로 목이 매이진 않아서요. 물은 제가 알아서 마실게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그리고 루크 선생님도요."


그렇게 현우는 두 사람 앞에서 호언장담을 했다.


* * *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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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71화. 용의 시험(1) 19.09.25 67 1 13쪽
70 70화. 안드레와의 대담(2) 19.09.24 67 1 14쪽
69 69화. 안드레와의 대담(1) 19.09.23 69 1 14쪽
68 68화. 안드레의 초대 19.09.21 81 1 13쪽
67 67화. 개판(5) 19.09.20 78 1 14쪽
66 66화. 개판(4) 19.09.19 62 1 14쪽
65 65화. 개판(3) 19.09.18 68 1 13쪽
64 64화. 개판(2) 19.09.17 75 1 13쪽
63 63화. 개판(1) 19.09.16 69 1 14쪽
62 62화. 오분 전(2) 19.09.12 61 2 14쪽
61 61화. 오분 전(1) 19.09.11 59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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