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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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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4
글자수 :
2,992,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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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22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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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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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글자
20쪽

27화 - 2

DUMMY

“하아…….”

한숨을 쉬며 터벅터벅 걷는다. 아무런 의욕이 없다. 미래의 그 표정과 행동이……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것 같다. 아니, 아니다. 생각하지 말자. 공연히 리유의 손을 더 꼬옥 잡고 걷는다.

“아, 아파.”

“어, 미안.”

리유는 얼굴을 찡그리고 말한다. 나는 공연히 미안해져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흘끗 리유를 내려다본다. 투명한 흰 피부와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 옆모습을 보니 어린애같은 느낌이 별로 안 들고 오히려 또래 여자애같다는 기분이 든다. 확실히, 아무리 어려보여도 17살은 17살인가.

“리유야.”

“웅?”

나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리유를 불렀다. 리유는 내 말에 고개를 팍 돌리고 머리칼을 흩날리며 나를 올려다본다.

“너는…… 내가 좋아?”

“웅? 그건 갑자기 왜??”

“아니, 그냥…….”

리유의 되물음에 나는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부끄럽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했지. 아니, 그게 그러니까, 미래랑 어색하게 된 게, 미래가 나 좋아한다고 고백해서 그런 거잖아. 그걸 어떻게 처리하지를 못하겠으니까…… 근데 리유는 평소에 나 잘 따르고, 나랑 있는 거 엄청 좋아하잖아. 어쩌면…… 아니, 아니야. 착각이야. 내가 미친 거야, 미친 거! 그런 말을 대체 왜 한 거지, 무슨 생각으로. 창피해서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잖아. 리유는 별로 의식하지 않는 것 같지만, 창피해, 창피해…… 으아아!

“난, 웅이 좋아해!”

“어……?”

리유는 내 물음에 잠시 망설이는 듯 대답하지 않다 나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흠칫 놀라게 된 나. 리유를 내려다보니 더욱 창피해져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웅이, 좋아, 많이많이 좋아해.”

“……그래.”

리유야, 나 같은 남자애 좋아하면 안 돼. 나 같은 애가 뭐가 좋다고. 나는, 나는…… 아니, 혼자 무슨 개수작을 있는 대로 하고 있네. 리유는 방긋 웃으며 이어 말한다.

“당연하잖아, 웅이 좋아하는 건! 웅이 덕분에 다른 애들하고도 친해지고, 웅이하고도 제일 먼저 친해졌는데! 누구보다 제일제일 좋아해!”

나의 말에 리유는 특유의 귀여운 웃음을 터뜨리며 한껏 기분좋게 말한다. 보는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리유의 그 대답에 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져 얼굴이 완전히 빨개졌다.

리유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이전에도 들었던 것 같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들으니까 또 전혀 다른 기분이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잖아!! 으아아!! 몰라, 몰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어!!


“춘향!”

“도련님!”

오후부터는 연극 팀 애들이 카페에서 빠져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연습하게 됐다. 주말 간에 다 맞춰 보고, 거의 완벽에 가깝게 했지만 그래도 연습은 끝까지 해야 하니까.

나는 이제는 굉장히 실력파 배우(?)가 됐다. 처음에 연기할 때엔 여자애들에게 발연기라고 놀림을 많이 받았는데. 나라 해도 꽤나 노력하고 연습했으니까. 지금은 감정도 잘 잡고, 대사처리도 자연스럽다. 내가 봐도 장족의 발전이란 게 느껴질 정도로. 특히 춘향이를 붙들고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진짜가 아닌가 여자애들이 의심할 정도로 애절하게 잘 하니까. 다만…….

“……엇.”

“아 진짜! 몇 번 째야, 여기서 꼬이는 게!”

“……미안합니다.”

반장이 없다보니 감독 역할을 배역이 없을 때의 희세나 정희가 번갈아가며 하고 있다. 희세가 잔뜩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굉장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러니까 그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기도 하지만…… 정말 말로 형용키 힘든 그런 상황이다.

