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55B

함경도의 별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최근연재일 :
2024.04.22 12:00
연재수 :
364 회
조회수 :
217,812
추천수 :
6,782
글자수 :
1,993,819

작성
21.04.23 12:00
조회
405
추천
14
글자
12쪽

주변인정전 3

DUMMY

다시 핏내 나는 불온의 밤. 수증기처럼 올라오는 따뜻한 피 냄새, 연홍색 역겨움이 긍정으로 바뀌는 시점. 그걸 맡아야 내가 산 것이고 못 맡으면 밥숟가락 놓은 거다. 살인과 파괴는 이제 일반적일 뿐이며, 더 강한 게 아니면 일상이 돼버린 사람들. 무생물 총과 칼은 유생물 죽인 맛을 알고 있다. 자기에게 대적하는 멍청한 것들은 목을 따 정육점에 걸어놓는다.


나에게 당한 놈에게 넌 어차피 그 고깃덩어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조소. 그들 군복과 계급이 부르는 짜증. 신보다는 아주 작지만, 모든 걸 선택하는 지배자이며 영혼의 세계는 억울하게 뒈지는 놈이나 꿈꾸라는 냉소. 또 누군가 쓰러져 대지의 자양분이 되고 말 밤. 오늘 밤 누울 것이 앞서가는 사람인지 나인지 뒷사람인지 모른다. 내가 맞으면 역시 당황할 것이며 발버둥 칠 거란 사실도 안다.


하지만 사회에서 그게 공포와 당황이라면 여기선 공포와 분노다. 먼저 죽이지 못한 분노. 먼저 조준하지 못한 분노. 좆도 아닌 새끼한테 당한다는 죽어가는 자의 살기. 죽으면서 모든 걸 포용한다고? 좆까라 그래. 난 안 그렇다. 우린 모두의 공상은 하나. 상대 1천을 죽이고 살아남고 싶다. 신이 되고 싶다.


단지 생존의 신. 모든 쓰러진 자 속에 우뚝 서 있는 1인. 그게 되고 싶다. 쓰러진 자들의 소소한 얘기는 듣고 싶지도 않다. 여긴 지금 선사시대다. 생각도 추억도 살아야 가능하다. 귀신이 되어 북한군 꿈에 나타나 갈군다고 개 좆이나 뒈진 놈이 뭐가 후련해?


벙거지와 깡통모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군화. 너덜너덜해져가는 밑창. 땀내가 찌들다 못해 허연 소금 가루가 훌훌 털리고 뻑뻑해진 군복. 생각보다 초라한 몸뚱아리. 담배연기가 본 적도 없는 추상적인 폐로 들어가 다시 대기로 뿜고, 먹은 것은 위장에서 액이 나와 녹여 자양분을 용해시키고, 똥을 싼다. 내가 산다는 증거.


죽기 전까지 해야 한다. 영원처럼 아주 길게 살아서. 인생... 국군의 날 헬기 밑에 매달린 공탈처럼 사는 거지. 내가 동물이 아니길 빌며 학교 다니고 책도 읽었지만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새끼도 공자가 되지 못한다.


대상을 찾는 눈. 이미 상대를 시체로 간주하며 차갑게 웃는 눈. 넌 내가 봤으니 이제 죽었쓰. 죽는다는 말이 식상하다. 죽인다는 말도 식상하다. 왜 그 동사에 두려움을 갖는가. 거기다 무슨 의미 두어 뭐해. 잠깐 한눈을 팔면 이제 살아 있던 자들은 다 없어지고, 없어진 자들을 기억할 필요조차 못 느끼는 사람들이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자기 세상처럼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이룬 것 없이 간다. 이룰 능력도 환경도 안 된다고 자학하지만, 어차피 이룰 수 없는 인간이었다. 발버둥 쳐봤자 좀 배부르고 유명한 사람이다. 그들은 뭐가 나아? 낫다고 남들이 칭송하니까 낫다고 착각하는 거지. 가진 게 많으면 고민만 많아질 뿐. 가들도 까놓고 말하면 서럽다고 말할 것. 아무래도 인생은 쌈빡한 게 좋다.


