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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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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최근연재일 :
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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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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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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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72화. 용의 시험(2)

DUMMY

마법사에게서 마법을 빼앗아 가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마법사라는 이름에서도 마법이 빠진다면 결국엔 ~하는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만 남는다. 그저 사람만 남는다는 소리다.


전혀 아프지는 않았지만, 안네의 곤봉에 얻어맞을 때마다 현우는 무력함에 몸을 떨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맹렬히 현우를 공격했던 그녀였다. 현우의 완력으로는 전장에서 단련된 그녀의 근육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서른하고도 네 번의 충돌이 있었다.

안네의 주먹을 막으며 밀려난 현우가 고개를 털어내며 볼을 세게 때렸다. 손바닥이나 뺨이 얼얼하다는 느낌도 없었지만, 정신을 차리라는 자기 반성이었다.


몇 번 정도는 그녀의 곤봉을 뺏는 것에 성공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이 주문을 외울 때면 무기는 연기로 변해 사라지고, 안네는 다시 허공에서 새로운 곤봉을 꺼내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몸통까지 부딪혀가며 용병에게 백중세로 맞섰지만 이기는 것은 요원했다. 교차점이 없는 두 평행선은 그저 쭉 달려나갈 뿐이었다.


"이봐요, 안네. 당신, 정말로 지옥에서 돌아온 겁니까? 정말로 그 사람이 맞는 건가요?"

"글쎄. 내가 전에 죽어봤어야 아는 거겠지. 진짜 영혼이 돌아온 것인지는 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안네는 손가락을 오므리며 쥐었다 펴는 것을 반복했다. 잔잔한 불길이 일렁이는 눈두덩이는 이윽고 그 푸른 기운을 터트렸다. 푸른 불꽃은 그녀의 대적자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아직 내가 죽인 녀석들을 만나보지는 못했다. 모종의 이유가 있겠지. 내가 가짜이거나, 아직 다하지 못한 일이 있어 그것을 이루어야만 하거나."

"대답 고맙네요, 안네."

"적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듣다니. 죽어야만 들을 수 있는, 참으로 귀중한 경험이군 그래."

"어쨌든, 당신이 나를 죽이려 들어봤자 여기선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겠죠. 이제 별다른 효율성 없는 그 짓은 그만하지 그래요. 벌써 서른 하고도 대여섯 번은 겨룬 것 같은데."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방패와 무기가 연기로 사려졌다 나타남을 반복한다.


"좋아. 나도 내가 어째서 여기 있는 지를 알고 싶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안네와 현우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보다 조금 더 이곳에 온 시간이 길었기에, 그가 주도하여 그녀에게 현재 상황을 간략히 알려주었다.

감추는 것은 없었다. 혹여 정말로 그녀의 영혼이 여기에 자리잡은 것이라 한들, 그와 그녀 사이에는 삶과 죽음이라는 넘어가지 못할 경계가 존재했다. 이런 편법을 통해서만 간섭을 할 수 있으니, 현우는 거리낌없이 안드레아와 제피로스의 이야기를 안네에게 꺼낼 수 있었다.


"보기보다 훨씬 더 거물에게 죽었군. 나를 보고 떨 때에는 그저 햇병아리인줄로만 알았더니. 용의 시험을 받는 자라. 전설로만 전해지는 이야기다."

"안네 씨는 용을 보신 적이 있나요? 아, 그러니까... 생전에요."

"전혀. 애초에 이오니아에서는 용이 살지 않는 데다가, 용 사냥은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 일반 용병들이 그것을 알 까닭이 없지."

"왜인가요."

"용 사냥에서 일반 용병들이 고용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용의 분노를 받아낼 미끼, 다른 하나는 외부에서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을 보초. 후자도 나중에 입막음으로 정리 당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하면 결국 용을 아는 일반 용병은 거의 없다."


안네는 현우를 흘긋 보고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용은 너에게 무엇을 시험하겠다 한 거지? 어째서 이미 죽었어야 할 내가 여기에 있는가 말이다. 마법사여, 어째서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죽음 뒤의 안식을 방해하는가."

"내가 그것을 꿰뚫고 있다면 진작에 여기를 나갔겠지요. 그래도 짐작이 가는 것은 있지만."


그녀는 슬쩍 손에 곤봉을 나타났다 다시 흩어냈다. 그것을 본 현우가 급하게 답했다. 빨리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으면, 땅바닥에 철퍼덕 풀어지는 건 자신이 될 것만 같았다.


"그 용은 제게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하겠다 했어요. 실제로 이보다 위의 세상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위에서는 저의 삶 속에서 제가 겪었던 좀 좋지 않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가더군요."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건가."


갑자기 그녀는 땅을 치며 껄껄 웃었다.


"그래서 마법사여, 이름이 장이라 했던가. 그래, 장. 내가 그토록 무서웠던가? 상대하기가 버겁던가? 다른 이들도 아니라 내가 여기에 끌려 나온 것을 보면 말이야."

