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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의 별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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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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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글자
13쪽

도요새, 안녕 1

DUMMY

Scolopacidae Goodby




좁은 방, 불 꺼진 방. 사지만 편히 뻗어도 팔 다리가 벽에 닿는 방. 아무도 없고 나만 있는 방. 눅눅한 냄새와 곰팡이로 얼룩진 벽. 먹을 거라곤 초라한 밥사발과 콜레스테롤 전혀 없는 반찬 두 개. 누구는 그런 독방에서 미칠 거라고 했다. 정신이 분열되고 자기 처지를 비관해 목을 매달 거라고 했고, 폐쇄공간 공포증으로 사람이 이상해진다고 했다. 무서운 거라고... 난 이해를 못하겠다. 밖으로 나가 교류하는 것보다 그 안에 있는 것이 편하다면 누가 믿을지 모르겠다. 넓은 세상이 좋은 것이라고? 세상에 고귀하고 유명하신 분이 그랬다.


[그건 너의 말이다.]


난 지친 자가 쉬러 스며드는 곳이 아니라, 내가 원래 있어야할 곳에 있다. 사람이 어떻게 남을 이해시키나. 서로가 이해 못 할 걸 떠들며 시간 낭비하느니 서로 할 바를 하라. 당신의 말이 있고 내 숨겨진 말도 있으며, 당신을 내게 이해시키는 것과 내 것을 당신에게 말하는 것 모두 서로에게 쓸모가 없다.


사람에게 충고하는 것처럼 헛된 건 없다. 충고가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도, 상대가 삶을 통해서 겪어야 알아듣는다. 삶을 통해서 죽고 싶을 충격으로 겪어야 드디어 이해한다. 그래도 안 고쳐지는 사람이 더 많을 걸? 나도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바위처럼 알아듣는 척만 하고 결국 자기 길로 간다. 계란 수천 개 투척해도 안 변한다. 가장 편한 방법은 못 본 척, 모르는 척 하는 것. 충고하면 관계가 깨지고 웃으며 어카심정을 갖는다.


난 오래 전부터 먹을 걸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고, 누울 곳이 굳이 넓을 필요가 없었으며, 기다리고 기다리고 백만 년을 버틸 수 있었다. 나에게 일주일은 이틀 정도. 존 스타인벡의 말처럼 난 어차피 길을 잃고 태어난 사람 같다. 내가 자살을 한다면 아무 것도 안 먹고 기다리다 죽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해 못하겠지. 그러나 나도 세상이 이해 안 되는 건 마찬가지.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걸 인생이라 표현하는지 난 모르겠다. 그 의견의 차이. 접점에서 승부가 벌어지면 결국 나에게 굴복한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바로 이곳에서는.


너, 도요새. 시베리아로 도망치고 카라카스 상공을 자유롭게 날고 태평양을 고속으로 마음껏 비행해봐라. 결국 나에게 온다. 넌 오게 되어 있다. 필연적으로 나에게 온다. 내가 있다는 걸 모르던 알던 온다. 알아도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난 영원처럼 여기서 널 기다린다. 승부를 피하고 태평양 바닷물에 떨어져 죽는 것이 네 운명이라면,


도요새 넌 태어나서 자라고 죽어봤자 아무 의미 없다. 세상은 원하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걸 도전하다가 원하는 것이 덤으로 떨어질 뿐. 아무리 뭘 좋아해도 먼저 길을 간 사람들이 널 괴롭히고 굴복하길 바라는 것이 당신의 꿈이다.


치욕스럽지 않아? 꿈을 추구하려면 구부려야 하고, 그렇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안 한 걸 해라. 이것저것 다 싫다면 천국도 지옥도 도피 장소가 되지 못한다. 유일한 도피처는 자기 자신. 승부를 피하고 안정을 택한 건 원래부터 도요새가 아니었고 앞으로도 아니다. 대신 넌 무명의 치욕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도요새는 구부리지 않고 내 앞에 당당히 서는 약하지 않은 존재다.


기다리는 내가 힘겹냐고? 당신도 인생에서 뭔가 기다리잖아. 뭐 그런 앞뒤도 의미도 없는 말을 하고 그래. 우린 모두 기다려. 뭔가 나아지길 기다리고. 행운을 기다리고. 다가올 미래에 곧 이뤄질 거라고 상상하지. 그래서 남는 게 뭐야? 기대하는 그 자체가 좋다고? 그래. 그 말은 좋네. 그래, 난 뭘 기다리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그 자체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정말 좋다는 허무맹랑한 표현이 아냐. 종종 사람들은 그렇게 말로 도피해.


