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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조회수 :
552,853
추천수 :
12,224
글자수 :
2,992,898

작성
14.04.24 21:22
조회
2,014
추천
52
글자
22쪽

26화. 소녀 할 수 없사옵니다.

DUMMY

“바보야?! 멍청이냐고!! 나…… 진짜로 너 좋아한다고!”

“……어……?”

이것은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너무 얼떨떨해서 그대로 몸이 굳어 버리는 느낌이다. 태어나서 누구에게 고백 받은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없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오며 어떤 것보다 바라마지 않던 일은 여자친구가 생기던 일이다. 하지만 막상, 고백을 받은 내 심정은─



학기 초라는 것은 늘 그렇다. 다시 시작되는 학기에 적응하느라 바쁜, 그리고 정신없이 지나가는 나날들의 연속. 1학기라면 그 정신없음은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특히 1학년 1학기라면 더욱 그러하겠지. 중학교 때랑은 다른, 더욱 열약한 수업 환경에 야자까지 더해지니까. 지루하고 죽을 것 같지만 의외로 시간은 잘도 지나가 금세 1학기가 지나간다. 그리고, 지금 2학기는 다른 의미로 빠르게 지나간다.

뭐랄까, 금방 질려버렸다고 해야 할까. 1학기 내내 느꼈던 걸 여름방학 개학하고 1달도 체 안 되어 다 느껴버린 기분이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별로 두려울 것이 없는 2학기다. 특별히 다른 게 있다면, 2학기는 좀 더 노는 이벤트가 많이 있다는 것. 대표적으로 얼마 남지 않은 축제, 10월중에 간다는 소풍, 뒤이어 바로 수학여행. 그 정도이려나. 그것 말고는 똑같다. 중간에 중간고사, 한참 뒤에 기말고사를 보고 1학년이 끝나겠지. 단지 한 학기만 다녔는데 이 권태로운 학교생활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럼, 어떤 걸로……?”

“…….”

여자애들은 기본적으로 시끌벅적하지만, 이런 때에는 다들 조용해진다. 하긴, 그건 굳이 수다스러운 여자애든 더럽게 시끄러운 남자애든 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의 학급 회의에선.

축제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다. 2주 앞으로 다가온 축제, 별달리 할 게 없을 줄 알았는데 반마다 장기자랑 하나씩은 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피식 웃음이 다 나온다. 장기자랑이라고 해봤자, 결국엔 춤잔치 노래잔치잖아. 남중이라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중학시절 축제에 대한 내 환상은 이미 와르르 무너졌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운동장과 길가에 가게를 차리고, 교실도 카페 같은 것으로 꾸미고 장사도 하고, 전야제 때에는 밴드부나 댄스부, 치어부 같은 애들이 프로 못지않은 솜씨를 뽐내는, 그리고 마지막에는 불꽃놀이로 마무리를 하는, 그런 축제. 아니면, 미국이나 유럽처럼 두근두근 거리는 하이틴 로맨스 소설 같은 발랄하면서 활동적인 분위기의, 남자애들은 미식축구 하고 여자애들은 치어리딩 할 것 같은 그런 축제.

꿈 깨라, 그런 건 없다. 여기 대한민국이다.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하를 보게 되겠지. 공부, 공부, 공부 하라고!! 그럴 거면 대체 왜 축제를 하게 하는 건지, 어중간하게 논다면 그냥 축제 안 하고 넘어가면 안 되? 축제 기간에 수업 빼는 것도 굉장히 생색내는 학교 측이다. 선생님들 말씀하시는 뉘앙스만 봐도 알 수 있지. 물론 그렇다고 축제를 정말 안 하고 넘어간다면 학생들 불만이 굉장하겠지만. 그나마 주어지는 자유라도 만끽해야지. 닥치면 다 하게 되는 법이다, 이 세상은.


어쨌든, 뭔가 잡담이 되게 길어졌지만 그런 축제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넘어가지만 또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닌, 그런 어중간한 축제. 친구 녀석들 학교는 이미 1학기에 축제를 한데다 그것도 고등학교 3개 정도 연합해서 엄청 성대하게 했다는데. 나한테는 그런 운이 안 따르는구나.

“그럼, 배역 설정부터…….”

“음?”