현재 여기처럼 또렷하게 삶을 사는 사람들 없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피를 보며 격렬하게 사니까. 삶을 지속하기 위해선 그 어떤 것도 딴다. 빼앗고 파괴하며 정상을 비정상으로 흔들어 놓는다. 걷는다. 오늘도 삶을 지속하기 위해 걸어! 마음속에 폭죽이 터지니 땅과 하늘이 별이 환호성을 지른다. 지루한 자연에 우리가 파장을 하사한다. 묵묵하고 지루한 자연은 어차피 일어날 참화적인 사건을 고대한다. 자연은 양쪽 다 응원하지 않는다. 서로 알아서 뒈져라. 니들이 쓰러진 곳에 자란 나무의 사과는 굵다. 땅으로 녹일 너란 인간의 자양분에는 관심이 있을랑가 모르겠다.



눈은 디딜 바닥을 보지만 종종 저 멀리 고도 낮은 곳을 노려본다. 곧 정적이 깨지고 아비귀환이 될 아래를 증오한다. 너희들 때문에 우린 목숨을 건다. 너희도 오늘 밤 걸어라. 어둠 속에, 체온이 점차 가열되는 무리가 기다란 적외선 불덩어리처럼 또 저 밑으로 내려간다. 음침하고 격렬한 봉화가 벌레와 산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면서 일깨우고, 번져 가 산이 깨어난다.


산은 현재 우리 거다. 우리가 지나가면 벌레가 아가리 닥치고 새가 석고상처럼 굳어 부리만 분주하다. 땀내 똥내 풀풀 날리는 앞사람 그림자만 봐도 용기와 공포가 교차하는 감정이 보인다. 무수한 자신만의 그림이 그들 등에 서려 있다. 전우. 동료. 동기. 팀. 지역대. 파괴. 죽음. 에라 모르겠다 씨발. 나 죽여 달라는 놈들 죽이다 보면 뭐 어떻게 되겠지... 곧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이를 악문다.


저 아래 사람들에게 죄라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북한에 태어난 게 죄지. 할아버지 대부터 백마 탄 영웅 구라에 속아온 게 죄지. 전 세계가 다 독재자를 때려죽이는데 눈 막고 귀 막은 게 죄지. 이젠 중국이 북한 먹겠다고 밀고 내려올까 걱정이다. 여기 남아서 중국군 상대로 게릴라전을 지속해야 할지도 모른다.


말 안 통하는 새끼들 죽이는 건 좀 부담 없겠어. 콰일러 콰일러 와라 죽여줄게. 맛을 본지 너무 오래되었어 니들. 중일전쟁 일본군에게 졸라 허벌나게 깨진 이후로 너무 놀았지 아마. 중국은 영화에서만 일본군을 이기고 있어. 지구가 망하는 날까지 영화에서만 영웅적으로 싸울 거야. 총이 없으면 그 무시무시한 권법으로.


그러므로 우린 쉼 없이 산을 내려가야 한다. 뭐라도 해야 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 이유 때문에 우린 조져야 한다. 낭만소설도 우리가 이기기나 해야 가능한 거다. 우린 이제 이해했다.


지금, 단기전이라 생각했던 전쟁이 길어지는 것도 분명, 북한이 중국과 쇼부를 치면서 남한에 (6.25 휴전회담 때 했던 것처럼 똑같이) 감언이설로 항복하니 어쩌니 구라를 까면서 요것만 해 꼭 달라 시간을 질질 끌기 때문이다. 습관 못 버린다. 역사도 못 버리고 반복된다. 진짜 붙으면 이 땅에 넘어온 중국군은 정말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잔인하게 거시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전 세계가 니들의 진짜 전투력을 궁금해하고 있다 콰일러.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해치 손잡이 잡고, 돌린다. 구리스가 별로 없어 끼릉끼릉 거린다. 과연 열려 있어? 아군 신형 탱크는 해치를 외부에서 여는 기본적인 대응과정이 있다. 키가 있어야 할 거다 아마. 여긴 모르겠다. 끼이잉. 끼이잉. 신경 심히 거슬린다.