자꾸 NG를 내는 이유는 바로 연극 상의 상황 때문에. 지금 상황은, 그러니까 이몽룡이 거지꼴로 동네를 나다닐 때, 아낙들이 잔소리를 한 마디씩 하는 장면이다. 이몽룡인 나는 그냥 능청스럽게 넘기면 되는, 어렵지 않은 장면이다. 하지만 단 하나, 단 한 장면 때문에. 미래…… 때문이다.

“저런 거지새끼가.”

“아 진짜! 그렇게 하면 어떡해! 잘 했었잖아, 이전에는!”

“……미안.”

“뭐야, 왜 그렇게 기분 안 좋아.”

“……아니야.”

미래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보다 못한 희세가 탄식하며 말한다. 미래는 마찬가지로 연기 톤과 그리 차이나지 않게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게 뻔한데.

연기라는 건 자고로 두 연기자의 호흡이다. 혼자 하는 감정 연기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어찌 됐든 연기는 사람과 사람이 맞대고 이야기 하는 게 주된 거니까, 사람 대 사람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호흡이 전혀 되고 있지 않다. 나나, 미래나. 비록 미래가 엑스트라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 대목이라 하지만 이 부분에서 이렇게 계속 NG가 나는 건 영 좋지가 않다. 하지만 어쩌겠어, 나부터도 미래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는데.

“아, 안 되겠다. 잠깐 쉬고 하자.”

“어어.”

희세는 골이 난 표정으로 미래를 쳐다보다 나에게 시선을 옮겨 잠시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한다. 다른 애들 역시 수긍하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이대로는 진행이 잘 안 되니까. 미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혼자 자리에 앉는다. 그나마 애들하고 친해지고 있다고 생각이 드는 미래였는데,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더 지독하게 혼자 있다.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아.

“무슨 일 있어?”

“음??”

나는 그런 미래를 보고 착찹한 마음에 책상에 앉아 땅바닥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성빈이가 소리 없이 내 옆으로 와 앉으며 말한다. 살짝 움찔 놀랐다. 하여튼 여자애들, 이런 눈치는 엄청 빠르다니까. 하긴, 꼭 여자애가 아니더라도, 요즘 내 행적이 영 수상하긴 하니까. 기운도 없고, 말수도 적고, 유쾌하게 웃지도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있으니까. 리유나 희세나 성빈이나, 자꾸 왜 그러냐고 물어보지만…… 말하지 않는 나다.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미래랑…… 무슨 일 있었어?”

“어, 어?!”

성빈이는 준비동작도 없이 바로 찌르고 들어온다. 이런 게 바로 기습공격이지. 신호 좀 보내고 들어오라고, 갑자기 이렇게 확 들어오면 어떡해. 성빈이의 말에 나는 눈에 띄게 동요하는 목소리를 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너무 기습적으로 들어와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위장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성빈이는 내 반응에 걱정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역시, 무슨 일 있었구나.”

“아니, 아니야.”

“아니야, 분명히…… 있었지. 사이 안 좋아질만한.”

“…….”

성빈이는 나의 부정을 부정하며 말한다. 그러면서도 안쓰럽고 걱정하는 말투와 표정이다. 내가 상처받지 않게, 자극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내 기분을 배려해주며 말하려는 성빈이의 마음씨가 참 착하다. 그건 참 고마운데, 어떻게 해도 난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찌질하다 해도, 옹졸하다 해도 이건 얘기하기 그렇다. 사실은 말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만,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못한다.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 그런 거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은 말 못 하는 거야. 나한테도, 말 못하는 거야?”

“…….”

성빈이는 아예 내 손까지 잡으며 말한다. 평소 같으면 ‘으앗 성빈이 손이……!’ 하며 기분 나쁜 오타쿠처럼 하악거렸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차라리 형사가 심문하듯 추궁하면 그게 더 낫겠다. 이렇게 성빈이처럼 자신의 관계와 감정에 호소하는 건 더욱 마음의 빗장을 약하게 만들어 버리니까. 성빈이의 그 애처로운 눈빛엔 강한 호소력이 있어서,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입을 열 뻔 했다. ‘나한테도 말할 수 없는 거야? 난 너한테 있어서, 조금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잖아.

