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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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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29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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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26화 - 3

DUMMY

“춘향!”

“서방님!”

“…….”

연극 연습이 한창. 나는 격정적인 눈빛으로 리유를 쳐다보며, 기어이 손을 들어 리유의 팔뚝을 덥썩 잡는다. 리유는 움찔 동요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나를 마주보며 대답한다. 살짝 볼을 붉히고 수줍어 보이지만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는다.

“오…… 이건 좀 괜찮아, 확실히 괜찮았어!”

“에헤헤헷.”

“아하아. 못 해먹겠네.”

“잘 했어.”

여자애들은 숨을 죽이고 나와 리유를 쳐다본다. 정희의 다소 시끄러운 목소리에, 여자애들은 숨을 내쉰다. 리유는 약간 부끄러워하며 뒷머리를 긁는다. 나 역시 기운이 조금 빠져 한숨을 쉬며 말했다. 채영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리유 잘 하네?!”

“응! 집에서 거울 보고 연습했어!”

“어유, 집에서 연습했어요~”

“응응!”

정희의 말에 리유는 방긋 웃으며 대답한다. 꾸밈 없는 순수하게 귀여운 리유의 모습. 정희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 보기 드물게 선한 표정으로 리유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하는 리유가 그걸 마다할 리는 없다. 아, 저거, 내가 많이 하던 긍정의 선순환인데.

리유는 연극 연습을 하며, 아이들과 굉장히 많이 친해졌다. 특히 정희하고. 정희는, 내가 대놓고 ‘사실 리유가 따돌림 당하는 걸 해소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서 리유에게 살갑게 군 것이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정희가 리유랑 놀고 싶어서 안달난 것 같은 느낌이다. 리유도, 중학교 때 한 번 데인 기억이 있으니 처음엔 조심스러웠지만 조금씩 자신의 귀여움을 차근차근 여자애들에게 어필해 나갔다. 재수없지만 않다면 귀여운 걸 마다하지는 않는 여자애들이다. 거기다 리유의 귀여움은 억지로 꾸민 것이 아닌, 순수하게 그 자체로 귀여운 거니까. 그것은 내가 보증할 수 있지.

거기다 리유, 연기까지 꽤나 늘었다. 나만 노력하고 연습한 건 아닌 모양이다. 리유도 집에서 열심히 연습해왔다고,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쭉 펴고 말한다. 대사도 줄줄 다 외고, 무엇보다 애들하고 친해지니까 애들 눈을 의식하던 것도 극복하여 지금은 방금 전과 같이 어느 정도 괜찮은 수준의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되면 불안해지는 건 내 발연기인데. 안타깝게 내 발연기는 그닥 발전이 없다. 하긴, 며칠 사이에 그게 발전이 되기가 힘들지.

“리유는 잘 할 줄 알았어. 역시 네가 문제잖아.”

“알거든!? 굳이 그렇게 아픈데 찌르지 마세요, 좀!”

“……왜 신경질이야! 내가 뭐 욕을 했어, 언성을 높였어!”

“아니……! 됐다, 됐어.”

리유는 성장하는데 이 쪽은 오히려 퇴보인가. 퇴보까지는 아니지만, 요즘 희세는 나한테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이다. 한두번이면 별 신경쓰지 않겠지만 너무 자주 그러다보니 지금은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 버렸다. 내 짜증에 얼굴이 붉어지더니 왈칵 화를 내는 희세. 고개를 내저으며 신경을 껐다. 이런 소모적인 싸움에선 그냥 내 쪽이 지고 넘어가는 게 에너지 절약이다.

“정말, 오히려 리유 쪽이 더 안정적이야. 연습 좀 더 해야겠는데? 밤에?”

“아아. 미안해지네, 늘 신세지는데.”

“뭘, 나도 재미있어서 하는데.”