"하하... 그런 건 아니에요. 당신이 무섭다기 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처음 사람을 죽인 게 당신이었어요."

"첫경험이란 이야기군. 뭐, 모든 사람들에게는 첫경험이란 소중한 것이니까. 앞으로도 나를 꼭 기억해주길 바래, 마법사."

"그렇게 능글맞은 표정으로 이야기하지 말아주세요."


현우가 앉아있는 자리로 슬쩍 안네가 자리를 옮기자 현우는 그만치 멀찍이 달아나 자리에 앉았다.


"아직 숙맥이신 것 같은데, 진정한 어른의 세계로 인도라도 해줄까? 전장에서 굴러서 그런지 외모는 많이 죽었지만, 육체라면 남들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단련했는데 말이야."

"이야기를 그쪽으로 돌리지 마시죠, 안네 씨."

"마법사, 전혀 경험이 없나?"


아픈 고통은 없더니만 얼굴이 발개지며 피가 쏠린 것은 느낄 수 있는 모양이었다. 현우는 손을 뻗어 다가오는 안네의 손을 뿌리쳤다.


"이제 확실해졌네요. 당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첫 살인을 했다는 부담감 때문이겠죠."

"말은 똑바로 하지, 마법사. 부담감 정도로는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되지 않아. 적어도, 두려움 때문이겠지."

"그, 그건."

"내 경험을 말해줄까? 여자가 용병계에서 구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대충 느낌은 알리라 믿는다. 동료라고 믿었던 녀석들 중 아랫도리를 탐하던 짐승들도 있었고, 특수한 임무를 맡았다가도 여자란 이유로 수당이 깎이기도 했었지."

"그랬군요."

"그러던 와중에 나를 범하려던 녀석을 칼로 찔렀다. 피가 터지고 얼굴은 비트(Chard, 근대류 작물)간 것을 뒤집어쓴 것마냥 붉었다. 그게 첫 살인이었어. 그 당시에는 어떻게든 살고 보자는 식이었지."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다행히 정신머리가 맛이 간 녀석은 그 새끼 뿐이라서. 살인을 했다 하여도 별다른 탈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내게는 남아있었지. 아무리 용병일을 하며 수 없이 반복되는 살인에도 그것을 잊을 수는 없었다."


옆머리를 긁적이는 그녀는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이제는 다시 겪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인지, 아련한 눈빛은 살아있던 기억에 잠겨있었다.


"내가 말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가, 마법사?"

"물론이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나타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목숨을 거뒀던 이들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 그것이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나름대로의 추모라 했었다."


그녀와 같은 행동을 하던 이들이 용병들 중에서는 적지 않노라 안네는 말했다. 유언을 듣지 못하면 적을 기억할 수 있는 물품 하나를 간직하는 사람도 있다던가.


"도망치지 마라. 물러서지 마라. 이미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어찌되었건, 나의 피가 당신의 손에 흘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건 맞죠. 그렇기에 고민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기억할 수 있을지. 이렇게 만나서 직접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지는 몰랐지만요."

"하하. 내가 이곳에 불려온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용의 능력이라면 일부러 나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사람을 많이 죽였으면 이미 지옥에 끌려갔을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있는 건 무언가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리고 그건 그대에게 이 말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천천히 일어서는 안네의 손에는 다시 무기가 들려있었다. 황급히 현우 또한 엉거주춤 일어나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기억의 주마등 속에서, 내가 그대가 그토록 두려워하고 꺼리는 존재라면."


안네는 두 팔을 벌리며 현우에게 말했다.


"나를 포옹해다오."

"네?"

"나에게 맞서 싸워 이기는 것도 방법이겠지, 그러나 지금 네 능력으로는 조금 어렵다.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는 상황에 육탄전으로 날 상대할 수는 없을 거야. 그렇다면, 네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방법은 어떤가. 어쨌든 그것 또한 물러서는 것은 아니지 않나?"

"단지 그것만으로 가능할까요?"

"해봐야 알겠지."


현우는 안네를 향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마법사는 그의 적을 꼭 안았다. 그녀는 가만히 현우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쩔렁.


잠시 후, 그녀의 손에서 방패와 철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현우의 앞에 조금 슬픈 표정으로 그에게 안겨있는 안네가 보였다.


"후. 이렇게 나도 사라지는군."

"네?"


점차 흐려지는 형상, 현우에게서 나오는 빛이 그녀를 붙잡아 두려 했지만, 빛은 그대로 안네를 통과했다.


"잘했어. 부디 그 뜻을 계속해서 잊지 않기를 바라. 바람은 지나가던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바람이 태양을 닮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


마지막으로 흐릿한 미소를 현우에게 보낸 그녀는 이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현우와 마찬가지로 반짝이는 연기는 그대로 그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감았던 눈을 뜬 마법사는 자신이 내려온 위쪽의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안네."