엄청난 자제심을 발휘하여,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로 하고 성빈이를 쳐다봤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입을 열었다.

“후우. 괜찮아, 정말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냥…… 좀 답답한 마음이긴 한데. 이겨낼 수 있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

내 말에 성빈이는 조금 서글픈 표정으로 바뀌었다. ‘자신한테는 말해줄 수 없는 건가’ 하는 슬픔이 담긴듯한 표정이다. 그 얼굴을 보니까 마음 한 구석이 짜르르 하다. 성빈이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아파온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이건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내가 저지른 잘못이니까. 성빈이는 잠시 그 안쓰런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럼, 언제라도 괜찮으니까, 마음 답답해서 말할 사람 필요하면 불러줘. 언제든지 괜찮으니까.’ 하고 말한다. 정말정말 고마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정말 고마운데, 정말 고맙긴 한데 가뜩이나 미래 때문에 마음이 아픈데 이런 주위의 호응 때문에 더욱 괴롭다. 그냥 어디 섬 같은 데 들어가서 혼자 고독을 곱씹고 싶다.

“……!”

“……?”

겨우 성빈이를 물리치고 잠시 한 숨 돌리려는데, 문득 희세와 눈이 마주쳤다. 희세는 이 쪽을 보지 않는 것처럼 하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흠칫 놀라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평소대로 새침한 느낌으로 ‘흥!’ 하는 기분으로 고개를 돌린다. 보고 있었나, 성빈이랑 얘기하는 거. 자주 틱틱대는 희세지만 그래도 나한테 관심가져주고 있긴 하구나. 그것도 고맙다. 부담되고.


“……!”

“됐어! 잘 했어.”

마지막 장면이 끝이 나고, 희세의 말에 다들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는다. 한 차례 휴식을 가지고 연기에 임하니 훨씬 나아졌다. 어쩌면 성빈이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은 효과일지도 모르지. 미래는 여전히 나에게 어색하게 대하지만, 내 쪽에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서 어떻게든 넘어갔다. 솔직히 그 부분만 빼면 정말 완벽하다.

이제는 다른 애들도 나와 미래 사이가 어색하다는 걸 은연 중에 눈치로 알게 된 기분이다. 어째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고 있다. 미래는 구석에 혼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다. 애들은 내 눈치뿐만 아니라 미래 눈치도 살피고 있다. 아, 정말, 이제는 다른 애들까지 나를 괴롭게 만드네. 이런 분위기에서는 숨도 잘 못 쉴 것 같다. 눈썹을 치켜 올리고 불편한 심기를 애써 누르고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했다. 그래도 팍팍한 기분이 해결되진 않는다.

‘드르륵.’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바람이라도 쐬어야 될 것 같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무엇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걸까. 이제는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잘 생각도 안 난다. 미래랑 어째서 이렇게까지 어색하게 된 걸까. 그렇게까지 어색해야만 하나. 도통 모르겠다. 이런 관계는, 이런 상황은 생에 처음 겪는 일인지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릿 속이 또 엉망이 돼 버렸다. 요즈음은 이런 게 일상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뜻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혼돈이다.

“어이.”

“……어.”

혼자 부정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때, 뒤 쪽에서 날카로운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린다. 희세. 허리에 손을 올리고, 살짝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특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멍청하게 희세를 쳐다보다 멍청하게 대답했다.

“뭣 때문에 그렇게 바보처럼 있는 건데.”

“……뭐가.”

희세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퉁명스럽게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짜증나.”

“뭐.”

희세는 눈썹을 모으고 눈 밑을 파르르 떨며 말한다. 정말 짜증나고 역겨운 것을 보는 듯한 표정. 희세는 원래 그런 식으로 잘 보지만 오래간만에 이 표정을 보니까 또 기분이 안 좋다. 가뜩이나 자기비하 하고 있었는데.

“미래 때문이지?”

“……아니야.”

“맞잖아, 너 그런 일 있으면 표정에 다 드러나니까.”

“…….”

