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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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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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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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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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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5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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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71화. 용의 시험(1)

DUMMY

"미안해, 나는 네가 말한 만큼 너를 좋아하지 않아."

"그, 그렇구나."

"그냥 친구 사이로 지내. 안녕."


강을 사이에 두고 호향과 조금 거리를 둔 마을에서의 기억이었다. 그 당시 처음으로 어머니를 따라간 시장에서, 그는 꽃을 모아 팔던 소녀를 만났었다. 그 뒤로 몇 번이고 어머니를 졸라 꽃을 사기도 했고, 시장이 열리는 때만 되면 가자고 들떴더랬다.


"이것 참, 사람을 울적하게 만드는 마법이야."


현우는 소녀의 형상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형체는 바스러져 후드득 부스러기로 떨어졌다. 이윽고 회색의 연기로 화한 그것은 모습을 감췄다.


새가 울었다. 현우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쯤이면 이 마법이 풀릴 것인가. 분명히 그의 마력이 다하면 마법도 풀리겠지만, 애석하게도 현우에게 마법을 건 당사자는 용이었다.

현우가 먼저 생을 다할지언정 그 끝을 모르는 마력이 먼저 마르는 일은 없으리라. 결국 이 밤을 헤쳐나갈 수 있는 건 현우에게 달렸다는 소리다.


인간은 끝을 알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그렇기에 이를 피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렇게나 죽음을 피하기 위해 불로불사를 원했고, 때로는 신에게 빌며, 때로는 연금술에 매진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 결과는 하나같이 끝으로 맺어졌지만.


언제쯤 이 어둠이 걷힐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현우의 마음엔 점점 공포라는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예전에 몇 번 바다에 가본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고 지는 파도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현우의 마음 속에서 다시 벌어졌다.


밀려들어오는 감정의 파도에 흠뻑 적셔지는 지도 모른 채, 그는 그저 새를 따라 걸을 뿐이었다.


"삐이익!"


이름 모를 새는 빨리 오라며 성을 내고, 그 빛에 의지한 마법사는 새가 멈춘 자리에 섰다. 그의 앞에는 앞서 봤던 연기가 다시 아지랑이를 부리며 누군가의 형상을 이뤘다.


"장! 우리와 함께면 당신은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어요!"


연기로 이루어진 여성은 그녀를 바라보는 현우를 향해 정확히 손을 뻗었다.


"나와 같이 하자고요."

"벌써 이것까지 끌어온 거야?"

"내가 더 잘해줄 자신이 있어요."


여기까지 오면서 이 어둠의 정체에 대해 얼추 생각했었다. 그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아프고 상처가 되었던 것들을 전부 끄집어 올리는 것이리라. 지금까지는 담담히 넘길 수 있었다. 그의 삶은 마드라드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리 굴곡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훠이. 물러가라."


건넛마을의 소녀처럼 이것도 연기로 날아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현우는 에블린의 형상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턱.


그러나 그 팔은 에블린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어, 어라?"

"안녕?"


현실의 그녀와 똑 닮은 미소에 현우는 오한이 돋았다. 그의 손목을 잡은 그녀의 손이 곧 허물어지며 현우를 덮쳤다.


"조금 더 열심히 해봐."

"우, 우웁."


연기는 현우를 옥죄고 점차 알 수 없는 미지로 그는 가라앉았다. 검은 늪에 빠져들면 과연 어디로 이동할 것인가. 온몸에 점점 힘이 빠졌다.


"삐이익!"


작은 새가 흑색 물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우를 향해 울었다. 다급한 듯 울부짖는 그것은 가녀린 발로 어떻게든 현우를 끌어올리려 하는 듯 했다.

그의 옷깃을 부여잡고는 어떻게든 앙칼진 기합을 질러보지만, 현우의 몸에 비해 새는 너무나 작았다. 이내 포기한 새는 현우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삐이이."

"이게 뭐야."


이미 빠진 발을 놀려보았다. 무언가 걸리는 것이 없다. 바닥이 없는 늪은 점점 현우를 삼키고 있었다.

언제였을까, 강가에 친구와 놀러 나갔다가 발이 닿지 않은 깊은 곳으로 잘못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그것까지 여기는 구현해 놓은 것일까, 그 때에 비하면 키는 훨씬 커졌지만 거기에 맞추어 늪의 깊이 또한 깊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는 가슴언저리까지 가라앉은 현우의 몸은 이미 제 힘으로는 올라가는 것이 무리였다. 이미 에블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다시 현우의 작은 새가 그의 콧등에 살포시 발을 디뎠다.


"뭐, 말하고 싶은 게 있니? 어떻게 하면 여기를 나갈 수 있을까?"

"..."

"거참, 새한테 혼잣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한가지 방법은 있어."

"응?"


하얀 새는 작은 날개를 최대한 활짝 피더니 현우의 위로 날아오르며 이야기했다.


"지금 상태로는 빠져나갈 수 없어. 차라리 완전히 잠식되는 게 좋을 거야."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바닥을 박차야 위로 솟을 원동력을 얻을 수 있지 않겠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일 거야. 그럼 잘 가.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


작은 새는 그대로 현우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쿵!