잊었던 것이 떠올랐다. 제피로스의 질문에 현우는 이리 답했었다.


[축하해. 이제 곧 있으면 원래대로 돌아가겠어. 다만 하나만 물어볼게. 나는 분명히 깨부수거나 파훼하는 쪽을 권했건만,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너를 도운 이의 말을 믿지 않는 건가?]

[차가운 북풍으로는 나그네의 상의를 벗길 수 없으니까. 여기서도 마찬가지에요. 폭풍만이 모든 걸 해결하는 수단은 아니에요.]


현우를 인도하던 작은 새의 말처럼 이곳은 단단한 밑바닥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숨겨왔던 민낯의 감정을 마주했다. 그리고 이를 감싸 안았다. 인정했다.


그렇다면 바닥을 박차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 추진력으로 이 곳을 벗어날 차례다. 더 이상 차갑지 않은 바람은 서서히 그 자태를 드러냈다.

이제는 날아오를 시간이다.


* * *


빠각.


검은 막의 윗부분이 살짝 깨지는 소리에 제피로스가 고개를 돌렸다. 서서히 잔금이 아래로 이어지는 구체에 바람의 정령이 서둘러 기운을 쏘아냈다.


깨어진 껍질 너머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물에 빠진 듯 촉촉히 젖어있는 머리카락은 머리에 딱 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검은 알을 깨고 모습을 드러낸 현우가 콜록거리며 숨을 쉬기 위해 헐떡거렸다.


"어라, 드디어 나온 건가?"

"크, 크어헉!"


따스한 바람이 젖어있던 마법사의 물기를 훔쳤다. 이내 뽀송뽀송해진 옷자락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안드레아가 주는 따뜻한 찻잔을 받아 든 현우가 차를 홀짝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현우의 입이 열렸다.


"이제 된 건가요? 무사히 당신의 시험을 통과했습니까?"

"조금 의외긴 하다만. 맞아."


안드레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엄숙히 선서했다.


"녹색의 일족, 안드레아의 이름으로 인정하노니, 인간 마법사여. 그대는 나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도다. 그렇기에 나는 그대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약속대로 액스 선배를 돌려주시죠."

"그런 약속을 한 기억은 없지만, 어쨌든 조금 있다가 데려가게. 지금은 안정이 필요해 보이는군."


그대로 의자에 몸을 기댄 현우에게 제피로스가 슬쩍 얼굴을 비췄다.


"오랜만이군요, 제피로스 씨."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다니 고마워."

"그렇게 고마우면 이것 가져가실래요?"


현우는 목걸이를 꺼내 흔들었다.


"저를 여러 번 도와준 고마운 녀석이긴 한데, 제가 용사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고요. 정령왕과 용을 만난 건 정말 꿈에서나 그리던 귀중한 추억으로만 남기고 싶은 게 지금 가장 큰 소원이에요."

"어, 미안. 어쨌든 그 녀석이 너를 선택한 이상, 네가 죽기 전까지는 다른 이들은 그걸 건들 수 없어."

"분명히 시어도어 할아버지는 에고가 없다 했는데..."

"시어도어? 아. 기준에 따라 에고의 정의가 달라지긴 하지만. 그것보다도 안드레아의 인정을 받은 것은 축하해. 용은 용이라서, 오랜만에 용과 계약을 맺은 마법사가 탄생할 수도 있겠어."

"그딴 것들은 어차피 제 손에 걸러질 게 아니라는 것, 잘 알고 있고요. 어서 제 말에나 답해주세요."


제피로스는 뜸을 들였다. 현우가 보채고 나서야 그는 숨기고 싶었던 사실을 공개했다.


"이미 안드레아의 인정을 받았지?"

"네."

"이 세상을 지키는 사명을 받은 용들의 말에는 거대한 힘이 들어있다. 그들의 약속은 세계에 새겨져. 그렇다는 건, 이미 너를 시험한 것과..."

"더 이상 무를 수 없다는 건가요? 하. 사기를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네."


인간 마법사는 그대로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얼굴이 잔뜩 구긴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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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화. 용의 시험(2) 19.09.26 76 1 13쪽
71 71화. 용의 시험(1) 19.09.25 67 1 13쪽
70 70화. 안드레와의 대담(2) 19.09.24 67 1 14쪽
69 69화. 안드레와의 대담(1) 19.09.23 69 1 14쪽
68 68화. 안드레의 초대 19.09.21 81 1 13쪽
67 67화. 개판(5) 19.09.20 77 1 14쪽
66 66화. 개판(4) 19.09.19 62 1 14쪽
65 65화. 개판(3) 19.09.18 68 1 13쪽
64 64화. 개판(2) 19.09.17 75 1 13쪽
63 63화. 개판(1) 19.09.16 69 1 14쪽
62 62화. 오분 전(2) 19.09.12 60 2 14쪽
61 61화. 오분 전(1) 19.09.11 59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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