딴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보지 않은 사이 회의가 벌써 상당 부분 진행된 모양이다. 칠판에는 ‘춘향전’ 이라고 써 있고 반장과 부반장이 배역을 적고 있다. 오, 결국 연극으로 가는 건가. 춘향전이라, 춘향전 좋지, 나도 좋아해. 그런데…… 반장은 처음 쓰는 구절에 당당하게 ‘이몽룡 : 정웅도’ 라고 적는다.

“잠깐!!”

“??”

“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큰 소리로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들이 전부 쳐다본다. 아, 이건 좀 창피한데. 아무리 학교 다니면서 적응됐다고 해도, 30여 명의 여자애들이 한 번에 나에게 주목하는 건 좀 부끄럽지. 얼굴이 벌게지는 걸 느끼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 나에게는 선택의 권한이 없어?!”

“응, 없어.”

“…….”

“푸하하하하하!”

“……크흠.”

왜인지 모를 부끄러움에 나는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채영이의 무표정하고 아무 감각도 없는 반격에 와르르 무너졌다. 본인은 의도한 게 아니지만, 뭔가 굉장히 꽁트처럼 돼서 애들은 무표정한 채영이와 말문이 막혀버린 나를 보고 와하하 웃는다. 비웃음 당한 것 같은 기분에 더욱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뒷머리를 긁으며 자리에 앉았다.

채영이는 무안한 나와 애들의 반응을 보고 그제야 당황한 표정으로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 그러니까 배역이, 남자애가 웅도 너밖에 없어서……!’ 하며 허둥대는 채영이. 그만 둬, 이미 난 창피해 죽겠으니까. 좀 친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애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건 여간 창피한 게 아니구나. 그래도 비꼬는 듯 기분 나쁘게 놀림감이 된 건 아니니까. 부끄러우면서도 화끈한 느낌으로 기분이 살짝 좋다. 헉, 변태인가, 나는.

“그럼, 춘향이 역할에 추천해도 됩니까!”

“응, 누구?”

“리유!!”

“…….”

정희가 활발한 목소리로 손을 쭉 뻗으며 말한다. 채영이의 말레 정희는 얼굴에 잔뜩 웃음을 머금고 말한다. 내 영향으로 아직까지 웃으며 화기애애하던 반의 분위기가 싸하게 식는다. 정희는, 대체 무슨 속셈으로 리유 얘기를 꺼낸걸까. 방실방실 웃는 것이 장난으로 하는 것 같긴 한데. 리유에게 엿을 주려고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나름대로 배려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예고도 없이 기습으로 튀어나오면 리유가 얼마나 당황하겠어.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앞자리의 리유를 봤다.

아니나 다를까, 리유는 홍당무보다 더 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원래 투명할 정도로 피부가 흰 리유라서 얼굴이 빨개지는 게 다른 애들보다 심하게 티가 나는 편이지만 지금은 정말 엄청 빨갛다. 거의 울 정도로 당황해하는 모습은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가련하다. 무슨 잘못을 해서 그만큼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는 거니, 리유야. 싸하게 된 분위기 속에서 모두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어째서, 리유를……?”

“안될 거 없잖아? 귀엽잖아, 리유.”

“…….”

정희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한다. 채영이는 조금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정희에게 물었다. 정희의 대답에 더욱 입을 꾸욱 다문다. 리유는 ‘어버버’ 거리며 허둥댄다. 무언가 말하려 하지만 전혀 말을 하지 못한다. 정말, 보면 볼수록 안쓰러워 죽겠다.

“리유는, 아무래도 춘향이 캐릭터하곤 맞지 않을 것 같아서…… 이미 각본을 다 써서.”

“아, 각본까지 있어? 우와, 대단한데.”

“…….”

채영이는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렇게 심각할 건 없는 것 같은데. 자기가 쓴 각본을 바꿔야 하는 것이기에 심각한 걸까. 그보다 벌써 각본이 쓰여 있다니, 좀 대단한데?! 축제에 이 정도 의지를 보이다니. 정희 역시 감탄해서 논지에 전혀 맞지 않는 말로 대답한다. 갑작스런 칭찬에 채영이는 얼굴을 붉힌다. 채영이도 누구 못지않게 남들 눈에 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니까.

“그래도, 각본이 바뀌어도 리유가 했으면 좋겠는데. 가끔은 파격적인 것도 좋지 않아? 춘향이가 꼭 그렇게 수절만 해야 되? 응석쟁이 춘향이도 나쁘지 않잖아!”

“……후우. 응, 그럼, 다른 애들 의견을.”

“…….”