결코 작지 않은 소리와 함께 현우의 몸이 쑥 하고 완전히 검은 늪에 가라앉았다. 어떻게 이토록 작은 새에서 그런 충격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새의 몰골을 보면 답이 나왔다.

이 까마득한 어둠 속에 현우를 안내하던 찬란한 빛은 퇴색되었고, 서서히 검은 것에 깃털이 찢겨지는 새는 아련한 눈으로 손만 남은 현우를 바라보았다.


"열심히 하길 바래, 나의 친구여."


곧이어 들이닥치는 흑색의 물결이 현우의 손마저 그대로 꿀떡 삼켰다.


* * *


"시험에 들게 한 건 네 녀석이면서, 그 마법사가 나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구나."

"신경 끄세요. 그렇게나 제가 걱정되시면 아버지께 알린다는 말을 취소하시면 됩니다."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아베인이 네 걱정을 은근히 한다는 것, 모르고 있니?"

"아버지가요? 하."


짙은 녹색 머리카락을 배배 꼬면서 안드레아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정령은 거짓말 정도는 가볍게 해도 되나 봅니다? 그렇게 타격도 받지 않으시네요."

"거짓말 한두 번 정도 한다 해서 깎일 정신력이었으면 내가 왕의 자리를 맡고 있지 않겠지. 이미 쌓아둔 것이 많아서 이 정도는 걱정 없단다, 아베인의 아이야."

"안드레아라는 이름이 있어요. 그걸로 불러주세요."


이미 그가 현우에게 자랑하던 녹차도 벌써 세 번이나 찻주전자를 비운 지 오래였다. 이나가 슬쩍 둘의 표정을 살핀 뒤 주인에게 차를 다시 내올지를 물었다. 찻주전자를 들고 어디론가 조용히 걸어가는 골렘을 본 제피로스가 물었다.


"네가 만든 골렘이 저 녀석이냐?"

"당신의 눈에는 차지 않겠지만, 제가 처음 만든 수호자입니다. 여태까지 열심히 해주고 있어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듭니다."

"전부 마석인 건가. 은근히 닮았어."


자신은 전혀 아버지와 닮지 않았다 항변하는 안드레아, 그런 그를 보며 제피로스는 숨죽여 웃었다.

골렘 한 기를 만드는데 은근히 많은 재료가 들어가지만, 그런 와중에 몸통을 전부 마석을 깎아 만들었다니. 황금과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그 기색은 아비인 아베인 쪽을 꽤나 빼 닮았다는 것을 그 자신은 모르는 것일까,


"요 근래 여기가 시끌벅적한 것 같더니만, 네가 마석을 싹 끌어 모은 거로구나."

"제가 그랬을 리가 있나요? 어떻게든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열심히 범위 안에서 꾸미며 살아가고 있던 와중입니다. 보나마나 인간들끼리 알력 다툼에 부족 현상이 일어난 것이겠지요. 마석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럼 저것들은 전부?"

"네. 아버지 레어에서 나올 때 들고 나온 겁니다. 저도 아공간 정도는 다룰 수 있다고요."

"이런."


어쩐지 아베인이 그렇게 아들내미를 찾더니만 그 이유가 한가지가 아니었나 보다.

제 색깔처럼 황금을 좋아하는 그는 같은 색깔의 무리 사이에서도 특히나 유명했다. 탐욕스런 그의 레어에서 돈과 마석을 긁어 나왔다면 능히 저렇게 돈지랄을 할 수 있으리라.


그런고로 아베인은 안드레아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아직 어린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도 있지만, 어쩌면 아들에게서 돈을 다시 돌려받으려는 것이 아닐까. 제피로스는 후자의 비율이 좀 더 높을 수도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그토록 아베인을 보기 싫다면, 마법사가 내 시험을 모쪼록 빠른 시간 내에 통과해야만 해야겠네."

"그럼요. 저도 보는 눈이 있지, 그렇게 심한 마법을 걸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그러냐?"

"애초에 용사를 시험할 거면 제가 본신으로 변해서 공격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름지기 용사라면 용 정도는 상대했다는 이야기는 따라붙어야지요."


어디서 동화 이야기를 많이 읽었는지 제피로스는 안드레아가 전혀 딴 세계의 헛소리를 한다 여겼다. 용이 세상의 전면에서 모습을 감춘 지가 언제였던가.

그 수마저 예전에 비하면 많지도 않은 데다가, 그들이 본연의 모습으로 활개를 치기엔 이 대륙은 너무나 좁았다.

과거에 비하면 인간들이 바글바글해진 것도 있고, 용은 더 이상 절대적인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지 않았다. 아직도 일대일로는 역부족인 것은 맞으나, 수십 내지는 수백의 사람들이 모여 용을 잡는 것이 없지는 않았으니.


"조금 전에도 말했습니다만, 당사자의 기억들 중 상처를 받거나, 내면의 공포를 끌어내 마주보게 하는 마법입니다. 정신 단련에 얼마나 좋은걸요."