나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희세는 마찬가지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그런가. 표정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인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희세는 내 쪽으로 다가와 가까이까지 온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남자새끼가, 잔뜩 풀 죽어선. 짜증난다구, 그 표정, 그 태도.”

“……뭐가 그렇게 짜증나는데.”

“지금 그렇게 하는 거 전부 다.”

“…….”

희세의 말에 나는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단지 내 표정과 태도가 짜증난다고 시비 걸다니. 내가 얼마나 힘든 지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자기 기분에 거슬린다고 이렇다니. 진짜 이기적인 거 아니야. 짜증은 내 쪽에서 더 난다고. 상대하기 싫어졌다.

“…….”

“야 정웅도!”

“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희세를 지나쳐 걸었다. 빠른 걸음으로 그 곳에서 벗어나려 했다. 짜증나니까. 희세의 어안이 벙벙한 표정도 그대로 두고 걷는다. 뒤 쪽에서 희세의 가시돋힌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며 소리쳤다.

“짜증난다니까 사라져주는데 왜! 뭐가 불만이야 또!”

“……너 진짜.”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도 모르게 몸 안의 모든 화가 한순간에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릴 것 같다. 욕지기가 올라올 것 같다. 간신히 참았다. 분노가 온 몸을 휩싼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화가 난다. 희세는 놀람과 당황이 교차하는 얼굴로 나를 본다. 어이 없다는 목소리로 무엇인가 말하려다 말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게 잘한 것이다. 만약 거기서 평소 희세가 하던 대로 같이 맞서고 핏대 세워 말했다면 난, 정말 내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화를 낼 것 같으니까. 지금까지 있던 답답한 마음 모두 희세에게 풀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니까.

“……!”

“멍청아, 뭣 때문에 그러는 건데. 뭣 때문에 그렇게 덜덜 떨 정도로 화내는 건데.”

“…….”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데, 희세는 내 쪽으로 걸어온다. 그러더니 말없이 포옥 나를 껴안는다.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다. 귀로 희세의 목소리가 들리고, 모든 게 안정되는 기분이 든다. 정신 없던 머리가 맑아진다. 그리고 느껴지는 건, 따뜻함. 따뜻하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할 건 아니지만, 기분 좋다. 태초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간 것 같은 포근함과 따뜻함. 나는 말없이 희세에게 안겼다. 손을 들어 나도 안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 희세의 ‘……이제 좀 그만 하지?’ 하는 목소리에 펄쩍 놀라듯 몸을 땠다. 희세의 볼은 약간 상기돼 있다.

“미안, 미안…….”

“아니야. 좀 진정 됐어?”

“응.”

희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며 말한다. 나는 엄마에게 말하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뭔가 조금 창피하지만, 나쁘진 않은 기분이다. 이랬던 게, 한 번 있었던 것 같은데. 학기 초에, 리유 품에 안겼던 그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그 때 리유는 나보다 워낙 작아서, 안기는 것도 힘들었지만. 희세는 나랑 밸런스 맞는 체구에, 무엇보다 압도적인 중량감(?)이 있어 훨씬 좋았다. 아니, 이런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참 나쁘지만…… 아니, 닿았잖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래서, 뭔데. 말 안 해줄 거야?”

“아니, 그게, 그러니까.”

희세는 팔짱을 끼고 씨익 웃으며 묻는다. 여유 있는 표정이지만 여전히 볼은 약간 상기돼 있다. 아무리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날 껴안아준 희세겠지만, 그 희세라도 역시 창피하긴 하겠지. 사귀는 것도 아닌 남자애를 껴안았는데. 나는 무언가 실토하는 것처럼 돼 안절부절 못하게 됐다. ‘……일단은 저기 앉아서 얘기하자.’ 하고 말했다. 희세는 순순히 따른다.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죽을 것 같아서.”

“하. 바보네. 진짜 엄~청 바보야.”

“……그래, 그렇지 내가 뭐.”