좋긴 개뿔이 좋아. 좋아서 기다리지 않아. 기다리는 것이 그저 내 삶이야. 돈도 사랑도 행복도 당신들은 기다리지. 그러나 내가 보기에 말야, 뭐가 없으니 와달라고 기다리는 게 가장 무익해. 신과 세상이 산타야? 온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냐. 행복을 기다리는 게 가장 제정신 아닌 것 같아. 난 모자라다는 상상, 그게 오면 새로울 거란 상상. 그래서 기다리고, 또 와봤자 불행하다. 난 상상 뒤에 올 불행을 즐긴다. 행운이 안 올 걸 알면서 기다리고, 결국 안 오는 불행을 즐겨. 세상이 법칙처럼 돌아가면 지독하게 재미없다.


왜 불행할까? 내가 보기에, 가진 걸 가지는 방법을 몰라. 가진 걸 관리하는 방법을 모르지. 가진 것이 매초 매분 변화하고 변화무쌍하다는 걸 믿지 않는 거지. 기다리다 현재를 못 보지. 나는 그 ‘현재’를 주는 사람이다. 아무에게나 주는 건 아니고, 도요새가 된 대상에게만. 도요새가 온다고 해서 사건이 아니며, 온 것일 뿐야. 뭐 달라지지 않아. 올지 안 올지도 몰라. 안 올 걸 기다린다고 생각해야 진짜 기다리는 거지. 그냥 시간을 기다리는 거지.


가끔 이상한 사람들을 보지. 사진을 멋지게 찍어서 보여줘. 잘 찍었다고 자랑하고 고상한 척 거품을 떨어. 좋은 평을 받고 서로 지랄들을 해. 카메라로 담아야 아름다워? 그건 원래 아름다운 거야. 카메라에 담기 전에도 아름다웠고 담은 후에도 계속 아름다워. 차창으로 지나가는 그걸 못 보는 거야. 그림과 사진 따위 원래 볼 필요가 없는 거였어.


사진은 필터가 들어간 첨가물이라 더 아름답게 각색돼. 집을 자세히 관찰해 봐. 아이는 24시간 365일 아름답지? 세상 모든 게 같아. 서류도 아름다워. 다 떨어진 신발도 의미가 있고 아름다워. 나무 하나만 5분간 봐. 아름다워. 그런 건 안 보이고 욕망만 주시하다 열이 오르고 분노를 느끼지. 사진과 화가의 그림 앞에서 갑자기 어린아이가 돼.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추창이 그랬지. 백인들은 저 아름다운 자연을 보지 못하고, 그걸 그린 조그만 종잇조각에 열광한다고. 자연에 동화된 그 인디언 추장은 그림과 실제 자연을 구분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림을 왜 그릴까 이유를 가늠할 수 없다. 사진과 그림에 감동하고, 실제 주변에서 그걸 못 보는 사람들은 바보도 보통 바보가 아니야.


어디를 가든 사람만 보지. 자기만 귀중하다 생각하고 남은 하찮아. 길바닥의 젊은이들은 외부에 관심이 없으며 곧 잊어. 모든 주제에서 인간을 너무 중심으로만 놓으면 인생 재미없어. 바보로 사는 대표적인 방법이야. 하루 종일 우린 인간만 생각해. 인간이 아니라 관계만 생각하는 거지. 그 관계로 먹고 살고 관계 때문에 마음도 아프고. 나도 당신도 관계로 가로막고 고통도 주지. 그 관계에서 주고받는 즐거움은 몇 %일까? 갑자기 짜증이 몰려오지 않아? 사람들이 거액을 들여 카첸중가 정상으로 도망가는지 이제 알겠어? 슬슬 내 좁은 방에 관심이 생기지 않아?


그래서 어떨 때 나 같은 종결자가 필요한 거야.

복잡하잖아. 끝내주는 사람도 있어야지.


좁은 방. 혼자. 그 안에서 자기를 부풀리지. 상상으로 제국을 만들어. 초보야. 고수가 되면 자신의 존재감만 느껴. 오히려 모든 게 나에게서 떠나고 사라져. 무익한 걸 알면서 못 버리는 게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이지. 물론 이런 시간이 무익해 보일 수도 있어. 사회가 원하는 결과물이 없을 수 있으니까. 인정해. 혼자 있고 싶으면 방법은 많아. 훈민정음이 통하지 않는 곳으로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말아! 겁나나? 거기 그냥 섞여 살아.


난 지금, 결과물도 만들 수 있어. 자연이 준 조건이 그렇게 만들었지. 그 조건은 남들이 날 우러러 보는 게 아닌, 나 자신 만의 만족이란 제한을 달았어. 광범위하게 잘났다고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사이트. 한 곳을 증폭한 동그란 세상. 지금까지 200번은 더 봤다. 사람들은 계속 원 안에서 북적이는데 도요새는 아직 안 떴다. 2천 번 보지 뭐. 도요새의 자유까지 침해할 수는 없다. 언제 오는지 내가 결정할 게 아니다. 그 조건 중에 내가 결정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미미하다. 모두 내 능력이라고 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을 다하는 것도 그 자연의 조건 안에 들어 있다.