정민이는 리유를 춘향이로 만들려고 작정을 했는지 더욱 적극적으로 말한다. 채영이는 졌다는 느낌으로 잠시 머뭇거리다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한다. 아이들은 수군수군대지만 누구 하나 반대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다. 정희는 그런 애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스윽 애들을 둘러본다. ‘반대하는 사람 없지?!’ 하고 압박을 가한다. 기가 죽은 듯 말이 없는 애들. 아, 이런 흐지부지한 광경, 참 보기 싫다.

“난 찬성.”

“……!”

손을 들고 나지막이 말하는 사람은 의외로 희세. 도도하고 새침한 표정으로, 곧게 손을 들고 말한다. 희세의 말에 여자애들의 수군거림이 잦아들었다. 반의 중심인 희세가 그렇게 말한다면, 갈대 같은 여자애들의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텐데. 희세는 리유를 쳐다본다. 리유는 작은 몸을 가련하게 부들부들 떨며 희세를 쳐다본다. 얼굴은 여전히 빨간 채로. 희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돌려 나를 본다. 그러더니 ‘흥!’ 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홱 돌린다. 뭐야, 저 반응은.

“그래, 그럼 리유 본인한테 물어보자. 하고 싶은지, 하기 싫은지.”

“응, 그래. 리유……야?”

“……!”

정희는 희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채영이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리유에게 말한다. 리유는 퍼뜩 놀라며 반장을 쳐다본다. 겁 먹은 듯한 눈망울. 얼굴은 잔뜩 빨갛게 돼서 애처로운 표정이다. 홱 고개를 돌려 뒤 쪽의 나를 본다. 나를 봐서 뭘 어떡하라고. 결정을 도와줘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할까. 리유를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리유가 연극에 참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연이라도 배역에 들어서, 연극 연습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애들하고 친해질 수도 있고, 자기도 반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는 기분과 함께 반의 일원이 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성장해나가는 거니까. 근데, 이렇게 단번에 엄청 주목받는 주인공이라니. ‘해!’ 라고 강제하기가 힘들다.

리유는 병적일 정도로 애들한테 관심 받는 걸 두려워한다. 사실 그 점 때문에 좀처럼 따돌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별 게 아닌데도, 조금이라도 나대고 까불대면 다시 예전처럼 아이들에게 따돌림 당할까봐, 은근한 따돌림에서 적극적 따돌림으로 다시 전환될까봐 마음속에서 떨려서 애써 브레이크를 걸고 있는 거겠지. 난 그렇게 생각했다.

왜, 정책 중에도 ‘햇볕정책’ 이란 게 있잖아. 갑자기 확 닫혀버린 마음의 문을 열어버리면, 오히려 더 두려움과 미움을 갖고 문을 세게 닫아버릴 수 있잖아. 천천히, 햇볕을 쪼여서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게 해야지. 갑작스런 이 주인공 행은……

“…….”

“……할래!”

“응, 그럼…….”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마침 내가 상대 배역인 이몽룡이고. 같이 하다보면 실수하거나 이상한 쪽으로 새려는 리유를 잘 붙들어주고 챙겨줄 수 있겠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리유는 반대로 엄청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홱 고개를 돌린다. 그리곤 반장을 올려다보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장은 측은한 표정으로 리유를 보며 칠판에 ‘성춘향 : 정리유’ 하고 글을 쓴다. 리유는 밝은 표정이 돼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잘 했어? 잘 했어!’ 하고 다가오는 강아지 같은 눈빛이라 절로 측은한 마음이 든다. 방긋 웃으며 리유를 쳐다봐줬다.


“어째서! 내가 왜 그딴 배역인데!”

“어쩌겠어, 애들이 그렇게 뽑았는데.”

“아으으! 너 주인공이라고 막 나간다? 짜증나!”

“허허허.”

희세의 짜증에 나는 아저씨처럼 너털웃음을 지었다. 학급 회의가 끝이 나고 쉬는시간, 나, 희세, 리유, 성빈이, 미래까지 다섯 명이서 매점에 가고 있다. 밥을 먹을 때 이렇게 결성해서 몰려다닌 적은 많지만 쉬는 시간 매점 가는데에 이렇게 다섯 명이 우르르 가는 건 또 처음이다.

희세는 자기 배역에 불만이 있는지 잔뜩 불퉁한 표정이 돼 나에게 있는 신경질, 없는 신경질 다 내고 있다.