짧게 요약해서, 희세에게 말했다. 뭔가 말하니까 내 치부를 들킨 듯 굉장히 부끄러운 기분이다. ……솔직히 찌질하잖아,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남자애가 할 수 있는 가장 찌질한 풍경을 보여주는 기분이니까. 희세는 내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팔짱을 끼고 나에게 말한다. 추궁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고개 들어! 멍청아.”

“넵!”

“그건 확실히, 네가 잘못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제정신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고개 들으라고! 아 진짜.”

“넵, 넵! 잘못했습니다!”

희세의 꾸짖음에 나는 절로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 희세는 더욱 신경질적으로 자꾸 고개 들기를 강요한다. 나는 퍼뜩퍼뜩 놀라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런 태도니까 미래가 그렇게 대하지! 고개 숙이지 마, 내 눈 똑바로 봐. 피하지 말라고.”

“응…….”

희세의 말에 나는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고정하고 희세를 쳐다봤다. 희세는 만족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그래, 미래가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겠지.”

“응, 싫은 건 아니야. 분명 좋은 애인 건 알겠는데.”

“그럼…… 여자친구로서는 아니다, 그런 말?”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 진짜! 그딴 식으로 우유부단하게 하지 말라니까?! 할 꺼면 하고, 안 할 꺼면 하지 말고! 확실히 하라고! 남자새끼가 뭐 그래?!”

“……하아.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다고.”

“에휴, 에휴. 내 뭐 좋다고 이런 애 붙잡고 이러고…… 에휴.”

희세는 나에게 질문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순수한 분노를 표출하며 말한다. 정말 화가 났는지 얼굴이 빨개져서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아까와 같이 마주 대응하며 화가 나거나 하진 않고 오히려 더욱 고분고분해져서 대답했다. 백이면 백 희세의 말이 다 옳은지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희세의 한탄 역시 가슴 속에 가시처럼 와 박히는 기분이다.

“내가 해 줄 말은 딱 하나. 너, 생각 더 정리해.”

“생각?”

“어, 생각.”

희세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고 말한다. 좀 뜬금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넌 지금 네가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제대로 정리 안 했잖아. 확실하게 고민하라고. 내가 이 애를 좋아하는지, 여자로서 생각하는지, 그냥 친구인지. 그리고 확실하게 말해줘. 그딴 식으로 흐지부지하게 찌그리려고 하지 말고. 여자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라고.”

“……알았어.”

희세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의 예의…… 생각…… 조금은 가닥이 잡히는 것 같다. 희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다. 그러니까, 피하지 말고 정직하게 마주하라는 거지. 미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맑게 뜨고 희세를 본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뭐, 뭐가.”

“조언해줘서. 안아줘서.”

“……벼, 변태야?! 그, 그건 네가 울 정도로 그러니까! 별다른 의미를 두고 그런 건 아니니까, 잊어. 잊으라고.”

“어, 알았어.”

희세는 어째 앞의 ‘조언해줘서’ 보다는 뒤의 ‘안아줘서’에 무게를 두고 듣는 것 같다. 그것도, 이상한 본인의 해석까지 합쳐서. 변태로 오인 받아도, 그게 악의가 있어 그런 게 아니란 걸 아니까, 또 그러거나 저러거나 생각을 확실하게 해 준 희세가 고마워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희세는 얼굴이 약간 상기돼 불편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가의말

아뇨, 아뇨, 진짜 핑계가 아니라, 과제가, 과제가...!


가뜩이나 그냥 생으로 하기도 힘든데, 왜 교수님들은 과제를 자필로 해 오라고 할까요. 죽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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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26화 - 2 +9 14.04.26 1,872 41 21쪽
106 26화. 소녀 할 수 없사옵니다. +9 14.04.24 2,018 52 22쪽
105 25화 - 4 +15 14.04.17 2,782 115 18쪽
104 25화 - 3 +16 14.04.10 2,148 50 21쪽
103 25화 - 2 +24 14.04.05 2,317 52 16쪽
102 25화. 다시 한 번, 친구로! +19 14.03.26 3,107 64 19쪽
101 누락된 편입니다 +6 14.03.25 1,939 49 1쪽
100 24화 - 4 +16 14.03.24 1,969 4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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