찢어진 군복. 언제인가 모르게 모자가 사라졌다. 모자가 없어 위장을 위해 머리칼에 발라 딱딱해진 진흙. 딱지가 앉은 입술. 피가 흐르고 굳고 반복하는 상처투성이 손. 피로와 집중 사이에서 방황하는 몸과 눈.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한 피로로 기절하면 편할 것 같다. 그게 안 된다.


말라비틀어진 창자. 나흘 동안 먹은 게 없고, 이제 나의 내장은 말한다.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심장은 말한다. 네가 필요한 만큼은 뛰어줄 테니 걱정 말고 할 걸 하라. 그래도 죽지 말라고 마른 침을 어렵사리 제공한다. 새벽이슬을 잎사귀에서 핥았다. 일어서면 몸이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 같다. 사타구니는 자연방출한 소변으로 축축하다. 몸이 바싹 끼는 두 바위틈에 엎드려 가지와 수풀로 위장하고... 4일차 동이 텄다.


내 도요새는 사단장이다.

누가 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지휘관들은 내가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명령할 사람이 없다. 산중을 헤매던 5일 전, 난 포로를 잡았다. 포로를 잡지 않고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보는 적의 움직임으로는 많은 걸 알 수 없다. 전황과 상황을 알고 싶어 하나를 노렸다.


산중에서 칼로 사람 하나를 수중에 넣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알고 싶었다. 너희는 무슨 부대이며, 지금 소탕작전은 어떠한가. 남조선 산사람들을 얼마나 죽였는가. 너희는 얼마나 죽고 피해를 입었는가. 모두 말해라. 포로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군인으로써 나보다 허술했다. 몸만 나약한 게 아니라 군인으로써 의지가 없고, 어서 모든 것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고픈 그런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표정을 보고 내가 정확히 골랐다.


그가 처음 내 얼굴을 대면했을 때, 날 귀신 보듯 했다. 난 북침한 후에 내 얼굴 본 적이 없다. 거울 없다. 세수도 보름 넘게 못했고 수염도 나고 더럽다는 건 안다. 내가 군인인지 자연에 동화된 산사람인지 구분이 안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날 보고 무서워했다.

왜! 이런 거 처음 보냐?

동물원에서 많이 봤잖아. 동물. 언제든지 자기 생명 위협당할까 경계하고, 위협이 예상되는 걸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동물. 왜 인간이 안 그렇다고 생각해? 물이 덜 빠졌어. 전연으로 내려가서 포격 한번 받아봐. 너도 나 같이 될 거야. 빼앗은 총을 5미터 멀리 떼어놓고 양반다리로 얼굴을 맞대고 앉았다. 말해. 있는 그대로. 정말 아는 대로 말하면 내 대검에서 검기가 사라지고 널 놔줄 거야. 내 눈을 똑바로 봐라. 생각하지 마라. 눈이 흔들리면 내 칼 잡은 손이 흔들린다. 날 믿고 말하라...


20분 심문으로 난 모든 걸 들었다. 목이 막혔다. 그 정도였나? 폭격 때문에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정규사단이 우리들 소탕에 투입되었다. 자랑스러웠다. 향토예비군 따위와 상대한다면 얼마나 창피한가. 우리의 제2전선은 성공으로 가고 있었다. 이야기 결론은 하나. 저들도 우리도 피해가 컸다. 난 연대본부나 사단본부 주둔지를 물었다. 내 목표는 사단본부였으나 관심 없다는 듯 물었다. 거기는 피해야 하기에 묻는다고 했다.


물론 내 관심은 사단본부. 왜냐? 난 이미 연대장을 보냈으니까 업그레이드가 필요했다. 그 친구 솔직하게 모든 걸 답했다. 약속대로 차비를 지불하고 풀어줬다. 차비? 그 친구가 돌아갔을 때 어려움을 겪으면 안 되잖아. 공증서처럼 스미마셍 하고 대검으로 팔과 허벅지에 한 방씩 줬다. 빨리 내려가지 못하게. 왼팔에 한 방 왼 다리에 한 방. 그 친구는 오른팔로 왼팔 상처를 잡고- 몸을 구부려 왼팔로 왼다리 상처를 잡고 내려갔다. 못 뛴다. 그 친구도 만족하고 하산길에 들어섰다. 실탄만 버리고 총도 돌려주었다. 총 분실하면 군발이 깨지잖아. 그 친구는 날 알리지 않겠다고 했다. 살려줘서 고맙다고. 그래서 그 친구에게 그랬다.


“약속을 어기는 게 더 짜릿한 거야. 동무.”

그러자 그 사람이 그랬다.

“남조선 사람들은 사람 아이 믿는 게 습관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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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Jumping Jack Flash 위경 (僞經) : 전투 스쿠버 1 20.09.25 604 2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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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도요새 사냥꾼 4 20.09.25 575 21 11쪽
84 도요새 사냥꾼 3 20.09.24 545 23 13쪽
83 도요새 사냥꾼 2 +2 20.09.24 609 26 15쪽
82 도요새 사냥꾼 1 20.09.24 645 2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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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Jumping Jack Flash 5 20.09.23 643 2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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