"그걸 정신 단련이라 표현하는 너도 정상은 아니구나."

"그런가? 분명 아버지는 가끔 저한테 이걸 걸어줬는데 말입니다."

"하."


제피로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안드레아는 그를 흘깃 보더니 입을 살짝 삐죽이 내밀었다.


"다만 살짝 문제가 있긴 합니다."

"뭔데 그러냐."

"너무나 큰 충격이라면 당사자가 일어나지 못할 지도 몰라요. 예를 들어 강자를 겨우 쓰러트렸다던가 하는. 하지만 제가 지켜본 바로는 그가 상대하지 못할 적들은 없었습니다. 분명히 그 마법사는 훌훌 털고 마법에서 벗어나겠지요. 암, 꼭 그래야 합니다."


적어도 안드레아보다 현우를 오랫동안 지켜본 입장에서 제피로스는 가만히 고민에 잠겼다. 아베인의 아이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 마법사가 겪을 수 있는 압도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에 뭐가 있을까.


이제야 인간의 나이로 성년이 된 녀석이었다. 대략 생각해본다면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했거나, 첫사랑을 거절당한 정도가 아닐련지. 제피로스 또한 안드레아의 옆에 앉아 그들의 앞에 놓인 검은 구체가 깨지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 * *


위에서 떨어진 현우는 다시 온통 까만 공간으로 뚝하고 떨어졌다.

다행히 충격으로 다리를 다치진 않았다. 고통이 전혀 없었다.

습관적으로 엉덩이 쪽을 손으로 어루만진 현우는 고개를 돌려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온통 검은 세상에 스스로 빛나고 있는 그를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안녕."


방패와 철퇴를 든 용병이 현우를 향해 히죽 웃었다.


"내 이름은 안네. 내게 죽은 자들에게 내 안부를 전해라. 어라? 그런데 내가 죽어버렸네?"


뒷걸음질 치는 현우를 향해 안네는 입꼬리를 아주 끝까지 올리며 '클클' 소리를 내었다. 이미 푸른 안광이 눈이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했다. 그녀의 무기엔 끈적이는 피가 잔뜩 묻어있었고, 걸을 때마다 현우의 마법으로 잘려졌다 이어진 근육이 철퍼덕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뭐야, 정말 영혼이라도 되, 되는 겁니까?"

"네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런 거겠지, 장. 난 아직도 네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이 안네의 삶을 끝낸 마지막 대적자! 참으로 그 마법은 놀랍더군."


저런 말까지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죽은 이의 영혼마저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를 충분하다 못해 벼랑으로 몰고 가게 할 정도로 실력 있는 용병이었다. 그러나, 안네는 결국 현우를 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충분히 정신만 집중한다면 이번에도 그녀를 이길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아앗!"


기합과 함께 안네는 현우를 방패로 밀었다. 가볍게 밀쳐지는 현우를 그대로 밀쳐낸 뒤, 안네는 철퇴를 바닥에 박고선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언가 안네의 손에 쥐어진다.


뚜렷한 형체가 들어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흔히 볼 수 있는 곤봉이었다. 철퇴가 목표물을 단번에 치명상을 입혀 즉사 내지는 빈사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면, 곤봉은 그것보다는 제압의 의미가 조금 더 강했다.


그 말인즉슨, 안네는 현우를 그저 쉽게 잡을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나무로 된 곤봉에 손목이나 허리를 맞아도 뼈가 부러지거나 신경이 상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행운일지는 미지수였다.


다시 한번 얻어맞은 현우는 틈을 노려 반격에 나섰다. 마력을 끌어올려 안네의 목을 노렸다.


"뭐, 뭐야!"


그대로 그녀의 발길질에 걷어차인 현우는 우당탕 넘어져 한 바퀴를 굴렀다.


여태까지 걸어왔던 시간 동안 현우는 딱히 무언가를 한 적이 없었다. 단지 새의 인도를 따라 길을 걸어왔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억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형상들을 볼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제서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마법이 써지질 않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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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73화. 귀환하다(1) 19.09.27 69 1 14쪽
72 72화. 용의 시험(2) 19.09.26 76 1 13쪽
» 71화. 용의 시험(1) 19.09.25 68 1 13쪽
70 70화. 안드레와의 대담(2) 19.09.24 67 1 14쪽
69 69화. 안드레와의 대담(1) 19.09.23 69 1 14쪽
68 68화. 안드레의 초대 19.09.21 81 1 13쪽
67 67화. 개판(5) 19.09.20 78 1 14쪽
66 66화. 개판(4) 19.09.19 62 1 14쪽
65 65화. 개판(3) 19.09.18 69 1 13쪽
64 64화. 개판(2) 19.09.17 75 1 13쪽
63 63화. 개판(1) 19.09.16 69 1 14쪽
62 62화. 오분 전(2) 19.09.12 61 2 14쪽
61 61화. 오분 전(1) 19.09.11 59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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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9화. 폼나는 계획(2) +1 19.09.09 64 1 14쪽
58 58화. 폼나는 계획(1) 19.09.07 75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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