얼음장처럼 붙어 있던 게... 열린다 니미. 오른손으로 권총 쥐고 왼손으로 최대한 소리 줄여서 해치를 올리고, 벌어지는 틈으로 먼저 총구를 넣는다. 인기척? 없나? 잠시 숨 고르고 권총을 더 수직으로 넣으면서 머리가 들어간다. 퉁명한 강철의 차가운 방관. 내부 좌석, 비어 있다. 차다. 철 덩어리. 숨을 멈춘 강철 괴물. 안에 동물의 온기? 없다.


잽싸게 후레시를 왼손으로 넣어 포탄 적재칸을 비춘다. 예비 포탄 적재구까지 확인. 비어 있다. 휴. 고폭탄이나 같은 거 들어 있으면 유폭으로 나까지 뒤질 수 있다. 공산권 탱크는 내부 유폭 나면 포탑이 떴다가 뒤집혀 옆에 걸린다. 이유는 모른다.


잽싸게 머리 빼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다른 녀석이 건너편 땅크에서 나와 똑같이 하고 있다. 아직 신임 지역대장의 공격 신호탄이 안 올랐다. 신호탄이 아니라도 자주포를 맡은 주 공격조에서 총소리나 폭음이 나면 개시된다. 해치 열려있고 적재칸에 포탄 없고 땅크 안에 불침번이 없는 걸 보니 후방은 후방이다. 미친 새끼들. 이래놓고 당하면 뭐해. 이래놓고 우릴 추격하면 뭐해. 요즘 잠을 자? 아무리 도 북쪽이라 해도 지금 평안남도에서 잠이 와?


생각 같아서는 엔진을 날리고 싶은데, 엔진을 날리려면 가동 된 상태에서 안으로 연료가 퍼져 있어야 한다. 그것도 상당히 돌아 엔진이 뜨거워야 돌고 있는 연료도 뜨거워 화재를 일으키기 쉽다. 무가동 차가운 상태에서 자칫하면 겉하고 오일만 탄다. 궤도는 폭약으로 깨봤자 수리 금방이다.


수류탄을 두 개 준비해 손에 쥐고 주 공격조가 들어간 방향을 본다. 그리고 저 아래 스러져 대(大)자로 누운 땅크 경계병... 땅크에 접근하는데, 그 중간에 딱 자리를 잡은 보초는 우리 진로와 정확히 걸렸다. 잠깐 주시하며 추이를 보는데 북한군 동료가 나타났다. 그리고 갑자기, 새로 나타난 북한군이 팔 벌려 거리에 다가서자 질러버렸다.


어떤 새낀지 인생 화려한가보다. 불필요할 정도로 질러버려, 쓰러져 미동이 사라질 때까지 미친놈처럼 계속 질러댄다. 어쩐지 난 그 그림자가 진호라고 생각했지만, 진호가 아니길 바라기도 했다. 그게 너냐고 영원히 물어보지 못했다. 일단 상관없었다. 보초가 쓰러지자 난 땅크로 뛰어 올랐다.


포열은 각이 높아서 솔방울을 넣기 힘들었다. 하지만 북한의 공업 사정상 내부 부속기자재만 파괴해도 뭐 어째. 지들이 여기서 새 부속 구해 말짱하게 수리할 거야? 아니면 철도까지 구난전차가 끌고 가? 땅크 옮기는 트럭 있어? 한 달만 가동불능되어도 남조선 국방부 전쟁목록에서 적 땅크 하나가 빠진다. 정확히 하려면 주포 포구에 솔방울을 넣어 밑으로 굴러가 폐쇄기 근처에서 터져 균열이 일어나 약간이라도 깨져야 한다.


그렇게 수류탄 잡고 기다리는데, 왜 신호탄이나 총소리 폭음이 안 나오는지 슬슬 열이 오른다. 그렇게 길게는 10분은 대기한 거 같다. 뭐 이리 시간을 끄나, 불알이 간질간질하다. 우리 조만 목표 도달이 빨랐나? 건너편을 보니 그 땅크 위의 놈도 긴장하며 나와 면상이 마주쳤다. 단지 얼굴 그림자로 마주쳤지만 서로 본 거다. 저 그림자가 날 보는지 안 보는지 공기로 느낀다. 눈도 표정도 안 보이지만 서로 왜 신호가 안 터지나 의아해 한다.