성빈이는 희세와 말다툼을 해 기분이 언짢아진 나에게 웃는 낯으로 말한다. 장난스런 표정의 성빈이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때 성빈이가 상대역을 해서 연기 지도를 받은 이후, 몇 번 정도 더 밤에 열람실 휴게소에서 둘이 연기 연습을 했다. 이제는 성빈이가 춘향이 대사를 반쯤 외웠을 정도다. 많은 도움이 되지만 천성적으로 발연기인 건 어디 안 가나보다. 성빈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에에─? 밤에 뭘 연습하시는데요~?? 설마, 설마……?!”

“정말 그 흉악한 발상 좀 그만 둬 주면 안 될까. 그럴 껀덕지도 없었는데.”

“에엣! 남녀칠세부동석인데 어찌 밤에 남녀둘이 모여서 그러고 있어요! 불건전해요! 음탕해! 후후…… 벌을 줘야겠군. 바지 버클을 내린다.”

“무슨 벌!! 좀 작작 해, 섹드립 좀!”

“아하하하하.”

이 틈새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 미래. 가만히 듣고 있다 점차 수위가 높은 섹드립을 친다. 주위 여자애들까지 듣고 와하하 웃는다. 괜히 나만 창피해져서 얼굴이 빨개졌다. 어째 미래에겐 늘 섹드립을 당하고 반박을 잘 못 한다. 아니, 성빈이랑 연기 연습 하는 건 정말 어떤 그런 것(?)도 없는 거잖아. 성빈이도 피식 웃는 얼굴이다.

연극을 하는 애들 열 명 정도 중 다섯 명이 우리 밥 패밀리이다보니 분위기가 이렇다. 나머지 애들 중에서도 정희나 정희 친구까지 합쳐 버리면 거진 다 나랑 조금은 안면이 있고 친분이 있는 애들이다. 그래서 더 괜찮다. 아예 10명이 합쳐서 거대한 패거리가 된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같이 연극 연습을 하다 보니 유대감이 쌓이는 것 같다.

나야 그럭저럭 반에서 확고한 캐릭터도 있고, 인지도도 있는 지라 이렇게 다른 애들하고 친밀감이 쌓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희세와 성빈이는 말할 것도 없고. 원래 반 애들하고 친하니까. 하지만, 리유하고 미래에게는 굉장한 발전이자 이득이다. 특히, 미래에겐. 리유는 귀여움으로 어필하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지만, 미래는 뭔가 아직까지 애들하고 어색하다. 그래도 미래도 애가 이상한 건 아니니까, 무엇보다 나한테 치근덕대는 섹드립이 너무 재미있어서, 애들하고 조금씩 친해지고 있는 것 같다. 저번에는 정희 친구랑 얘기하고 있는 것까지 봤으니까. 여러모로 괜찮은 것 같다, 이 연극은.


“아우…… 개 무거운데.”

“미안, 좀 들어줄까?”

“아냐, 그게 더 걸리적 거릴 것 같애.”

크고 아름다운 보온통을 옮기는 나. 옆에서 채영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한다. 나는 낑낑대며 애써 괜찮은 척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진실은 죽을 것 같은 기분이다. 어깨와 허리와 다리와 온 몸이 다 아파. 특히 허리가! 아직 써 보지도 않았는데! 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지. 허리가 중요하잖아, 남자는. 허리가.

나는 좀 동네 북 같은 컨셉이 된 것 같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성실한 일꾼이랄까. 연극은 연극대로 하고, 다른 애들 카페 차리는 것도 거의 준 메이저 맴버로 활약하는 것 같다. 카페라고 해서 별 것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를 짐이 상당하다. 대충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꽤나 제대로 하는구나.

“여러모로 힘드네.”

“너한테 너무 많이 부탁해서 되게 미안하네.”

“아니야, 뭐 나도 나름대로 재미있고.”

무심결에 한 마디 하니 채영이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크, 이런 건 질색인데. 꼭 이런 애 있잖아, 자기 잘못으로 생각하는 애. 리유도 좀 그런 경향이 있는데.

“사실, 축제 대충 지내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까 재미있네. 고생은 네가 더 많이 하지.”

“……아니야, 도와줘서 고마워, 정말.”

“하하. 다른 거 더 옮기러 갈까?”