“애초에 내가 왜 변학도야?! 사실 춘향이 엄청 하고 싶었는데!”

“……변학도 하면 어울릴 것 같은데.”

“너 그거 무슨 의미야?! 당장 말 해!”

“아니~ 그냥, 카리스마 있게 잘 할 것 같다 그런 말이지.”

“……절대 그런 말 아닌 것 같은데.”

희세 특유의 새침하고 도도한 표정을 떠올리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특히 나 왕따 시킬 때의 그 표정은…… 정말 어떤 악역이라도 무난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지. 희세는 내 말에 잔뜩 눈을 부라리며 말한다. 위기를 모면하고자 그 동안 쌓인 경험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니 희세는 그다지 납득히 되지 않는 표정으로 내게 눈을 흘긴다.

“언니 표독스럽게 악랄하게 잘 할 것 같다는 뜻 아니에요? 변학도면.”

“우이씨! 진짜야?! 죽을래!!”

“내가 언제 그랬다고! 미래가 말했잖아, 미래가!”

“진짜 그런 생각 했어, 안 했어?!”

“안 했어요, 안 했어!!”

미래가 옆에서 촐싹대는 목소리로 말한다. 희세는 쥐 잡듯 내 멱살을 잡으며 말한다. 어이어이, 멱살은 좀 아니잖아, 멱살은! 남자애 체면 다 떨어지네. 나는 애써 부정하며 격렬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리곤 미래를 잔뜩 노려본다. 미래는 피식 웃으며 혀를 쭉 내민다.

“그래도 언니나 오빠는 잘 된 거에요. 전 ‘지나가는 아낙3’이라니까요.”

“그거야 네가 존재감이 없으니까 그러지.”

“히잉! 너무해요, 그 말!”

미래가 징징대는 목소리로 말하자 희세는 냉정한 말투로 내뱉듯 말한다. 엄청난 돌직구. 얼음이 풀풀 날릴 것 같은 그 말에 미래는 투닥투닥 희세 팔뚝을 때리며 앙탈을 부린다. 여자애가 여자애한테 앙탈이라니. 반대로 남고 였으면…… 후후, 말을 말자. 여자애들이니까 넘어간다.

“성빈이는, 월매였지?”

“응…… 헤헷. 아줌마 연기 해야 되려나?”

“이상할 것 같다. 성빈이가 아줌마라니.”

“……난 변학도라고 변학도! 성별이 달라졌잖아?! 거기다 악역이라구! 내 쪽이 더 심하잖아!”

“아아, 알았어요 알았어.”

성빈이는 적절하게 월매 역할이 걸렸다. 엄마 같이 푸근하고 착한 건 확실히 성빈이랑 잘 맞겠지만, 내가 알기로 월매 아주머니는 한 성깔 하는 중년 아주머니인데. 그게 과연 성빈이랑 맞을까. 성빈이도 배역과 맞지 않을 것 같은 부담감에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에 희세는 얼굴이 살짝 빨개져서 나와 성빈이 얘기하는 사이에 낀다. 자기가 더 거지같다는 걸 이해해달라는 뜻인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할 수 있겠어?”

“……우으. 솔직히 전혀.”

씩씩거리는 희세를 뒤로 하고, 고개를 내려 옆에서 풀죽은 체 걷고 있는 리유에게 말을 걸었다. 리유는 기가 죽은 체 내 눈을 마주하지도 않고 땅바닥을 보며 말한다. 아까 내 허락 비슷한 끄덕임을 보고 강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활기찬 모습을 보일 때와는 상반된 풀죽은 모습이다. 그 때는 그 때고, 막상 하려니까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런 때엔, 남자애로써 위로해주는 말을 해야겠지, 역시.

“잘 할 수 있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그치만 그치만! 애들 앞에서 말해야 되잖아?! 무대 위에 서는 거잖아?! 사람들 잔뜩 와서, 다 쳐다보는 거잖아!!”

“아아, 뭐, 연극이니까 그렇겠지. 축제 당일이라면.”

“그, 그걸 어떻게 해!! 으앙!!”