문득 식별했다.

김중사님이다.


아니, 조장님이 올라왔네! 탱크 외곽선에서 몸을 조금 일으키자 금방 알아봤다.


김중사님은 원래 우리 지역대가 아니다. 본인 지역대가 거의 깨지다시피 해서 도피탈출하다 우리 지역대와 만나 합류한 케이스다. 대대에서 정말 여러 가지로 유명한 사람이 나와 작전하게 됐다.


안전핀을 오른쪽 하나만 뺀 다음, 왼쪽은 안전핀이 잘 보이게 돌려 잡았다. 수류탄 안전손잡이 쥔 오른손 검지로 왼쪽 안전핀 뽑고, 안에 두 개 다 털면 된다. 수류탄 넣고 해치를 닫아 잠금 손잡이 돌려야 내부 파괴력이 강해진다. 압력이 커야 많이 부서진다.


저 멀리 컴컴한 곳. 주 공격조 저쪽 하늘가가 왠지 무거워 보인다. 무거운 냄새가 풍겨. 이상하게 길어지는 시간. 뭐가 문제야? 손목시계 야광분침을 본다. 이미 지났다. 뭘까? 왜 저러지? 문제가 생긴 거다. 어디 막혔나? 막혔어?


그때 수목선에서 북한군복이 나온다. 진호다. 손짓이 약정도 아닌 이상한 동작을 하는데, 그냥 하라는 거 같다. 그냥 까라는 의미다. 생각해보자. 먼저 하면 뭐 어긋나는 거 아닌가? 진호의 수기가 강해진다. 알아들었고, 드디어 깨달았다.


‘지금 저쪽에서 막혔어. 여기서 터져서 개시되길 바라...’


난 오른손 검지로 왼쪽 수류탄 안전핀을 뽑고 두 개를 안으로 던져 넣고 해치를 닫고 연속동작으로 손잡이를 텅 걸고 뛰어내렸다. 니미, 안에서 터지는데 파편은 없겄지? 뛰어내려 진호 쪽으로 달리는데 드디어 포탑 안에서 푸러렁 펑 꽈릉! 압력의 힘이 터진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 포구에서 화염이나 연기를 뿜지 않는 걸 보니 폐쇄기가 닫혀 있다.


이제 뛰려고 하는데 진호가 날 잡는다. 김중사님이 올라탄 탱크에서도 똑같은 폭음이 들린다. 아니나 다를까 그 소리가 나자마자 주 공격조 쪽에서 살벌한 연속 총격이 터진다. 타타타타타 꽝! 꽝!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함경도의 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25 격납고 II (2) 21.05.31 374 12 11쪽
224 격납고 II (1) 21.05.26 528 13 11쪽
223 민족해방전선 4 21.05.24 394 12 14쪽
222 민족해방전선 3 +2 21.05.19 415 14 15쪽
221 민족해방전선 2 21.05.17 374 13 13쪽
220 민족해방전선 1 21.05.12 486 13 13쪽
219 성냥개비 3 21.05.10 377 14 12쪽
218 성냥개비 2 21.05.07 365 13 14쪽
217 성냥개비 1 21.05.03 443 14 12쪽
216 주변인정전 6 21.04.30 340 14 13쪽
215 주변인정전 5 21.04.28 368 11 12쪽
214 주변인정전 4 21.04.26 987 13 14쪽
» 주변인정전 3 21.04.23 406 14 12쪽
212 주변인정전 2 21.04.21 450 16 12쪽
211 주변인정전 1 21.04.19 540 13 10쪽
210 CSAR 18 +1 21.04.16 532 15 11쪽
209 CSAR 17 +8 21.04.14 558 17 15쪽
208 CSAR 16 21.04.12 540 19 14쪽
207 CSAR 15 21.04.09 502 16 14쪽
206 CSAR 14 21.04.07 444 16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