채영이가 조금 어색해하는 것 같아 잠자코 말했다. 채영이는 말없이 나를 쳐다본다. 이것 참, 별 것 아닌 일 가지고 너무 기대 받는 것 같아 조금 부끄러운데. 채영이와 함께 나머지 짐을 마저 나르러 간다.


이렇게, 축제일은 조금씩 다가오고 축제 준비도 무르익고 있다. 아예 학교 수업을 다 때려치고 축제에만 전념하면 참 좋겠지만, 어디 대한민국 학교가 그렇게 해 줄 리가 있나. 그나마 이만큼 주어진 자유에도 감사하고 있다. 축제 준비 덕분에 오후 보충을 빼주기 때문에 한층 여유 있다. 저녁시간까지 합치면 2시간 조금 넘는 시간이 남으니까. 게다가, 연극하는 애들은 선생님께 잘 말하면 야자시간 내내 연습에 전념할 수 있다. 비단 우리 말고도 다른 춤추는 애들이나 노래하는 애들도 연습하고 있다. 음, 이건 이것대로 괜찮은 것 같아. 진짜 학창시절 같잖아. 벌써 축제는 4일 앞으로 다가왔다.

“좀 쉬자.”

“응, 하아.”

두 시간 조금 안 되게 연습하고, 다들 지쳐 의자에 앉았다. 축제가 얼마 안 남은 만큼, 이제는 다들 완숙한 실력을 보인다. 희세야 말할 것도 없고, 리유의 다른 사람들 의식하는 것이나 내 발연기나 상당히 나아져서 이제는 보여줄만한 수준이 된 것 같다. 대사도 거의 다 외웠고. 그 많은 대사를 어떻게 외웠나 싶기도 하다. 역시, 사람은 반복적인 경험이 제일인가보다.

“오빠……♡”

“뭐야, 또 뭐.”

“아이, 제가 뭐만 하면 이상한 드립 치는 앤가요! 반응이 왜 그래요!”

“그러니까 사람은 뿌린대로 거둔다는 거야.”

잠자코 쉬고 있는데 미래가 내 쪽으로 다가와 말한다. 몸을 베베 꼬며,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데 못 하는 것처럼. 다만 내가 불퉁하게 대답한 건 미래가 얼굴은 살짝 상기돼서, 묘한 야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 쳐다봤기 때문이다. 음…… 그 표정은, 섹드립을 치려는 표정! 느낌으로 알 수 있지, 이제는. 내 말에 미래는 서운하다는 듯 약간 앙탈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들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

“근데 왜 불렀어.”

“아, 그게.”

별 감정 없이 말한 건데 미래는 조금 심각한 표정이 돼서 빤히 나를 쳐다본다. 너무 선입견을 가지고 말했나? 약간 서글픈 느낌마저 드는 미래인지라 얼른 말을 걸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미래는 다시 약간 야한 표정이 돼 말한다.

“같이 하러 가요……♡”

“아, 연극 다시 시작해볼까.”

“아, 알았어요! 음료수! 음료수 뽑으러 가요! 목마르다구요!!”

“진작 그렇게 말해야지. 곱고 아름다운 우리말 많은데 왜 하필 그렇게 말해.”

“에헤헤헤.”

미래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샐쭉하게 뜨고 얼굴은 약간 상기돼서 말한다. 하지만 그걸 미래가 하니까 일말의 효과조차 없다. 차라리 희세나 성빈이가 했으면 꽤나 큰 심리적 타격이 가해졌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희세라면. 다이나마이트급 파괴력(?)을 지닌 몸매니까. 하지만 미래는, 역시 다른 건 몰라도 몸매 쪽은 한참 부족하지. 아니, 몸매가 된다고 그런 게 아니라, 미래의 말에 동요하지 않은 건 역시 미래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저런 소리를 하도 해 대니까 이제는 적응된 거겠지. 나의 단호한 대답에 미래는 다급하게 의자에서 일어나는 나를 붙들고 말한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손을 부들부들 허공에 노닌다. 다른 여자애들이 보고 웃는다. 리유 만큼은 아니지만, 이런 모습의 미래도 나름대로 귀여운 편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미래와 함께 음료수를 마시러 간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매점은 이미 닫힌 지 오래, 그래도 3층에 음료수 자판기가 있다. 1층은 1학년, 2층은 2학년, 3층은 3학년이 쓰는, 지극히 단순한 구조의 이 학교. 하지만 음료수 자판기는 어째서인지 3층에만 있다. 묵묵히 빙빙 도는 계단을 오른다.