리유는 내 말에 갑자기 폭발하듯 줄줄 길게 말한다. 말을 꺼낸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격한 말투. 나의 어색한 대답에 리유는 절망하듯 얼굴을 쥐어 싸고 고개를 푹 숙인다. 옆에서 희세가 ‘그까짓 거 뭐 하면 되지. 난 이미지가……!’ 하며 입을 삐죽인다. 그 놈의 배역 타령, 가지가지 하네. 희세는 전혀 걱정되지가 않으니까, 계속 저러면 오히려 조금 짜증이 날 것 같다. 그치만 리유는, 정말 걱정되잖아. 그런 것에 정말 서투른 앤데. 확실히, 갑자기 이렇게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건 굉장히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겠지.

“아냐, 잘 할 수 있어. 별 것 없잖아? 사람들 의식하지 말고, 연극하는 애들만 보면 되지.”

“그, 그래도! 옆에서 다 보고 있을 거 아니야?! 초롱초롱한 눈으로, 일거수 일투족 다 볼 것 아니야! 단기대결을 지켜보는 양측 병사들처럼! 이기든 지든 쳐다보는 건 매한가지잖아!!”

“……뭔가 예시가 되게 이상하다, 너.”

“으앙!! 히이잉!! 역시 괜히 했어!!”

리유는 무슨 말을 해도 어째 계속 울상이다. 이거야 원, 암만 위로를 해 줘도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 버리니. 매점에서 빵을 사 먹고 돌아오는 내내, 리유는 풀 죽은 체 전혀 웃지도 않아서, 그거 달래주느라 시간을 다 소비했다. 할 수 있다고, 잘 할 거라고. 사실 나도 잘 할 수 있을지 어쩔지 떨리는데. 솔직히, 연극에서 주인공 같은 거 하는 건 태어나서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나도 떨리지만, 리유는 더하니까, 리유를 달래야지.


“웅도야!”

“어, 왜?”

점심시간. 간단하게 도시락으로 떼우고 화장실에 갔다오는 때, 채영이가 부른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교복 바지 엉덩이에 슥슥 문지르고 대답하며 채영이 쪽으로 갔다.

“잠깐 걸을 수 있을까?”

“응? 뭐, 그래.”

채영이는 살짝 수줍은 느낌으로 말한다. 수수한 채영이는 말할 때마다 늘 이런 느낌이다. 뭐, 이제는 꽤 많이 친해진 듯해서 예전처럼 엄청 수줍어하진 않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채영이와 나란히 교내를 걷게 됐다.

“……근데 왜?”

“할 말 있어서.”

“응, 뭐?”

교내는 걷는데,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 채영이.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걷자고 한 줄 알았는데. 조심스럽게 물으니 채영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며 대답한다.

“좀 미안해져서, 하나 더 부탁할 게 있을 것 같아서.”

“……부탁?”

채영이의 말에 나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이렇게 판을 깔고 말할 정도면 그 얼마나 큰 일이기에. 대체 나를 얼마만큼 부려먹어야 성이 차려고. 애초에 이몽룡이란 잘생기고 부잣집 도령 역할 하는 것도 굉장한 압박감인데. 이만큼 반 일에 참여한 적이 없는데!

“연극하는 애들한테는 웬만해선 카페에 관한 건 시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응? 카페?”

“아, 말 안했구나.”

채영이는 내 반응에 반짝 생각이 나서 간략하게 설명해준다. 연극을 해도 잡스런 배역까지 합쳐서 15명이 체 안 된다. 그래서 나머지 애들은 축제동안 작게 카페를 연다고 한다. 그래서 연극하는 애들은 연극에만 전념하고, 카페를 여는 애들 역시 마찬가지로 카페에만 매진하는, 그런 시스템이란다.

“……그런데 부탁해야할 것 같아서.”

“응, 뭐?”

“큰 물건 나르고 하는 거…… 부탁해도 될까?”

“어, 그런 거야 뭐~ 연약한 여자애들이 어찌 나르겠어. 말만 해, 말만.”

“고마워.”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결국엔 짐꾼 얘기였나. 그건 늘 하는 것인지라,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모양새가 이상하잖아, 아무리 연극 주인공이라도 남자애인 내가 버젓이 있는데 여자애들이 낑낑대며 무거운 짐 옮기는 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니 채영이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나를 올려다본다. 채영이랑은 이런 관계구나, 일을 부탁하는 자와 일을 들어주는 자. 반장이라 애들 사이에서 쩔쩔매는 채영이를 보면 가끔은 참 측은하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인데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기도 하고.

“리유, 좀 걱정돼.”

“아아, 말도 마. 쉬는 시간에도 그걸로 얼마나 징징댔는데. 점심시간까지 달래느라 난리도 아니었어.”

“하하하.”