“조용하네요.”

“다른 데는 다 야자 제대로 하고 있으니까.”

“네…….”

정말 조용하다. 2학년들도 1학년만큼이나 축제를 많이 할 텐데 어째 조용하다. 아, 교무주임 선생님이 2학년 담당이셨지…… 3학년은 말할 것도 없다. 축제 따위, 그녀들에겐 시끄러운 방해공작일 뿐이겠지.

‘덜크렁, 쿵.’

“넌 뭐 마셔?”

“전 콜라요.”

미래는 달착지근한 목소리로 ‘사 주세요♡’ 하고 말한다. 어이가 없지만 일일이 딴지 걸고 넘어지기 싫어 음료수를 사 줬다. 대답도 존댓말로 하고 부탁도 존댓말로 하니까 정말 후배 같은 느낌이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좀 징그럽다. 분명 동갑인데.

‘치익, 탁.’

“꿀꺽 꿀꺽 캬아.”

“밖에 나가요.”

“응?”

음료수를 마시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미래가 넌지시 말한다. ‘바깥은 왜, 벌레 꼬이게. 더워?’ 하고 물었다. 미래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하고 말끝을 흐린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말을 못 하는 그런 느낌. 계단이 약간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지만 볼도 약간 붉어진 그런 느낌이다.

“그냥, 그냥 나가요!”

“어, 어.”

미래는 1층 쪽에 도착하자 나를 밀쳐내며 말한다. 혹시라도 내가 바깥으로 안 나가고 복도 쪽으로 갈까봐 그런가. 등을 밀려 앞으로 나가며, 나는 말했다.


9월까지는 그런대로 여름의 더운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10월은 확실히 가을이다. 특히 아침저녁으로는 굉장히 쌀쌀하다. 지금도 꽤나 공기가 차다. 뭐, 겨울처럼 공기가 차가워서 못 걸을 수준이 아니라, 시원하고 쾌적한 느낌의 공기라 오히려 돌아다니기엔 상쾌하니 좋긴 하다. 좀 더 추워지면 슬슬 돌아다니기 싫어지겠지만.

미래는 막상 나오자고 해 놓고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는다. 잠자코 걷다 음료수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묵묵히 걷는다. 나 역시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음료수로 목을 축이며 걸었다.

“있잖아요, 오빠.”

“응?”

미래가 아무 말도 안 하기에 조금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들을 보는데 미래의 다소곳한 목소리에 정적이 깨졌다. 시선을 내려 미래를 쳐다본다. 리유 정도는 아니지만 키가 꽤 작아 눈높이가 나보다 한참 밑에 있는 미래니까.

“오빠한테 저는, 어떤 인상이에요?”

“어떤 인상이냐니…… 너무 포괄적인데.”

“그…… 그러니까.”

어째 쭈볏거리는 느낌이 드는 미래다. 확실히 이상한 기분. 평소의 폭풍개드리퍼 컨셉의 미래라면 결코 이런 느낌으로 말하지 않을텐데. 애초에 자기에 대해 어떻게 보냐는 질문도, 미래에겐 어울리지 않는 궁금함이다. 자기가 남들에게 어떻게 비치는 지 안다면 그런 섹드립이나 개드립을 수시로 치지 않겠지. 멀거니 미래를 보며 물으니 미래는 조금 수줍어하며 말한다.

“미, 미친년이라거나…… 탕녀라던가…… 거, 걸레년이라던가…….”

“야,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헤헷.”

방금 생각했던 거 취소. 여전한 폭풍개드리퍼구나, 미래는. 하긴, 컨셉이면 계속 그렇게 하기도 힘들지. 그냥 본인이 그런 거지. 여자애가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제지하니 혀를 쭉 내밀며 웃는다.

“유쾌하고 재미있어. 좀 드립의 수위를 낮췄으면 좋겠다─ 싶지만. 특히 섹드립 쪽은.”

“그, 그거야…….”

“남녀차별이 어쨌네 저쨌네 하는 말이 아니라, 여자애잖아. 아무리 그래도 아직 우리나라는 좀, 그렇잖아? 남자한텐 성적으로 관대하고, 여자애한테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게 현실이니까. 좀 자제하는 게, 너한테도 좋을 것 같아.”

“……네.”

별 감정 없이 막 내뱉다 어쩌다보니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나. 그건, 평소에 미래에게 바라왔던 점일까. 미래, 가만히 보면 참 괜찮은 애거든. 귀엽고, 붙임성 있고, 유쾌하게 재미있고. 사람이 유쾌하기가 정말 힘들거든. 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여러모로 하위호환(?)이라 좀 입지가 불안한 미래이기도 하지만. 귀여움은 리유에게, 몸매하고 외모는 희세에게, 성실함과 참한 건 성빈이에게 한참 딸린다. 그래도, 그래도. 드립 수위만 적당히 조절한다면 정말 재미있고 남을 즐겁게 해 주는 멋진 여자애가 될 것 같아. 그런 기분이 들어. 내 말에 미래는 입을 다물고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다 작게 대답한다. 그리고 미래는 다시 한동안 말하지 않는다. 다시 정적이 돼 한동안 걷기만 한다.

“오빠.”

“응?”

“할 말 있어요.”

“……??”

미래의 말에 나는 즉각 대답했다. 미래는 내 앞으로 걸어 진로를 틀어막고 나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의아한 눈으로 미래를 내려다보는데 미래의 눈이 별처럼 빛나는 것 같다.

딱히 어디를 목표로 걷는 건 아니고 그냥 정처없이 걷기만 해서 여긴 학교 운동장 구석. 풀숲 올라가기 전 그 구간.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미래가 날 붙잡아 세우고 가만히 날 쳐다본다.

“오빤, 누구 좋아해요.”

“응……? 무슨 소리야.”

“리유, 성빈이, 희세 언니. 셋 중에 누가 좋아요.”

“어……?!”

미래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한다. 적지 않게 당황스럽다. 갑자기 무슨 말을……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당황한 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좋아하는 거 맞잖아요? 희세 언니도, 리유도, 성빈이도. 아니면, 그냥 어장 관리?”

“아니, 아니, 아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오빠가 그렇게 질질 끌면 끌수록, 오빠한테만 더 안 좋은 거에요. 알아요?”

“…….”

미래의 말에 나는 저항하듯 한 마디 하려 했다. 하지만 미래는 내 말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말한다. 그 말에 다시금 할 말을 잃은 나. 질질 끌수록 안 좋다니, 뭐가 어떻게……

“저는요, 저는……”

“……?”

“저도 오빠가 좋아요. 정말정말, 정말 좋아해요.”

“……!”

미래는 방금 전까지 또박또박 어떻게 보면 표독스럽기까지 한 눈빛으로 말하다 지금은 순간적으로 눈빛이 흔들린다.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다 덜컥 말해버린다. 눈을 질끈 감았다 팍 뜨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명치를 주먹으로 세게 맞은 것 같다. 그만큼 충격이 크다.

여자애한테 고백을 받았다. 열 일곱 살 평생 처음. 상남자라고 허세 부리는 나지만, 실제로는 찌질한 남자애인 나는 하나의 선입견이 있었다. 이성관계에서, 고백은 꼭 남자애가 하는 것이라는. 그래서 이런 시나리오는 아예 상상해본 적도 꿈꿔본 적도 없다. 여자애가 먼저 나한테 고백하다니, 이건 어떻게 처리해야하는 문제인거야.

“……어, 저…….”