채영이의 말에 나는 쌓여 있던 감정을 일시에 터트리며 말했다. 억울한 말투로 좀 우스꽝스런 말투로 말하니 채영이는 입을 가리고 웃는다. 참, 웃는 것도 모범적으로 웃네. 여자애랑 얘기하면, 항상 웃겨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진다. 딱히 웃기려는 건 아니었지만, 여자애가 내 말에 웃어주면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다.

“그래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리유, 은근히 4차원 기질 있으니까.”

“응, 잘 부탁할게. 너도 이몽룡 잘 해 줘. 대본은 어떻게든 잘 써 볼게.”

“아, 응. 솔직히 나도 긴장되긴 하는데, 헤헤.”

채영이는 내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기지개를 쭉 펴며, 나는 대답했다.

“근데, 연극 각본을 네가 썼어?”

“어, 응. 글 쓰는 게 취미여서.”

“우와, 진짜?! 어쩐지, 책도 많이 읽고 그러더라. 설마,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는 그 희귀한 문학소녀?!”

“에, 에에, 아니야~ 그 정도는.”

“그 정도라니, 문학소녀의 기준이 얼마나 높기에.”

“에, 에, 에에, 그래도!”

채영이는 내 말에 굉장히 당황하며 허둥댄다. ‘문학소녀’라는 말이 그렇게나 창피한가. 자꾸 놀리고 싶어져서 계속 ‘문학소녀~ 문학소녀~’ 하며 칭찬하고 추켜 세워줬다. 채영이는 보기 드물게 얼굴이 빨개져서 팔을 내저으며 ‘하지 마, 하지 마~~!’ 하며 큰 소리를 낸다. 하하, 귀엽네. 적당히 걷는 것을 마치고 같이 교실로 돌아갔다. 채영이 말에 따르면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연습을 한다고 한다. 축제가 2주도 체 안 남았으니까, 열심히 하자고 한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축제는 축제고, 지금 일단 위험한 건 점심시간 뒤 국사 시간이니까. ……100% 졸겠지?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굉장히 오래간만이네요! 흐으으으윽! 


물론 중간고사는 망했답니다, 하하하! 공부도 안 하고 놀기만 했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시험기간에 글을 쓸 걸. 여튼 다시금 복귀했습니다! 이제 무서울 것도 없어요! 팍팍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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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번외02 - 2 +3 14.07.03 1,701 43 18쪽
124 번외02. 나 같은 애가 좋을 리가 없잖아!! - 1 +13 14.07.02 1,851 31 21쪽
123 번외01 - 3 +14 14.07.01 2,155 38 21쪽
122 번외01 - 2 +9 14.07.01 2,155 32 20쪽
121 번외01. 금단이지만 금지는 아니니까... - 1 +16 14.06.29 2,271 36 22쪽
120 29화 - 4 +22 14.06.28 1,924 36 23쪽
119 29화 - 3 +9 14.06.27 1,838 43 20쪽
118 29화 - 2 +13 14.06.21 1,885 34 21쪽
117 29화. 너도 내가 좋니? +21 14.06.15 2,278 43 20쪽
116 28화 - 4 +17 14.06.07 2,828 56 24쪽
115 28화 - 3 +19 14.05.30 3,540 147 20쪽
114 28화 - 2 +19 14.05.27 3,019 45 19쪽
113 28화. 나만의 그녀 +23 14.05.26 2,156 51 19쪽
112 27화 - 3 +13 14.05.24 2,027 49 22쪽
111 27화 - 2 +7 14.05.22 1,945 46 20쪽
110 27화. 그만 할게. +13 14.05.18 2,080 44 15쪽
109 26화 - 4 +10 14.05.10 1,696 42 15쪽
108 26화 - 3 +7 14.04.29 2,053 46 23쪽
107 26화 - 2 +9 14.04.26 1,868 41 21쪽
» 26화. 소녀 할 수 없사옵니다. +9 14.04.24 2,015 52 22쪽
105 25화 - 4 +15 14.04.17 2,780 115 18쪽
104 25화 - 3 +16 14.04.10 2,144 50 21쪽
103 25화 - 2 +24 14.04.05 2,311 52 16쪽
102 25화. 다시 한 번, 친구로! +19 14.03.26 3,101 64 19쪽
101 누락된 편입니다 +6 14.03.25 1,934 49 1쪽
100 24화 - 4 +16 14.03.24 1,965 4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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