“…….”

나는 바보처럼 멍한 표정으로 미래를 내려다봤다. 미래는 여전히 애처로운 눈빛으로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볼 뿐이다. 더욱 난감해진 나. 내 사고회로에, 이 질문을 해결할 경험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이 쪽 방면은 순백의 뇌니까.

여자애가 자기 감정을 참다 참다 참지 못하고 터트릴 정도면, 정말 좋아하는 게 아닐까. 어지간하다면 여자애는 좋아해도 좋아하는 티를 안 낸다고 하잖아. 여고 다니면서 확실히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여자애들은 자기 기분 티 안 내고 얼굴색 감추는 기술이 남자애들하곤 비교도 안 되게 엄청나다는 거. 그러한데 그걸 참지 못하고 여자애가 먼저 고백한다는 건……

하지만 막상 이렇게 고백을 받으니 적지 않게 당황스럽다. 여기서 내가 수락한다면, 미래와의 관계가 하루아침에 바뀌게 된다. 그건, 그런 건……!

미래 귀엽지, 나도 좋아해. 하지만 이런 건 역시 상상해본적도 없다. 미래하고 내가 연인관계라니…… 미래와 내 관계, 나아가 다른 애들과의 관계는 또 어떨까. 머릿속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한 가지만 생각해도 어질어질한 문제들인데 동시다발적으로 머릿속에 떠 오르니 고장이라도 날 것처럼 머리가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어, 나도 너 좋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으면서.”

“…….”

나는 애써 억지웃음을 지으며 태연한 척했다. 손을 뻗어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래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쯤은 그닥 눈치가 없는 나라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선, 뭐라고 해야 할지 전혀 몰라서, 또 막상 좋아한다는 미래를 마주하니 그 대답을 하기가 두려워 잘못 알아들은 것처럼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이러고 있다. 미래는 그대로 돌이 된 양 굳어서 나를 쳐다본다.

‘탁.’

“그만 둬!”

“?!”

“이런 게 너무 싫다고, 나는!”

“……!”

미래는 순식간에 얼굴이 일그러져서 내 손을 탁 치며 말했다. 발굽에 체이기라도 한 듯 성난 얼굴이 된 미래. 평소 콧소리 담은 귀여운 목소리와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거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어째서…… 어째서 나 같은 애한테 그렇게나 다정한 건데! 그러면서 또, 왜 잘해주는데! 그것 때문에…… 자꾸 네 생각만 나니까……! 존댓말 캐릭터도, 섹드립도 결국에 내 스스로 덫을 파는 게 맞는데……!”

“…….”

미래는 감정이 격해져 반말로 거칠게 말한다. 나랑 동갑이니까 반말을 쓰는 게 확실히 맞긴 한데, 사람은 익숙함의 동물인지라 굉장히 거슬리게 들린다. 뭔가 순리가 아닌 듯한 느낌. 거기에 미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조각조각 박히는 기분이다.

“짝사랑인 건 뻔히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고백하는 것만큼은 알아줬으면 했는데……!”

“미, 미래야.”

급기야 미래는 눈에 눈물까지 잔뜩 고였다. 이 순간에도 나는 속으로, ‘와 진짜 만화처럼 순식간에 눈물이 고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바보야?! 멍청이냐고!! 나…… 진짜로 너 좋아한다고!”

“……어……?”

미래는 아주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운동장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그 큰 소리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드는 느낌이다.

미래한테 엄청 미안하다. 왜 피하려 했지, 왜 숨기려 했지. 미래의 마음을 알면서도, 왜 알아듣지 못한 척 하려 했을까. 좋으면 좋다고, 나도 너 좋으니까 사귀자고 말하면 될 것이고, 싫으면 나 너 별로라고, 여자로써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될 것 가지고 어째서, 이렇게나 추잡하게 질질 끌으려 했을까.

큰 소리의 ‘좋아한다고!’ 하는 미래의 절규와도 같은 목소리는 그런 나를 질책하는 채찍 같은 느낌이다. 미래는 그 말을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양 볼로 눈물이 또르르 흐른다.

“……하아, 하아. 이 말…… 꼭 하고 싶었어.”

“……어, 어…….”

“…….”

미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한다. 낮게 잠긴 목소리. 너무 크게 말해 목이 대번에 쉬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착찹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바보, 멍청이, 병신. 미래는 그런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더니 말없이 뒤돌아 교실 쪽으로 걷는다.

“미, 미래야!”

“…….”

나는 황급히 미래를 불렀다. 여기서 아무것도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더 골치 아프다. 아니, 내가 골치 아픈 건 내 개인의 문제지만,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내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미래와의 관계가……! 미래는 내 부름에 살짝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여전히 슬픈 눈망울. 저렇게 슬픈 눈망울 하는 미래는 본 적도 없는데. 늘 환히 웃는 활기찬 모습의 미래니까.

“나, 아직은 나도 내 마음 잘 모르겠는데…… 으…… 조금만,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줘. 솔직히 지금까진…… 너에 대해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언제까지고 기다릴게요.”

“……응, 고마워.”

“…….”

나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변명이자, 최대한의 생각. 미래는 묵묵히 듣다 굉장히 서글픈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미래의 목소리 중 가장 슬프고 기운 없는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에 답하고, 다시금 뒤돌아 교실 쪽으로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미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잠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미래가 학교 건물로 들어갈 때까지 서 있었다.


작가의말

네, 죄송합니다. 어제는 조금의 사정이... 는 개뿔, 아무 유혹도 없었는데 그냥 별다른 이유도 없이 글을 안 써버렸네요. 흑흑.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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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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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번외03 - 3 +13 14.07.05 1,441 46 20쪽
128 번외03 - 2 +9 14.07.04 1,512 40 23쪽
127 번외03. 제일 예쁜 우리... - 1 +10 14.07.04 1,762 34 19쪽
126 번외02 - 3 +7 14.07.03 1,689 34 18쪽
125 번외02 - 2 +3 14.07.03 1,701 43 18쪽
124 번외02. 나 같은 애가 좋을 리가 없잖아!! - 1 +13 14.07.02 1,851 31 21쪽
123 번외01 - 3 +14 14.07.01 2,155 38 21쪽
122 번외01 - 2 +9 14.07.01 2,155 32 20쪽
121 번외01. 금단이지만 금지는 아니니까... - 1 +16 14.06.29 2,271 36 22쪽
120 29화 - 4 +22 14.06.28 1,924 36 23쪽
119 29화 - 3 +9 14.06.27 1,838 43 20쪽
118 29화 - 2 +13 14.06.21 1,885 34 21쪽
117 29화. 너도 내가 좋니? +21 14.06.15 2,278 43 20쪽
116 28화 - 4 +17 14.06.07 2,828 56 24쪽
115 28화 - 3 +19 14.05.30 3,540 147 20쪽
114 28화 - 2 +19 14.05.27 3,019 45 19쪽
113 28화. 나만의 그녀 +23 14.05.26 2,156 51 19쪽
112 27화 - 3 +13 14.05.24 2,027 49 22쪽
111 27화 - 2 +7 14.05.22 1,945 46 20쪽
110 27화. 그만 할게. +13 14.05.18 2,080 44 15쪽
109 26화 - 4 +10 14.05.10 1,696 42 15쪽
» 26화 - 3 +7 14.04.29 2,053 46 23쪽
107 26화 - 2 +9 14.04.26 1,868 41 21쪽
106 26화. 소녀 할 수 없사옵니다. +9 14.04.24 2,014 52 22쪽
105 25화 - 4 +15 14.04.17 2,780 115 18쪽
104 25화 - 3 +16 14.04.10 2,144 50 21쪽
103 25화 - 2 +24 14.04.05 2,311 52 16쪽
102 25화. 다시 한 번, 친구로! +19 14.03.26 3,101 64 19쪽
101 누락된 편입니다 +6 14.03.25 1,934 49 1쪽
100 24화 - 4 +16 14.03.24 1,965 4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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